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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벌써 7강이네요.
제 7강
(1958. 6. 12.)
실제 존재의 원칙으로서 발전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적 원칙·115 | 칸트의 경우 변증론은 단지 이성비판의 부정적 측면일 뿐·117 | 이성비판의 긍정적 계기·118 | 반성이 이성의 사변적 자기인식의 원칙이 된다·120 | 인식의 인식은 동시에 내용적 인식의 원칙이다·121 | 변증법과 형식논리학·124 | 헤겔의 경우 ‘사례’·124 | 판단의 논리적 형식과 중요한 개념·125 | 사유와 세계의 어긋남에 대한 표현으로서 변증법적 모순·127
지난 시간에 우리는 헤겔 철학을 향해 비교적 일찍이 제기되었고 또 어느 정도 근본적인 성격을 띠는 반론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왜 이 철학은 단지 모순만 알고 단순한 차이는 모르는가 하는 반론입니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반론을 통해서는 앞에서 여러분에게 조금 더 일반적인 개념들로 말한 반론, 즉 존재자가 헤겔 철학을 통해 처하게 된 개념들의 구속 장치에 대한 반론이 좀 더 면밀한 공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 유명한 공식은 이렇습니다. 즉 절대적 관념론자(Idealist) 헤겔은 위대한 실재론자(Realist)이기도 했으며, 사실상 그가 제공하는 모든 인식은,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이 표현했듯^이, 경험에서 유래하며, −이 경험의 개념은 실제로 그의 경우에 아주 각별한 성격을 지닙니다− 그의 경우 사변적 혹은 구성적 변증법보다는 −사람들이 역시 수상쩍은 표현으로 명명하는 바에 의하면− 실재변증법(Realdialektik)이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쏟는 수고는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90)또 실제로 방대한 체계적 주저들, 그러니까 정신현상학, 및 논리학을 면밀히 다루는 수고도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간단히 체계의 이른바 실행부분들에 집중할 수 있을 테고, 그중 가장 유명하고 또 효과가 큰 부분은 역사철학과 법철학일 것이며, 가장 생산적인 부분은 아마 미학일 것입니다.(입문115-116)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즉 실제로 헤겔 철학에서 그 구성의 엄격성을 제거할 경우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더 이상 철학이 아니고, 실제로 일련의 다소 중요한 실질적 통찰들을 자유분방하게 모아놓은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들 사이에는, 바로 이 헤겔 철학이 맞섰던 전통적 과학 활동 내부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저 유명한 정신적 유대가 결여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올바르게 실행된 엄격한 변증법 개념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헤겔을 예컨대 분트(Wundt)나 기껏해야 딜타이(Dilthey) 부류의 박식가로 만들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는 아마 좀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만, 우리는 헤겔이 그러한 통찰들을 얻는 데에 꼭 필요했던 힘을 실제로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헤겔 철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이지만, 아무튼 그가 파악한 것처럼, 즉 본질적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서 현실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변증법적 원칙 덕분이었으며, 따라서 또한 이 예리한 변증법적 원칙이 없으면 헤겔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에 남아 있는 것, 즉 다른 모든 개념들보다 상위의 범주인 발전 혹은 역동성의 사고도 필연적으로 사라지고 일종의 우연한 확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입문116)
칸트의 논리학이 두 개의 큰 부분으로, 즉 ‘선험적 분석론’과 ‘선험적 변증론’으로 나뉘며, 이때 변증론은 논리학의 이른바 부정적인 측면을 나타낸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이 경우 아주 간단히 말해서, 순수이성 비판이 의식을 분석하여 우리 의식의 본질구성적 형식들 덕분에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인 인식과 같은 어떤 것이 가능해진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인 인식의, 혹은 −칸트가 명명하는 바로− ‘아프리오리한 종합판단들(synthetische Urteile a priori)’의 가능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 관건입니다. 그런데 순수이성 비판은 바로 그것이 비판이라는 점을 통해 이중적인 것을 말합니다. 즉 한편으로 그것은 어떤 범위 내에서 우리가 그런 인식의 능력을 지니는지 증명하려고 하지만,(92)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 그처럼 구속력 있는 인식의 능력을 더 이상 지닐 수 없는지 설명하려고 합니다.