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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사랑하는 딸과 아들 남매가 있다. 올해로 딸이 45살, 아들은 42살이다. 지난달 8월 19일 교회에서 34명이 단체로 유럽 종교개혁지 5개국 탐방을 갔는데 나도 일원으로 참가하여 2019년 8월 30일 무사히 귀국하였다. 난 지난 9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평신도 성경 필독서 7 권중 5권을 완독하였다. 이제 그걸 아래와 같이 작은 책으로 만들어서 유럽 종교개혁지 5개국 탐방을 다녀온 기념으로 자식들에게 추석선물로 주었다. 책 제목은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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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이스라엘의 역사 (구약 역사서)
1 이스라엘의 파란만장한 역사 (아브라함에서 부터1948년 5월 독립선포까지)
아담과 하와가 한 가정을 이루어 가인을 낳고 아벨을 낳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아벨 대신에 셋을 낳게 하십니다. 그래서 가인은 죄인의 후손으로 내려오고, 셋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본처인 사라에게서 오랫동안 아이가 없자 첩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그의 후계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 그래서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미). 그래서 이삭을 약속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삭은 리브가에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는데, 여기서 에서는 이방인의 후손으로 내려가고 야곱은 12 아들을 낳습니다. 12 아들이 이스라엘의 12 지파가 됩니다.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에 12 지파가 정착 합니다. 그후에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이때를 <사사기>라고 합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사사시대가 끝나갈 무렵 사람들이 사사대신 인간왕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여 왕으로 세워줍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제사는 좋아하는데 순종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뽑아 왕으로 세웁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통하여 회개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에서 아들 솔로몬을 얻습니다. 다윗이 죽은후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풍성하게 주십니다. 솔로몬이 부해지니까 여자들을 좋아해 많은 이방여인과 결혼합니다. 이때 왕비들이 자신들이 섬시던 신을 가지고 와서 솔로몬을 유혹하고 같이 섬기게 하므로 성전이 영적으로 더렵혀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하시어 솔로몬에게 내가 이나라를 빼앗아 네 아들대에 가서 분열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르호보암이 <나이 많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는게 좋은지 묻습니다. 그때에 왕은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자기 아버지 솔로몬보다 더 세금을 많이 걷고 전갈보다도 더 가혹하게 백성을 다스린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2 지파만 남유다에 남고 나머지 10 지파는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북이스라엘로 도망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국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이 됩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나 일년에 한번씩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와야 합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오지 않고 남유다에 체류하는 일이 일어나므로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 사이에다 경계선을 두고 황소 머리를 한 금우상을 세우고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걸 숭배하라고 합니다 (남유다로 내려갈 필요가 없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서 그런 우상에 절하지를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호세아서). 또한 바알상과 아세라상을 섬깁니다. 바알상은 돌로된 남자를 상징하는 생식신이고 아세라상은 나무로 된 여자를 상징하는 생식신입니다. 즉 그들의 신상은 농사가 잘 되고 자식을 많이 낳는 sex reproduction 신상 (세상습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 선지자는 북왕국에다 이방인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특히 아합왕의 왕비인 이방여인인 이세벨은 남편과 백성들을 바알신에게 절하게 한 악독하고 잔인한 여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활자체가 음란합니다. 그래서 남유다 (또는 유다인)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 (또는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을 안하였던 것입니다 (요 4:9).
그러나 남유다는 다행히 영토내에서 예루살렘을 가지고 있는 바람에 하나님을 섬깁니다. 성결을 지킬수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결혼도 유다와 베냐민 지파끼리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강대국 (애굽, 앗수르, 바벨론)들에게 둘려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다윗의 뿌리에 있습니다. 북왕국 여호람 왕은 강대국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 시리아와 동맹을 제의하고 결혼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잡신이 들어오고 하나님외 다른신이 들어오고 음란해 집니다.
북왕국은 앗수르를 공격하기 위해 시리아와 동맹을 체결합니다. 그런데 시리아가 앗수르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북왕국은 자연히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BC 722).
여기서 여전히 남왕국 유대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과는 상종을 안하는데 예수님만 사마리아인들을 대접해 줍니다. 남왕국은 놀래서 앗수르와 애굽과 동맹을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 (지금의 이라크)이 앗수르와 애굽을 멸망시키니까 동맹국인 유다는 저절로 바벨론의 속국이 됩니다. 그래서 남유다는 저절로 바벨론에 멸망을 당합니다. 바벨론은 1차로 유다 왕족과 귀족을 포로로 잡아서 데려갑니다 (BC 605). 그런데 나머지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을 공격하므로 다시 많은 백성들이 잡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갑니다 (BC 586).
남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에 가서도 유대민족끼리만 결혼해서 성결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합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를 합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없으므로 회당에 모여서 율법을 배우는데 서기관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생깁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BC 538년에 바사와 <고레스>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바사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대하 36:22-23, 스 1:1-4). 그들은 돌아와서 성전을 회복하고 (BC 516), 다음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합니다 (BC 444-425). 그러나 다시 BC 331년에 희랍 (헬라제국)의 알렉산더가 애굽까지 공격할 때 페르시아도 멸망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33살의 나이에 전장에서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제국은 4분활 됩니다. 에집트에 프톨레미 왕조가 세워지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강대국 로마의 속국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로마라는 강력한 문화적 배경을 갖게됨).
그러나 이집트에서 시리아를 통합하므로 이스라엘은 아람어를 쓰게 되고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방신을 섭기게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사독 제사장 후예인 사두개인들 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총독은 로마의 안티오커스 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신을 섭기고 암퇘지를 태워 번제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저항으로 순교를 당합니다 안식일 성수보다 순교를 택합니다. 그래서 <마티아>란 제사장의 다섯째 아들이 산으로 도망가서 무기를 들고 게릴라전을 전개 낮엔 공격을 하고 밤엔 숨고하여, 결국엔 셋째 아들에 와서 <유다 마키아>가 승리를 합니다.
