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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勒約 (1905년 (광무9년) 11월 17일), 바람 앞에 촛불이 된 大韓帝國의 운명, 우리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서, 이제 우리는 거대한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 나아갈 것입니다.
大韓帝國의 외교권을 되찾아올 마지막 기회가 제2차 萬國平和會議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습니다.
-------------------1907년 7월 5일, 헤이그 밀사와 <만국평화 회의보> 기자의 인터뷰 中-----------
윌리엄 스테드/만국평화회의보 기자: 당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상협 아나운서/헤이그밀사 이위종役: 저는 법과 정의를 위해 머나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당신은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보 기자죠?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윌리엄 스테드: 만국평화회의 대표들은 평화와 정의를 보호하기 위한 조약을 맺을 것입니다.
이위종: 그렇다면 법과 정의의 신이 있는 제단에 大韓帝國의 호소를 올려 주십시오! 1905년의 을사조약은 무효입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198번째 그날입니다. 좀 특별하게 짧은 연극으로 시작을 해봤는데, 당시 실제 진행된 인터뷰를 재구성해 본 거예요. 굉장히 강열하죠?
이윤석/방송인: 멋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협 아나운서죠? 밀사의 얼굴하고 되게 닮았어요.
최원정: 뒤 사진에서 튀어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요?
이윤석: 네, 2D에서 3D로 가는 느낌---관상이 독립투사 관상이에요.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어요. 이 헤이그에 파견된 밀사가 무엇을 했는지, 왜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갔는지 혹시 아세요?
이윤석: 마지막 대사가 “1905년에 을사늑약은 무효입니다.”
최원정: 그렇죠, 大韓帝國을 도와달라, Help me! 학교 다닐 때 배우지 않았습니까?
이익주: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잖아요 (乙巳勒約 1905년 11월 17일-일본이 大韓帝國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이 을사늑약은 大韓帝國의 외교권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제 무대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는 건데 바로 그것이 부당하다 일본에 의한 불법적인 조약이었다는 것을 바로 세계 각국 대표들이 모인 국제회의에서 이야기를 할려고 하는 거죠.
류근/시인: 그러고 보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쭉 들어오긴 했는데 국제적으로 萬國平和會議가 뭡니까?
박준형/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萬國平和會議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제창을 해서 개최가 되었던 국제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1차 萬國平和會議는 1899년에 열렸고 26개국이 참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2차 萬國平和會議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07년에 열리게 되었던 것인데요, 군비축소 라든가 평화유지를 위한 방책, 전쟁의 법규를 제정하기 위한 이런 일들에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大韓帝國이 국제적으로 안전한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자리였다라고 할 수가 있고 乙巳勒約도 무효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계기, 그래서 어떻게 보면 大韓帝國의 마지막 카드, 강력한 마지막 기회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윤석: 그런데 萬國平和會議가 요즘으로치면 유엔 같은 것이겠지요.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연합이니까 얼마전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BTS,
최원정: 방탄소년단,
이윤석: 유엔(2018년 9월 25일)에서 연설을 해가지고 엄청났어요. 어떻게 보면은 밀사들이 元祖일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大韓帝國의 방탄특사단!
이윤석: 그나저나 류 시인님이 BTS를 얘기하고 있는데 알아듣고 계신가요?
류근: 대한민국에서 BTS 멤버들의 이름이나 몇 명인가는 몰라도 헤이그 밀사가 몇 명이고 누군가하는 정도는 압니다!
최원정: 누구세요?
류근: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정도는 알아야죠.
이윤석: 그러면은 그분들의 성함과 저기 사진 속의 얼굴을 일대일로 매치를 할 수 있는지요? 그게 중요합니다.
류근: 근데 비밀이예요. 밀사인데---,
최원정: 신분이 노출되면 안되는거지요.
이윤석: 그렇습니까? 무려 111년이 지났는데 이젠 밝혀도 되는데---, 이제는 말 할 수 있어요.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만국평화회의보>에 실린 헤이그 밀사단 사진--------------
먼저 젊은 분이요. 만으로 20세 이위종, 이상설과 이준 두 분이 남았는데 두분이 형체처럼 보이는데 심 작가님이 혹시 정확히 알고 있는지 제가 한번 테스트 해보겠습니다. 알고 있나 모르나?
심용환/역사작가: 몰라서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가운데 계신 분이 이상설 선생님이십니다. 당시 나이 만37세, 나이를 얘기하니까 느낌이 새롭긴 한데, 前의정부 참찬을 역임하셨고 쉽게 말하면 고위 관료였죠. 그러니까 乙巳勒約이 맺어지는 과정들에 대해서 지근거리에서 살펴봤던 위치라고 할 수 있구요. 마지막에 이준 열사 라고 많이 부르죠. 당시 만48세구요 대한제국 1호 검사, 이력이 좀 독특하죠.
이윤석: 앞으로 계속 책 써도 되겠어요. 정확히 맞춰주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수고하셨고---, 이제 자리에 앉아주세요.
심용환: 이용당한 느낌인데---,
이윤석: 헷갈릴 수 있거든요. 지금 부터는 제가 소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위종, 조선에서 양반家의 자제로 태어났고요 미국으로 건너가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류근: 청소년기에 조기유학을 보냈나요?
이윤석: 그런 건 아니고, 어떻게 된 거죠?
심용환: 이위종의 아버지가 중요한데요. 아버지가 이범진이라는 주미공사였구요. 아관파천 얘길할적에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던 고종과 명성황후의 최측근이었던 사람인데 아버지가 주미공사로 해외에서 활동하게 되니까 자연히 아들도 따라 다니면서 문물을 배우게 된 거죠.
