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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20. 현상과 본질, 그리고 과잉결정
1.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의 구분을 위해서는,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나누고 그 구분에 적합하게 주체의 실천 역량을 배치하려는 전략적 사유가 전제된다. 이때 중요성의 경중에 대한 평가가 자의적 변덕이나 개인적 욕구에 좌우되는 일을 피하고 최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제반 모순들을 가능한 한 총체적 관점에서 비교⋅평가할 뿐 아니라 눈앞의 다양한 현상형태에 현혹당하지 않고 사태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과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변증법은 “사물, 현상, 과정 등에 관한 인간의 인식이 현상에서 본질로, 좀 더 얕은 본질에서 좀 더 깊은 본질로 심화해 가는 무한한 과정”이기도 하다.(주1)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주2)이라는 맑스의 주장은, 제국주의 자본독재 이데올로기가 과학의 깃발까지 내걸고 삶의 전 영역을 장악해갈수록 더욱 절실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핵폐수가 안전하다는 핵물리학적 괴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평등사회는 인간의 본성상 불가능하다는 문화인류학적 공론(空論)까지 버젓이 사이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노동자민중의 감각과 사고방식을 잠식하고 있다. 성적⋅인종적⋅종교적⋅지역적⋅세대적 차이 등등 존중해야 마땅할 차이들을 적대적 주요모순처럼 부풀리면서, 자본과 노동 혹은 제국주의 세력과 예속국 민중 사이의 현실적 주요모순을 은폐하고 이로써 지배관계를 유지⋅강화하려 드는 것은 자본독재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 사업이다.
이러한 사정을 원론 차원에서 충분히 의식하고 있더라도, 실제로 총체적 관점을 취하면서 사태의 현상형태를 꿰뚫고 본질을 좀 더 깊이 인식해가는 데에는 지난한 노력이 요구되며 종종 혼선이 야기되기도 한다. 또 이러한 혼선은 운동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근래 러우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상반된 두 입장은 중국사회의 성격, 특히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차와 결합해 국내외 해방운동 내부에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견해차를 요약하자면, (1) 러시아와 중국의 독점자본주의적 성격을 본질적인 문제로 보는 입장에서는 두 나라가 미국⋅일본⋅독일 등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일 뿐이다. 당연히 러우전쟁도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이다. 전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이다. 이때 중국이 호혜적 다자주의를 통해 미제국주의와 대조되는 측면은 제국주의적 본질을 좌우하지 못하는 현상형태일 뿐이다. (2) 이와 반대로 중국을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라고 평가하는 입장에서 보면, 앞의 입장은 역사적으로 미제국주의가 드러내온 폭력적 본질을 간과하는 양비론일 뿐이다. 중국이 완벽한 사회주의 사회는 아니지만, 공유기업의 비중과 특히 최근의 공동부유⋅국진민퇴 등 핵심적 정책방향이 지니는 본질적 의미를 간과하고 자본주의적 과도현상들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다자주의는 미국의 단일패권을 허무는 주요 변수이며, 반미 없이 반제국주의도 없다.
이처럼 대립하는 두 입장은 풍부하고 다양한 자료들로 발판을 다져가고 있어 쉽사리 절충 또는 종합될 수 없을 듯하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양측 모두에서 생산적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입장으로부터는 독점자본주의적 성격을 중국사회의 본질로 못 박아 놓고 이를 곧장 제국주의와 직결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특히 미국 단일패권 붕괴 이후 중국식 사회주의가 약소 저개발국가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예의주시하도록 만드는 자세, 즉 제국주의적 지배의 현상양태가 아니라 지배적 본질을 주시하는 비판적 자세를 배울 수 있다. 다자주의의 장점들을 인정하더라도 향후의 기능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뒤의 입장에서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확인이나 양비론에 대한 비판 이상으로, 중국 사회의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발전경향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강조하는 측면이 중요해 보인다. 중국의 시장사회주의가 미래 인류의 유일 모델은 아니지만, 중국이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우리가 건설할 노동자국가의 주요 모델이나 우군이 될 가능성을 미리 배제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순적 경향과 요소들이 충돌하면서 발전 또는 퇴행하는 복합체인 한 사회를 통째로 긍정⋅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 문제점들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부분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우리의 실천을 위해 종합하는 변증법적 사유를 최대한 가동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 모순 문제와 관련해 알튀세르의 과잉결정론이 진보 학계의 이데올로기 지형에 끼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은 적지 않다. 이제 별 의미 없는 전설이 되었지만, ‘맑스주의의 위기와 전화’, ‘이론적 실천’, ‘인식론적 단절’, ‘징후독해’ 등의 유행어를 퍼뜨리면서 그의 이론은 현실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패배로 생긴 이데올로기의 빈공간에서 한동안 맑스의 이름을 지켜내고 있었다. 알튀세르식 유물변증법의 요체를 이루는 과잉결정론은 아직 우리 운동 내부에서도 일정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과잉결정 개념을 만들어내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오의 모순론을 끌어들이고, 맑스의 유물변증법에서 헤겔 변증법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최고급의 수사법을 발휘한다. 그의 주요 저작인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 읽기] 전체가 반-헤겔주의 선언문이나 다름없다.