이때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신을 제거하고 성전수축을 허락받아 평화가 오고 독립을 하게 됩니다. 독립후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극도로 대립합니다. 드디어 BC 63년에 로마의 속국이 되어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유다는 고난의 길을 걸어 갑니다. 이때 로마제국은 유다지역 통치를 위해 이두메인인 헤롯을 왕으로 삼습니다 (2살 이하의 어린애를 죽임). 유대인들이 성전을 엄청 좋아하므로 헤롯은 유대민족의 환심을 사기 위해 40년간에 걸쳐서 성전을 건축하게 합니다 (나중에 통곡의 벽).
이때에 예수님은 부모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한후에 헤롯왕이 죽은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 옵니다. 헤롯이 죽은후에 로마 아킬레오 총독하에 가이샤라 빌립보 (헤롯의 아들) (마 16)가 왕이 됩니다. 가이샤라 빌립왕이 죽은후에 동생인 헤롯 안티오커스 (빌립의 아내와 삶)가 왕이 됩니다 (이때에 세례 요한이 책망하여 목베임을 당함). 여기까지가 신구약 중간사 입니다.
그런데 아킬레오 총독이 물러나고 대신에 <본디오 빌라도>가 직접 유대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등장). 헤롯 안티오커스 다음에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의 동생)가 통치합니다 (통치중에 야고보를 죽임).
로마 총독은 성전에 헌금으로 모인 금은이 많은 것을 보고 정치자금을 내라고 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유대인을 잔인하게 죽입니다.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1단계로 유대성전이 헐립니다. 결국 예수이후에 유대가 멸망합니다 (마사다 사건).
그리고 로마제국은 유대란 지명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서 2천년동안 세계 각처로 흩어져서 유랑생활을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때는 유대인들이 둑일군에 의해 폴란드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6백만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드디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국가를 건립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땅을 돈을 주고 조금씩 사서 1948. 5.14 에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건립하여 독립을 선포합니다.
① 여기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주후 200년 경에 로마제국은 유대라는 땅 이름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고 (지구상에서 유대라는 지명을 없애버림) 유대인들을 전세계로 강제추방을 시켰습니다 (디아스포라). 대략 2천년 간이나 나라없이 전세계를 유랑하던 수백만명의 유대인들 중에 일부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팔레스타인(유대 땅)에 땅을 조금씩 사서 영토를 넓히면서 (갈등의 단초)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제2차 대전 후 1948년 5월 14일에 독립을 선포합니다. 이때부터 중동지역에서는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종교분쟁이 아니고 땅에 관한 문제, 즉 생존에 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즉 하나의 땅을 두 개의 민족이 공유하면서 끝없는 비극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거기는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고 합니다.
2 성서지리-이스라엘의 지형에 관해서
성경 (Bible)은 성령에 의해서 쓰여졌으므로 그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이해 될 수 있으며 기도하는 자세로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고, 배우는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딤후 3:14). 그러면, 성경은 친근하게 다가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한국과 언어, 역사, 문화와 지역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성서지리를 배우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이스라엘은 작지만 복잡한 나라 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리책을 쓴 어느 학자가 책 제목을 "작은 나라 그러나 큰 나라"라고 붙혔다고 합니다. 작은 나라란 면적이 작다는 의미 (강원도만한 크기)로 한반도의 십분의 일 정도이고, 큰 나라란 작은 나라 속에 큰 나라의 각가지 지형을 다 가지고 있다는 의미 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흔히 자신들의 나라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삿 20:1)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남북으로 직선거리 약 240 km이며, 북쪽의 끝인 악고에서 갈릴리 바다까지 약 45 km이고, 남쪽 끝인 가사에서 사해까지는 약 85 km 입니다. 이스라엘의 서쪽은 지중해가 가로막고 있으며, 북쪽은 높은 산맥이 뻩혀있고, 동쪽은 요단강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불모의 황무지가 전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해해야 하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점점 넓어지는 지형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 지역이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4개의 띠로 구분되는데 서쪽으로부터, 해안평야 지대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이어진 낮은 평야), 중앙 산악지역 (갈릴리 산간지방, 사마리아 산간지방, 유다 산간지방), 요르단 계곡 (대협곡으로 되어 있음), 그리고 요르단 동편지역 (트랜스 요르단)의 전혀 판이한 4개의 자연적인 지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해안평야지대: 해안평야지대는 갈멜산 지역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는데 갈멜산의 북쪽을 악고 평야, 갈멜산의 남쪽을 샤론 평야라고 부릅니다. 욥바 지역이 있는데 거기에 텔아비브라는 가장 큰 도시가 위치해 있습니다. 욥바 지역 바로 위에 야르콘 강이 흐르고 있는데, 야르콘 강을 중심으로 북쪽엔 샤론 평야라 부르고 남쪽을 블레셋 평야라고 부릅니다. 블레셋 지역은 성경에 이스라엘 민족과 늘 싸우던 블레셋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둘째, 중앙 산간지역: 중앙 산간지역은 이스라엘 역사의 주무대 였습니다. 이 지역은 세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북쪽에 있는 지역을 갈릴리 산간 지방이라 부르고, 아래에 있는 지역을 사마리아 산간 지역이라 부르고, 예루살렘에서 남쪽에 이르는 지역을 유다 산간지방이라 부릅니다. 중앙 산간지역 (사마리아 산간)을 이스라엘의 등뼈라고도 부르는데 등뼈가 사람의 중심을 이루는 것처럼 이곳이 이스라엘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이 중심이 되어 있고, 신약에서는 갈릴리, 갈릴리 산간 지방이 중심부로 되어 있습니다.
