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9일 일요일
해파랑길 걷기 20일째. 28코스와 29코스 중간쯤인 임원항까지 걸었다.
6시 30분에 숙소 근처의 음식점으로 가서 아침을 먹었다. 소고기국밥을 시켰는데, 주문한 음식을 내오면서 주인 여자가 몹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였다. 어제 퇴근할 때 전기밥솥 예약이 잘못되어서 더운밥이 지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어제 남은 찬밥을 내온 것이다. 나는 뜨거운 국이 있으니 괜찮다고 하면서 그냥 먹었다. 비록 찬 밥이었지만 쌀도 좋았고 밥이 지어진 상태도 최상이었다.
맛있게 먹은 후 계산하려고 하니, 주인 여자가 음식값을 받을 수 없다며 깨끗이 씻은 사과 한 개를 건네면서 그냥 가시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이 추운 날씨에 새벽같이 길을 떠나는 나그네 손님한테 찬밥을 드려서 너무 죄송하다고 하면서…. 억지로 국밥값을 주인 손에 쥐어주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 가슴 가득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부구 흥부시장 옆 국일식당의 주인. 복 많이 받기를 빌었다. 오늘은 왠지 한결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남은 여행 내내….
석호항을 지나면서 일출을 감상했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일출 시점에 맞춰 일찍 하루를 시작한 보람이 있었다.
완만한 오르내리막길이 계속되는 7번국도(구도로)를 따라 걸었다. 나곡항, 고포항 입구를 지나자 고개는 더 가팔라졌다. 도로는 비교적 한적했다. 새로 뚫어놓은 신7번국도인 동해대로(자동차전용도로) 위로는 고속으로 달리는 차량들이 바람을 가르는 거센 소리가 가득했지만….
44년 전인 1980년 8월, 17일간 해안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했던 기억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때도 이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비포장 구간이 많았고 언덕과 고개도 지금보다 심했던 그 길을 15kg에 이르는 짐을 싣고서 달렸던 그 기억들이 지금 이 순간들의 느낌과 겹치면서 뇌리를 스쳤다. 당시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과 안갯속 시국이었는데, 공교롭게 지금도 그때와 유사한 상황이라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더니….
도화동산(경상북도 도화인 백일홍이 많이 가꾸어져 있었다.)을 지나자,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인 갈령재가 나타났다. 부산 오륙도해맞이공원을 출발한 지 20일만에 강원도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수로부인길을 따라 걸어내려와 호산버스터미널에서 28코스를 마쳤다.
호산시내에서 된장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TV에서 여객기 추락사고 소식이 속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존자가 2명만이 확인된 대형 참사였다. 가슴 아픈 일이다!
29코스를 시작하였다. 호산천을 따라 걷다 옥원역 부근에서 잠시 쉬었다. 지도상 정보로는 동해선(삼척~포항) 고속철이 2025년 1월에 개통 예정이라고 되어 있는데, 신형의 멋진 열차(객차 4량)가 나타나 옥원역에서 정차하고 승객 한 명이 내리는 것이었다. 아마 예정보다 일찍 개통한 거 같았다. 열차 모습이 아주 스마트하고 예뻤다. 한 번 타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동해안을 따라 쭈욱 여행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7번국도 오르내리막길을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새 눈앞에 아름다운 임원항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걷기 일정은 오후 2시 40분에 일찍 마무리되었다.
예약해 놓은 숙소로 가서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커피를 마시고 임원항을 한 바퀴 돌아봤다. 항구 바로 옆에 있는 수로부인헌화공원을 구경하기 위해 공원 입장용 엘리베이터로 갔더니 오후 4시에 매표가 종료됐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을 몇 군데 확인하고, 숙소로 돌아와 일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6년 전쯤인가, 제주도에서 한달살기를 할 때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 교장선생님이 나의 해파랑길 걷기에 동참하겠다는 연락을 오늘 갑자기 해왔기 때문이다.
내 일정을 세밀하게 조정한 후, 1월 3일 저녁에 강릉 안인항에서 숙박할 계획을 짰고, 그때 거기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번개팅과 비슷한 그분과 함께 하는 일정이 새로운 상황과 재미를 불러올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저녁을 먹고 오늘 한 일을 길게 정리해 올렸다. 오늘은 11시쯤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