(입문117-118)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이 이성을 비판하고, 이성이 이성에 한계를 설정해 주고 그 속에서 이성이 확실하고 위험하지 않게 보편적 구속력을 요구하면서 작동하게 되는 한계를 설정해주면서, 동시에 [네가] 그것을 넘어설 경우, ‘멈춰라, 그것은 불합리하게 되고 그러면 너는 허구를 만들어내게 되며 기껏해야 사실상 이론적으로 인식의 진술이 될 수 없고 단지 규범적 의미에서 우리 행동의 규제적 요인들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진술을 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기이한 일이다.” [나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네가 여기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자로서 이성에 이러한 한계를 지정한다면 너 자신이 이미 이 한계 위로 올라서는 것 아닌가? 거기까지는 가도 되고 거기까지 가서는 안 된다고 구분한다는 이성의 주장은 이미 암묵적으로 이성이 그 스스로 설정하는 한계 너머에 있다는 주장 아닌가?”(93)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테고 실제로 헤겔이 그렇게 정리했습니다만, 이성은 도대체 어디서 인식을 비판하는 권한을 얻는가요? 왜냐하면 그러한 비판 자체도, 이성을 통한 인식능력에 대한 그런 비판도, 우리가 얻는 내용적 인식, 어떤 사태들에 대한 실질적 통찰이 아니라 −칸트가 명명하는 바와 같이−^ 선험적 통찰, 즉 단순한 가능성과 관련된 통찰일 뿐인데도, 칸트는 이러한 통찰과 관련해 그것이 우리 인식 일반의 본질구성에 대해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실제로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른바 경험의 가능성을 넘어설 수 있게 되는 일종의 힘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것은 그 나름으로 감성적 충만상태 혹은 질료에 의존하지 않는, 달리 말해 궁극적으로 단순한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 인식들을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입문118-119)
일단 아주 단순한 이 주장이 타당하다면, 이는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실제로 언제나 동시에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리할 수 있으며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이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이로써 이미 순수이성 비판이 긍정적인 부분, 즉 우리 경험의 기본개념들을 제시하는 ‘선험적 논리학’과, 부정적인 부분, 즉 우리가 모순들에 얽히게 되는 부분 사이에 설정하는 차이, 이 구분은 실제로 더 이상 합당하지 않으며, 이 경우 둘째 부분, 그러니까 우리가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되는 부분도 첫째 부분과 꼭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부분으로서도 인식에 포함됩니다. (…)(94) 달리 말하면 이 경우 여러분은 선험적 변증론에서 다루어지는 바로 그 이율배반들 혹은 모순들을 하나의 긍정적 요소로서 받아들이고, 이성이 그 자체의 한계에 부딪치고 그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바로 그 지점을 하나의 인식 기관 자체로 개조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의 비판적 업무와 이른바 이성의 긍정적 업무는 서로 융합되어야 합니다. 즉 존재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그 부정적 비판적 요인을 자체 내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역으로 그 단순한 부정적 요인은 결코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자체 내에서 하나의 긍정적 계기가 되도록 발전해가야 하는 것입니다.(입문119-120)
칸트를 넘어서는 헤겔의 고찰들이 결합되는 결정적인 개념은 반성의 개념입니다. (…) 실제로 헤겔과 나아가 칸트 이후 관념론자들 전체가 하는 일, 또 실제로 칸트에 대한 그들의 구분을 나타내는 것은, 그들의 경우 예컨대 영국 경험론자들처럼 이러한 반성을 의식 없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따라서 그들의 경우 단순히 이성이 거울을 바라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 반성 행위 혹은 이 반성 능력 자체가 이제 철학의 주제가 된다는 점입니다.(95)(입문120)
여러분이 헤겔 철학을 칸트 철학과 구분해 주는 핵심 개념, 즉 사변 개념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혹은 단순한 규정을 원한다면, 사변적 의식은 단순한 의식 혹은 단순하게 반성하는 의식과 반대로 의식의 자체에 대한 반성이라는 이 계기가 주제로 되고 그 자체의 자의식에 도달하며 바로 이로써 인식분석 자체의 출발점에서 이미 궁극적으로 이 변증법 전반의 주요대상이 되는 것, 즉 반성의 독특한 이 중복과정 속에 이미 담겨 있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에 부딪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한편으로 여러분은 객체로서의 사유, 즉 칸트가 말하듯이 고찰되고 분석되는 것으로서의 사유를 보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로서의 사유, 즉 스스로를 고찰하는 사유, 혹은 본래의 선험적 원칙, 혹은 통각의 종합 원칙, 본래의 종합적 원칙이라고 해도 좋은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96)그리고 이 두 원칙들은 이런 식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입문121)