셋째, 요르단 계곡: 요르단 계곡엔 세개의 바다가 있는데 둘은 내해에 들어 있고, 마지막은 홍해 바다 입니다. 헬몬산 밑에서 시작하여 갈릴리 바다를 지나 요단강을 거쳐서 사해 바다를 지나서 아라바 계곡을 거쳐서 마지막 홍해로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대협곡으로서 갈라진 부분 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지진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쪽은 지중해 면보다 80-90 m가 높은 지형이지만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점점 낮아져서 갈릴리 바다의 경우에는 지중해 해면보다 210 m나 낮은 곳이고 사해바다의 경우는 지중해 보다 400 m나 낮은 곳으로서 세계에서 제일 낮은 사해바다 입니다. 여기서 점점 높아져서 280 m 높이로 올라와서 홍해바다로 낮아지는데 이 지역을 요르단 계곡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요르단 동편지역: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지역 입니다. 영어로는 Trans Jordan 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요단강 동편 지역이란 말 입니다. 이 지역엔 바산 땅이란 곳이 있고, 그 바산 땅을 경계로 하여 야르묵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지역이 길르앗 지역이고 그 중심에 얍복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 올 때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싸워 기도 했던 곳). 그 아래 지역이 모압 지역이고, 그 아래 지역이 에돔 지역 입니다. 에돔 지역은 에서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 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크게 4개의 띠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여기에 추가해서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사막지역을 가리켜 네게브라고 부르는데 네게브 지역 중심에 브엘세바가 있고 브엘세바 아래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 입니다. (2006.11월, 기독교사이버대학, 과목: 성서지리, 권혁승 박사 강의에서 인용)
3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고 사랑의 행전이고 신앙의 발전사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부활사건과 마지막 부탁과 승천, 성령강림으로 초대교회가 설립되고, 성도의 참된 교제, 그리고 복음사역이 기록된 책입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정신이 무엇인가? 그래서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역사서입니다. 그리스도교 (기독교)사의 첫번째 책입니다. 오순절(Pentecost)의 성령 강림으로 기독교와 교회가 생겨나고, 그것은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많은 무명 신자들에 의해 세계 속에 운반돼, 마침내 로마에 까지 도달한 복음 전파의 역사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기독교사이자 초대 교회사인 것입니다.
동시에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전기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스데반, 바나바, 바울 등의 전기, 특히 바울의 전기입니다. 사도행전만큼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하고 생생한 전기는 기독교는 물론이고, 일반 고대 서적 중에서도 드물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얼마나 위대한 전도자인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결코 단순한 역사나 전기가 아닙니다. 기독교사, 초대교회사, 사도전으로서만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세상의 역사가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성령과 사랑의 역사를 전하여 남기기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입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성령 자신이 얼마나 열렬히 활약하신 것인가 하는 하나 하나의 사실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성령입니다. 베르도도, 야고보도, 바울도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이 목적 때문에 각자의 사명이 주어졌고 그 사명이 끝난 후에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성령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활약을 계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인류가 갖는 유일한 귀중한 하나님의 역사서입니다.
사도행전은 또한 사랑의 행전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행하신 사랑, 사도들과 신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사랑, 그리고 사도들과 신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사랑,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강한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류를 얼마나 사랑해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셨던 것인가, 사도들이 그 사랑의 복음을 어떻게 전 세계에 전하려고 했던가를 기록한 사랑의 전도서입니다. 사랑의 행전, 이것이 사도행전을 영원히 가치 있게 하고, 언제나 읽는 자를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인류가 갖는 가장 아름다운 책입니다.
사도행전을 통독하면서 놀라는 것은 그 신앙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의 신앙은 한순간의 정체도 없습니다. 첫번째의 성령 강림이 있고, 베드로와 사도들이 생겨나고, 사랑의 교회가 생겨나고, 스데반이 순교하고, 바울이 소명되고, 두 번째 성령 강림이있고, 그리고 세계 전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바울의 세계 전도는 날로 발전을 계속합니다. 그 발전이 너무도 빠르고 격렬하기 때문에 야고보는 그것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멀리 뒤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때로는 바울마저도 사도행전 신앙의 혁혁한 전진 앞에 머뭇거리기 일쑤고 겨우 성령의 명령에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신앙의 발전사입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은, 바울이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 전혀 다른 신앙이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합니다. 로마에서 사도행전의 기독교는 많은 희생과 순교를 통해서 힘차게 약진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행전의 신앙은 참 자유한 것으로서 그 무엇에도 붙잡히지 않고, 그 무엇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뻗어 나갔습니다.
