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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미나 발제문입니다.
노동자정치운동의 성공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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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가 불붙고 있다. 논의가 더욱 활성화되고 노동자정치운동이 크게 성공하여, 자본독재로 인한 환경재앙과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극단적 양극화와 대량실업의 지옥에서 인류를 구해낼 결정적 무기를 벼려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성공의 첫째 조건은 운동의 목표 설정에 있다. 예컨대 선거제도를 바꿔 거대 양당 체제를 타파하고 진보⋅노동 세력의 원내 진출을 확대하는 데에 운동의 목표를 둔다면, 설혹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운동은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목표를 위해 제시되는 ‘돌봄국가’, ‘노동이 행복한 지역사회’, ‘아래로부터의 정치’, ‘정의로운 복지국가’ 등의 구호들은 민주당도 합창할 만한 것들이고, 노동자민중의 희망과 에너지를 끌어내 의미 있는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데에 별다른 촉매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은 노동자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불신의 뿌리는 현실사회주의 운동의 일시적 패배와 자본독재의 장기적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노동자정치운동이 변혁적 전망을 잃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본독재를 대전제로 의회주의에 매몰되면서 각 정파의 지분 확대에 사활을 걸었고, 이 와중에 의회 진출이 주로 기득권세력으로의 편입을 뜻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경험에 있다. 양당 체제 타파나 의회 진출의 확대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가와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의 잔향이 될 수밖에 없다.
2. 하지만 지금 불신이 크다고 해서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 자체를 뒤로 미뤄두기에는 노동자민중이 처해 있는 난관이 너무 절박하다. 이는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극우 집권세력의 노골적인 친자본 반노동 정책 때문만이 아니다. 만일 그 때문만이라면 탄핵이나 타도운동을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촛불정부’ 기간에도 선진국이니 G8이니 하는 희망회로 안에서 가계부채와 비정규직 비중은 꾸준히 증대했다. 그것에 비례해 대기업 사내유보금은 폭증했다. 근본적 양극화의 틀 속에서 불평등을 세세히 노동자민중의 몸에 새겨넣는 범사회적 서열체제는 부수기 어려울 만큼 고착되었다. 노동시간은 OECD 국가중 최장 수준이며, 산재사망률 역시 압도적 1위다. 미루고 미루던 ILO 핵심협약이 비준되었지만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은 여전히 제한을 받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현정권과 마찬가지의 친자본 반노동 기조가 깔려 있다. 이미 김대중 정권은 제국주의 자본권력인 IMF의 요구대로 비정규직 비중을 폭증시켰고, 재벌구조를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는 것을 구조조정이라고 불렀다. 노무현 정권은 삼성 X파일을 덮으면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명언을 남겼으며, 삼성장학생들로 정부 요직을 채웠다. 문재인 정권은 촛불의 힘으로 태어났으면서 민주당의 기존 친자본 노선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사회적 대화’ 따위로 노동운동을 무력화하면서 노동자민중을 분할 통치하는 자본독재의 전략에 모범적으로 복무해왔다. 민주당 역시 본질적으로는 노동자민중을 입법⋅사법⋅행정 등 국가권력에서 배제하는 자본독재의 주요 분파임을 부인할 수 없다.
