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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7일 [현대사상세미나] [토론 정리]입니다.
토론 중에 발언한 내용에 대해서 보완이 필요하거나
발제문에 관해 미처 전하지 못한 의견이나
해소되지 못한 의문들을 가지고 계시다면
연구소 카페나 텔레그램 방이나 다음 세미나에서 이어가기를 바라옵니다.
제33기 현대사상세미나 09
안현효: 맑스에서 국제주의와 민족주의
토론자: 민족주의를 피해자 민족주의라고 한다면 노동자나 소수나 다른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는 연결고리는 되는데, 이것이 정체성주의적인 것으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맑스주의에서의 민족주의와는 배치되는 것 아닌가요.
발제자: 저도 피해자 의식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지금 가자 지구에 이스라엘이 공격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당화하는 논리가 피해자 의식 민족주의라는 것이죠. 맑스시대에도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아일랜드 노동자를 배척하는 논리로 쓰일 수 있다는 겁니다. 임지현 교수의 주장은 모든 민족주의는 그런 요소, 억압적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의 불편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 그 논리는 친일파를 용서하는 논리가 돼버립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에 보면 꽤 많은 글들이 그렇게 임지현 교수와 같은 민족주의 비판 의식에서 진전돼어 그렇게 포섭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 그게 딜레마입니다. 민족주의를 발본적으로 비판하면, 예컨대 친일파를 척결하고 싶은데 친일파 척결이 안 된다는 것, 그런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국제주의와 민족주의가 대척점에 있고, 국제주의가 기본적인 기조이기는 하지만 민족적 차원의 포섭, 민족적 차원의 이슈를 포섭해야 될 필요성 같은 게 계속 글에 서술되어 있어요. 그게 일종의 창문처럼 되어서 나중에 맑스주의적 사회주의가 현실 운동으로 전개될 때 민족주의와 결합되게 되는 원천이 된다는 거예요.
토론자: 발리바르를 끌어들이셨는데, 맑스주의에서 나름 현실적으로 적합하게 결합된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를 시빌레테 등의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 정말 우리의 운동에 적합한지요.
발제자: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뭔지 발리바르 식으로 이야기하면, 민족이라는 지평을 벗어나야 한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벗어나는 것이나 제시하는 대안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하냐 안 하냐와 별도로, 그 이론을 추적해 가보면 칸트로 간다는 겁니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으로 가는 거예요. 세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그 칸트가 제시하는 것이 인륜성 개념이지요. 그러니까 민족에서 해답을 찾지 말고 인륜성에서 찾자 이렇게 되는 거죠. 이런 이야기는 도덕적이고, 현실적 근거가 없는 거 아니냐 하는 비판은 토론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토론자: 맑스가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의 결합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중요한 통찰들을 만들어냈고 그것들을 레닌, 스탈린까지 오면서 사실 상당 정도는 현실 운동에서 적용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려 놨는데 다시 칸트로 돌아가야 할까요.
발제자: 칸트로 돌아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논의를 받아들였을 때 칸트 이슈가 있다는 것이고, 칸트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맑스가 민족 문제를 잘 결합시켰다 그랬지만, 제 발표는 못했다는 거죠.
토론자: 못했다는 근거가 현실사회주의 운동이 패배한 것말고 무엇인가요.
발제자: 그게 다죠. 물론 이론적으로는 칸트 끌고 와서 민족 비판할 수도 있고요.
토론자: 그렇다면 발리바르 이론으로 지금 자본주의를 극복해 가고 있느냐, 극복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토론자: 소련 현실에 대해 사람들이 꽤 관심 있었어요. 페레스트로이카 하면서 민족 문제가 많이 부각됐지요. 사람들 관심이 있어서 연구도 이루어졌지만, 그 팀이 결국은 발표 안 했어요. 못한 거죠. 이게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여차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족 문제는 이론적으로 제일 늦어요.
토론자: 선생님이 인용하신 맑스의 글에 나온 것만 해도 상당히 훌륭한 해법인 것 같습니다. 타인을 억압하는 건 안 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 주장과 서발턴으로 가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요. 자본주의 현실에서 최대한 타인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이 뭐냐, 그것은 끊임없이 역동하지만 핵심은 자본 아니겠습니까. 맑스는 이 점을 분명히 짚고 있지요.
발제자: 그건 동의합니다.
