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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죽음, ヘロデ王の急死。(2021년 5월 16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12:20-25
행 12: 20 ○그런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에게 몹시 노여움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뜻을 모아서, 왕을 찾아갔다. 그들은 왕의 침실 시종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그를 통해서 헤롯에게 화평을 청하였다. 그들의 지방이 왕의 영토에서 식량을 공급받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21 지정된 날에, 헤롯이 용포를 걸쳐 입고, 왕좌에 좌정하여 그들에게 연설하였다. 22 그 때에 군중이 "신의 소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23 그러자 즉시로 주님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쳤다.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벌레에게 먹혀서 죽고 말았다. 2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25 바나바와 사울은 그들의 사명을 마치고, 마가라고도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
20. ヘロデ王は、ティルスとシドンの住民にひどく腹を立てていた。そこで、住民たちはそろって王を訪ね、その侍従ブラストに取り入って和解を願い出た。彼らの地方が、王の国から食糧を得ていたからである。21. 定められた日に、ヘロデが王の服を着けて座に着き、演説をすると、22. 集まった人々は、「神の声だ。人間の声ではない」と叫び続けた。23. するとたちまち、主の天使がヘロデを撃ち倒した。神に栄光を帰さなかったからである。ヘロデは、蛆に食い荒らされて息絶えた。24. 神の言葉はますます栄え、広がって行った。25. バルナバとサウロはエルサレムのための任務を果たし、マルコと呼ばれるヨハネを連れて帰って行った。
지난 주일에는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고정관념을 뛰어 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과 손길이 베드로를 죽이고 유대인들의 인기를 얻으려는 헤롯왕의 계획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베드로를 죽이려다 실패한 헤롯은 베드로를 지키지 못한 경비병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로 내려갔다고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이사랴(Kaisareia)는 카이사르(Caesar, 혹은 시이저), 즉 황제에게 바쳐진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가이사랴라는 이름의 도시가 성경에는 두 곳이 나오는데요. 오늘 헤롯이 내려갔다고 말하는 가이사랴는 항구도시로서 지중해 연안에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이름의 도시로 내륙지방인 헤르몬 산 아래에 있는 도시입니다. 두 곳 모두 황제를 뜻하는 카이사르라는 명칭을 따서 지은 도시로서 당시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못지않은 화려함과 웅장함을 지닌 도시였습니다. 모두 로마 제국의 세속적인 힘과 실력, 그리고 영향력을 자랑하던 도시였지요. 무엇보다 황제의 질서, 황제의 논리, 그리고 힘의 논리인 약육강식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속의 부조리와 불의함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도시였습니다.
특히 항구도시였던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과 그의 손자인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 아그립바 1세 시절에 유대왕국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로마제국이 식민통치를 위해 거점으로 삼았던 도시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등장하는 고넬료라는 로마 군인이 주둔하고 있던 도시가 가이사랴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고향인 다소로 가기 위해서 먼저 가이사랴에서 배를 타야 했었습니다. 이처럼 가이사랴는 유대에서 로마를 상징하고 로마의 권력, 그리고 황제의 논리, 세속의 논리를 실감나게 체감할 수 있는 장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롯왕이 가이사랴에 간 이유에 대해서 성경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매년 열리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축제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가이사랴에서 헤롯은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을 세우고 그 신전에서 개최하는 축제를 열어서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가진 유대지역에서의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가이사랴는 곧 이 땅에서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탐욕을 관철시키려는 욕망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유일한 강대국인 로마제국의 황제에 대하여 온갖 아부를 하면서, 유대지역에서는 자기보다 나약한 이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헤롯이었습니다. 이런 헤롯이 두로와 시돈이라는 도시에 뭔가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헤롯은 두로와 시돈에 공급하던 식량을 중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의 주민들은 헤롯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헤롯의 비서실장의 역할을 하던 블라스도라는 사람을 통하여 중재안을 마련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중재안을 받아들인 헤롯이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대회를 열었던 것이지요.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서인 [고대사]라는 책에서 그 날 헤롯이 입고 나온 옷은 은실로 짠 옷으로서, 은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옷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천사의 날개를 두른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군중들 앞에 나섰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게다가 헤롯의 기분을 달래고, 그의 마음을 얻어야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얻을 수 있었던 두로와 시돈의 군중들은 그가 나아와 그 은색으로 빛나는 용포를 휘날리며 연설할 때,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열광과 환호를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마치 독재국가에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독재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감동의 눈물과 환호성을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군중들은 신의 목소리라며 헤롯의 연설에 열광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이 그 모든 환호와 칭찬을 듣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지 않고 마땅히 자신이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어쩌면 세속의 가치관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지요.