3. 이러한 사실은 오늘의 검찰-언론-기득권 카르텔 정권을 타도하고 다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민주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이재명이 제시하는 ‘기본사회’가 기득권세력의 저항을 뚫고 실현되면 자본독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기본사회’의 토대가 되는 경제정책은 환경조건을 고려하고 기술발전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장 파이를 키움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완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시적 특별잉여가치 생산과 제국주의적 초과이윤 획득을 통해 낙수효과를 추구하는 방식으로서, 오늘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할 수 있겠지만 자본독재의 수명을 연장할 뿐 자본독재가 초래하는 재앙의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특별잉여가치의 수명은 늘 일시적이며 제국주의적 초과이윤 확대는 전지구적 갈등과 전쟁의 자양분이다. 더욱이 기술혁신과 생산력 증대에 따르는 노동력 절약은 자본독재 하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명확하게 대량실업을 예고하고 있으며, 제국주의 전쟁이나 환경재앙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본독재의 분파 차원에서 찾을 수는 없다. 현재의 진보정당들도 자본독재 하에서 민주당과 공조 또는 경쟁하면서 지분을 넓히기 위한 정치공학에 몰두하고 있는 한, 그 독자적 존재이유는 미미하다. 노동자정치운동은 기존 보수정당들과 확연히 선을 긋고 독자 세력으로서 자본독재를 넘어선다는 인류사적 장기 전망을 세움으로써만 그 성공을 향해 첫발을 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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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자세력화의 길은 현재 노동자민중의 전반적 의식⋅욕구체계로 인해 비현실적인 듯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자본독재로 인한 재앙의 고통과 희생을 노동자민중이 전담하게 될 필연성으로 인해, 노동자민중이 자본독재에 맞서는 중심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객관적인 것이다. 이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바꿔가는 것이 노동자정치운동의 본업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출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노동과 자본의 근본 모순을 직시한다면, 반-자본독재 투쟁에서 노동자민중이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때 노동중심성은 자본독재 하의 생존을 위한 소극적 운동에 머물고 자본독재를 대신할 적극적 대안사회 건설로 나아가지 못하면 계급이기주의로 매도당할 수도 있다. 노동중심성의 본질은 자본독재를 종식하고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운동의 중심세력이 노동자민중이라는 데에 있다. 이러한 본질을 흐리고 그것을 경제주의⋅환원주의로 몰아가는 포스트모던류 다원주의나, 현실사회주의 운동의 유산을 무차별적으로 일소하고 싶어 하는 무지성적 청산주의, 인간학적 고정관념을 끌어들여 평등사회의 원천적 불가능성을 선동하는 형이상학적 패배주의 따위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이들은 암암리에 제국주의 자본독재의 영속성을 전제하고 부분적 개선을 통해 자본독재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 이를 극복하는 것도 노동자정치운동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자본독재를 종식하려는 노동자민중의 해방전쟁은 평등의 원리에 따른 인류의 공존과 공영을 목표로, 자본독재로 인한 범인류적 문명파괴 위기 극복의 근본 방안이다. 이 점에서도 노동자정치운동의 독자세력화에는 명백한 존재이유가 있다.
2. 오늘날 자본독재는 대개 형식적 민주주의를 활용한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다수를 분열시키고 그 가운데 일부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레닌은 자본이 직접⋅간접으로 관료들을 매수함으로써 민주공화제의 외피 아래 아무리 인물⋅제도⋅정당이 교체되어도 견고하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매수의 범위는 더욱 광범해졌고, 매수의 방식도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여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간의 임금격차를 통한 위계체제의 고착화와, 특히 이데올로기 생산과 유포를 맡고 있는 지식노동자들에 대한 매수가 일반화된 것이다. 그 결과 ‘관리되는 사회’ 수준은 아닐지라도 노동자민중의 자발적 동의 현상이 압도적인 수준으로 확산되었고, 심지어 노동자⋅노동자계급⋅노동자정치 등의 개념들이 사회적으로 금기어 수준으로 매장당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현 집권세력은 대놓고 ‘노동자 없는 세상’을 외치고 있다. 이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혹은 민주공화제라는 형식 아래에서 자본독재가 관철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현상을 고려하면 해방적 투쟁과 관련해 “오늘날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지칭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일 것이다.
3. 그러나 레닌은 민주주의의 요체인 평등을 계급 폐지라는 의미로 이해할 경우, 형식적 평등에서 실제적 평등으로 나아가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고 주장한다.(국가165) 그리고 민주주의가 철저히 구현될수록 노동자민중에게 유익하다고 본다. 또한 레닌은 민주주의의를 위한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할 필요성도 제기한다. 오늘의 노동자정치운동도 민주주의 혹은 민주국가를 위한 투쟁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때 민주국가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즉 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인 국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어야 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정치운동은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인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 건설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집권을 위한 장단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 집권계획 없는 정치운동은 대중의 희망과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노동자국가 건설을 주요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노동자정치운동은 자본독재의 영속성을 전제로 지속가능한 착취의 효율성을 높이며 자본독재의 수명을 연장해주는 자본독재의 분파들과 차별화되는 독자적 존재이유를 확보할 수 있다.
