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았습니다. 궁궐소개의 마지막 부분으로 들어가면서 문득
이곡이 떠올라 한번 들어 보았습니다.
가기 전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가끔은 내 마음도 저 푸른
나뭇잎처럼 아무런 얼룩 없이 맑고 청량하면 참 좋으련만,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감정의 굴레 속에서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날이 참 많습니다. 내 안의 집착과
서운함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를 때도 있지만, 그저 오늘의 내가 어제보다 조금은 더 유연하고 넉넉한 사람이기를 조용히
바라봅니다.
여름의 초입인데도, 늦은 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제법 서늘해 슬그머니 창문을 닫게 됩니다. 이런 심한 일교차에 다들 건강을 염려하는 요즘인데요. "주말에 누가 저 먼 바다를 보러 갔다더라, 어디 초록이 우거진 숲길이 그렇게 아름답다더라"
하는 남들의 여행 소식에 잠시 마음이 솔깃하다가도,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책상에 앉아 차분히 일을 하고 이렇게 청취자 여러분을 만날 대본을 씁니다. 이런 평범하고 고요한
일상이 제게는 그 어떤 풍경보다 가장 큰 위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려한 궁궐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조금은 쓸쓸하고도
눈물겨운 역사 속 이야기들입니다. 잠시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저와 함께 조용히 그 시절의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는 건 어떨까요? 오늘 여행의 문을 열어줄 첫 번째 곡입니다. 장사익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찔레꽃> (큐)
[제1부: 서쪽의 궁궐, 경희궁의 눈물]
건드리는 저녁입니다. 우리 라디오 시간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도성의 서쪽에 있어 '서궐'이라고 불렸던 <경희궁>입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부른 것과 비대칭을 이루는 별칭이죠. 광해군 때 짓기 시작한 이 궁은 원래 '경덕궁'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와 발음이 같다 하여 영조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머물렀고, 특히 영조 임금은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낼 만큼 사랑했던 궁궐입니다. 숙종 임금이 태어나고 승하하신 곳이기도
하고, 정조 임금이 즉위하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당당히 외쳤던 역사적인 무대도 바로 이곳 경희궁이었지요.
둔갑했다가,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은 끝에 겨우 돌아왔습니다. 본래 동남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던 정문이 지금은 엉뚱하게 남향으로 바뀌어 기형적으로
서 있으니, 볼 때마다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경성중학교 교실로 쓰이다가 지금의 동국대학교 경내로 넘어가 '정각원'이라는 법당이 되어버렸고, 지금 경희궁에 있는 건
새로 본떠 만든 복원품입니다. 숭정전 계단을 오르실 땐 소맷돌 측면의 당초문과 Y형 뿔을 달고 엎드린 해학적인 해치 해태상을 눈여겨보세요. 비록 세월의 단절로 조잡한 화장술을 한 여인의 얼굴 같은 씁쓸함이 남지만, "이나마도 되찾았다"는 위안을
삼으며 허물어진 궁터를 거닐어 봅니다.BGM END.
음악듣고 가시죠 조용필이 부릅니다. 어제오늘그리고(5.08)/큐
BGM START
있노라면, 궁궐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내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 또한 얼마나 눈물겹고 헐벗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방 직후였던 1946년의 어느 날을 기록한 오래된 단편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울의 거리는 전재민들과 피난민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눈물겨운 생계의 전쟁터였습니다.
이른바 '광주리 승객'들이 가득했습니다. 시골에서 나물이나
생선을 광주리에 이고 나와 팔아야만 겨우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어머니들이었죠. 자리가 없어 버스 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다가 사람들에 치여 신발 한 짝이
길바닥으로 툭 떨어지면, 그 닳아빠진 '떨거지 신발'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승객들의 애달픈 풍경이 가득했습니다.
기사 역시, 눈물겨운 퇴근길을 맞이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차마 차 문을 닫지 못해 매달린 승객들을 보며 모질게 마음을 먹다가도, 결국엔 그 고단한 삶의 무게에 가슴이 먹먹해져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기사들의 이야기... 나라를 빼앗긴 궁궐의 눈물이나, 그 땅 위에서 하루하루를 눈물로 버텨낸 소시민들의 삶이나, 그 아픔의 깊이는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힘겨운 시절을 버텨내며 지금의 우리를 키워내셨겠지요.
비록 지금은 화려한 빌딩 숲 사이에 초라하게 남은 궁터이지만, 그 흙바닥 속에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뜨거운 눈물과 삶의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있습니다. 이번에는 분위기를 조금 바꿔서 청량한 바람을 불어넣어 드릴게요. 이선희가 부릅니다. <아름다운 강산> (큐)
[제2부: 정릉동 행궁에서 대한제국까지, 덕수궁]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다 불타버려,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 후손의 집과 주변 민가를 합쳐
임시 거처인 '시어소'로 삼은 것이 그 눈물겨운 시작이었지요. 가뜩이나 나라 전체가 도탄에 빠졌는데 임금이 머무는 곳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처량하기 짝이 없던 공간이었습니다.
선조가 이곳에서 눈을 감으신 후,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며 비로소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후 인조반정
성공 후 인조 역시 이곳 별당(지금의 즉조당으로 추정됩니다)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은 아주 오랫동안
주인을 잃고 비어있게 됩니다.
경운궁은 다시 한번 격동의 역사 중심에 서게 됩니다. 본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심이 발전하고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이 동쪽에 건립되면서, 원래는 동문이었던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 1906년, "국운이 날로 번창하고
한양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지금의 이름인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하지만 이 문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태평로 확장 공사가
진행되면서 길 한가운데 섬처럼 갇혀 있다가, 결국 원래
자리에서 33미터나 뒤로 물러앉아 지금의 자리에 외롭게 서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 않아 마치 백성의 소박한 살림집 같은 중층 건물 .