최원정: 저 사진 보세요. 유럽 귀족같애,
이윤석: 서구문명이나 문화, 예의범절 이런 것들이 어렸을 적부터 몸에 많이 베어있을 거예요. 이위종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입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로 옮겨간 뒤에 파리근교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합니다(15세). 자, 놀랍게도 창립자가 나폴레옹입니다. 그리고 졸업생 중에서 유명인이 샤를 드골(프랑스 제18대 대통령)은 동창이에요. 공항도 있어요, 드골 공항.
최원정: 우리가 아는 유명 프랑스인이 다 나오네요.
이익주: 이위종은 정말 프랑스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다닙니다. 여길 다니면서 프랑스 상류사회의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를 하게 돼죠. 그러면서 근대사상을 몸소 배우게 되는 이런 좋은 기회를 갖게 되는데 게다가 졸업한 뒤에는 마침 그때 아버지 이범진이 주러시아 공사로 가 있어요. 그래서 러시아로 이동을 해서 아버지의 외교를 돕게 됩니다.
류근: 진짜 그건 요즘 말로 하면 진정한 글로벌 꿈나무네요. 진짜 어릴 때부터 현지에서 배웠으면 영어에 불어에 러시아어에 유창했겠어요.
이익주: 실제로 이위종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세나라 언어에 능통했는데요. 그 당시 이런 국제회의를 할 때는 프랑스어가 공식적인 언어로 사용이 됐는데 이위종이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프랑스어까지 하게 되고 이것이 아버지 외교활동을 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1905년에 乙巳勒約이 체결되면서 외국에 나가 있던 大韓帝國의 외교관들을 전부 소환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이범진 이위종 부자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계속 러시아에 머물면서 외교활동을 합니다. 그때 자칭 大韓帝國 투사예요.
류근: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외교능력은 기본이고 아버지로부터 뜨거운 祖國愛며 愛國心을 물려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윤석: 祖國愛만 뜨거웠던 게 아니라 연애 스토리도 아주 뜨겁습니다. 이위종이 1905년 11월에 결혼을 했는데 신부의 이름이 엘리자베타 발레리야노 브나 놀켄,
최원정: 외국인과 결혼을 했군요.
이윤석: 그렇습니다. 스웨덴 외교관의 후손인 러시아 여성 이에요.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무려 개종까지 합니다. 러시아 정교로 그러니까 인종, 종교, 국적을 뛰어넘는 사랑의 주인공이죠. 그런데 이렇게 뜨거운 신혼의 단꿈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헤이그로 간 거예요.
류근: 순정한 청년입니다.
최원정: 그것도 사랑을 뒤로 하고 나라를 위해서 떠난 거잖아요.
류근: 祖國의 부름에 응답한 거죠. 응답하라 1907.
최원정: 언어도 그렇고 학창시절, 국제결혼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국제사회를 온 몸으로 받아들였는데---,
이윤석: 밀사가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맞춤형 인재다.
류근: 밀사적 체질
이윤석: 그렇습니다. 다음은 이상설, 어릴 적 이름은 복남이 입니다. 어렸을 적에 모습이에요. 이상익 이상설 형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14살에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한성으로 올라옵니다. 소년가장인데 그런데 이분이 신동입니다. 신학문과 구학문을 아우르는 천재중에 천재예요.
박준형: 이상설은 1894년에 조선에 마지막 과거(24세)였는데 그때 급제를 해서 관직에 진출하게 됩니다. 2년 뒤 성균관 관장으로 임명되고 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한 여러가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수학을 정리한 책으로 算術新書 라든가 數理 라고 하는 책들이 있는데 이런 책을 바로 저술한 사람이 바로 이상설 이었던 거죠.
류근: 문과 이과 통합 수재예요.
최원정: 융합형 인간,
심용환: 이상설의 삶을 보고 있으면 행동파 라고 얘기해도 좋을 정도예요. 乙巳條約이 체결된 직후에 상소를 무려 다섯 차례를 올립니다. 그 중에 일부 내용을 보면,
“나라가 망할 지경이니 정녕 사직을 따라 죽을 결심으로 순사의 뜻을 세우소서” 신의 말이 그르다 하시거든 신을 베어서 적들에게 주시고 (苦以臣 言爲非須斬 臣而以謝諸賊),
신의 말이 옳다 하시거든 적들을 베어서 국민들에게 주십시오(以臣言爲是 須斬諸賊而以謝國民)
류근: 왕한테 사직을 따라 죽으라고? 기개가 강성이네요.
박준형: 乙巳勒約 체결 이후에는 1906년에 들어서서 이상설은 북간도 지역, 지금의 용정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망명을 갑니다. 여기에 서전서숙(瑞甸書塾) 이라고 하는 학교를 건설하게 됩니다. (瑞甸書塾-북간도 용정에 설립 근대학문을 가르치는 신학문 민족교육기관), 이 학교에서는 역사 뿐만 아니라 수학, 지리, 국제법 이런 근대학문들을 가르쳤는데 국외지역에서의 항일민족교육의 효시라고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들으면 들을수록 존경심이 절로 막 생깁니다.
이윤석: 마음껏 존경하셔도 됩니다. 마지막 大韓帝國의 1호검사 이준입니다. 1896년(37세) 한성재판소의 검사보에 임명된 분입니다. 그런데 조신들의 불법과 비행을 조사하고 파헤치다가 취임 1개월만에 면직이 됩니다. 그래서 일본 망명길에 올라요. 2년간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에 귀국 1906년 대한제국의 사법기관인 평리원에 검사로 임명이 돼서 다시 복직이 되는데 복직되고 나서 어떤 사건이 또 있습니다.
이익주: 10년만에 검사가 다시 돼서 1년뒤에 자기의 상관, 형사국장이라는 자리인데 여기 있는 사람을 처벌해 달라고 탄원을 해요. 이준이 을사늑약을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서 지금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사면시킬려고 한 거예요. 그랬더니 평리원의 상급자들이 전부 반대를 해서 이준의 주장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이준이 형사국장을 고소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거죠.