4. 고타 당대회에서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ozialistischen Arbeiterpartei Deutschlands: SAP)이 출범한 지 6년 후인 1881년 엥겔스는 영국의 노동자계급을 상대로 뼈아픈 문제를 제기한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일 단축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데,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전적으로 토리당원들, 휘그당원들, 급진파의 수중에, 상류계급 사람들의 수중에 맡겨놓았고, “거의 이십오 년 동안 ‘거대 자유당’의 꼬리를 이루는 데 만족해 왔다”는 것이다. 이때 엥겔스도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공업 및 농업노동자계급이 인민의 막대한 다수를 이루고 있는 영국에서는, 민주주의란 더도 덜도 아닌 노동자계급의 지배권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노동자당이 아니라면 참된 민주주의적인 당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도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이해를 돌보는 일을 지주, 자본가, 소매상인 등의 계급에게, 그리고 그들을 쫓아다니는 법률가나 신문기자 등등에게 허락하고 있다. 노동자의 이해를 위한 개혁이 그렇게도 천천히, 그리고 그렇게도 비참할 정도로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국의 노동자민중은 하려고 하기만 하면 되며,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요구하는 어떠한 개혁도 사회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그래도 20여 년 후인 1900년에는 영국 노동당이 출범하며 1945년 집권당으로 성장한다. 물론 노동당은 아직 영국을 노동자국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5. 엥겔스가 말하는 ‘노동자계급의 지배권’을 노동자국가로 바꾼다면, 그의 비판을 상당 부분 그대로 우리의 노동자정치운동에 적용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 독일의 국가보안법이었던 사회주의자법(1878~1890)을 통한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꾸준히 성장하며 1890년에는 최다 득표 정당(이후 사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으로 올라서게 되는 흐름 속에서, 엥겔스가 의회주의를 사회주의운동의 중요한 무기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엥겔스는 당의 성장을 단순히 낙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성장과 함께 끊임없이 출현하는 반혁명적 수정주의 경향에 맞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엥겔스 사후 독일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따라 사민당은 급속히 우경화되고 수정주의와 사회쇼비니즘에 빠져들었다. 의회권력을 활용하더라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경각심을 유지하면서, 노동자국가로 나아가는 총체적 전략전술을 세울 필요가 있다. 독일 사민당이나 영국 노동당이 우리 노동자정치운동의 유일한 모델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다른 어떤 사례도 고스란히 받아들일 만한 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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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자정치운동이 추구하는 노동자국가는 가능성과 당위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 자본독재가 초래하는 총체적 재앙에 대한 근본 인식을 바탕으로, 노동자민중이 납득하고 공감할 만한 대안사상 및 세부 대안정책들을 생산⋅검증하고, 이를 폭넓게 공유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의 적극적 지지와 참여를 충분히 끌어내야만 노동자국가 건설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구체적인 대안사상⋅대안정책들은 바로 노동자민중이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싸우기 위한 주요 무기이자, 싸움의 성과물들이기도 하다. 치밀하고 조직적인 이론투쟁을 통해서만 설득력 있는 대안사상⋅대안정책을 생산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결코 특정한 개별 연구자나 정파 혹은 조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동자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노동자정치운동에 적극 나서는 사람들 모두가 힘을 모아야 가능한 일이다. 정파와 조직들이 분열되어 각자도생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노동자민중의 공감대를 넓혀갈 수도 없다. 대안사회 건설을 자족적 사고의 실험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한, 운동의 통일이 집권의지와 마찬가지로 성공의 기본조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결투쟁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절대명령이며, 운동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노동자정치운동에 나서는 주체의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무다.