토론자: 맑스주의는 지배민족의 민족주의와 피억압민족의 민족주의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인데, 서발턴 민족들이 저항할 수 있는 논거가 무엇인가요. 서발턴은 살려야 하지만 민족 단위로 가면 왜 안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민족만 남고 계급이 사라질 때, 그 피억압 민족 내부에서 지배관계가 다시 부활하거나 아니면 강화되는 게 문제지, 피억압 민족의 해방 운동 자체는 긍정적이지 않냐는 겁니다.
발제자: 저도 그렇게 생각을 계속해 왔는데 자꾸 제기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서발턴 민족이라는 말, 그러니까 민족이라는 하나의 묶음에 정체성을 부여했는데, 그 집단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으로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아까 이야기했던 잉글랜드 노동자가 아일랜드 노동자를 배척하는 문제를 잘 설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토론자: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배척하거나 괴롭히는 영국 노동자는 자기 해방을 못한다가 것이 맑스의 주장이잖아요. 그럴 때 아일랜드인들이 민족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맑스 입장에서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들이 민족적으로 영국 노동자들한테 배척당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억압하는 영국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자라도 나쁜 것이지요.
발제자: 일단 그 현상이 굉장히 지금도 만연하다는 걸 우리가 인정할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한국인 노동자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한테 하는 것. 미국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 지지자죠.
토론자: 똑같은 논리로 만일 노동자가 옆에 있는 노동자를 괴롭히면 또 안 되는 거거든요.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괴롭히면 자기 해방을 못한다는 것이 맑스 논리였죠. 남성이 여성을 괴롭히고 있으면 자기 해방 안 되는 거예요. 거기에 논리적인 모순도 없고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것 때문에 소련이 망했냐 그건 아니라고 봐요. 세계 제국주의세력과의 전쟁에서 결국 밀린 거지 그것을 하나의 논리로 다 설명하려고 들면 밑도끝도 없다는 겁니다. 그냥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죠.
토론자: 소련에서 제일 큰 세력인 러시아가 민족 얘기를 안 하고 있었을 때는 공존이 가능했는데, 러시아가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다른 민족들이 소련의 틀 속에 같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 민족주의를 부추겨 엘친이 대통령이 돼버렸지요.
토론자: 레닌이 스탈린하고 절교까지 생각했던 문제가 있습니다. 스탈린은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알바니아 등을 소련으로 묶으려고 강압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레닌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합니다. 대러시아주의 때문에 주변 약소국들이 늘 괴로웠고 피해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 약소국들을 상대로는 러시아가 손해를 보더라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입장이었습니다. 주변국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 가운데 소련을 지지하는 세력까지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국제주의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민족사회주의 아니냐고 반발했다는 겁니다.
토론자: 레닌은 주변 약소국들의 자결권이나 민족해방적인 요소들이 세계 혁명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민족해방 운동은 제국주의에 타격을 준다고 보았습니다. 베트남의 경우에도 호치민이 프랑스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억압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데에 실망합니다. 그런데 레닌의 경우에는 얘기가 달랐지요. 약소민족의 해방은 제국주의 극복에 도움이 된다, 민족해방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지론이었지요. 맑스주의에는 이런 현실적인 답이 분명히 있습니다. 민족 단위로 벌어지는 억압과 착취가 이제 없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제국주의적 문제가 남아 있는 한, 민족 문제는 여전히 살아있는 문제죠.
토론자: 이스라엘이 해방될 때 그때 유대 민족주의를 시오니즘이라고 하잖아요. 이스라엘이 건국된 시점부터 그 이후의 변화된 이스라엘을 봐야 됩니다. 이스라엘을 가지고 희생자 민족주의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건국될 때, 주로 동유럽에서 나치하에 박해받았던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을 내세웠습니다. 이후 1960년대 70년대에는 인구가 부족하다고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에 있던 유대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내부의 차별이 굉장히 심해졌습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북부에서 억압받고 가난하게 살던 이 사람들을 유대인 내부에서 억압하고 차별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유대인 정착촌으로 내몰아 아랍 민족들하고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동유럽 출신 시오니스트나 진보좌파 사회주의자들이었는데, 70대로 넘어오면서 중동 쪽의 극우적인 사람들이 늘어나며 지금 이스라엘 정계의 주류가 됐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놓고 히틀러가 뭐가 문제냐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네오 나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희생자 민족주의라는 것과 지금 이스라엘을 같이 보면 안 된다는 거죠.