최원정: 정말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진정한 검사를 보고 계십니다. 당시 乙巳勒約에 대항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말이죠.
류근: 그런데 진짜 한분 한분 살펴 보니까 다들 쟁쟁하신 분들이에요. 정말 大韓帝國을 대표하는 인재들만 선발한 것이 국가대표가 헤이그 밀사였던 거잖아요.
최원정: 가슴이 설랠정도의 이건 거의 특사 드림팀! 밀사 어벤저스!
이윤석: 그러면 이제 마지막 정리를 합니다. 여기는 만 20세에 열혈남아 이위종 Young Blood 해서 B,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린 기개남아 이상설 Tough Guy, 그리고 강단-강직-강골 이준 Strong Spirit 헤이그의 BTS 다.
일동: 박수
최원정: 어떤 수식어를 부쳐도 아깝지 않은 대단한 분들이십니다. 밀사들이 한성에서 헤이그까지 먼 길을 어떻게 가셨는지 알아볼까요?
박준형: 이번에는 제가 준비했습니다. 이게 지도인데요. 목적지가 네덜란드 헤이그인데 지금으로 네덜란드까지 가려면 비행기로 약1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이때 헤이그 특사는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세명을 따로 준비한 건 세명의 특사가 함께 네덜란드로 이동을 한게 아니기 때문에 따로 따로 준비를 했습니다. 첫번째로 서울에서 출발한 사람은 이준 한 사람이었습니다 (1907년 4월 22일), 이준이 서울에서 출발을 해서 부산 (4월 23일)으로 갔다가 부산에서 일본에 들려서 블라디보스토크(4월 26일)입니다. 이상설은 아까 1906년에 북간도 지역으로 망명을 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북간도 지역에 있었던 이상설이 합류(1907년 4월 26일)를 하게 됩니다. 이준과 이상설이 두 사람이 같이 네덜란드로 가게 되는데 1904년에 완공이 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만주, 그리고 시베리아를 거쳐서 상트페테르부르크(1907년 6월 4일)에 도착합니다. 러시아 공사로 있었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요. 여기서 세명이 만나서 이들이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류근: 지구를 정말 반바퀴 돌았네요. 시베리아 회단 열차가 요즘 기준으로 6박7일이 걸리는 장기노선입니다. 그리고 7번이나 시간대가 바뀌는 최장기 기찻길입니다. 얼마나 걸렸습니까?
박준형: 이준이 서울에서 출발이 4월 20일인데요. 그리고 나서 네덜란드에 도착한 날이 6월 20일이니까 꼬박 두달이 걸렸습니다.
최원정: 두달을 거대한 대륙을 지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결연한 의지도 다졌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인지라 무서운 생각도 들고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애요.
류근: 그분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 앞에서 정말 경건한 마음, 역사의식, 책임감을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이윤석: 그래서 한꺼번에 움직이지 않고 이렇게 한 명씩 한 명씩 합류한 것을 보면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한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밀사선발도 그렇고 이동과정도 그렇고 상당히 치밀한 계획하에 움직인 것이 맞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류근: 그런데 말이죠. 이분들이 고종이 보낸 밀사가 아니라는 카더라가 있어요.
최원정: 황제의 밀사인데?
류근: 고종이 공식적으로 그들을 내가 보낸 특사다 라고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이윤석: 그게 바로 밀사죠! 대놓고 보내면 밀사가 아니죠.
류근: 아니, 밀사라는 것 자체가 카더라 잖아요. 고종을 알현하고 친서를 받은 특사가 누구냐 하는 것 부터가 지금 설이 분분해요. 그래서 이상설이 망명전에 한성에서 고종을 알현 했고 망명 후에 은밀하게 고종이 친서와 신임장을 받았다는 설이 있고, 그때 한국에 이준이 유일하게 있었기 때문에 이준이 문서를 챙겨서 떠났다 라는 설이 있고 그래요. 지금 설이 분분합니다.
이윤석: 그런데 그것은 적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고 두분 모두가 받았을 수도 있는 거고, 제가 이 세분이 밀사가 맞다 카더라는 증거를 한번 대볼께요. 뭐냐면 일단 이 세명의 여비만 해도 어마어마했을 거예요. 기차값도 굉장히 바쌌을 것이고 무려 한 계절 동안의 식비도 필요했을 것이고 숙박비도 더해서 활동비도 굉장히 많이 들었을 것이고 이 엄청난 돈을 과연 누가 댔겠느냐 이 시기에는 고종 말고는 댈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저는 들어요.
최원정: 저도 이윤석씨의 카더라에 한표!
류근: 지금 때가 어느 때덴 돈이 꼭 왕한테서만 나온다는 봉건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자금이 관건이긴 하네 자금 출처가 어떻게 되죠?
이익주: 사실 이게 밝혀지지를 않았습니다. 고종의 비자금이라는게 가장 유력한데 확인이 되지를않았어요. 만일 고종의 비자금이라면 이윤석씨 카더라가 맞는 것이고 그런데 또 한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상동교회 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尙洞敎會-1901년에 설립된 교회 국권회복운동 비밀본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짐). 이준이 이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독교 청년회 회장이었어요. 그래서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이런 주권회복을 위한 운동자금이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상동교회가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면 류근 시인의 카더라가 맞게 되는 거죠.
류근: 그러니까 아까 이범진 이위종 부자가 본국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라고 했잖아요. 그런 것처럼 혹시 황제의 밀명도 없이 자체 활동을 한 게 아닐까요.
최원정: 그게 가능한 걸까요?
