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 / 봄바다
요즘 부쩍 건망증이 심해졌다. 최근의 사건은 그 한도를 벗어나서 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 것 하나에 집중하면 앞의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그날도 출장을 앞두고 막내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쓸 탱자차를 끓이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친구의 톡을 보자마자 그대로 나가 버리고는 까맣게 잊어 버렸다. 두 시간여 쯤 지나 큰딸이 계속 전화를 걸어와 받았더니 "엄마, 찻물 불에 올린 건 기억이나 해?"라며 거의 울 듯한다. 그제서야 기억이 나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힘이 쭉 빠지고 난감해서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집은? 냄새는 안 났어?" 했더니 둘 다, 다른 방에서 문 닫고 자다보니 냄새가 나지 않아 전혀 몰랐단다. 문 열고 나와서야 열기와 타닥타닥 소리에 놀라 봤더니 바닥에 탱자 잔재는 숯덩이가 되어 있고 뚜껑까지 그을려서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저 거시기 있냐. 거."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럴 때마다 딸들은 "거시기 좀 하지 말고 엄마아, 그 말을 애써 기억해 보라고!"라며 안타까워한다. 곰곰 이런 요즘의 나를 돌아보니 그럴만도 하다. 직장에서는 하루종일 모든 일에 관여하고 결정한다. 또한 그 결정이 학생, 교사, 학부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세심하게 살피다 보면 하루가 번쩍 가버린다. 여유를 두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지쳐 퇴근하면 다 나만 기다리는 눈들이라니!
거기에 내 주요 관심거리가 뉴스이다보니 요즘은 화가 나지 않는 날이 드물다.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아이도 하지 않을 짓을 눈도 끔쩍하지 않고 끊임없이 해대는 그의 뇌구조가 궁금할 정도다. 사고를 저질러대는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에 절로 공감이 간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을 벌였을지 귀를 세우고 뉴스를 듣다 나도 모르게 욕을 해대는 걸 본 남편이 "혼자서 중얼중얼 그것도 욕이라니, 정신병자가 따로 없네. 욕이나 해댈 뉴스는 왜 듣냐?"라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다. 어이가 없어 빤히 그를 쳐다본 후, 아예 말을 하지 않으니 이젠 오히려 내 눈치만 흘끔흘끔 본다. 그도 나오는 대로 내뱉고는 주워담지 못해 당황했으리라.
그의 말이 과하긴했지만 욕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싶긴하다. 늙으면 지혜로워 진다는 말은 종이조각보다 가볍다. 이러다 지혜롭기는커녕 치매에 걸려 욕이나 해대는 노인네가 될까 두렵다. 이런 고민에 쌓여 있는데 하필 한 칼럼의 내용이 가슴을 친다. 혈관성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장모님의 가계부와 수첩을 발견하고 쓴 글이다. 가계부에는 정갈한 글씨로 제사상에 올릴 품목이며 가격, 음식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첩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글자 연습하듯 그녀 이름 석 자가 적혀 있고, 어느 날에는 두 글자, 어느 날은 성만 적혀 있거나 이름의 받침을 끝내 완성하지 못한 날도 있다. 자기 자신을 찾으려 애쓰던 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본 듯 했다는!
가족은 변해가는 나를 안타까워하지만 늙어가는 중일거라 여기며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직은 즐겨 책을 읽을 만큼 눈이 견뎌주고, 읽은 후의 기쁨도 꽤 오래 가니 미리 불행에 휩싸일 필요가 있으랴. 더구나 내게는 이렇게 글을 쓸 공간도 있고 문우들의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한 걸. 불이라도 났으면 어찌될 뻔 했냐는 딸들의 성화에 퇴직 전까지는 아침에 데우는 요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거시기'를 줄이고 애써 맞는 말을 찾는 노력도 부지런히 하면서 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리라.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큰 용기와 기쁨을 주는 일이라는 걸 고맙게 여기며 또 고통스런 이 작업에 기꺼이 매몰되고자 한다.
첫댓글 선배님! 저도 그래요. 화장실 갔다가 물을 안내려서 ㅡ 수압 약한 집에 사느라고 샤워하고 해야지 해놓고는 깜박 ㅡ 남편에게 치매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크고 작을뿐 다 그래요.
공감합니다. 머리와 입이 따로 놀아요. 그러다 자책하고.
'거시기'는 저도 다반사네요.
선생님 아직 건장하세요. 힘내세요.
그래요. 나이가 들면 거시기를 자주 반복하게 돼요. 그런 정도의\
건망증은 누구나 있지 않을 까요?
의심스러우면 구청 치매 센타에서 검사를 받아 보세요.
다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딸들이 거의 치매환자 취급을 하니 난감해요. 그렇지 않아도 아파트 게시판에 기억력 검사한다고 찍어왔더라구요. 저는 여유가 없이 머리가 가득 차서 좀 비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싶어요. 뉴스도 덜 보고요. 하하하
마지막 문단이 참 맘에 듭니다. 크게 개의치 않는다. 선생님의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을 드러내 주는 듯합니다.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쁨을 주는 일을 하는 것. 와 닿습니다.
선생님, 나이가 궁금합니다.
같은 나이 여자 중에 가장 귀여운 사람일 것 같아요.
저도 자꾸 잊어버려서 가스렌지를 없애버릴까 고민하고 있어요. ㅎㅎㅎ
귀엽게 봐 주신 분도 귀엽게 사시네요. 한 밤에 콩물, 그리고 남편에게 한 다리 올리기. 👍
비슷한 경험 많습니다. 요즘은 가까운 사람 이름도 생각나지 않고요. 저는 어느 한쪽에 몰입히는 것이 있어서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자주 넘어갔는데 이번엔 2시간 넘게 냄비를 올려놓고도 기억을 못한 관계로 딸들의 분노를 사서 건망증에서 치매로 급상승 했네요. 하하하
문단 중간 중간 알찬 명언들이 많아요. 즐겁게 그리고 새기며 읽었습니다.
늘 정의롭고 뉴스에 날카로운 이른봄 (봄바다에서 개명하셨을까요? )님이 곁에 있어 어깨가 으쓱하답니다. 글공부 지도도 부탁합니다.
이렇게 꾸준히 좋은 글 쓰고 계시니 단순한 건망증이지요. 저도 반 애들 발표 시키려는데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슬며시 명렬표 내려다 보는 일이 있어요. 60고개 넘기가 어렵구나 생각하며...
저도 그렇습니다.
가스랜지 불켜고 다른 일에 집중하면,
여러 일을 같이해서 그런걸까요.
머리는 하나인데,
하나씩 처리하는 걸 길들이고 있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