아까 서발턴 얘기를 하셨는데 이게 해방되고 나서도 자기들 내부에서 계급이 만들어지고 차별이 이루어지고 독재가 되고 뭐 개판이 되고 이러니까 문제지 희생자 민족주의가 뭐가 문제입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같이 주변을 침략하고 억압하고 파괴하고 이러니까 문제지 뭐가 문제입니까.
발제자: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극우화를 주도하는 세력은 희생자들이 아니고 저기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의 본질이 극우잖아요. 그들이 사람을 죽이고 파괴할 때 그걸 정당화하는 논리가 그런 거라는 거죠. 그래서 이들을 비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홀로코스트 대상도 아니었고 아무 상관도 없고 세대도 다른데, 그렇게 학살을 하면서 난 우리가 희생자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틀렸다는 이야기가 희생자 민족주의의 비판적 논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논리는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그다음의 불편한 이야기가 뭐냐면, 희생자인 척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나라를 향해서도 희생자인 척하는 민족주의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예요.
토론자: 그러니까 우리가 희생자로서 역사를 겪어온 부분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 또 가해자 노릇을 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그렇죠. 그런 걸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얘기해야지 이걸 뭉뚱그려 말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희생자였더라도 새로운 억압 자가 돼서는 안 되지만, 희생자로서 지금 당하고 있다면 저항해야죠. 저항을 위해서는 당연히 단결을 해야 되고요.
발제자: 그런데 이런 것도 있죠. 희생의 논리가 이스라엘이든 어디서든 재생산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민족 해방 운동에서 민족 내의 갈등은 단결을 위해 억눌러야 된다는 논리도 일종의 희생자 민족주의라는 얘기거든요. 다 구분하면 좋은데 현실이 그리 안 되잖아요. 전쟁 상황 같으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유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와 관련해 전쟁의 피해가 너무 크니까 외교적 해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죽기살기로 싸우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토론자: 지금 우리도 전쟁을 반대해야 하는데, 막상 전쟁이 났을 때 반전 운동을 얼마큼 조직적으로 현실성 있게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반전운동 자체가 그대로 매국으로 매도되고 내부에서 학살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토론자: 식민지 민족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이건 우리가 그전부터 하던 얘기였단 말입니다. 근데 친일 민족주의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해도 되나요.
발제자: 친일 민족주의라는 용어가 있어요. 이광수의 친일 민족주의. 그렇게 연구도 많이 되고 이게 상당히 중요한 이슈더라고요. ‘이등 신민론’이라는 게 있어요. 만주에 간 우리 조선인들이 현지인들보다 우월하다, 즉 일본인보다는 열등하지만 너희들보다 우월하다는 논리지요. 아제국주의론의 뿌리 아니겠습니까. 친일파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냥 민족의 적이잖아요. 그것은 민족주의가 아니죠.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그들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이광수 등은 민족주의하다가 친일을 하는데, 이것을 변절이라고 해석하고 마는 것이 전통적 해석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실제로 우리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한 논리와 세력을 청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는 것인데, 그런 세력이 생각보다 많아요. 그래서 친일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피억압 민족주의만 민족주의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해석이 안 되고, 해석이 안 되다 보니 싸움만 나는 거예요..
그래서 민족주의 문헌,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등을 읽으면서 민족주의를 종족주의와 연결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졌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족주의라는 이슈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고 그래서 맑스까지 끌어들인 거예요. 맑스 읽을 때 나름대로는 해석이 잘 됐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을 가지고는 현재의 거대한 친일파 세력 문제를 해석하기 어렵고 그냥 비판만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민족주의 안에 이미 그런 식의 생각들이 다 깔려 있는 거고, 학술적으로 보니까 그런 연구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더군요. 근본 민족주의와 근대 민족주의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저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신채호는 아나키즘으로 급진화하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오늘날 살았으면 이영훈처럼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영훈은 한국의 초기 민족주의가 혈연적 민족주의라는 식으로 공격했는데 사실 신채호에도 그런 요소가 있거든요.
토론자: 민족주의가 혈연에 기초하죠.
발제자: 신채호의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게 뭐였습니까. 결국 우리 민족이 없어졌다는 데서 시작했고, 네이션 빌딩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토론자: 그러니까 네이션 빌딩을 이승만이 했으니까 이승만은 국부고, 네이션 빌딩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한 김구는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해괴하잖아요.