이익주: 비용은 그런데 고종이 이 세 사람을 특사로 임명했다는 근거가 있습니다. 제가 친서를 보요 드리겠습니다.
이윤석: 역시 대단한 교수 카더라~
류근: 그렇긴 카더라~
이익주: 이렇게 보시면 대황제와 수결이 있고 여기 옥쇄도 찍혀 있어요. 그래서 내용은 인제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특사로 임명한다는 이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임명했다고 하는 쪽으로 기우는게 문제가 있어요. 이 문서가 원본이 없다는 거예요.
최원정: 이건 뭔데요?
이익주: 이건 사본이에요.
이윤석: 사본이 있다는 건 원본이 어디엔가는 있다는 거 아녜요.
이익주: 사본 날자가 4월 20일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4월 20일 날 친서를 줬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가지가 좀 미스터리가 있긴 한데 은밀하게 진행된 그런 정황을 좀 보여 주는게 아닌가, 방증 정도는 있다고 볼 수 있죠.
최원정: 이것에 원본이 나오게 되면 이런 논란이 깨끗하게 해결이 되는 거잖아요. 원본 갖고 계신분 있으면 연락 주세요~~
류근: 진품명품에서 찾아봐요
이윤석: 이사 가거나 그럴 때 한번 뒤져 봐 주세요.
최원정: 뭔지 모르고 갖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아무리 은밀하게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일본이 워낙 삼엄하게 경계하고 감시하고 했을텐데 눈치를 못챘을까요? 저는 그게 가장 궁금한 부분인데---,
박준형: 大韓帝國이 萬國平和會議가 열리는 것을 계기로 해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 라는 사실 자체는 이미 일찍부터 일본이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종이 특사로 임명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아니라 뜻밖에 인물, 또 다른 인물을 오히려 더 주목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류근: 일본의 시선을 돌릴만한 플랜B가 또 있었다는 거예요. 연막작전 같은 거---,
____________________萬國平和會議를 앞둔 일본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외무성 열강들이 주고 받은 수많은 기밀문서들은 의외의 인물을 주시하고 있다. 大韓帝國에 머무르며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미국인 헐버트, 고종은 헐버트에게 은밀한 임무를 맡겼다. 大韓帝國을 떠난 그는 여러 열강을 들러 헤이그로 향하며 일본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는다. 헐버트는 훗날 제4의 헤이그 특사라 불리는 인물이다.
최원정: 이것이 당시 일본이 헐버트를 감시하면서 기록했던 글들을 모아둔 거예요. 다 헐버트와 관련된 문서들인데 어떤 내용들인지 읽어 드리겠습니다------------1907년 5월 16일, 헐버트가 가족들과 함께 서울을 출발, 일단 일본으로 온 뒤 다시 시베리아 철도로 미국으로 갈 것이라고 함. 평화회의를 이용, 어떻게든 한국을 위해 일하려고 한다는 풍설이 있음. 도착여부 및 행동들에 주의를 기울인 뒤 그에 알맞은 조치가 있기를 바람. 자세한 사정은 우편으로 이게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방대한 분량의 이런 보고서를 작성해서 일본에서 보내온 거예요.
류근: 요즘으로 말하면 민간인 사찰 이네요.
최원정: 민간인 사찰이죠. 어마 어마 합니다.
박준형: 그 헐버트(Homer Hullbert, 1863~1949)는 미국인 선교사인데요. 1886년에 우리나라에 최초의 근대식 관리학교가 할 수 있는 육영공원에 초빙되어 온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국을 위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하게 됩니다. 1894년 이후에 일본이 경복궁을 연이어서 침입을 했고요. 그리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었는데 그로 인해서 고종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니까 헐버트가 이제 고종의 불침번을 자처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고종의 신임을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거죠. 고종의 비밀외교를 수행하는 특사 밀사로서의 여러가지 활약을 하게 되었던 거죠.
이익주: 헐버트는 역시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로 가요. 그냥 간 게 아니라 가는 도중에 여러나라를 돌면서 그 나라의 언론 관계자들과 사전에 대한제국의 특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인터뷰 일정을 잡아 주기도 하고 또 고종의 친서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런 9개 나라의 국가 원수들에게 돌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본으로서는 정말 헐버트의 이런 존재와 활동이 굉장히 신경 쓰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어요.
류근: 대외적인 임무는 친서 전달일지 몰라도 혹시 또 다른 임무가 헤이그 특사를 보호하는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최원정: 그러니까 교란작전을 펼친 거잖아요.
이익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1907년) 6월 10일에 개회가 돼요. 그런데 일본은 대표단을 보냈겠죠. 이 전권위원단의 첫번째 목표가 대한제국의 대표들이 만국평화회의에서 그 나라를 대표하지 못하도록 하게 해라 다시 얘기해서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일본대표단의 첫번째 임무였다는 거죠. 그런데 헤이그 밀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해서 바로 활동을 개시를 하는데 바로 파악을 못해요. 이 밀사들이 호텔에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외국 사람들을 상대로 활동을 하는 그때에 파악을 하고 이때부터 긴박하게 움직이는 거죠.
최원정: 바로 그 교란작전이 성공을 거둔 거네요.
박준형: 일본 전권위원단이 취한 조치들을 살펴 보면 각국 대표단들을 만나서 대한제국에서 파견된 헤이그 밀사들이 내는 의견들을 수용해 주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들을 미리 다 해놓구요.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같이 동행해서 온 일본기자를 헤이그 특사를 방문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취재라기 보다는 감시 목적에서 이런 기자를 부쳐 놓기도 했고요.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당시 일본 전권위원단이 얼마나 이런 방해공작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가를 보여주는 관련된 보고서가 있습니다. 수행원들 중에서 두 명이 너무나 심하게 일해서 과로사로 죽었다 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류근: 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이런 상상까지 하게 돼요. 일본이 워낙 집요하고 악랄하잖아요. 그래서 고종이 대규모 특사단을 파견을 했는데 중도에 일본 공작에 의해서 죽거나 실패하거나 해가지고---,
최원정: 중간에 중간 지점에서 여관에서 암살당하고 회유 당해서 일본측에 붙고 마지막 남은 네명이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거에요.