반성 개념의 이 완전히 새롭고 중심적인 지위는 실제로 이 철학의 기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반성의 계기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제기한 물음에 대해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할 답입니다−, 스스로를 알게 되는 이 반성의 원칙이 실제로 부정의 원칙과 동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유에 대한 사유는 −그리고 여기서도 헤겔의 경우 다른 여러 문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적 모티프, 즉 노에시스 노에세오스(νόησις νοήσεως)를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 관건입니다−, 사유 자체에 대한 사유는 헤겔의 경우 실제로 실현된 부정성의 원칙일 뿐입니다.(입문121)
크로너: “하지만 그것은” −이성비판은− “이 경우 그 반성이 ‘단지’ 비판적이기만 한 한에서(따라서 각자 보기에 따라 ‘단지’ 경험적이거나 혹은 ‘단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기만 한 한에서) 그 자체가 ‘순진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그것이 계기들의 결합⋅종합을 단지 경험적 인식을 위해서만 연역하고 그 자체의 인식은 ‘단순한’ 반성으로, ‘단지’ 형식적 인식으로,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단순한’ 사유로, 비인식적, 즉 비-형이상학적 논리로 경험적 인식에 대립시키는 한에서 그렇다.(97) 그래서 그것은 형이상학에 ‘단지’ 부정적으로만 대응하며, 형이상학을 단지 모순적 사유로만 보며, 그래서 이 형이상학적 사유는 내용이 없고 스스로를 무화하는 공허한 것이다. 이는 경험적 사유가 그 속에서 생겨나는 모순들을 바라보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입문121-122)
인용문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칸트의 경우 한편에는 인식의 형식과 같은 어떤 것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용은 어떤 식으로든 우연히 외부로부터 인식에 들어옵니다. 내용 자체는 본래 반성을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크로너는 헤겔에 대한 묘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구분 전체는 실제로 경직된 것이다. 나는 한편에 형식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 내용들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다소 자의적으로 이 형식들은 단지 그 내용들을 위해서만 타당할 뿐 그 자체로는 타당하지 않다고 판정한다. 하지만 나는 형식들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사실상 그 형식들 자체를 이미 내용으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로써 나의 출발점이 된 이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절대적 구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와 똑같이 역으로 이른바 내용들, 즉 감각 자료들은 나의 의식과 무관하게는, 사유의 동일성과 무관하게는, 나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입문122-123)
그러니까 달리 말해서 크로너는 칸트가 이미 종합의 원칙, 곧 선험적 종합 혹은 통각의 원칙을 설정했지만 그것을 단지 추상적으로만 설정했고 사실상 형식과 내용, 구체와 추상, 선천과 후천의 매개되지 않은 대립들에 머물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립들을 간단하게 그처럼 독단적으로 서로 맞선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고 각자로부터 전개되어 나오게 하는 것, 그것이 철학의 과제인 것입니다. 헤겔은 이때 그 계기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그러니까 형식이 내용으로 동화되지 않으며 내용이 없으면 형식은 그러한 난관들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해서 칸트가 선험적 변증론에서 설정하는 모든 난관들을, 단순히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직시하는 한에서 칸트를 따릅니다.(98) 다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형식들을 통해 내용들을 넘어서버릴 경우 이러한 난관들에 빠진다는 점을 나의 반성 속에 이미 받아들인 후에는, 어떤 경계선을 설정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나는 갑자기 ‘중지’를 말할 수 없으며, 사실상 이 난관들 자체를 말하자면 내 인식의 외적 착오들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내가 빠져드는 난관들 자체를 인식 일반의 내생적 원칙으로 파악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그것들을 전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는 철학자로서, 인식론자로서 본래 아무 판단도 할 수 없고 아무 명제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을 경우, 그러니까 나 자신이 이미 이성에 대해 반성하는 자로서 절대적 인식을 갖지 못할 경우 이 한계에 대해서도 전혀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한계를 설정하면서 동시에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기 속에서 −이 한계가 제거할 수 없는 것으로서 지극히 진지하게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해^ 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이 사유가 순진하게 형식논리학적 영역이나 단순한 경험적 인식의 영역에서 움직이지 않고 실제로 반성철학이 되자마자, 즉 경험적 계기와 형식적 계기가 서로 매개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영역에서 움직이게 되자마자 부딪치는, 논리적 모순의 단순한 형식을 얻게 됩니다.(입문123-124)(99)