2. 물론 아무 원칙 없으면 운동의 통일은 무의미하다. 운동 통일을 위한 첫째 원칙은 자본독재에 맞서는 독자적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둘째 원칙은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를 구성하는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실질적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 건설을 운동의 주요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노동자국가는 실질적 평등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파리코뮌의 교훈, 즉 사회의 심부름꾼이 사회의 주인으로 둔갑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절대적 조치를 취한다는 교훈을 오늘의 조건에 맞게 구현할 필요가 있다. 또한 노동자국가는 현재의 자본독재가 초래하는 재앙들을 극복하고 사회 구성원 누구도 생존권의 위협을 받지 않으며 인류의 문화유산과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다. 즉 풍요로운 평등사회가 노동자국가의 궁극 목표다. 그런데 이처럼 노동자국가를 통해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국주의 자본독재 세력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이 전쟁에서는 전세계 노동자들과의 국제주의적 연대투쟁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운동 통일의 셋째 원칙을 설정할 수 있다. 즉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제국주의적 자본독재를 종식하고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인류사적 전쟁을 의식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 셋째 원칙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제국주의 자본권력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불가피한 독재의 성격을 띠지만, 동시에 노동자민중 위에 군림할 수 없는 근본민주주의적 성격을 띤다.
3. 이러한 원칙에 동의하더라도 대안모델과 정책 문제로 한발만 들어서면 현재로서는 개인이나 정파 혹은 조직에 따라 천차만별의 입장들이 갈라서 있다. 예컨대 대안사회의 모델을 구소련이나 오늘의 중국 혹은 조선이나 쿠바 혹은 북유럽 복지국가 등 어느 하나에서 찾는 배타적 입장에서 여타의 모델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도 있고, 마오의 모순론에 근거해 현단계의 주요모순을 민족모순 혹은 계급모순 가운데 하나라고 파악하고 달리 파악하는 것을 비과학적이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나 시장의 존속 여부에 대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당이나 국가권력 문제를 놓고도 무정부주의에 가까울 만큼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입장부터 극단적으로 엄격한 조직형태를 요구하는 경우까지 편차가 클 수도 있다. 최근에는 제국주의 문제로 격한 논쟁이 오가기도 하고 아예 서로 말을 섞기조차 혐오하는 분위기도 있다. 이러한 견해차가 모두 해소되고 사상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운동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운동 통일은 끝없이 미뤄질 것이다. 또 세부 수준까지 사상통일이 이루어진 특정 조직만으로 일사분란하게 운동을 끌고가고자 한다면, 비판과 이견을 통한 생산적 논의와 사상의 발전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우며, 오늘의 이데올로기 지형 속에서는 운동의 규모가 확대되기보다 축소되어갈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른바 지도부나 전문가가 생각한 바를 제시하면 대중이 그에 따라 비판과 논쟁 없이 움직이는 조직문화가 고착될 것이다. 현실적 조건에 근거한 비판과 논쟁, 그리고 이를 통한 사상⋅정책의 검증⋅발전과 대중적 공유 과정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며, 통일된 운동의 내실을 다지며 성공으로 가기 위한 주요 조건이기도 하다.
4. 이러한 운동 통일 역시 노동자정치운동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일 뿐 현실은 아니다. 주요 원칙들에 대한 동의를 전제로 통일된 조직 속에서 다양한 논의를 벌여 견해차를 좁혀가고 정책 관련 세부 문제들에 대한 최선의 답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민주노총이나 기존의 진보정당들 혹은 그밖의 어느 조직이 해낼 수 있을지, 아니면 그 역할을 위해 어떤 형태의 새로운 당이 필요할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그 동안 누적되어온 운동 경험들과 조직적 정파적 입장 차이 혹은 운동방식과 철학 등의 차이로 인해 운동의 통일은 실로 난해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운동 통일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차별, 억압,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여러 분야의 운동들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독재에 기인하는 문제들을 대증요법 차원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위해서다. 따라서 운동의 통일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영역을 넘어서며, 여타 부문운동들과의 느슨한 사안별 연대 수준도 넘어선다. 또한 제국주의의 폭력에 대응하기 위한 노동자 국제주의적 연대를 포함한다.