토론자: 맑스 관점을 잠깐 돌아가면 어쨌든 옆에 사람을 억압하는 사람은 본인도 해방될 수 없다, 타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자기도 해방될 수 없다, 이것이 기본 원리입니다. 형식과 내용을 나누어 이야기했지만, 단계적인 성격이 크다고 봅니다. 현재 실존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 갈등들을 염두에 둔다면 민족 단위를 건너뛰고서 세계 시민으로 가서 한번에 국가가 사멸하는 단계까지 갈 수는 없다고 본 거지요. 맑스는 각 민족 내부에서 노동자들이 주도권을 잡아라, 권력을 장악해라, 이것이 현 단계 운동의 불가피한 면이다 라고 본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계속 머물러서 민족 단위로 모든 것을 해결하자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그다음 단계로 가는 것은 상당한 기간을 염두에 두고 장기적으로 보는 겁니다. 세계 혁명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국가도 사멸되는 거고 계급도 사멸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세계 혁명으로 가야 한다거나 무정부 상태로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맑스는 현실적인 얘기를 하자는 거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고진이나 네그리는 국가를 상대해서 싸우자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느냐의 문제가 또 있습니다. 지금 엄연히 국가 단위로 모든 것들이 작동하고 있고, 이 국가권력이 자본과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면서 노동 쪽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는 상황이 고착돼 있을 때, 그 국가권력을 노동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활용하거나 아니면 어떻게 깰 것이냐 하는 문제가 소홀히 되는 것입니다.
발리바르나 알튀세르가 과장법을 워낙 좋아하지요. 이제까지 이데올로기 이론은 없다고 했죠. 그럼 자기 이론만 이론인가요. 맑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방대한 책,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만하임의 고전, 그밖에도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 무수한 이론가들이 고심하고 글을 썼는데, 이데올로기 이론은 없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맑스한테 국가 이론이 없다는 것도 과장이지요. 맑스는 핵심을 정리했지요. 지배계급의 지배 도구라는 것이 본질이이며, 그걸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같이 작동한다고 봤고, 헤게모니적인 요소가 작동한다고 봤지요. 이 자체가 훌륭한 국가 이론 아닌가요. 그런데 그걸 왜 부정하는 그들의 논리에는 현실사회주의의 역사를 싹 지워버리는 논리가 밑에 깔려 있습니다.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청산주의를 전제로 모든 논리를 펴고 있는 겁니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현재의 자본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하는 문제가 또 있습니다.
토론자: 마지막 단락의 맨 마지막에 ‘연결되지 않은 운동들의 결합’이라는 게 뭔지 좀 설명 부탁드려요.
발제자: 운동들의 결합이라는 건 옛날부터 했던 이야기고 노동자 운동이 다른 어떤 운동들하고 결합해야 되느냐 하는데 최소한 민족주의적인 운동과의 결합은 아닌 것 같다는 거예요.
토론자: 한상원이 인용한 맑스의 글이 그런 의미인가요?
발제자: 한상원은 칸트식의 시민성이라는 개념을 통합의 준거로 삼자는 것입니다.
토론자: 맑스가 그렇게 얘기했다는 거예요?
발제자: 아니 해석이죠. 현상으로 해석한 거죠.
토론자: 그러면 노동과 자본의 적대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발제자: 맑스가 칸트보다 한 걸음 나은 건 칸트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를 몰랐고 맑스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를 깔고 있는 거잖아요. 그 전제하에서 다른 세력들을 어떻게 결합할 거냐 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 부분은 좀…인륜성이라는 표현을 계속 쓰는데 같은 얘기거든요. 예를 들어 전쟁에 반대하는 그런 것은 계급적 이슈는 아니겠지요.
토론자: 그것도 계급적 이슈가 될 수 있죠.
발제자: 될 수도 있는데 그 계급적 이슈에서는 무조건 전쟁 반대 이런 건 아니잖아요. 지금 현재 우리가 얘기하는 상식적인 전제는 아니죠. 그런 것을 시민성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준거가 새로 연구돼야 되는 거죠.
토론자: 그러니까 현재의 구체적 조건 속에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서 어떻게 바꿔 가서 궁극적으로 어디까지 갈 거냐 하고, 즉 궁극 목표의 문제하고, 현재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가 구분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궁극 목표가 좋은 건 다 알아요. 거기에 도달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되느냐. 무엇부터 인식해야 되고, 그걸 방해하는 요소가 뭐고, 그들과 어떻게 전략적으로 싸울 것이냐, 이게 문제잖아요. 그 부분에 대한 논의가 없으면 그냥 듣기 좋은 얘기가 되는 거죠.