류근: 최후의 네명을,
이익주: 정말 詩人이세요.
심용환: 그러면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활동일지를 보면서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살펴 보겠습니다.
6월 25일: 헤이그 도착
6월 27일: 일본제외, 각국에 탄원서 발송, 萬國平和會議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서 大韓帝國 문제를 다뤄줄 것을 요청합니다-거절.
6월 29일: 의장 넬리도프 면담 요청-거절
6월 30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대표를 찾아가서 사실상 만날 수 있는 대표들을 다 찾아가서 지원을 호소합니다-거절. 결론은 어떻게 되느냐 거절입니다. 이 정도는 최소한으로 들어줄 것 같 은데 다 거절입니다.
류근: 거절한 공식적인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뭡니까?
이익주: 이때 거절한 공식적인 이유는 참가국 명단에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회의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 불청객이다 라는 이유인데 이것은 거짓입니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는 정말 차고도 넘치는데요. 오래된 낡은 서류인데요. 여기보면 그 회의에 초대받은 나라들의 명단이 이렇게 있습니다.-제2차 萬國平和會議 초청국가 명단(알파벳순)-1906년 3월 21일, 12번째로 Coree 大韓帝國, 大韓帝國이 초대를 받은 거지요. 그런데 다음 자료를 보시면 이것이 그날 회의장의 자리배치도 입니다.-회의식장 나라별 좌석배치도 1907년 제2차 萬國平和會議 안내장 中. 여기에 나라 이름이 쭉 써있는데 ABC순이예요. 그래서 가보면 Coree가 있을 그 자리에 보면은 Colombie가 있고, 그 다음에는, Cuba 로 넘어가니까, 여기에서는 빠진 거죠.
류근: 초청국가 명단에는 있었는데 좌석배치도에는 없고 이게 뭐예요?
이윤석: 주최측의 실수나 무슨 착오 그런건 아닐까요?
류근: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박준형: 본래 제2차 萬國平和會議는 1907년이 아니라 1906년에 개최될 예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1년뒤로 연기가 되었던 것인데, 바로 그 사이에 러시아의 태도가 변하고 있었다 라는 거죠. 러시아가 露日戰爭 직후 시기만 하더라도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도 계속 유지해 나가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 이후에 1905년 乙巳勒約으로 인해서 일본에 의해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러시아 정부자체도 사실은 이전까지는 적대시해왔던 영국이나 일본에 대해서 이제 협조관계로 외교정책을 전환시켜 버리게 됩니다.
이익주: 헤이그 萬國平和會議가 열리고 있는 시기에 다른 쪽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이 협상을 벌입니다. 이 비밀협약 중에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권리를 인정해주고 그 대신 일본은 러시아의 외몽골에 대한 특수이익을 보장한다 라는 교환조건이 있습니다. 아주 제대로 배신을 한 것이죠.
최원정: 그러면 대한제국은 러시아도 버리고, 미국도 버리고, 결국은 회의에 참석 못하는 거예요. 의자를 끌고 들어가서 앉으면 안돼요?
박준형: 결과적으로는 참석을 못했죠.
류근: 정말 좌절이네요. 그 때 헤이그에 갔던 나라들 중에서 가장 간절하게 평화를 원했던 나라가 어디었을까요? 명색이 萬國平和會議인데 진정한 평화가 필요한 나라는 참석치 못하고 평화를 가장한 채 자기네들 끼리 파이 크기를 확인하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목숨을 걸고 뛰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게 정말 괴롭습니다.
이윤석: 그 오랜 시간에 그 먼 거리를 갔는데 만국평화회의에 大韓帝國이 낄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는게 너무나 안타깝고 ---,
심용환: 회의장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중요한 성과를 맺게 되는 데요. 아까 우리가 헐버트 이야기를 했는데 헐버트가 여러 곳에서 사전 교섭을 하는 과정 중에 영국의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스테드 라는 사람과 사전에 접촉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그 당시에 萬國平和會議報 편집장을 하던 사람이었고요. 한국대표단의 호소문도 자세하게 언론을 통해서 알려주게 되고 한국 대표들을 위한 기자클럽 연설회를 주선해 줍니다. 그때 있었던 이위종의 인터뷰 한 토막이 굉장히 강렬하게 인상적인데 한번 들어보죠.
--------1907년 7월 5일, 이위종과 <만국평화회의보> 기자의 인터뷰 中--------이상협 아나운서 [헤이그밀사 이위종役]
윌리엄 스테드: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까?
이위종: 왜 대한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은 유령일 뿐입니다.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기독교란 한낱 위선에 불과합니다. 왜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 대포가 유일한 법이고,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없다고요! 우리는 구릉 하나 하나가 천연 요새인 산악국가입니다. 극동의 스위스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일동: 아, 멋 있습니다. 기립 박수, 잘 했습니다!
최원정: 이위종의 명연설이네요. 이런 인터뷰를 넘어서, 와 멋 있다!
류근: 진짜 경건함이 느껴지네요. 약관 스무살에 어떻게 저런 지혜로운 연설이 가능할지 존경스럽습니다.
최원정: 도움을 구걸하는게 아니라 진짜 꾸짖으면서 우리 입장을 당당하게 밝히는 거잖아요.
심용환: 인상적인게 밀사들과 유일하게 대화를 나눴던 일본 기자가 있어요. 이 사람이 다카이시 신고로 인데, 본인이 일본 입장으로 일본편을 들어주긴 하지만 회고록을 보면 그들 세명은 진실로 애국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 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보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서 임무를 떠 안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런 모습이 느껴지는 거지요.