5. 이 통일된 운동 조직의 과제는 무엇보다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대안정책을 생산하고, 노동자민중의 비판⋅검증을 통해 그 일차 결과물들을 널리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확정해가며, 그것들을 조직적⋅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것이다. 나아가 결정적인 시기에 운동 주체들이 전략전술에 따라 최대한 강력하게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이 준비 과정 자체도 자본독재에 맞선 전쟁의 양상을 결정해갈, 전쟁의 일환이다. 이 경우 당대의 혁명에 대한 엥겔스의 입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회 조직의 완전한 변혁이라는 문제가 있는 곳에서는, 대중들 스스로가 변혁 과정에 참여하여, 그들 스스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야 하는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엥겔스는 이러한 인식의 확대를 위해 ‘장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운동의 주체들인 노동자민중이 사상적 이론적 무기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다면 제국주의 자본독재로 인한 객관적 재난상황으로 혁명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더라도, 사회는 온갖 분열술책과 혐오정치 등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야만상태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거나 그람시가 말하는 수동혁명으로 귀착되기 쉬우며, 자본독재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도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레닌의 조언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전위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전체 계급, 곧 광범한 대중들이 전위를 직접적으로 지지하거나, 적어도 전위에게 우호적인 중립을 취하고 적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 서기도 전에, 전위만으로 결전을 치르는 것은 멍청할 뿐만 아니라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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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운동 통일에는 사상적 배경, 조직적 입장, 인적 관계, 구체적 실천 경험 등의 조건들이 함께 작동하고 있어 어떤 한두 가지 묘수로 분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장기목표나 원칙들에 동의하고 형식상으로 동일 조직 속에서 함께 일하는 것은 운동 통일의 대전제이다. 형식적 통일이 실질적으로 생산성을 발휘하는 데에는, 운동의 적극적 주체들이 파리코뮌의 기본정신, 즉 일꾼들을 주민들이 언제라도 공직에서 소환할 수 있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냉정한 평가에 근거해 역할과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운동 주체들이 특권화⋅관료화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과 책임은 자본독재와의 전쟁 과정에서 예외 없이 박해당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희생조차 특권의 발판이 될 수 있으며 언제라도 권력에 중독되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항상 기꺼이 소환될 자세로 자신의 사상⋅이론⋅정책⋅활동 등을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더 나은 대안에 승복하는 가운데 필요하면 서로를 교정해가면서 함께 일하는 운동문화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자세는 조직 내부에서만 아니라 노동자민중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며, 이로써 운동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다. 노동자민중의 신뢰와 관련해 스탈린이 지적하는 두 가지 사안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당이 대중의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대중의 혁명적 본능에 깊이 신경을 써야 하며, 대중의 실천적 투쟁을 연구하여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의 정책이 올바른지를 검증해야 한다는 것, “대중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우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당이 매일매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신뢰를 획득해야 하며”, 정책과 사업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획득해야 하며, 대중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설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 이러한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적극 가동하는 것도 분열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맑스가 밝히는 것처럼 변증법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은 현존하는 것의 ‘불가피한 파멸’ 내지 ‘일시적 측면’을 파악하며, “본질상 비판적⋅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유에 대한 제약에는 외부 검열이나 편협한 이해관계만 아니라 고정관념들이나 당연시되는 무의식적 전제 등도 포함될 것이다. 물론 사유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제멋대로 망상을 펼치는 것이 변증법은 아니다.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도식주의나 형식주의적 사유에 빠지지 않고 인식 대상의 살아 있는 본질에 최대한 다가가려는 ‘개념의 노고’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방식을 적극 가동할 경우 기존의 인식이나 개념들을 변화하는 실천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필요시 수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는 개념적 인식 대상 자체와 개념을 동일시하는 동일성 사유, 특히 그 극단적 형태인 행정적 사유나 위상학적 사유를 비판한다. 또 어떤 영구불변의 형이상학적 제일원리로부터 추론되는 완결된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기성품처럼 물려주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증법은 대화와 논쟁, 비판과 반비판을 통한 인식의 심화와 확대과정을 중요시한다. 변증법은 개념의 노고를 중단하는 교조주의나 속류화를 거부한다.
