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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영의 새로운 것. 霊の新しい事。
본문: 로마서 7장 1절~6절
롬 7: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율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2 결혼한 여자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풀려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그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로 갈지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5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6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옭아맸던 것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1.それとも、兄弟たち、わたし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々に話しているのですが、律法とは、人を生きている間だけ支配するものであることを知らないのですか。2.結婚した女は、夫の生存中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るが、夫が死ねば、自分を夫に結び付けていた律法から解放されるのです。3.従って、夫の生存中、他の男と一緒になれば、姦通の女と言われますが、夫が死ねば、この律法から自由なので、他の男と一緒になっても姦通の女とはなりません。4.ところで、兄弟たち、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体に結ばれて、律法に対しては死んだ者となっていま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他の方、つまり、死者の中から复活させられ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わたしたちが神に対して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なのです。5.わたしたちが肉に従って生きている間は、罪へ誘う欲情が律法によって五体の中に働き、死に至る実を結んでいました。6.しかし今は、わたしたちは、自分を縛っていた律法に対して死んだ者となり、律法から解放されています。その結果、文字に従う古い生き方ではなく、霊に従う新しい生き方で仕えるようになっているのです。
저와 여러분은 매 주일 로마서를 통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능력이 되는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죄에 대해 죽었음을 배웠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하여 종이 되었습니다. 의의 종으로 사는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동시에 영생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거듭난 구원의 삶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인지를 확신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별이 너무도 뚜렷하게 존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남편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결혼을 하면 평생 그 남편과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남편들은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의 하나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만일 매우 폭력적이며 불성실한 남편과 만나서 결혼을 했어도 운명으로 생각하고 참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실하지 못한 남편과 결혼한 여인의 경우를 비유로 삼아서 율법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몇 주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율법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오로지 율법의 요구를 완수해 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면, 한 번 맺어진 인연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판매된 책이 천로역정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하늘의 도성, 즉 천국을 향해 가는 과정을 비유로 그린 소설입니다. 기회를 만들어 꼭 한 번은 읽어 봐야 할 고전입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멸망의 도시에 살던 크리스천이 어느 날 한 권의 책, 즉 성경을 만나서 하늘의 도성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많은 유혹과 시험, 그리고 환난을 이겨내고 천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여정 가운데 율법의 산을 넘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피하고 세속적인 묘안을 따라서 걷다가 생긴 일입니다. 크리스천은 율법의 암벽을 오르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코 그 산을 넘지 못합니다. 분명 그 산을 넘어야 하늘의 도성을 가는 길로 닿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산을 넘기 위해서 실패를 거듭하는 가운데 전도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되돌아가서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걸어갈 것을 전해줍니다.
율법은 이처럼 우리가 해결할 수 없을 의무와 짐을 짊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평생 그 관계가 끊어지지도 않습니다. 한 번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매어 있어야 하는 잘못된 결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아내가 간음하여 죄를 짓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에 매이게 됩니다. 결국 율법은 우리를 지켜 주지 않으면서 의무와 부담만을 가중시키는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남편과 같은 존재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 남편과 함부로 헤어질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남편이 혹 죽기라도 하면 재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지난 주일에 함께 나누었던 6장의 내용에서 죄에게 종으로 묶여 있는 것과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남편의 법인 율법에 묶여 있는 것은 사실 같은 ‘묶임’입니다. 따라서 4절에 사도 바울이 형제자매로 부르고 있는 성도는 이제 율법이라는 남편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 율법이라는 남편은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에 속한 인생, 율법의 무책임 아래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죄가 죽었습니다. 마찬가지 율법의 의무에 대해서도 우리는 죽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의 진짜 남편이 되어 주십니다. 남편은 다시 말해 책임적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뜻이지요.