신앙의 자유는 있습니다. 참 자유한 신앙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신앙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고정화도 위축도 없습니다. 교의화도 노쇠도 없습니다. 주의화도 파벌화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복음은 자유로이 자기 자신의 신앙에서 자유로이 나아갑니다. 야고보도 베드로도 몇번인가 신앙의 발전을 합니다. 바울마저도 몇 번인가 신앙의 약진을 이룩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무엇하나 고정된 것이 없습니다. 교의도 신조도 전도계획도 없습니다. 신앙마저도 변하고 개혁되어(reformed) 그칠 줄을 모릅니다. 변치 않는 것은 단 하나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은 사랑, 사랑 그 자체인 생명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행전의 신앙은 사랑의 신앙인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생명은 사랑이 있는 곳에만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참된 신앙에 살고자 한다면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서는 안되고 당연히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한 순간이라도 교의, 주의, 신조, 형식, 관습, 파벌의 포로가 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부자유한 신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약화되거나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무엇이 불쌍하다고 해도, 죽은 신앙만큼 불쌍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자유만큼은 끝까지 굳게 지켜서 발랄하고 생기가 넘치는 신앙 속에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 야고보, 스데반, 바나바, 바울 및 수많은 성도들의 신앙과 전도로써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끊임없이 살아 움직여서 매진해 나아갔던가 하는 비밀을 전해 주는 책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계신 곳엔 사랑과 생명이 있고 신자들에게 그들의 신앙과 생애를 모두 사랑의 그릇으로 화하게 하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릇으로 변하게 했던 것을 실례를 가지고 가르치는 책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배워서 얻은 최대의 교훈, 최대의 격려, 최대의 위로는 하나님 사랑의 깨달음, 그 감동과 그의 위대함, 그리고 신앙의 전파 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눅 13:33)라고 선언하신 사랑의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천국에 이르기까지, 늘 신앙을 순결하고 자유하게(개혁되게) 해 주심을 감사하면서 말씀과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12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떠나 각 나라 각처로 흩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충성스럽게 살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모두 다 순교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마감했습니다만 미완성된 책입니다. 29장부터는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지상계명(마 22: 37-40)과 지상명령(마 28:18-20)을 깨달아 교회를 통해서 또는 공동체를 통해서 또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이 써나가야 합니다.(2007.11월 서울 강서구 강서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고 인용)
①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쓰여졌고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으므로 기도하는 자세로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고 배우는 자세로 대하면 (딤후 3:14)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4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
교회 저녁성경 공부반은 지난 2017. 4.25부터 바울서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 13권 중 4권이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 황제로부터 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에 의해 로마로 압송되어 로마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써서 각개 교회로 보냈습니다. (이게 4차 전도여행에 해당). 아래는 옥중서신을 읽고 심령에 와닿는 중요 성경구절을 요약한 것입니다. 은혜를 공유하시기 바랍니다.
1. 에베소서: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지금 터키 땅) 교인들에게. 보냈음.
엡 5:15-17,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2. 빌립보서: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지금 그리스 땅) 교인들에게 보냈음.
빌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의라.
3. 골로새서: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지금 터키 땅) 교인들에게 보냈음.
골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4. 빌레몬서: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지금 터키 땅) 교인들에게 보냈음.
빌레몬서는 주님의 사랑과 중보사역으로 변화된 오네시모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의 도망간 노예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주인된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편지를 쓴 것이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에 있는 감독(오늘의 목사)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가지고 골로새 교회로 갑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자기를 영접하는 것처럼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로마 시대에 노예들은 대단히 비참했다고 합니다. 당시 노예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스타르타쿠스 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노예가 처형되는 십자가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종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즉 자유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고로 우리는 바울같이 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① 골 4:10-18 (복음에 매인 삶의 은혜), 사도는 동료들이 전하는 문안과 골로새 주변 지역에 인사를 전하고 친필 서명과 함께 성도들에게 복음에 매인 삶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모두 자기 만을 위해 사는 때에 나를 위해 살면 나 하나도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부족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면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위로와 구원을 얻습니다.
② 삼상 14:1-23 (믿음과 마음을 같이하여), 요나단에게는 사울이 모르는 하나님이 계시고 사울이 이해하지 못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③ 삼상 16:1-23 (성령이 떠난 왕, 성령이 임한 왕), 다윗이 궁에 들어간 것은 그를 사울에게 추천한 무명의 소년 때문입니다. 오래전 사울을 사무엘에게로 이끈 것도 무명의 사환입니다(9:3).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이름 없는 이들의 수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④ 삼상 17:28-40 (낙담하지 마십시오), 다윗이 사울 왕 앞에서 당당하고 골리앗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것은 평소 양을 칠 때 그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과 함께 주를 경험한 이야기들을 소중히 여기며 차곡차곡 마음에 간직해 두십시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2부 성령은 성경을 통해 오늘도 말씀하시고
5 창세기 100독
2011년 12월 6일, 창세기 100을 완독했습니다. 창세기는 모세오경, 구약성경, 그리고 신구약 성경의 첫번째 책이자 시작의 책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책입니다. 창세기는1장-11장까지는 불명확한 역사이고, 12장-50장까지는 3500년 정도의 명확한 역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인구의 출현에 대해 다른 종교나 학문에는 없는 데 유일하게 창세기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예배 때 신앙고백의 핵심이 사도신경인데 창세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인류구원 방법이 감동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려갔지만 17년만에 애굽 총리가 되어 대기근으로 형들을 애굽에서 만나게 됩니다.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을 죽일까봐 두려워하는 데 요셉이 “나를 애굽에 팔았다고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지혜)라고 위로해줍니다.
창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여기서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걸 의미합니다. 세상 인간들의 창조는 하나님이 창조해 낸 걸 조금 발견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창조의 첫째날에 빛이 창조되었는 데 이 빛은 원초적인 빛이고 넷째날에 해(태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온 우주 만물이 인간을 위해서 준비된 다음에 여섯째날에 사람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첫 아담에서부터 씨 후손(믿음의 조상의 족보)를 통해서 구속사를 이어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종에게 그의 며느리를 그의 고향 사람 중에서 구해오도록 요청합니다. 조건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까지 오겠다는 사람을 고르라고 합니다(창24:7-8). 두번 세번 다짐을 합니다. 자기가 걸었던 그길을 고스란히 뒤밟아 걸어올 수 있는 여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어 맡기겠다는 결단의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배필로 “믿음으로 사는 여인”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가지 언약을 주시고, 그걸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실행하셨습니다. 첫째가 후손(씨)에 대한 언약(covenant)이고, 둘째는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언약이고, 그리고 셋째는 너의 후손을 통해서 천하만민(모든 민족)이 복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왜 유명한가요? 야곱, 즉 세상의 것들을 붙잡는 자 되기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창32:28). 야곱이라는 뜻은 발꿈치를 붙잡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 유다가 믿음의 계보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가 다말과의 사건으로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 즉시 회개하고 가장으로서 믿음의 중심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38:26). 유다는 당시에 큰 족장을 거느리는 소도시국가의 왕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는 50장 26절로 끝나는 데 “요셉이 백십세에 죽으매----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끝납니다. 요셉도 그의 아버지 야곱과 같이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갈망했습니다.
