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행위 이건 간에 그 행위가 행위자에게 그의 개인적 특성을 요구하고, 이 점을 눈에 띄게 드러내 놓을 때, 우리는 예술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달리 말한다면, 예술이란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고, 예술과 함께 곧 '스타일'―스타일에 의해서 인간의 특성이 의미될 수 있다면―이라는 것이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 인간의 어떤 행위를 가운데에 이 '특성'―한 마디로 행위자의 '표현' 이라는 것이 대단한 함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그가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을 찾아볼 수 있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술 작품' 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생산된 작품들 에게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처음 볼 때에는 아무런 실용적인 목적에도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럴수록 더 이 작품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표현으로서 그 자체 내에 그의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보이고, 비록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다 하더라도 이것들이 위의 흥미를 유발하는것은 이런 실용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의 표현적인 측면에서인 것입니다. 예술 작품이 '미학적인 작품'으로 변모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견지에서입니다. 우리의 일상어로서의 이 미학적이라는 표현은 미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미의 경험이란 예술 작품의 미학적 토대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의 미학적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관찰자의 눈에는 미학적 행위란 오직 거기에 몸바친 사람을 표현하는 기능, 그리고 이 사람을 통해 단적으로 인간 그 자체를 표현하는 기능 외에는 아무런 다른 기능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것' 은 언제나 '개별적인 것'을 통해서만 찾아지는 것으로, 오디베르띠(Audiberti)는 「한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것들이 미학적 범주 가운데에 자리잡는 예술인가를 나만큼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음악과 회화 그리고 시만을 검토의 대상으로 한정하고자 합니다. 그것들이 이제까지 내가 부여했던 그 정의에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이제 여러분들께서는 보시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상가들은 스콜라 학파의 범 주론으로 되돌아가서는 예술을 '공작(工作)' 의 질서로 분류했습니다. 물론 예술은 하나의 '공작' 이지만, 이 '공작'은 오직 공작된 사물의 '표현적' 특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며, 이 특성은 공작방식―조형 예술에서는 묘사 방식, 문학 예술 가운데에서는 말을 모으는 방식, 음악에서는 소리를 모으는 방식―에 달여 있는 것입니다. 예술이란 언제나 '어떻게' 에 의해서 발현되는 것이지만, 이 '어떻게' 는 모든 '어떻게' 들과 마찬가지로 의미된 사물인 '무엇을' 에 연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물을 그것이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어떻게'를 ·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인 까닭에 공작된 사물의 표현 가운데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그의 '공작' 가운데에서 의도한 것도 이 '표현'이며, 예술 가운데에서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포착하는것도 바로 이 '표현'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표현이란 '개념' 에 적어도 최우선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념은 우리를 그 개념이 담겨져 있는 사물에게로 다시 이끌고 갈 테니까요. 그러니까 표현이란 우선은 오직 정서에 의해서만 반향되는 것이며, 또 지각된 사물 앞에서 이 정서는 사물의 표현과 하나를 이루는 것일 따름입니다. 비록 예술이 우리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예를 들어 오이디푸수와 그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이 생각이 아니라 이 생각이 포용하는 인간적인 의미―인간을 짓누르는 저 운명의 영원한 현 전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간적인 의미는 선험적으로 '느껴진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생각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예술의 대상은 언제나 주어진 바와는 '다른 무엇' 입니다. 따라서 출발점으로부터 미학적인 체럼은 표상적(表象的) 태도, 즉 보고 읽고 듣는 것 가운데에서 보고 읽고 듣는 바와는 다른 무엇을 파악해 내려는 그런 태도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율리우스2세(Jules Ⅱ)의 초상화는, 모리스 드니(Marice Denis)의 말대로「어떤 질서에 의해 정돈된」색채들로 덮여져 있는 캔버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캔버스에 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나는 이 그림에서 어떤 사람의 초상, 내게 있어서는 비록 '이미지로서' 이긴 하지만, 이 사람을 '현전(現前)하게' 해주는 초상을 알아봅니다. 그러니 미학적 체험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이 초상화에서 인간의 어떤 형태, 개성 성격의 표현을 파악합니다 이 순간의 나로서는 비록 화가가 본 대로의 율리우스 2세의 얼굴에 나타난 그 성격밖에는 읽을 수 없지만, 그것이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라는 사실이나 율리우스 2세가 누구라는 사실은 나로서는 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화가가 본 대로만 보고 있으면 됩니다. 화가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이 그림의 생생함과 그 조화로움이 곧 화가이고, 그의 작품들 전체가 그 화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해주듯, 그의 그림은 율리우스 2세에 해한 명확한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니까 미학적 표현은 그림이나 음악 혹은 시편(詩篇)과 같이 예술가가 이루어 놓은 것의 초월적 의미적으로, 예술이 갖는 모든 인간적 가치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있어 이 가치는 '미학적으로 체험된 것의 초월적 의미'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이 됩니다.