우리교회는 클래스101 양육을 받아야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인 되시는 지역교회에 등록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믿는 순간 주님께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생하도록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동시에 교회와 성도는 정식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개교회에 등록을 함으로 실제적으로 상호책임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소속감을 갖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아직 등록하지 못하신 분들은 꼭 등록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마찬가지 율법에 대해서 죽은 것도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미 나를 지키시고, 이미 나를 사랑하시고, 이미 나를 영원토록 책임지시는 주님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등록양육을 할 때 세례에 대해서 이렇게 비유하는 것을 배웁니다. 마치 결혼반지와 같다고요. 그 반지가 나를 결혼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반지를 통해 나의 결혼사실을 증명하지요. 그래서 결혼반지를 소중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사진과도 같습니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찍힌 종이사진을 갖고 다니면서 꺼내봅니다. 그리고 흐뭇한 마음을 갖게 되지요. 물론 그 종이 쪼가리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종이를 바라봄으로 상대를 향한 나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늘 주님을 의식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은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이제 죄의 종도 아니고, 율법에 소속되어 의무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오직 의의 종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남편으로 삼고 사는 순결한 아내들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의 새로운 것, 즉 성령이 주시는 새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광복절 특사’라는 코미디영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죄수가 탈옥하기 위해서 수감된 이후 몇 년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숟가락으로 벽을 파고 땅굴을 만들어 어느 비 오는 날 감옥에서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하수구를 통해서 세상으로 나온 그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감격스럽게 탈옥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그러나 감동이 지나자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데, 이제 뭐하지?”
감옥 안에서는 갇혀 있는 것이 지겹고 힘들었습니다. 마치 율법에 매어 있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빨리 자유를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감된 이후 탈옥을 결심하고 줄곧 탈옥하는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결국 탈옥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유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참으로 감격스럽습니까? 솔직히 그런 감동과 감격, 그리고 감탄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줄어드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새벽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생각하면 한탄스럽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생각하면 감탄스럽다.”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탐욕과 욕심, 그리고 이기심으로 채워지기에 육신을 바라보면 탄식과 한탄하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보혈로 씻겨진 나의 영혼을 생각하면 감탄이 넘칩니다. 우리가 낡아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사느냐, 새로워지는 영혼을 바라보며 감탄하며 사느냐가 우리의 마음에 불안으로 채우느냐, 안도감으로 채우느냐를 결정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성도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하루만큼 새로워집니다.
저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웃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을 보면 그다지 웃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한숨이 나오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고후 4:16절을 생각합니다. 겉사람의 모습이 낡아갈수록 속사람은 새로워지는 구나... 물론 항상 100%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문제일 뿐,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매일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실패해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나는 보잘 것 없어도 우리 하나님의 계획은 하루만큼 완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일상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과 정리된 관계를 아쉬워하기 때문입니다.
1973년 8월 23일 부터 8월 28일까지 스톡홀름 노르말름스토리(Norrmalmstorg)의 크레디트반켄(Kreditbanken) 은행을 점거하고 은행 직원을 인질로 잡았던 ‘노르말름스토리’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질들은 범인들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워졌고, 6일 동안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났을 때에는 인질범들을 옹호하는 발언도 했다고 합니다. 범죄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닐스 베예로트(Nils Bejerot)가 뉴스 방송 중에 이 현상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알려진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은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인질이 아니더라도 일부 매맞는 아내, 학대받는 아이들도 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상태를 정상적인 책임적 관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거듭나기 이전의 율법적인 삶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채로 신앙생활을 종교생활로 근근히 이어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는 모든 율법적인 행위를 극복하고 자원하여 기쁨으로 섬기게 하는 감탄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능력을 성령의 ‘새정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후 4:16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워지는 것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리하자면 매일 새롭게 주님께 대한 책임적인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던 사람이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폭력적이던 사람의 태도가 온순해지게 됩니다. 입만 열면 욕을 하던 사람의 입에서 감사와 감탄의 고백이 쏟아집니다. 이런 현상은 한 때 그렇게 하다가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갈 때도 있지만, 분명히 다시 회복됩니다.
율법과 규칙에 대하여 자유하게 되었다는 말이 곧 룰이나 규정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스로가 그 룰에 자신을 묶어 두게 된다는 말이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나도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태도와 행실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손해를 보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때로 실패를 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율법과 관계를 청산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은 책임감 있는 신부로서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피부로 닿은 경험이 있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복음의 약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예약되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지키면 됩니다. 내가 있어야 할 시간, 그 자리를 자원하여 지키는 것이 곧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정하고 엄격한 율법의 남편과의 관계가 끝났습니다. 내 자아의 죽음으로 더 이상 율법은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내 자아의 죽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직 율법에 대하여 나는 죽고 예수께 대하여 사는 복음으로만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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