비판의 핵심은 헤겔이 “실재 대상과 지식 대상을 혼동”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알튀세르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을 논거로 삼는다. 알튀세르의 비판은 물론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맑스의 비판에 ‘대상’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조금 왜곡하는 수준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관념론적 혼동을 ‘경험론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경험론적 인식의 본질은 “실재적 대상으로부터 본질을 추상하는 것”이다.(주3) 하지만 이와 달리 맑스는 추상 자체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으며, [자본론] 첫머리에서부터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서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언한다.(자본1,4) 알튀세르의 경험주의 비판은 ‘이론적 실천’에 과도한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관념론으로 추락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이론적 실천은 그 자체가 기준”이며 “외부적 제실천으로부터 검증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읽기73-74) 이로써 이미 그는 인식론 차원에서 맑스를 끌어들이면서 맑스를 배반한다. 아울러 그와 그의 제자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징후독해’도 인식론적 파산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징후독해를 통해 얻어낸 통찰이 체계적 망상 따위에 머물지 않으려면 현상형태들를 꿰뚫고 사태의 본질을 밝혀내야 하는데, 이는 알튀세르의 논리상 과학이 아닌 경험주의 이데올로기일 뿐인 것이다.
과잉결정 개념을 통해 알튀세르는 헤겔의 관념론 내지 경험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헤겔 변증법을 통째로 버려야 한다고 선동한다. 그는 마오의 모순론이 밝히는 주요모순과 부차모순들, 모순의 주요측면과 부차측면이 불균등발전하는 복잡한 현실적 구조가 헤겔에게는 부재한다고 비판한다.(주4)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단순성으로 인해 관념론을 유물론적으로 전도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머리로 서있던 사람이 마침내 발로 걷는다 해도 그는 동일한 사람인 것이다!”(위하여138) 알튀세르가 자부하는 바에 따르면, 헤겔 변증법의 단순한 구조와 대조되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가장 심오한 특징’은 ‘과잉결정’ 개념으로 포착된다.(위하여357) 그 특징은 “모순의 존재 조건들이 모순 자체 속에 반영된다”는 것, “다시 말해, 모순의 상황이 복잡한 전체의 지배관계를 갖는 구조 속에 반영된다”는 것이다.(위하여362) 이에 따라 모순들은 “모순에 역할을 할당하는 구조화된 복잡성에 의해 결정된다.”(위하여363) 또 이 ‘구조화된 복잡성’으로 인해 단순히 주요모순은 본질이고 부차모순들은 이 본질의 현상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위하여355) 그리고 불균등성도 각 모순, 각 심급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반해 “미리 그리고 영구히, 최종 심급에서-결정적인-모순을 지배적인 모순의 역할과 동일시하고, 영구히 이런저런 ‘측면’(생산력들, 경제, 실천 등)을 주요 역할과, 또 다른 ‘측면’(생산관계들, 정치, 이데올로기, 이론 등)을 부차적 역할과 동류시하는 것은 경제주의이다.”(위하여368-369) 과잉결정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경제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에서 경제가 결정적임을 인정한다.(위하여372) 그러나 “경제의 변증법이 결코 순수한 상태로 작동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은 과잉결정론의 당연한 귀결이다. “처음 순간에도 마지막 순간에도 ‘최종 심급’의 고독한 시간의 종은 결코 울리지 않는다.”(위하여200-201)
3. 그러면 이 심오하고 난해한 개념 규정의 실천적 의의는 무엇인가? 알튀세르의 답변은 많은 독자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줄 듯하다. “지배관계를 갖는 구조는 불변하지만 그 속에서 역할들의 배역은 변화한다는 것이 실로 실천의 커다란 교훈이다. 즉, 주요모순이 부차모순으로 되고 부차모순이 주요모순의 자리를 취하며, 주요측면이 부차측면으로 되고 부차측면이 주요측면으로 되는 것이다.”(위하여365) 마오의 단순명료한 모순론에 무엇을 추가하기 위해 헤겔을 죽여가며 그토록 심오한 개념들을 늘어놓았단 말인가. ‘지배관계를 갖는 구조’의 불변성이 도대체 어떤 실천적 의미가 있단 말인가. 모순들의 중요성 정도 차이가 변함에 따라, 즉 주요모순과 부차모순들 사이의 중요성 격차가 감소함에 따라, 그 지배관계의 불변성이라는 것도 다소 무의미해질 수는 없는 것인가. 