박준형: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萬國平和會議에서 한국이 의제로서 채택이 되지 못했죠. 그런데 특사단의 실패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萬國平和會議 자체에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가 결국에는 문명국들의 공멸을 부른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 퍼즐을 완성시켜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1870년 이후로 독일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고립 목적을 위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간에 三帝同盟을 맺고 그리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간에 三國同盟을 체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90년에 들어와서 독일의 빌헬름 2세 라고 하는 새로운 황제는 러시아의 발칸반도로의 남하, 야심을 의심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동맹을 갱신하는 걸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사이에 프랑스는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되고 그리고 또 더 나아가서 영국과도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萬國平和會議가 열렸던 이 시기에 러시아가 영국과도 손을 잡게 되면서 결국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라고 하는 삼국협상 트라이앵글이 완성이 되는 거죠. 三國同盟과 三國協商이라고 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대립 구도, 그게 바로 여기에서 완성이 되는 거고 그게 결국은 유럽을 재앙으로 몰고 가는 역활을 했습니다.
류근: 진짜 박준형의 먼나라 이웃나라 였습니다.
최원정: 그 누구의 평화도 지켜주지 못한 아무 의미없는 회의였다는 얘기인 거잖아요.
류근: 생각을 해보면 萬國平和會議 실체가 약소국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그러면서도 또 한쪽에서는 평화와 정의의 깃발을 펄럭이면서 강대국들, 그들만의 리그였던 거죠.
심용환: 그래서 좀 준비한게 있습니다. 당시 언론들이 만국평화회의를 어떻게 봤는가 쉽게 말하면 신문에 실려있는 풍자만화 <萬國平和會議報> 1면-1907년 7월 16일-
류근: 한 눈에 봐도 여수님께서---,
이윤석: 예수님 맞는거 같애요.
류근: 보니까 예수님이 거절당하고 있어요.
이윤석: 의장의 인사가 너무 심하게 90도 국제조직 쪽으로 하고 있어요, 혹시 그런게 아닐까요 예수님이 가는 방향은 천국이니까 萬國平和會議 세상은 지옥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심용환: 이게 실제로 글이 있는데요, 친구여, 난 세계 평화의 대표자다. 넬리도프 의장이 서서 막고 있는 거죠.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해군 또는 육군 대표자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윤석: 무기를 다루는 사람만 들어 와라. 전쟁을 할 수 있는 사람만 들어와라 이러네요.
심용환: 이번 그림은 총 4컷입니다. 첫번째 새장 그림-이 남자가 접견을 거절했었던 의장 넬리도프입니다. 넬리도프 의장: “불쌍한 짐승, 이렇게 갇혀 있다니.”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장면이죠. 두번째 새장 그림-“기다려, 내가 풀어줄게”, 갇혀 있는 비들기를 풀어 줄려고 하는 모습이죠. 그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추론해 보죠.
이윤석: 새장에 손이 낀 넬리도프 의장이 손이 안빠져 가지고 비들기와 굶어 죽는다? 비들기는 살고 어떻게 보면 의장 조차도 강력한 서구 열강들에 놀아나고 있다는 의미에서 거대한 새장 속에 갇혀 있고 더 큰 손이 목을 쥐려고 하는?,---의장의 목을 쥐려고 하는?,
류근: 그게 이상한게요. 지금 저 평화롭게 갇혀 있는 비들기가 막상 손에 잡혔을 때 화들짝 놀라고 있거든요.
심용환: 세번째 새장 그림, 네번째 새장 그림, 겉 종이를 떼어 보겠습니다.
최원정: (세번째 새장그림) 결국 비들기를 잡아서, (네번째 새장그림) 요리사의 손에 넘어가 잡아먹히게, 요리사가 강대국인데 강대국한테 쥐어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잡아 먹힌 비들기 신세 대한제국이네요!
이윤석: 이 시대의 열강들이 내가 도와줄게 하고 내민 손은 결국은 목을 쥘려고 하는 손이다.
---------------------------1907년 7월 14일, 나의 동지 이준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직전 그는 갑자기 일어나 마지막으로 외쳤습니다. “신이여, 조국을 도와 주소서. 일본은 대한제국을 파괴하는데 온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검사 이준은 이렇게 머나먼 타국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최원정: 아휴, 정말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이준 열사라고 부르는게, 저렇게 생을 달리 하셨기 때문인데, 사유가 도대체 뭐예요?
이윤석: 독살설이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할복설도,
심용환: 여기 사망진단서가 있는데 논란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게 사망진단서에 사인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일본 외교관이 이준 얼굴의 종기를 열어서 본 결과 丹毒이란 것에 걸려서 사망했다 라고 보고를 했다고 하는데, (丹毒-피부의 상처로 세균이 들어가 열이 높아지고 붓기, 동통을 일으키는 병), 이걸로 사람이 죽을 수 있을까 하는 논란이 시작될 수 밖에 없고 국내에선 그가 할복자살을 했다 라는 보도들이 많아서(황성신문-1907년 7월 19일), 논란이 많은 죽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류근: 할복이라고 많이 들었는데 한국인은 절대로 할복하지 않죠. 한국인에게는 할복의 유전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민영환 같은 분도 목을 찔러서 자결을 하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혹시 홧병이 아니었을까. 憤死 아니었을까!
이익주: 맞아요. 우리가 이준 열사가 자결했다고 알고 있는데 실은 근거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 사망진단서도 그렇고 마침 그때 이준 열사가 통분해서 단식을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종기라고 하는게 단식, 또 분함을 참지 못하는 상황, 이것과 겹쳐질 때 좀 치명상이 될 수도 있어서 아마 그런 상황 속에서 홧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보는 것이 무난한 설명이 아닐까 하는데,
최원정: 특사활동이 발각되고 실패하고 그 이후의 후폭풍이 굉장히 거셌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이 됐나요?