헤겔은 모순율을 다른 모든 사유를 위해서와 꼭 마찬가지로 통상의 오성적 인식, 그러니까 우리의 통상적인 경험적 인식들과 형식논리학을 위해서도 상정합니다. 하지만 내가 반성하는 자로서 움직일 경우, 즉 내가 직선적인 태도로 형식적 명제들이나 내용을 향하지 않고 이 계기들 자체의 관계를 심사숙고할 경우, 나는 사실상 그것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형식이 단지 모순 자체의 형식이며 어떤 순수한 동일성의 형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 혹은 그와 같은 성격의 어떤 모순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모순은 일단 유한하고 제한된 인식에 대해 효력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식은 그 자의식에 도달하고, 스스로를 반성함으로써, 그것이 타당성의 기준으로 다루어야 하는 모순이 동시에 진리의 기관이기도 하다는 사실, 즉 각각의 개별 인식은 일반적으로 모순을 통과하면서만 어떤 인식이 된다는 사실에 도달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실제로 헤겔에게서 보게 되는, 칸트의 이율배반론으로부터 이 부정적 원칙, 이 모순의 원칙을 추론하는 일입니다.(입문124)
헤겔은 본보기라는 개념에 지극히 회의적이었습니다. (…)(100) 왜냐하면 본보기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보편 개념적 범위가 있고 이것이 어떤 확실한 것, 실증적으로 주어진 것, 결과적인 것, 사물적인 것이며, 또 그것으로 파악된 특수한 것을 통해 예시되어야 하는 것임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헤겔의 경우 특수한 것을 포괄해내는 보편적 논리적 외연의 관계가 아무튼 사변적 개념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이 자리에서는 전적으로 보류되어 있습니다. 즉 이 경우 이러저러한 만큼의 사물들을 포괄해내는 어떤 보편적 개념적 외연이란 없으며, 보편 개념적 외연이란 본래 그것으로 포괄된 특수한 것의 생명 속에서 존속합니다. 그런 외연은 특수한 것을 통해 실현되며 특수한 것을 단순히 포괄하기만 하지 않고 특수한 것으로부터 생겨나고 특수한 것 속에 생명을 지닙니다. 따라서 어떤 특수한 것도 본래 그 보편 개념적 외연으로부터 추상해낸 그저 죽은 본보기로서 고찰될 수는 없습니다. 또 사실상 우리가 누군가에게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도록 요구할 때면 항상 변증법의 예를 제시하기가 그처럼 매우 어렵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입문125)
(101) “내가 X를 인간의 개념 아래 포괄할 때, 인간의 개념에서는 개별 X가 사실상 아닌 온갖 가능한 것도 함께 사유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는 동시에 변증법적 사유 속에 이제 일단 포함되어 있는 엄격성, 특이한 자유, 거의 유희적인 우월성에 대해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어떤 기초적인 생물학적 인간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생생하게 이루어진 인식 속에서 인간 일반에 대해 말할 경우, 우리는 자유⋅개별화⋅자율⋅이성에 의한 규정상태 등의 범주들과 함께, 인간의 개념 속에 그 객관적 규정으로 담겨 있고, 인간이란 바로 이러이러한 생물학적 성격의 유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아무개라고 조작적으로 정의할 때에만 자의적으로 생략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것들을 생각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 (102) 어쩌면 인간의 개념이 그 자체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본래 파악하는 인간 따위는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X는 한 인간이다’라는 명제는 내가 여러분에게 말했듯이 맞으면서 동시에 틀립니다.(입문126-127)
헤겔 철학의 경우처럼 모순의 개념에 그처럼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하면, 이는 내가 여러분에게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미 설명한 어떤 것, 즉 우리가 세계의 논리성을 간단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세계와 우리의 사유가 서로 동일하다고, 세계와 우리의 사유가 서로 동화^된다고 무조건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양자는 다름 아니라 서로 어긋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제 세계와 사유의 이러한 어긋남이 다시 사유에 의해 매개되어 있을 뿐이라는 역설에 부딪치게 됩니다.(103) 따라서 사유 자체는 그것 자체가 아닌 것을 파악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 즉 사유가 본래 전혀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이 역설은, 사유가 수행하는 모든 개별 판단에서 나타나며, 이제 사유로 하여금 전체를, 총체성의 연관을 참조하도록 만듭니다. 사유는 바로 자체의 모순성 속에서 그러한 연관을 향해 전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한에서 결국 헤겔의 모순 이념이 진리의 중요한 개념 자체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104)(입문127-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