창3:15절에서 구원의 선포가 있었고 그게 신약 요3:16절로 연결이 됩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입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말이 쉽지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25년 동안 갈등과 고민이 있고 쓸어지고 넘어지면서 자기부인을 하고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자기고백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몸부림이 있은 25년 후에야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것은 아브라함의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애타는 기다림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담은 첫번째 인류의 조상이 되고, 그 때도 하나님을 믿는 허다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대홍수 후에 노아가 두번째 인류의 조상이 됩니다. 데라의 족보에서는 데라-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 까지로 창세기에서 믿음의 계보가 정리가 됩니다.
신자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주님 재림시 흙으로 돌아갔던 성도들이 부활하여 예수님과 같이 영화롭게 되는 이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이게 성도의 궁국적인 천국의 산 소망인 것입니다. 본인은 금번 창세기 100을 통해서 창세기와 더 가까워지고 친근해 졌습니다. 나의 창세기 100독을 통해서 영적으로 깨달은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6 로마서 100독
창세기에 이어 어제 2012년 6.13일에 로마서 100독을 완독하였습니다. 약 6개월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10년전에는 로마서를 읽을 때 그렇게 어렵게만 여겨졌던 성경책이 이제는 쉽게 느껴집니다.
로마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내 허물을 로마서를 집중해서 읽으므로 생각나게 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 나의 내면 속을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웠습니다. 성경 말씀을 알수록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고 하나님만을 쳐다보게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래와 같이 깨달아지고 요약한 내용을 교우 여러분들과 공유하기 원합니다.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끝낼 무렵에 고린도에서 썼습니다. 로마서를 크게 두 덩어리로 얘기한다면 1-11장까지는 기독교 교리에 관해서, 또 12-16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해서 설명한 책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1-11장 까지는 구원을 얘기하다가 그 구원으로 찬송을 부르다가 삶으로 돌아갔는데 그것이12-16장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짐승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로 말미암아 죄의 형상들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남은 우리의 본질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내가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로마서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적당한 죄인이 아니라 철저하게 죄인이라고 판결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고로 죄는 용서 받아야 하고 인간은 구원 받아야 한다. 또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살아온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선고합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지 않고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죄를 고백할 때 철저히 인정하고 고백해라.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이 하나님의 의는 율법서에서 예언되었고 선지자들이 말했던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보다 더 높은 법이 있다. 그건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그 법을 가리켜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깨닫게 되면 구원은 유대인을 통해서 왔고 유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졌고 유대인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복음을 배척한 관계로 복음이 이방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어 온 이방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하게 하시고 모든 이방인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 복음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의 완성은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두 구원이 이루어짐으로써 온전히 성취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크게 네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십자가, 성령, 선교, 그리고 사랑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고(1-7장),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8장), 선교의 비전을 갖게 된다(9-11장). 이렇게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로마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12-16장).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처럼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나의 구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없이 역사의 완성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구원은 개인의 구원에서 시작되어 민족구원을 넘어서서 온 인류의 구원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에 가서 전도하고 가난한 이스라엘인을 도와 주고 교회도 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비밀을 주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자요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비밀스럽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 사람이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환난 중에 가장 큰 위로와 용기와 믿음을 주는 책입니다.
구원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서 살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눈물이 나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어서 나도 모르게 감동되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노벨상을 받은 것보다 더 감격해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한참 지나다 보니까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립니다. 십일조도 하고 봉사도 하지만 마음에 기쁨이 없고 원망이 생깁니다. 그건 율법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믿음의 조상이 없습니다. 약속도, 율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도 있고 메시아도 있고 구원도 있고 하나님도, 성막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통은 사랑하는 자기 민족을 위하여 일 할 수 없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꿈은 민족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이방인을 위해 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한국에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은 유대인인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가 미숙하면 싸우고 성숙하면 하나가 됩니다. 미숙하면 지배하려고 하지만 성숙하면 섬기려고 합니다. 로마서는 당신이 미워하는 형제를 위해서도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복음은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며 능력있고 지혜롭게 만듭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저주 받은 자를 축복의 자녀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믿음은 남이 다 할 수 있고 상식적으로 하는 걸 믿는 게 아니고 남이 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위기는 복음이 분명하지 않고 희미하다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이방 세계를 하나로 보고 있고 또 이스라엘을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고로 모든 이방인들이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구원은 끝납니다. 세계 역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 이게 구원의 대드라마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본인은 금번 로마서100독을 통해서 로마서는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을 앞뒤로 연결시켜 주는 중심적인 책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7 요한계시록 100독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성경은 계시적 관점의 책이므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가 하나의 계시고, 하나의 기적의 책이고, 그래서 계시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으로 읽어야 되고 지나치게 편애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요한계시록도 성경 66권 중에 한 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창세기나 복음서와 같이 읽어야 되고 요한계시록은 1세기말에 진행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역사적 본문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영적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적, 종말론적 관점에서 읽어야 하고 현재의 아주 의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현재의 깨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현재의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작년 (2012) 6.26일에 시작한 요한계시록 100독을 우여곡절 끝에 어제 9.6일에 100독을 마쳤습니다. 대략 1년 2개월여 걸렸습니다. 지금 마라톤에서 풀 코스를 완주한 기분입니다. 창세기와 로마서에 이어서 스스로 또 다른 성경의 고지를 점령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다른 도전을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번에 스스로의 힘으로 요한계시록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주님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나에게 줄려고 하는 메세지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이 비록 난해하고 어려웠지만 그걸 찾을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교우 여러분, 누군가로부터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객관적인 요한계시록 요약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성경은 재미로 읽어야 합니다. 아래에 요한계시록 요약을 읽으시고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요약