무엇보다 마오 모순론에서 우리는 ‘하나의’ 주요모순을 찾아내는 데에 전력을 다하면 부차모순들이 손쉽게 해결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마오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의존하기에는 우리의 당면 과제들이 실제로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좀 더 차분히 들여다보면 주요모순과 부차모순들 간의 본질-현상 관계에 대한 비판, 즉 구조화된 복잡성이라는 개념도 제반 사물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변증법적 상식의 변주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에서 본질과 현상은 일방적 규정관계 내지 표현관계가 아니며 현상의 위치에 있는 “형식은 본질에 대하여 본질 자체만큼이나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된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현상학24) 또한 헤겔 변증법의 단순성이라는 것도 실은 내재비판에 대한 알튀세르 식 악의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경제주의에 대한 비판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니지 않았던가? 그렇다. 물론 과잉결정론 없이도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는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논박당한지 오래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경제주의 비판은 현실사회주의 운동의 패배 이후 계급론이나 토대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환원주의로 낙인 찍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했다. 그리고 이는 반-노동자중심주의적 다원주의가 번창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최종심급에서는 경제가 결정적이라는 원론을 고수하지 않았는가? 그렇더라도 이 원론이 각 심급과 현상 전체에 스며들어 지배력을 발휘하는 경제 혹은 자본독재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아마 알튀세르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연구도 ‘경험주의 이데올로기’라고 경멸하면서, 다시 현상형태들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과 거리를 두고 심오한 개념들의 개발에 몰두해야 하지 않을까.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말고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부정적인 것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현상학36)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우리는 알튀세르의 악의적 반-헤겔주의에서도 모종의 교훈을 찾고자 하는 진지한 연구자들에게 존경을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그들로부터는 제국주의 관련 뜨거운 논쟁에서처럼 해방운동의 방향설정을 위해 중요한 인식과 자극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알튀세르는 헤겔 변증법의 주요 개념들인 부정의 부정, 지양, 양질전환, 소외 등을 한묶음으로 쓰레기 취급한다.(주5) 이런 악담에 우리가 주눅들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주요 개념들을 상투어로 타락시키지 않고 해방전쟁의 무기로 활용하기 위한 개념의 노동이다. (1부 끝)
(2023. 7. 14.)
주1) V. I. 레닌: [철학노트], 홍영두 역, 논장 1989, 178쪽.
주2) 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3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8, 1037쪽.
주3) L.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김진엽 역, 도서출판두레 1991, 43쪽. 이하 ‘읽기’로 약칭. 헤겔을 경험론적 이데올로기와 엮어서 비난하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는 셈이다. 헤겔의 관념변증법은 알튀세르의 유물변증법이 단순화하는 것과 달리, 실재와의 부단한 대결을 통해 전개되며, 이 점에서 ‘관념론적으로 거꾸로 선 유물론’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경험론적이기 때문이다.
주4) L.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354쪽 참조. 이하 ‘위하여’로 약칭.
주5) 들뢰즈가 자신의 차이 형이상학을 위해 [자본론]을 왜곡하려 끌어들인 ‘맑스와 헤겔의 근본적인 차이를 주장하는 주석가들’가운데 주동자가 바로 알튀세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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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주까지로 1부 연재를 마치고 충전을 위해 2달 정도 쉽니다.
https://napo.jinbo.net/v2/archives/9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