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모세는
2023. 5. 14(주일낮예배) 히브리서 11:23-26
여러분은 삶을 가장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다고 생각하는가?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샘 리처드 교수는 몇 명의 학생들을 강단으로 불렀다. 그리고 17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리서치 결과 16항목을 보여주면서 2가지를 말해보라고 하였다.
친구, 자연, 직업, 사회, 건강(정신/육체), 가족, 물질적 풍요, 취미, 자유, 교육, 연애, 여행, 정신/종교, 애완동물, 서비스 및 참여, 퇴직
이 질문에 멕시코 여학생은 건강과 교육을 말하고, 미국 여학생은 친구와 교육이 자신의 삶에 가장 의미가 있게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윤성은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 대답에 샘 리처드 교수는 자신의 인생을 의미있게 하는 항목으로 물질적 풍요를 말하는 민족은 한국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왜 물질적 풍요를 대답했는지 물었다. 그때 윤성은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고, 또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물질적 풍요를 가장 의미있는 것으로 여긴다.
외국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원하는 것은 페라리 자동차를 타고, 멋진 옷을 입기 위해서 라면 한국 사람은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으로 물질적 풍요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윤성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저는 경제적으로 꽤 어려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래서 쌀독에 쌀이 떨어진 적도 있었고, 또 아이를 낳고 분유 살 돈이 없어서 분유를 아끼면서 먹였다. 아니 아이들이 아파서 열이 40도가 넘어가는데도 병원비가 없어서 밤새 우는 아이를 달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때가 너무 힘들었지만, 또 너무 그립다. 그래서 한번씩 아내에게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더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물질적 풍요가 가정을 지키는 핵심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가치는 무엇이겠는가? 저는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생각할 때마다 이해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튿날 일찍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결박하고, 죽이기 위하여 칼을 빼어 든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삭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한 이삭은 10대의 청소년이 아니었다. 위키 백과사전에 의하면 이삭은 20-37세의 건장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삭이 20살이면 아브람은 120세의 기력이 쇠하여 진 할아버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삭은 아버지가 결박할 때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결박당하고, 아버지가 죽이려 할 때 가만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이삭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권위 앞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삭이 순종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렇게 순종하는 아버지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두려워 떨며 순종하는 하나님은 나도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이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왜냐하면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 임의로 먹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은 하와를 꾀어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하여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가 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이 땅은 죄악의 도성이 되고 말았다<도표1>.
이것이 이 땅에 죄악이 들어오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담을 보고, 하와는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는데, 반대로 하와의 죄악을 보고 아담이 따라 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달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렇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보고 아들 이삭도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그 그림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는 이런 멋진 모습이 보여지고 있는가? 2021년 지엔컴리서치(지용근소장)에서 가정신앙과 자녀 신앙 교육에 관한 조사를 하였다. 이 조사에서 ①우리 가정의 신앙은 건강한가? 하고 물었을 때 69%가 건강하다고 말하고, 31%가 건강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②신앙적인 가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역할자는 누구인가?를 물었는데, 아버지가 51%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어머니(40%), 목회자(2%)로 나타났다<도표 2.3>.
그리고 고등학생 이하의 자녀를 둔 가정의 가족 전체가 출석하는 비율은 79%인데, 아버지가 교회에 출석하면 출석률이 85%가 되고, 어머니만 교회를 출석하면 가족 전체 출석률은 70%로 떨어진다. 이 통계는 자녀들의 신앙에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도표 4,5>.
그런데 이 리서치에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는 몇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자녀들에게 부모님의 신앙을 계승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47%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고, 연령이 높을수록 그 비율은 낮아진다. 그래서 유치원생은 부모님보다 신앙생활을 더 잘할 것같다는 질문에 72%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고등학생이 되면 65%만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자녀는 우리보다 더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우리 믿음의 선배인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4절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그 모세의 이름 앞에 믿음으로 라는 수식할 수 있는 배경을 23절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모세가 믿음으로 라는 수식어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오늘 본문을 읽기 바란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가 태어날 때 애굽의 바로왕은 모든 사내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눈물을 흘리며 나일강에 아들을 던져서 죽였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벳은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3개월 동안 숨겨서 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고개를 꺄웃하는 부분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아므람과 요게벳이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은 이유를 아이의 아름다움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갓 태어난 아이는 그렇게 예쁘지 않다. 그런데 모세는 얼마나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잘생겼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이는 것을 아까와 할 정도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을 보면 스데반은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눈으로 모세를 보았을 때 두려움 없이 모세를 3개월 동안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주관으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아므람과 요게벳은 믿음으로 모세를 보았다. 그리고 3개월 동안 두려움 없이 아이를 키운 것이다. 그런 아므람과 요게벳은 더 이상 모세를 키울 수 없어서 하나님께 모세를 맡겨서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흘려 보내었다. 그러한 아므람과 요게벳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유모로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래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된 모세를 젖을 먹이며 키우는 것이다.
그때 요게벳은 모세를 어떻게 키웠겠는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았다. 당신이 만약 요게벳이었다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된 모세를 히브리인으로 키우겠는가? 애굽의 왕자로 키우겠는가? 하고 질문했다. 애굽의 왕자로 키우면 결국 애굽의 왕이 되어서 모세는 최고의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게벳이 모세를 히브리인으로 키우면 모세는 애굽의 왕좌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요게벳이 모세를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모세의 인생은 이집트의 왕이 될 수도 있고, 쫓겨나 고통하는 인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게벳은 모세를 애굽의 왕자로 키우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25절)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눈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내 자녀를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가진 요게벳은 모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하여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쓰임받는 믿음의 용장으로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부모된 저와 여러분이 가진 사명이 아니겠는가? 지난 주는 자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것에 대하여 전하였다면 오늘은 부모된 저와 여러분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녀들이 가진 세상의 가치관으로 부모가 혼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가진 이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믿음의 대가 이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우리 자여교회 성도들이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