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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 사 65:17-25, 마 20:1-16
오늘은 성령강림절이다. 성령강림절은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에서 유래되었다. 성령강림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부활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 날, 낙심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어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성령강림주일로부터 창조절 전까지 열네주간 동안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는 교회가 세워졌고, 성령께서는 지금까지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지켜주는 힘이 되신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서 임하시어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새롭게 변화되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하겠다. 오늘은 노히 사회부주일로 지키는 날이기도 하다. 올해는 장애자의 해이다. 우리 주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애자들이 많다.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도록 기도하며 도와주는 손길들이 되어야겠다. 또한 오늘은 총회에서 정한 도시농어촌 선교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70%의 곡물을 수입하고 있는데, 지금 국제 곡물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식량이 무기가 되어 나라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경고가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식량이 무기가 된 것이다. 참으로 걱정이다. 그런데도 정부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농민들도 마찬가지이다. 영농의욕이 없다. 정부는 식량안보가 군사안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루 노동의 주기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노동의 관습은 랍비 문서에 의하면 ‘아침 태양이 비칠 때부터 별이 뜰 때까지 지속된다’라고 한다. 본문의 시간을 살펴보면 이른 아침이 나온다. 이때부터 일한 사람들은 포도원주인과 약속하기를 하루 종일 일하기로 약속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였다. 그래서 약속대로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기로 하였다. 그런 후에 삼시가 되어서 주인은 장터에 나가 보았다. 주인이 장터에 나가서 살펴보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한다면, 내가 상당한 노임을 쳐서 주겠는데 일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주인은 이렇게 하기를 제육시와 구시와 제 십일시에도 그렇게 하였다.
우선 우리들의 시간개념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유대나라의 시간에 대하여 말씀드리겠다. 제3시는 우리 시간으로 9시에 해당하고, 제6시라 하면 12시 정오이고, 제11시라 하면 오후 5시가 되겠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은 아침 6시부터 일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오전 9시, 정오 12시, 오후 5시까지 일하는 사람들을 고용하게 된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6시부터 일하는 사람들과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분명회 약속을 하고 고용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번에 고용한 일꾼들에 대하여서는 ‘내가 너희에게 상당한 노임을 주겠다’라고 말할 뿐, 그 액수는 정하지 않은 채 일을 부탁하였고, 일꾼들은 주인의 차분만 바라고 일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먼저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했다면, 시간에 따라서 그 임금이 지불될 때는 분명히 차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라 하겠다. 이른 아침 6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 5시에 온 사람의 임금의 차이는 분명히 달라야 정상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비유를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포도원의 모든 일이 끝나는 시간이 되었다. 마땅히 일꾼들은 자신들이 노동한 대가를 지불 받게 되고, 고용한 사람은 품삯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자기 집안 일을 돌보는 관리인을 시켜 모든 일꾼을 불러서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하였다. 관리인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일꾼들을 다 모았다. 그리고 주인이 하라는 대로 품삯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관리인은 맨 나중에 5시에 온 사람들로부터 품삯을 지불하였다.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모든 일꾼들은 관리인이 분배하는 돈의 액수를 눈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하루 품삯인데 1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 품삯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꾼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은 시간을 일했기 때문에 나의 품삯은 더 많겠구나!’ 이렇게 생가할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연히 일꾼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일했던 시간들을 게산해 보면서 나름대로 품삯을 추정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상황을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포도원에서 일하였던 일꾼들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에게는 얼마가 돌아올 것인가?’를 나름대로 계산하면서 그 다음 일꾼들에게 지불될 금액을 주의깊게 살펴보는데, 관리인은 오후 3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리고 12시에 온 사람들과 9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른 아침 6시부터 온 사람까지도 관리인은 한 데나리온을 줄뿐이었다. 우리는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통하여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관리인이 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그에 대한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일하러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관리인이 나누어 준 품삯을 받고서 대단히 언짢은 심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아침 6시부터 일하였는데 이 사람들을 비롯하여 오후 3시에 일하러 온 사람들까지도 이런 처사를 상당히 부당하게 여겼다. 그들은 주인의 처사가 온당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면서 주인을 찾아가 항의를 하였다. 그들은 주인을 만나서 원망섞인 어투로 말하기를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주장하면서 원망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인의 태도를 살펴보면,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뜻밖의 말을 하고 있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먼저 온 당신들은 나와 약속하기를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고 일하기로 하지 안했습니까? 