심용환: 냉정하게 여섯글자로 정리가 됩니다. 고종강제퇴위.
류근: 이 사건 때문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됐단 말이죠?
이익주: 그렇습니다. 고종의 퇴위를 불러온 대사건이죠. 그런데 이 사건은 특사들에게도 큰 불행이 됩니다. 밀사로 파견되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것에 대해서 일본이 고종을 퇴위 시키고 순종을 압박해서 궐석재판을 합니다. 그래서 특사들에게 관인사칭죄 (官人詐稱罪)를 적용해서 이상설에게는 교수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각각 종신형을 언도합니다.
류근: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아버지 고종에게는 특사였는데 아들 순종에게는 죄인이 되는 비극입니다.
박준형: 그래서 고국에는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그 이후 헤이그를 떠나서 프랑스나 영국, 독일과 같은 다른 나라들을 계속 돌아다니면서 순방외교를 계속 전개해 나갑니다. 이상설 같은 경우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한인들의 이주를 시킬 수 있는 땅을 구입을 해서 韓興洞이라는 마을을 만듭니다. 韓은 한국할 때 뜻이고 興은 흥하라할 때 흥입니다. 韓興洞=한국민족의 부흥이라고 할까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라고 할 수 있구요. 결국 그 이후에는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요청하면서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여러가지 일들을 활발히 하면서 지내다가 1917년에 시베리아에서 사망을 합니다.
류근: 이상설 선생의 유언을 한번 들어보시죠.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동지들은 합세해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올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 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마라”
돌아오지 못한 밀사의 유언입니다.
심용환: 그런데 이위종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최원정: 그때 갓 결혼했었잖아요. 다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심용환: 여기 한통의 이력서 사본을 입수한게 있습니다. 1918년부터 러시아 공산당 볼세비키 당원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이, 그가 러시아 블라디미르 군사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기록상 확인 할 수 있고요. 2년간 소위보로 복무하고 (하급장교 정도), 러시아 군대에 복무했다는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다음에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게 되잖아요. 혁명직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게 되는데 그때 일설에 따르면 황제의 군대인 제정 러시아군 장교에서 혁명군인 소비에트군 사회주의자로 전향을 해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최원정: 러시아의 붉은 군대의 소속으로요?
류근: 러시아 내전이라는게 대한제국을 배신했던 니콜라이 2세를 폐위시킨 전쟁이지요. 있을법한 일이 아닌가요?
최원정: 신의를 저버린 니콜라이 2세 너를 처단하겠다 라는 마음으로 지금 그만의 어떤 복수전을---,
류근: 우리 지금 너무 부끄럽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지금 사진 한장 세분 헤이그 밀사단 사진만 기억했을뿐, 겨우 아는게 헤이그에서의 실패, 이준 열사의 죽음, 이런 정도만 알고 있는데, 다 따져 보니까 이게 정말 존경스러운 여정이다.
최원정: 사실 이분들은 교육도 많이 받으시고 입신과 평안을 위해서 얼마든지 상류층의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한 분들이 아닌가요? 이게 과연 헤이그 특사가 실패였는지 성공이었는지, 이런 평가를 우리가 내리는 것도 미안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박준형: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이라고 하는 목적달성을 못한 것에 대해서는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실패의 역사는 오히려 성공의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 감춰진 진실 가능성을 말해주기 때문에 실패한 역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윤석: 역사의 시각에서 볼 때는 1907년에서 2018년으로 밀사를 보냈다 라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애서 어떻게 보면 111년 만에 딱 제 시간에 밀사분들이 도착을 오늘 잘 했고 우리가 잘 만났고 다만 그들의 어떤 메시지 라든지 그분들이 했던 영웅적인 업적 같은 것을 기억하는 일만 남았다. 성공이었다. 이렇게 상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최원정: 111면만에 다시 만났다 라고 하니까 전 지금 굉장히 가슴이 뭉쿨해져요.
류근: 역사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하죠. 역사에 지고 삶에 이기는 인간, 삶에 지고 역사에 이기는 인간, 고군분투하던 헤이그 밀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들리지 않습니까.
이익주: 세분의 특사가 정말 헤이그에서 모든 강대국이 불편해 하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 大韓帝國이 당당하게 할 이야기를 한 거죠. 乙巳勒約의 불법성-일본의 침략상 이런 것을 전세계에 알렸고 이들이 실패를 하면서 萬國平和會議의 기만성이 스스로 폭로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 더불어 帝國主義 국가들의 침략성을 또 폭로를 한 거죠. 만일 이런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가 너무 허전해 지거든요. 그래서 역사의 성공이 되는 거죠.
최원정: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떠났던 세분의 헤이그 특사 오늘 111년만에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 39화, “3인의 헤이그 특사”에서 정리).
① 大韓帝國 고종은 1905년 일본에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겼다. 1907년에 제2차 萬國平和會議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다. 요즘으로 치면 국제연합 같은 회의, 여기서 大韓帝國은 국제적으로 안전한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乙巳勒約을 무효화시켜 나라의 외교권을 회복할려고 헤이그 밀사 3인을 파견한다. 3인은 이위종, 이상설, 이준이다.
② 이위종은 당시 만20세였고 조선의 양반家의 자제로 태어났고 주미공사였던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러시아로 가서 주러시아 공사였던 아버지를 도왔다. 그는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유창하였다.