서론: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예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초기 하나님 나라 운동 때문에 박해받고 죽어가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파송받은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 천사들에게 주님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이기는 자 승리하는 자에게 무엇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또 하나는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각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회개하라 회개하면 어떻게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라는 약속을 합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일곱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이 처한 여건은 지도자나 인간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의존을 받고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 바로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신자(교회)를 보호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에게 편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①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운동 때문에 박해받고 죽어가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초기 하나님 나라운동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②. 요한은 환상 중에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 예배를 참관하고 하늘의 현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③ 거기서 요한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주변에 있는 네 생물과 24 장로와 많은 천사들을 보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어린 양을 보고, 어린 양의 심판의 점진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④ 요한계시록은 일곱 봉인에 관한 심판, 즉 일곱 봉인 환상, 일곱 나팔 환상, 일곱 대접 환상,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록한 책입니다. ⑤ 요한계시록은 12 지파에서 구원받은 144,000명(이스라엘)과 온 인류에서 구원받은 무리들(이방인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⑥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여자와 용이 전쟁을 하면서 용이 하나님과 대적하다가 실패하여 땅으로 내쫓겨서 땅에 내려와 인간을 괴롭히고 여자의 후손을 죽일려고 사력을 다하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⑦ 요한계시록은 지상에 있는 음녀와 함께 세상의 거대한 세력과 권세를 쥐고 있는 바벨론의 멸망을 기록한 책입니다. ⑧ 요한계시록은 음녀와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록한 책입니다. ⑨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에 천년왕국이 등장하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장면을 기록한 책입니다. ⑩ 요한계시록은 사탄의 군대, 주역들이 모두 무저갱 속에 갇히고 이 세상에 천년 왕국이 등장하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걸 기록한 책입니다. 옛 것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고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가 성취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⑪ 요한계시록은 천국과 지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천국백성으로 생명책에 기록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행위의 책들에 기록이 되어 불못에 던져진다는 걸 기록한 책입니다. ⑫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들림을 받는다. 첫째 부활은 생명의 부활로 (천년왕국전에), 구원받은 성도들의 부활이고, 둘째 부활은 심판의 부활로, 예수를 안믿어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로서, 천년왕국이 끝날 때 부활하여 평생에 지은 죄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받고 영원한 지옥불로 들어간다는 걸 기록한 책입니다. ⑬ 첫째 부활, 즉 생명의 부활을 얻은 성도들은 들림을 받았다가 7년 대환난이 지난 후, 예수님과 함께 지상에 재림하여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천년 동안 통치하시고, 성도들은주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다가 천년 후에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가는 걸 기록한 책입니다.
결론:
요한계시록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상실되었던 에덴 동산의 축복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천국)으로 매듭을 짓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에덴 동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살기 좋은 곳입니다. 천국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① 일곱교회 중에서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는 서머나와 필라델비아 두 교회뿐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서머나 교회는 순교의 교회로 유명했고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였다고 합니다. 특히 폴리캅은 이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로마로 끌려가서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당하여 순교하였습니다.
② 일곱교회 가운데 서머나처럼 빌라델비아 교회도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교인수도 적었고 연약했지만 그러나 질적으로는 주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훌륭한 교회였다고 합니다.
③ 여기서 사도 요한에 의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요한계시록이 성도들에게 바르게 가르쳐지고 요한계시록도 복음서와 같이 적극적으로 읽혀지고 그 메시지가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전달되어 성도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더 이상 이단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④ 한국교회는 일제 식민지 억압받았던 시절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의미가 중요했다고 합니다. 순교자도 많이 나왔습니다. 해방이 되었고 국가기반이 불안한 시대에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이럴 때 요한계시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산업화 시대에 공장에서 밤새도록 일하던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희망을 찾았다고 합니다. 현실이 우리를 힘들게 하였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국사회는 많이 변했습니다.
요한계시록 해석의 환상과 상징들:
①요한계시록엔 환상들이 많습니다. 천상에서 이루어진 환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난점입니다.
② 요한계시록 내부에 많은 상징들이 있습니다. 어린양=그리스도, 붉은 용=옛뱀=사탄(마귀)=온 천하를 꾀는 자, 짐승=사탄의 하수인이거나 거짓 예언자, 사탄의 군대=메뚜기=전갈
③ 요한계시록은 하늘과 땅의 2차원적인 공간구조가 아니고 4차원적인 공간구조를 가지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하늘도 높은 하늘과 낮은 하늘,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천사들이 전쟁을 치릅니다. 그러다가 타락한 천사가 낮은 하늘로 쫓겨 갑니다. 공중과 땅과 바다, 바다도 높은 바다와 낮은 바다, 깊은 바다를 심연 또는 아비소스라고 말합니다
8 예레미야서 100독
본인이 예레미야서를 스트레이트로 1독하는데 3시간 7분가량 걸립니다. 3년여에 걸쳐서 예레미야서 100독을 하는데 드디어 2016년3월31일 완독하고 아래와 같이 내용을 요약하였습니다.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고향인 아나돗 출신으로 요시야 왕부터 시드기야 왕까지 23년간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하는 위험한 시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예언의 목적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남유다의 변덕과 불순종이라고 강렬하게 예언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그 계약을 바르게 지키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실로가 멸망했던 것처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들어서 (렘43:10) 예루살렘 성전도 멸망하게 될 것이고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의해서 사라진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쫓아내리라 이것이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암살 위협에 영적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하여 바벨론 지배에 복종하면 살 수 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여 주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남유다의 지배층은 예루살렘 포위시 야웨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고 노예를 해방 시켰다가 포위가 풀리자 마음을 바꿔 다시 노예를 잡아다가 종으로 삼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렘34:8-11).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바벨론에 있는 자들이 미래의 소망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너희를 돌아오게 하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강화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언자의 고통과 탄식이 하나님의 고통과 탄식이라고 하였습니다.