나는 당신들하고 약속한대로 당신들의 품삯을 쳐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외의 분들에게는 여러분들이 하루 품삯 일을 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하루 품삯을 쳐서 드렸는데 내가 잘못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약속한대로 당신들에게 드렸고, 그 나머지 분들에게는 하루 품삯 일도 못했지만 내가 하루 품삯을 쳐서 드렸는데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내것 가지고 내 뜻대로 사용했는데 당신들이 원망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선한 일을 한 일 때문에 당신들이 나를 악하게 보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본문의 내용이 그 절정을 이루면서 끝나고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품꾼들은 날품팔이 노동자들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가장 하층에 있는 노동자 무리들이다. 그들은 그 당시 인력시장에서 누가 자기 자신을 고용해 주기를 바라면서 고용될 때까지 하루종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종일 기다리다가도 일을 얻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이 하루종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간절하게 일할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얼마나 비참한 하루하루의 생활상인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정황이다. 이들 품꾼들은 그날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의 식구들은 집에서 굶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 당시 사회 정황이었다. 본문을 통하여 살펴볼 때, 포도원 주인은 이런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일을 찾는 자들에게 일을 제공하므로 삶의 희망을 안겨 주었고, 또한 비록 일하는 노동 시간이 적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최소한도 그의 식구들과 함께 양식을 구하여 먹을 수 있는 품삯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주인은 굶주림을 벗어나도록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에서 품꾼들이란, 그날그날 벌어서 겨우 먹고사는 정도의 생활형편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본문을 살펴보면, 자비를 베푸는 주인은 일꾼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먹고 살 수있도록 그날 품삯을 나누어주는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마지막 주인이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내용이다. 그 경고의 내용은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라는 접속사를 통하여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과 그 당시 현실의 상황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본 비유의 성격으로 살펴본다면, 본문은 그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면,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으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로, 관리인은 예수 자신으로, 먼저 온 자들은 선민 이스라엘로, 나중에 온 자들은 세리와 창기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먼저 된 자들이고, 세리와 창기들과 땅의 사람들은 나중된 사람들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먼저 된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중된 창기와 세리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본래적인 교훈이 무엇이겠나?
1.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이 누구나 사랑하신다.
인간은 삶속에서 우열을 가리고, 서열을 따지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에 대하여 차별이 많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활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차별하여 대우하기도 하고 멸시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해 관계에 따라서 관심도가 달라지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공평한 사랑을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다. 교회 안에서도 일찍이 교회 구성원이 되었던 자들이 있고, 나중에 새로 들어온 가족들이 있다. 먼저 된 자들이 마음대로 기득권을 가지려고 한다. 그 기득권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불평하고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의무와 권리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똑같은 사랑을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나 소중하게 생각하신다.
먼저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하나님은 모두다 소중하게 여기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온 자들에게도 하루 먹을 품삯을 제공하시고, 나중 온 사람들에게도 하루 먹을 품삯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주님은 사람이 언제 그리스도에게 왔느냐 라고 하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은 누구나 다같이 귀하게 여기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봉사자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사랑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봉사자는 아름다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어진 봉사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봉사하는 사랑이 중요하다. 넉넉한 사람에게서 받는 선물도 소중하다. 그러나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땀과 정성과 사랑으로 가져다주는 선물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봉사한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전부를 바친 진실한 마음의 봉사를 언제나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5월의 넷째 주일은 도시농어촌 선교주일이다. 언제부터 정부에서 ‘떠나는 농촌에서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들겠다. 노는 땅 없이 경작해서 식량자급을 이루자’라고 한다. 저곡가 정책으로 이농시킨 사람들이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가격만 충분히 보장된다면 장사하는 것보다, 공장에 다니는 것보다,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확실하게 더 많은 수입만 보장된다면 노는 땅 없이 경작하자는 말 안해도 다 경작하게 될 것이다. 옥수수 밀가루 등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해서 큰 문제라고 한다. 빵값 20% 올랐다. 어떤 것은 30%까지도. 내년에는 더욱 폭등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몰랐단 말인가? 식량이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농업을 푸대접해서는 안된다고 얼마나 경고했는가? 농업은 사회조직의 기초이다. 이제 보세요. 농업을 푸대접한 나라일수록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때가 곧 올 것이다. 옥수수, 밀농사 안 짓고 싶어서 안 지었나? 수지 타산이 안 맞아서 못지은 것 아닌가? 이제 시급히 경제정책이 전환되어야 한다. 첫째는 농업 부문에 대대적인 투자가 실현되어야 하고, 둘째는 놀산물에 대해서 특히 식량에 대해서 제값을 받게 하는 가격 지지정책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셋째는 경제성장의 정의가 실현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성장이 좀 덜 되더라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견실한 사회가 건설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뜻깊은 주일,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일하는 즐거움과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과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즐거움 그 자체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삶의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1996-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