<석어당>이 보입니다. 이곳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가 이른바 '서궁'으로 격하되어 10여 년간 유폐된 채 피눈물을 흘렸던
한 맺힌 현장입니다. 또한 영원할 것 같던 권력을 휘두르던
광해군이 반정에 성공한 인조에게 옥새를 넘겨주며 꿇어앉아
죄를 추궁당하던, 서릿발 같은 역사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BGM END
이번에 들으실곡은 유익종의 이연입니다.(4.27)/큐
BGM START
먼저 전해집니다. 인목대비가 흘렸던 피눈물, 그리고 자신이
왕위에서 쫓겨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이곳을 경운궁이라 명명했던 광해군의 비극적인 운명까지... 역사는 늘 이렇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반전과 비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하소설 《객주》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조선 후기, 전국의 장시를 떠돌며 목숨을 걸고 길 위의 삶을 살았던 보부상들의
이야기지요. 주인공 천봉삼은 평생을 엄격한 보부상의 규율을 지키며 의리를 목숨처럼 여겼고, 마침내 수많은 상인들의
존경을 받는 행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돈과 명예, 권력을 모두 손에 쥐며 평생의 고생을 보상받는 듯했지요.
근대화의 물결과 외세의 압박으로 인해 평생을 바쳐 지켜온
보부상 조직은 하루아침에 강제 해산되고 맙니다. 천봉삼이
가졌던 그 모든 권력과 재물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결국 그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돌아가 차가운 길 위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죠. 화려한 행수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처량한 나그네로 돌아간 천봉삼의 운명은, 어쩌면
왕좌에서 쫓겨나 배를 타고 유배길에 올라야 했던 광해군의
처지와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제3부: 눈 크게 뜨고 세상을 보라, 준명당과 중명전]
있습니다. 고종황제가 대신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던 편전인 <준명당>인데요. '깊고 밝은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현판의 '밝을 명(明)'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기묘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통 밝을 명자는 해 일(日) 변에 달 월(月)자를 쓰지만, 준명당의 현판에는 날 일자가 아니라 '눈 목(目)'자에 달 월자가 써져 있습니다.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 속에서 "제발 눈을 크게 뜨고 세계
정세를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고종황제의 눈물겨운 경고이자 염원이 담긴 해석이 존재합니다. 밀려오는 거대한 외세의
파도를 보며, 힘없는 나라의 군주가 할 수 있었던 간절한
기도였을지도 모릅니다.
외곽의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던 벽돌 건물 <중명전>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맙니다. 일제의 총칼과 협박 아래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지요. 하지만 고종황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권 회복을 위해 이곳 중명전에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파견하는 목숨을 건
비밀 작전을 감행합니다. 비록 세계 열강의 냉대로 외교적
도전은 좌절되었고 특사들은 타국에서 순국해야 했으나, 나라를 지키려 했던 그 숭고한 국권 수호의 의지는 지금도 중명전의
붉은 벽돌 사이에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BGM ENF
음악한곡 들으실까요? 백지영의 사랑안해 듣겠습니다(4.14)/큐
BGM START
자꾸만 귓가에 맴돕니다. 만약 그때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눈을 뜨고 힘을 길렀더라면, 중명전에서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는 그 처참한 부끄러움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요? 역사의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훗날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가혹한
고통의 대가로 돌아왔습니다.
보면, 잘못된 시대와 부모의 죄악으로 인해 평생을 어둠 속에서 괴물로 살아가야 했던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삶이 나옵니다.
빛의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의붓딸에게까지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여인 유키호와, 그녀를 위해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인과 악행을 저지르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남자 료지의 이야기... 그들은 태양이 뜨지 않는 밤, 즉 '백야'의 길을 함께 걸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잔혹한 어둠일 뿐이었습니다.
아픔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빼앗긴 조국의 땅
위에서, 밤이 찾아와도 차마 불을 켜지 못하고 숨죽여 울어야 했던 이름 없는 영웅들... 하지만 소설 《백야행》의 주인공들이 서로를 파멸시키는 어둠으로 걸어 들어갔다면, 우리 선조들은 비록 몸은 어둠 속에 있을지언정 다음 세대에게 '빛'을 물려주기 위해 스스로 번개처럼 스러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제4부 : 정관헌의 가비 한 잔, 그리고 낭만에 대하여]
언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볼 곳은 덕수궁 후원의 깊숙한 언덕 위에서,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관헌>입니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한식과 양식을
조화롭게 절충해 지은 아주 아름다운 휴식용 건물이지요.
지붕은 전통 기와 양식이지만, 기둥과 난간은 화려한 서양식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어 묘한 낭만을 풍기는 곳입니다.
마룻바닥에 앉아 쓰디쓴 커피, 즉 '가비' 한 잔을 마시며
외교 사절들과 연희를 즐기고 잠시 숨을 고르셨다고 합니다.
눈앞에서는 나라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이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정자에서 붉은 가비 향을 맡아야 했던 황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것은 결코 달콤한 휴식이 아니라, 타들어 가는 가슴을 달래기 위해 쓴 고독을 삼키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덕수궁까지의 시간여행은 여기까지입니다. 우리 땅의 전각 하나, 기단석 돌 하나에도 붉은 세월의 풍화와 아픔이 숨 쉬고 있음을 기억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평범하고 고요한 일상이, 수많은 역사 속 눈물
위에서 피어난 가장 아름다운 기적이라는 사실도 함께 마음속에 담아 가셨으면 합니다.
(음악7: 최백호 - 낭만에 대하여 / 분량: 약 4분 10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