③ 이상설은 당시 만37세였고 前의정부참찬 고위관료였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조실부모했고 14살에 신동, 천재중에 천재, 1894년 24세에 과거에 급제 관직, 2년뒤 성균관 관장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수학인 算術新書와 數理 저술. 을사늑약 체결후 상소를 다섯번이나 올린다. 고종에게 사직을 따라 죽으라고, 1906년에 북간도로 망명해서 학교를 세우고 근대학문을 가르치다.
④ 이준은 당시 만48세로 大韓帝國 1호검사였다. 1896년(37세)에 한성재판부의 검사보로, 불법과 비행을 파헤치다 1개월만에 면직, 일본망명 2년간 법학을 공부후 귀국, 1906년에 대한제국 평리원 검사, 을사늑약을 살해하려다 형을 사는 사람들을 사면시킬려고 형사국장 고소하였으나 상급자들이 모두 반대.
⑤ 이준은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 23일 부산에서 일본을 거쳐서 4월 26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1906년에 북간도로 망명한 이상설을 만나서 합류,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6월 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 이위종을 만나서 세명이 6월 20일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 꼬박 두달이 걸리는 여정,
⑥ 헤이그 밀사의 호소에 귀 기우릴 강대국은 없었다. 淸나라는 淸日戰爭의 패배로 한반도에서 철수하였고, 미국은 가쓰라-태프트협정에 따라 大韓帝國을 일본에 위임하였고,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과 제1차 英日同盟을 체결하였고, 러시아는 露日戰爭의 패배로 일본이 大韓帝國을 차지하는 걸 인정하였다. 헤이그에서 大韓帝國을 도와줄 강대국은 하나도 없었다.
⑦ 밀사단 세명은 6월 25일: 헤이그 도착, 6월 27일: 일본제외, 각국에 탄원서 발송, 萬國平和會議 제1분과위원회 찾아가서 大韓帝國 문제 다뤄줄 것 요청, 6월 29일: 의장 넬리도프 면담 요청, 6월 30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대표 찾아가서 만날 수 있는 대표들 다 찾아가서 지원을 호소, 결론 모두 다 거절. 공식적인 거절 이유는 초청국 명단에 있으나 좌석배치도에 없다는 것.
⑧ 제2차 萬國平和會議는 본래 1907년이 아니라 1906년에 개최될 예정, 그런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1년뒤로 연기, 그 사이에 러시아의 태도가 변하였다. 露日戰爭 직후 시기만 하더라도 한국 독립을 인정,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도 계속 유지하려는 생각, 그런데 1905년 일본이 乙巳勒約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 러시아도 영국과 일본에 대해 협조관계로 외교정책을 전환,
⑨ 헤이그 萬國平和會議가 열리고 있는 시기에 러시아와 일본이 秘密協約,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권리를 인정해주고 일본은 러시아의 외몽골에 대한 특수이익을 보장한다 라는 교환조건. 大韓帝國을 러시아도 버리고, 미국도 버리고, 강대국들은 결국 大韓帝國을 회의에 참석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⑩ 회의장에 참석은 못했지만 나름의 중요한 성과를 맺게 된다. 헐버트의 사전 교섭으로 영국의 언론인이고 萬國平和會議 편집장인 윌리엄 스테드와 기자클럽 연설회에서 이위종이 인터뷰를 한 것, 영국과 유럽에 大韓帝國의 호소문이 언론을 통해서 자세히 보도.
--------1907년 7월 5일, 이위종과 <만국평화회의보> 기자의 인터뷰 中--------
윌리엄 스테드: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까?
이위종: 왜 大韓帝國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은 유령일 뿐입니다.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기독교란 한낱 위선에 불과합니다. 왜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 대포가 유일한 법이고,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없다고요! 우리는 구릉 하나 하나가 천연 요새인 산악국가입니다. 극동의 스위스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⑪ 1907년 7월 14일, 이준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외쳤다. “신이여, 조국을 도와 주소서. 일본은 大韓帝國을 파괴하는데 온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大韓帝國의 검사 이준은 이렇게 머나먼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⑫ 밀사들과 대화를 나눴던 일본 기자 다카이시 신고로의 회고록: “그들 세명은 진실로 애국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 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보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서 임무를 떠 안은 것 같았다.” 결국 萬國平和會議에서 한국이 의제로 채택되지 못했다. 특사단의 실패는 사실은 萬國平和會議 자체에 한계를 드러낸 것, 결국 문명국들의 공멸을 부른 제1차 世界大戰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 퍼즐을 완성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1870년 이후로 독일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고립 목적을 위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간에 三帝同盟을 맺고, 그리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간에 三國同盟을 체결하였다. 三帝同盟 대 三國同盟
⑬ 1890년에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의 발칸반도 남하정책을 의심하여 러시아와 동맹갱신을 거부, 프랑스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영국과도 손을 잡게 되었다. 萬國平和會議가 열렸던 이 시기에 결국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三國協商 트라이앵글이 완성, 三國同盟과 三國協商이라는 제1차 世界大戰의 대립 구도, 이게 유럽을 재앙으로 몰고 가는 역할,
⑭ 특사활동의 실패는 고종강제퇴위로 순종이 뒤를 이었고 일제는 순종을 압박 궐석재판을 통해 특사들에게 官人詐稱罪 적용 이상설에게 교수형, 이준과 이위종에게 각각 종신형 언도,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에서 외교활동,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활동하다 1917년에 시베리아에서 사망했고, 이위종은 러시아 군대장교로 근무, 그 이후 행방 묘연,
⑮ 헤이그 밀사 세분은 입신과 평안을 위해 상류층의 삶을 포기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한 분들, 세분의 특사가 헤이그에서 모든 강대국이 불편해 하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 乙巳勒約의 불법성, 일본의 침략상을 전세계에 알렸고, 이들의 실패로 萬國平和會議의 기만성이 폭로되고, 더불어 帝國主義 국가들의 침략성을 폭로, 이는 역사의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