헤롯의 죽음과 관련된 역사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그다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치 역사드라마나 정치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도 이 세상 어디에선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시민들을 억압하고, 그러한 권력자의 횡포를 피해보기 위해서 측근들에게 로비를 하는 모습 말입니다. 이처럼 힘의 논리와 함께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 옛날의 사람들이 추구하던 가치와 오늘날의 우리의 세속적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과 욕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할 것을 소유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속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날에도 자신의 실력과 업적을 자랑하며,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랑하는 것을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한 태도, 즉 자기를 과시하고 실력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잠 16:5)
결국 교만한 마음과 태도가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본보기이며 스승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날 구원하신 것을 믿고 의지하여,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살 길인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언제나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뭔가 대단한 영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삶의 본보기가 되시고, 기준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사는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해야 하는 존재인 것을 잊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정말 무익한 존재인 것, 불의한 존재인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에 반해 오늘 본문의 헤롯왕은 정통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쏟아진 찬사와 환호성을 듣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지요. 그러자 곧바로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내리쳤고, 결국 벌레에 먹혀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만한 이들에게 행하신 매우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헤롯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헤롯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만하게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며,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헤롯만 그런 저주를 받았던 것일까요?
헤롯의 죽음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기구하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현실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지 인과응보의 법칙이 현실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죽음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을 생각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성취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헤롯의 죽음을 통해서 말씀은 반드시 현실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간증과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보면서도 마찬가지 말씀의 성취에 대한 시선을 가질 수 있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헤롯이 벌레에 먹혀 죽었다는 기록 뒤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멀리 퍼져나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흥왕하였다고 번역하였는데요. 새번역 성경에서 ‘널리 퍼졌다’고 번역한 원어는 ‘auxano’(옥사노)인데요. 원래의 뜻은 자라다, 성장하다는 뜻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발달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공동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자라났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모두 4차례(6:7, 7:17, 12:24, 19:20) 사용된 이 말은 모두 교회의 성도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그 말씀이 널리 퍼졌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신도의 수가 증가하고, 그 영향력도 함께 자라나고 발달하고 있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여전히 주님의 나라와 그 말씀은 흥왕하고 자라고 발달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겉으로 볼 때 교회는 영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런 생기도 활력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특히 일본에서는 0.3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만 믿는 종교라서 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는 공동체는 하루에 하루만큼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하루만큼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루에 하루만큼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하루에 하루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믿고 나서 매일 반복되는 감사의 제목이 하나 늘었습니다. 하루에 하루만큼 가까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신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면적인 모습으로만 우리의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계획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지금의 선택과 사명을 헤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교만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인가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매일 하루만큼 자라나고 있고, 확장되고 있고, 번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살면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고 싶어집니다. 육신의 에너지를 사용하게 됩니다. 자신의 건강도 질병도 모두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고 싶어집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어떤 권사님의 병문안을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들 권사님의 갑작스런 입원에 당황하였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 때 문병을 온 교회 성도들에게 권사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이 병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새롭게 주신 것 같아요. 여기 함께 계신 분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있어요. 또 간호사들과 의사선생님께도 복음을 전할 마음을 주시네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마음을 구하면 모든 삶의 자리를 사명의 자리로 바꾸시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구원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기준으로 삶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면 헤롯왕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헤롯왕처럼 곧바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죽음으로 끝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명의 기회로 일상생활을 여기는 성도는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한 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불행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그 어느 곳이나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의 삶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지요.
헤롯은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밝혀주는 실질적인 예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사 13:11)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사 57:15b)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생생히 살아서 움직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하루만큼씩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 헤롯의 실패를 거울삼아 예수님의 성공을 따르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만한 태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삶은 무질서와 부조리와 불안, 그리고 멸망에 속한 삶입니다. 그 파괴된 삶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승천하시고 원래 계시던 하늘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지금 우리의 삶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겸손한 삶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삶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자랑할 만한 대단한 실적과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일상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주일을 맞이하며, 다음 주일에 성령강림주일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 충만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으로 아름답고, 기가 막힌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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