① 하나님은 변덕과 불순종을 반복하는 유다를 징계하실 때에 내 종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징벌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렘43:10). 여기서 바벨론도 하나님의 종이라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이번에 예레미야서 100독을 하면서 바벨론에 관한 본인의 고정관념이 깨졌습니다. 이런 게 성경이해의 지경을 넓혀가는 데 있어서 기쁨이고 즐거움이 아닐까요?
② 예레미야 선지자의 활동시기에 요시야, 여호와하스, 여호야김, 여고니야, 그리고 시드기야 왕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한 왕으로 무척 호감이 갔는데 어떻게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 느고에게 전사를 당했을까? 요시야는 친앗수르 정책을 폈다가 애굽의 바로 느고의 원한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행이었습니다.
③ 예레미야는 23년 동안에 유다에 참담한 대재앙이 덮칠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계약 율법의 정신을 혼신을 다해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의 변덕과 불순종에 대해서 인접 바벨론을 들어서 징벌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해석할 때에 한반도에서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발사로 남한을 위협하는 건 남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성경연구와 해석과 함께 개인적이고 교회적인 일대 회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통렬한 회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④ 하나님은 성경 66권을 교인들에게 매일 읽고 깨달으라고 주셨는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신학대학원에서 창세기, 로마서, 요한계시록도 제대로 모르는데 신학생들을 졸업시키고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창세기와 로마서와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열심히 강해설교하는 교회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참으로 통렬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속인죄로 옷을 찢으며 울부짖는 통렬한 회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⑤ 우리는 절대적인 구원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절대적이고 영원한 구원은 복음을 믿어야 되고 (요3:16-17, 행16:31), 회개가 수반되어야 (렘31:31-34) 됩니다. 왜냐하면 내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구원은 시작할 수 없기 없기 때문입니다.
9 이사야서 100독
3년여전 예레미야서 100독에 이어 오늘 2019년 6월 7일에 드디어 이사야서를 100독 완독하였습니다. 2016년 4월 1일부터 시작했으니까 3년 2개월여 걸렸습니다. 성경 100독을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저는 그냥 성경 말씀을 깨닫는게 즐겁고 재미있어서 창세기부터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스트레이트로 1독하는데 3시간 24분이 걸립니다. 여러분도 도전해 보세요. 즐겁고 기쁩니다. 아래는 이사야서 100독을 하고 핵심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총66장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이사야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했습니다. 이사야는 히브리어로 ‘예시야후’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책입니다. 이사야 당시에 유다 사회는 정치, 경제, 종교 전반에 걸쳐서 죄악으로 심히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유다를 심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심판의 예언을 통해서 이사야는 회개를 촉구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까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으며 출신 배경이나 인종적 구별과 상관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통한 구원, 그것이 이사야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주전 760년 유다 웃시야 왕의 통치기간에 출생하였습니다. 이사야의 아버지 아모스는 웃시야 왕의 아버지였던 아마샤와 형제지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웃시야 왕과 사촌지간으로 왕족 출신입니다.
이사야는 주전 735년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습니다. 첫 아들은 ‘스얄야습’이라고 하고, 둘째 아들은 ‘마헬살랄 하스바스’ 라고 하는데 이 두 아들의 이름이 이사야의 예언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스얄야습이란 이름은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 하여도 마지막에는 남은 자가 있어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아들 이름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헬살랄 하스바스 라는 두번째 이름은 ‘노략이 급하게 임한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앗수르에 의해서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임박한 약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통해서 유다의 북쪽에 있는 다메섹이나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는 예언을 이름 속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이사야의 아내가 여선지자 라고 하는데 그의 아내가 예언을 했다기 보다는 예언자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이사야는 아모스, 호세아, 미가와 동시대 인물이었습니다. 이 세 예언자들과 접촉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만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영적 영향력을 주었던 사건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주전 739년에 성전에서 본 환상이었습니다. 6장에 이 소명 기사가 나옵니다. 그는 이 소명 환상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 그리고 당시에 유다 민족의 부정함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부정을 씻음 받는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소명자로써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이사야의 사역기간은 사 1:1에 나와있는 것처럼 유다의 네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이 네 왕 시대에 걸쳐서 사역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주전 739년에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고 보고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했던 주전 701년 이 내용은 이사야 36~37장, 두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 40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주전 681년에 있었던 산헤립의 죽음이라든지 그리고 히스기야의 남은 행적과 선한 일을 기록했다는 다른 성경의 언급을 보면 그는 이후에도 계속 살아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사역은 히스기야의 아들이었던 므낫세까지 이어진다고 보고 그것은 탈무드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므낫세 시대 때 우상숭배법령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사야는 두개의 판자 사이에 묶인 채 톱으로 켜서 순교를 당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히11:37에 보면 어떤 이들은 돌에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그렇게 죽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히11장에 나오는 톱에 켜 죽임을 당한 것이 이사야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은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유다의 네 왕 시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왕이 활동했던 시대에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고 보는데 하나는 주전 734년 아하스 왕 때 북쪽에 있었던 아람과 에브라임이 앗수르를 대항하는 동맹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동맹에 가담할 것을 아하스 왕에게 요청을 하는데 아하스가 이를 거절합니다. 그 때 아람, 에브라임 동맹군들이 유다를 침공합니다. 그것은 유다에게 대단한 상황이었고 그게 이사야 7장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주전 701년에 있었던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입니다. 이 침공은 유다에게 대단한 위기 상황을 불러옵니다. 이사야 36~37장에 의하면 히스기야가 이 위기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얻어냈고 그로 인하여 산헤립 군대가 대패합니다. 어떻든 주전 701년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주전 721년에 사르곤이 침입하면서 북왕조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이사야서에는 이 사건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사야가 살던 당시에 엄연한 역사이기 때문에 이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웃시야 왕은 52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는데 이때에 유다 왕국은 솔로몬 이후 가장 번영했던 시대였습니다. 번영이 유다에게 경제적인 안정은 가져왔지만 사회적 종교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위기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반목이 생겼습니다. 계층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지배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생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부패한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상황도 매우 부정적인 상황으로 전개가 되었는데 종교가 형식에 치우치게 된 것입니다.