토론자: 시민성 말씀하시지만 공동체성도 있잖아요.
발제자: 저도 계속 어떻게 연결이 될 건가라는 고민이 있지만 오히려 이제 시민성 인륜성에 기반을 하더라도 그래도 오히려 고민을 얘기하면 이게 맑스주의하고도 같이 뭔가 좀 얘기가 될 수 있는 게 있지 않는가라는 느낌이 조금 더 강하거든요.
공동체라고 하는 포커스가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세계화 그러니까 지구적 차원에서의 공동성을 찾아야 되잖아요. 그 지구적 차원에서 코뮌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적인 공동체, 예를 들면 마을 단위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내가 말하는 코뮤니즘은, 1871년 파리 코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단 정치적으로는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해야 되고, 경제적으로는 공장이 사회화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맑스의 경우 세계적 차원의 코뮌 같은 것은 잘 안 보여요. 실제로 코뮌보다는 그냥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이런 식으로 바로 넘어가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해석하기를 아나키즘이라고 보는 겁니다. 맑스에게 세계적 차원의 생산 양식이라든가 이런 개념들이 없습니다. 세계적 차원에서 뭔가를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없다 보니까 자꾸 국민국가 단위로 넘어간다는 거예요.
그런 것이 문제고, 답이 뭐냐 하는 것은, 사실 열려 있는 문제니까, 각자 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난점이 있다는 걸 저도 인정합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은, 민족주의 문제의 이론적 공백을 어떻게 채우느냐 하면 예를 들어 가라타니처럼 칸트를 끌고 와서 채우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또 현실적 조건에 따라 다른 사회운동으로 채우는 겁니다.
그런데 노동운동이 다른 사회운동을 끌고갈 때 민족주의 운동을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있다는 것이지요. 민족주의 운동이 아닌 운동들을 서발턴이라고 한 것인데, 맑스가 이미 조금씩 이야기 다 했지요.
토론자: 이 세미나 앞에서 발표한 분들 가운데도 민족문제를 전략 차원에서는 건너뛸 수 없다고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면돌파해야 된다는 관점을 아주 강하게 갖는 분들도 있고,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라는 틀이 핵심이지만, 제국주의 문제를 보는 시각도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규정하고 시작하는 쪽과, 똑같은 제국주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고 보는 쪽이 팽팽하게 대립합니다. 사실 중국 문제가 주요 쟁점이 될 것 같아요. 중국 성격을 그 가변성 속에서 볼 수 있느냐, 아니면 자본주의적으로 성장한 부분에 초점을 둬야 되느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 하는 등등이 쟁점입니다.
앞에서 사회주의 플러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플러스 민족주의라는 발리바르의 분류법을 끌어들이셨는데, 이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어떻게 구분해야 되는지, 단계적인 문제는 아닌지요. 전통적으로 단계로 봤잖아요. 사회주의 단계 혹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등. 이때 민족주의가 범주상 어떻게 얽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발제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규정을 잘 알고 있긴 한데, 여기서는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썼어요. 그러니까 사회주의는 실제 존재하는 사회주의, 예를 들어 기독교 사회주의 등 아주 다양하게 있는 겁니다. 공산주의는 코뮌을 기초로 하는 것 공동체운동 이렇게 구분을 한 거예요.
사실은 맑스가 얘기하는 공산주의는 굉장히 이상화된 콘셉이입니다. 오늘날 상태에 와 있는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결합했다는 것이고, 그게 민족주의와 결합하지 않고 공산주의하고 결합해야 한다면, 이때의 공산주의는 맑스가 이야기하는 공산주의가 아니고 꼬뮌주의입니다.