3. 변증법적 비판은 주로 비판 대상의 주장이나 논리와 무관한 외부의 척도에 비추어 문제를 제기하는 초월적 비판이 아니라, 대상의 주장이나 논리를 따라가며 그것의 실체와 한계를 밝히고 그것을 지양하는 내재적 비판이다. 예컨대 자본독재가 표방하는 민주주의를 사회주의적 척도에 비추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주인인 정치체제라는 그 본래적 의미를 끝까지 밀고가 자본독재가 이를 배반하고 있음을 밝히고, 그 본래 의미에 충실하려면 자본독재를 종식하고 노동자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실질적 평등,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 궁극적으로는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헤겔은 “어떤 것에 관해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것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이제 그 일을 끝내고 그로부터 어떤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경우에 그렇듯이,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려버리는 긍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거기에 머무르는” 데에 정신의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변증법적 비판은 청산주의가 아니다.
4.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 개념을 통해 청년 맑스의 이데올로기적 문제의식과 원숙기 맑스의 과학적 문제의식을 엄격히 구분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맑스의 변증법에서 헤겔 변증법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청년 맑스의 대표저술인 [경철초고]에서도 이미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그의 주체적 적극성 혹은 변증법을 중요시하며,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적극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구태의연한 기계적 유물론에 머물지 않고 ‘운동의 결과일 뿐 아니라 출발점인 인간 주체’를 강조한다. 맑스는 헤겔 및 포이어바흐와 인식론적으로 단절하기보다 양자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기계적 유물론을 지양하고 종합한다. 변증법은 청산주의와 거리가 먼 것처럼 단절의 논리가 아니다. 대립물의 통일⋅이행⋅전도를 주목하는 변증법은 인위적인 구별과 경계선의 타당성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사물들을 인위적으로 나누는 경계선을 엄격히 고수하는 것은 물 자체에 대한 불가지론 이상으로 칸트 인식론이 초래한 폐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정치와 경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그리고 노동자정치운동 내부의 여러 정파들 간에 넘어설 수 없는 칸막이를 치고 상호이행⋅전도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것은 변증법적이지 않다. 실제로 엄격히 고수해야 할 경계선은 그리 많지 않다. 노동과 자본, 제국주의 세력과 종속국 민중 등 그 출발부터 종말까지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는 경우가 아닌 한, 자본의 지배전략에 의해 적대관계로 내몰린 수많은 대립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차이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의 분열책이 없다면, 남과 여, 청년과 노년, 정규직과 비정규직, 외국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가 왜 대립하고 갈등에 빠져야 하겠는가. 지식인과 노동자민중, 전위와 대중 사이에도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 따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지식인 역시 노동자라는 자각이 필요하며, 대중들이 전위와 같은 수준의 인식을 갖춰가는 변화야말로 운동의 성공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것이다. 해방운동 내부의 정파적 대립관계가 지금처럼 고착되어 있어야 할 필요성이 도대체 상호이행과 통일의 가능성 앞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겠는가.
5. 헤라클레이토스와 함께 변증법의 기원을 이루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변증법의 한 가지 본질적 특징을 지적한다. 즉 플라톤은 말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함께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이데아로 모으는 일과, 형상들에 따라 나누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그의 관점에서 실재에 근거하는 분석과 종합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본성적으로 하나로 모이면서 여럿으로 나뉘는 것을 통찰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여기면, 나는 그의 뒤를 ‘마치 신의 발자국을 좇듯’ 따라가네.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내가 붙인 이름이 옳은지 여부는 신이 알겠지만, 이제껏 나는 그들을 변증가라고 부르지.” 레닌도 분석과 종합의 통일을 변증법의 세 가지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파악한다. 노동자정치운동이 만들어내야 할 대안사상⋅대안정책들은 현실사회주의를 포함한 해방운동의 유산들을 청산하고 허공에서 창조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느 특정 모델을 통째로 받아들여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델은 다양한 유산들을 분석적으로 파악하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오늘의 실천적 요구와 현실 조건에 근거해 주체적으로 종합해내야 하는 것이다. 분석과 종합을 통일하는 변증법적 사유는 특정 모델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나 맹목적 거부를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사유방식을 통해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만 아니라 레닌과 스탈린, 혹은 아도르노와 지젝 등에게서도, 심지어 적으로부터도 배울 것은 배우며, 우리의 실천에 가장 적합한 대안사상⋅대안정책을 풍부하게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생산 과정에 다양한 정파나 조직 혹은 개별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향한 통일적 운동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왜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5