각 처에서는 우상숭배가 가득하게 되었고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형식에 머무르는 예배는 단순한 의식에 머무르게 되고 이사야는 그런 사회적인 갈등과 형식에 치우치고 우상숭배에 빠져들어가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을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는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66장은 성경의 66권수와 똑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사야서를 구분할 때 전반 1~39장까지 그리고 후반 40~66장까지 27장을 서로 다른 내용으로 구분한다는 점에서 이사야서의 구조는 신구약성경의 구조하고 똑같습니다. 물론 성경을 장으로 나눈 것은 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이미 이사야서 안에 전반부 39장, 그리고 후반부 27장 이라는 구조는 이사야서가 신구약성경의 축소판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눌 때 그 세 부분 중에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36~39장까지인데 이 네 장의 내용은 히스기야에 관한 역사기록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전체는 이 네 장을 중심으로 1~35장과 그리고 40~66장으로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5장은 주로 심판과 관련되는 내용을, 반면에 40~66장은 하나님의 구원을 제시하는 예언입니다.
전반 35장은 심판의 예언들이고 후반 27장은 위로의 예언들이라는 점에서 그 내용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네 장 히스기야의 역사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 부분의 35장과 뒷 부분의 27장은 모두 예언서 내용들이고 시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히스기야의 역사기록은 산문체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전반 35장 심판의 예언들은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2장은 유다를 향한 예언들이고, 13~23장은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열방을 향한 예언들이고, 그리고 24~27장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내용들을 예언한다는 점에서 이사야의 묵시록이라고도 합니다. 28~33장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예언들이고 그리고 34~35장 두 장은 마지막 하나님께서 보여줄 회복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뒷 부분 27장은 위로의 예언들로 되어 있는데 이 내용을 아홉장씩 균등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40~48장까지는 하나님은 어떤 신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점에서 첫번째 아홉장은 하나님을 소개하는 신론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아홉장인 49~57장은 하나님의 종을 통한 구원, 특히 여기에서는 종의 노래라고 하는 네 편의 시가 나오는데 구원론이라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아홉장인 58~66장은 미래의 영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65-66장 두 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보여줌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아홉장은 종말론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신론과 구원론과 종말론으로 너무 분명하게 그 성격이 구분되어서 이것이 성경인가 조직신학인가 혼돈이 될 만큼 이사야서는 분명하게 내용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가 강조하는 구원, 그 구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핵심입니다. 여호와는 구원하신다 그럴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라고 이사야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제대로 이해할려면 거룩한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이라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이란 뜻입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이 곧 거룩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하나님, 그 거룩한 하나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분은 구별된 분이라는 것입니다. 무엇과 구별되는가?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같이 지음받은 분이 아닙니다. 피조물과 구별되는 거룩한 하나님, 그 분은 창조주 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에 그 분께서는 다른 어떤 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성, 도덕적 완전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 속에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악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완벽한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다의 죄악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스라엘이 잘못했다 할찌라도 그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지킬 수 밖에 없는 파계할 수 없는 이스라엘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과 하나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심판 하시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것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 끝. (한국미디어선교회 바이블 아카데미 2012.4.13.부터 1년간 인터넷 수강, 구약교재 p.295~p.309, 이사야서 담당 권혁승 교수 강의에서 요약).
① 이사야서 66장의 구조는 신구약성경 66권과 똑 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장으로 나눈 것은 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이미 이사야서 안에 전반부 39장, 그리고 후반부 27장 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이사야서가 신구약성경의 축소판인 것입니다.
② 유다 왕국의 웃시야 왕은 52년간 통치를 했는데 이때 유다는 솔로몬 이후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정치적으로 부패해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반목이 생겼고 계층간에 갈등이 있었고 지배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생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서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위기상황이었습니다.
③ 이사야서는 36~39장을 중심으로 1~35장과 40~66장으로 3부분으로 구분합니다. 1~35장은 주로 심판과 관련되는 내용을 예언하고 있고 반면에 40~66장은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하는 위로의 예언서입니다.
④ 창조주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도덕적 완전함, 어떤 악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완벽한 분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지킬 수 밖에 없는 그래서 동시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⑤ 이사야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이게 복음의 본질이며 이사야 때부터 세계선교가 예언되었으며 고로 이사야 선지자는 선교의 선각자입니다. 아멘. 끝.
* 온전한 믿음, 히3:7-19, ① 성령은 성경을 통해 오늘도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말씀에 오늘 순종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일’의 구원을 결정할 것입니다. 주의 뜻을 알면서도 오늘의 순종을 더디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②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인 말씀의 교제와 격려가 있을 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기심과 자만을 버리고 서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낙오하지 않도록 내가 돌아보고 권면해야 할 지체는 누구입니까? ③믿음은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이루어져야 할 과정입니다. 한때 좋았던 믿음에 기대어 오늘을 안일하게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날마다 성실한 묵상으로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성실한 묵상과 기도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매일성경 2019. 05/06 p.120~121에서 인용)
2019.09.09.
춘천 우두동 인벤스 아파트에서 아버지가,
유럽 종교개혁지 5개국 탐방을 마치고 추석선물로 준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