토론자: 선언에서도 맑스와 엥겔스는 여러 가지 사회주의를 눌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프루동식 부르주아 사회주의, 진정한 사회주의, 소시민적 사회주의, 봉건적 사회주의, 기독교적 사회주의 등등. 그것들은 사회주의를 참칭할 뿐입니다. 맑스는 이게 사회주의냐는 그런 뉘앙스를 가지고 비판한 것이었지요. 오늘날도 사회주의를 입에 올린다고 해서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회주의 척도가 무엇인지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 수단의 사회화가 핵심일 것 같은데요, 파리 코뮌을 염두에 둔다면 구성원들이 얼만큼 근본 민주주의 수준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권력 문제도 있습니다. 생산 수단의 사회화도 본질적으로는 권력의 사회화와 직결되는 문제이지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뤄내고 있느냐, 정치 권력 차원에서 근본 민주주의 수준까지 가려고 노력하느냐, 생산 수단을 얼마큼 사회화하느냐, 이것을 사회주의의 척도로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발제자: 개념사적으로 보니까 아이러니한 건데 사회주의는 굉장히 근대적 개념이에요. 소셜리즘이란 단어 자체가 굉장히 근대 용어고 공산주의는 근대 용어가 아니고 오래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맑스는 근대적인 용어인 사회주의를 공산주의 1단계라고 표현하고, 아주 오래된 그런 공산주의라는 개념을 끌고 와가지고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쓴 거는 좀 연구해 볼 만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토론자: 맑스 당대는 온갖 세력들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시대였고, 그래서 맑스는 이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싶었지요. 공산주의자들은 조잡한 부인공유제까지 주장하며,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그래도 그 쓰레기들보다는 낫다, 현장 운동과 결합돼 있다 이런 차원에서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했지요.
발제자: 어쨌든 사회주의 계열의 논의에서는 자기는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구분했습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충분히 논의가 되었어요. 온갖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런데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갑자기 툭 튀어나옵니다. 자본론을 읽어봐도 그런 표현이 없어요. 오히려 자본론에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을 뿐이거든요.
토론자: 인류의 상상 속의 이상 사회, 유토피아, 모두가 자유로운 사회, 이런 것은 오랫동안 인류가 생각해 왔던 것이고, 또 먼 미래 목표로 설정할 수 있겠죠.
토론자: 사회주의라고 하는 아주 정교한 사회과학적 용어는 필요했을 수 있는데, 사회주의가 목표는 절대 아니에요. 공산주의가 목표죠. 그런데 그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상품, 화폐, 국가, 민족, 계급 등이 다 빠져야 되는데 사실은 그게 빠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토론자: 맑스는 낮은 단계에서는 자본주의의 온갖 흔적들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지요. 우리가 소규모의 공동체 운동을 통해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를 만드는 건 사실상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산 수단의 소요 문제를 풀 만큼 강력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핵심인 것 같거든요. 이 문제를 건너뛰고는 답이 안 나올 것 같습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아직 사회주의나 궁극목적과는 거리가 멀지요. 역사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사회주의 쪽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은 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잘 안 됐으니까, 국가 권력을 이용해 체제를 바꾸는 것은 포기해야 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길을 찾아보니까 잘 안 보이는 겁니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을 현실 속에서, 지배적인 문화나 정치 조건 속에서 구현할 방법이 안 보입니다.
토론자: 시빌리티도 좋은데, 어쨌든 발리바르 등의 이론에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가 잘 안 보입니다. [자본론 읽기]에서도 자본주의가 어떻게 재생산된다로 끝나지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한다는 얘기는 있는데, 어떻게 깰 것이냐,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는 막연해 보입니다. 사회주의 플러스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을 현단계의 과제로 보느냐 궁극 목적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또 민족주의든 민족이든 이게 타 민족을 억압하거나 자민족을 내부에서 차별하고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부분도 있지만, 동시에 민족으로 남아 민족 언어든 문화든 정체성이든 그것들을 유지하면서 인류 사회를 다양화하는 측면은 어떻게 살려낼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민족주의가 그냥 죄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토론자: 국가가 해소된다고 할 때 그 국가의 의미는 계급 억압 수단이잖아요. 누가 맡아도 상관없는 형태로 가는 것이 국가 소멸의 모델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민족도 타민족을 상대로든 자국 내에서든 억압을 해소하는 단계로 간다면 굳이 민족을 없애야 된다는 얘기를 할 필요조차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차이를 없애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차이를 근거 삼아 불평등하게 불공정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문제니까,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또 앤더슨이 얘기하는 환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은 유명론의 한 변종이지요. 맑스주의 입장에서는 사실 실체론이 훨씬 더 강력합니다. 앤더슨 식으로 말하면 계급은 뭐 상상의 산물 아닙니까. 계급이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고 개념화한 것이지만, 우리는 현실적인 실체라고 봅니다. 민족도 그런 성격이 강력하게 띠고 있습니다. 외국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억압과 착취, 경제영토 문제, 군수산업과 핵무장, 전쟁 등의 문제에서 늘 민족주의와 민족은 강력한 현실적 힘으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환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으로는 해결책을 찾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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