1. 노동자정치운동이 자본독재 하의 분파로 주저앉지 않고 노동자국가 건설을 향해 발을 떼는 순간부터 자본독재와의 ‘무제한 전쟁’은 불가피하다. 그 이전에도 이미 최소한의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축소를 놓고도 자본은 노동을 상대로 전면전을 불사해왔다. 아마 자본증식이 심각한 한계에 부딪치고 자본독재의 종말이 코앞에 닥치고 위기를 피하고자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 무한증식 본성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류가 자본독재를 이성적으로 제압하지 않는 한 증식의 한계와 주기적 위기로부터 시작되는 파국을 막고 공존과 공영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상 인류는 자본주의가 지배해온 수 세기 전부터 자본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해방전쟁을 부단히 벌여왔다. 설혹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전장을 벗어날 수 없다. 노동자정치운동은 이 전쟁을 의식적으로 치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인류사적 해방전쟁에서 노동자정치운동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전략적 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운동의 통일, 대안사상⋅대안정책의 체계적 생산과 대중적 공유, 노동자국가 건설, 제국주의에 맞서는 노동자 국제주의 강화, 풍요로운 평등사회 등의 개념들은 어떤 고정불변의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현시점에서 검토할 만한 전략적 사유의 잠정적인 논리적 귀결이다. 이 용어들은 검열을 의식한 노예의 언어도, 관종들의 종특인 시장의 언어도, 영혼을 잃은 행정의 언어도 아니다. 노동자민중의 현단계 의식과 욕구 상태에 최대한 부합하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선을 고수하면서, 해방운동의 유산들과 당면과제를 결합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필요하다면 ‘풍요로운 평등사회’ 자리에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나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들어갈 수도 있다. 또한 ‘노동자국가’ 자리에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사회주의’가 들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다. 대안사상⋅대안정책의 ‘대중적 공유’라는 말보다 ‘대중들에 대한 지도’라는 말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원대복귀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노동자민중 누구나 지금 옆의 사람에게 조심스럽게라도 건넬 수 있는 전략적 언어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2.마오의 주요모순 개념은 혁명적 실천의 전략적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발전과정에 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중의 하나는 반드시 지도적⋅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모순이며 다른 것은 부차적⋅종속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두 가지 이상의 모순이 존재하는 복합적 과정을 연구할 때에는 주요모순을 찾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주요모순을 파악하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주요모순 개념을 핵심으로 하는 마오의 모순론이 중국혁명에서 차지했던 결정적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마오의 주장이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어야 할 금과옥조는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의 주요모순을 파악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무수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들x 전체에 주체의 역량을 분산시켜서는 어느 것도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힘을 특별히 집중해야 할 모순들을 식별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또한 모순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모순들의 현실적 비중 및 해결 효율성을 고려한 우선순위, 동시해결을 위한 역량의 분산 배치 가능성, 예상되는 다음 단계의 주요모순(들) 등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현단계에서 주요모순으로는 자본독재의 계급적 폭력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극우 파쇼정권과 노동자민중 사이의 모순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로서 충실히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계급적 본질을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고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수년마다 행사하는 보통선거권만으로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된 듯이 착각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현정권은 이러한 외피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고 노골적인 반노동 정책과 함께 무능⋅무책임⋅탐욕으로 국민적 분노와 경멸을 삼으로써, 자본독재의 약한고리를 자처하고 있다. 이 파쇼정권과 노동자민중의 모순은 정권타도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반면에 자본독재의 약한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극우 파쇼정권이 타도된다고 해도 자본독재 자체가 허물어지기는 어렵다. 노동자정치운동의 주체적 역량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체적 역량의 성장 속도와 규모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폭발적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자민중의 존재와 국가권력기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민중 권력 사이의 모순을 다음 단계의 주요모순으로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모순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양적 성장과 질적 도약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이러한 성장과 도약은 제국주의 자본독재 종식을 위한 인류사적 해방전쟁의 주요 전환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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