내가 지금껏 여러분들께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이런 지적들을 해온 것은 미학적 체험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들로 보이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들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제1조건 : 대상의 필연성―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 아닌 의식은 없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의식은 언제나 하나의 '대상'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대상 가운데에서 미학적 의식이 찾는 바는 어떤 존재 양상입니다. 이 의식은 외양(外樣) 가운데에서 '존재'를 찾으며, 형식가운데에서 이 형식에 의해 예고되는 그 '존재' 를찾습니다. 켄다루스(半人半馬)는 어떤 존재의 일관성을 갖고 있고 게르니카의 인물들도 그러하지만, 마띠외가 그의 캔버스 위에 되는 대로 뿌려 대는 물감 세례며 땡글리의 '기계' 들에게는 그러한 존재의 일관성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때외씨 자신이 자기의 캔버스 위에서 되는 대로 배열되어 있을 뿐인 물감들만을 볼 뿐 인 데, 어째서 거기서 다른 사람들은 다른 그 무엇인가를 보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 우연은 우연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고, 예술 이 한 개인과 다른 개인 사이의 의사 소통이어야 한다면 우연은 무용한 것이 됩니다. 땡글리도 자신의 기계에서 교묘한 메카니즘만을볼 뿐인데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다른 무엇인가를 보아주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이 경우에서 표상 행위는 무너져 버리고, 초월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입니다.
제 2조건―미학적 체험이 가능한 것은 오직 예술 작품이 '보편적으로 인간적' 인 의식 사항들을 사용할 때, 혹은 현상학자들의 말대로 '통주관적(intersubjective)' 인 의식 사항들을 사용할 때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예술 작품이 모두에게 소통될 수 없을 테니까요. 우리들 모두는 (색맹이 아니라면) 동일한 색채 식별력을 갖고 있으며, 또 동일한 방식으로 한정된 주파수의 소리들을 듣습니다. 우리들이 색채와 소리를 지각하는 것은 모두에게 있어서 직접적으로 동일한 것이니까요. 이것들은 모두가 통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소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음이란 일단 듣고 나서도 그 것들을 다시 해석해야 하고, 또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소음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겠다는 것은 정신이 나간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의 언어에 있어서 어휘와 구문은 동일한 언어 환경 내에서는 통주관적인 사항들입니다. 그러나 '문자' 가 의미를 얻는 것은 단어 가운데에서이고, 단어가 의미를 얻는 것은 문장 가운데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라 생각은 되지만, 소위 문자주의 (文字主義, lettrisme, 주: 상형적인 글자, 의성어 등을 시에쓰자고 하는 주장)시에써야한다고 주아하는 )란 우스꽝스러운 기도였던 것입니다. 하나의 악곡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같이 상반된 두 가지의 주관적 태도를 대비한다는 것은 이것들이 동일한 '통주관적' 사항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모두에게 있어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 음악이 갖는 어떤 통주관적 의미가 있어야 하며, 이 의미는 각자가 갖는 음악에 대한 취향과는 무관하게 각자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음악에는 어떤 '진실' ― '만든 사람의 진실과는 다른 그 무엇' 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내부와 소리들 가운데에서 음악이 갖는 어떤 조건들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모든 예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그 자신과 그 자신의 견해와 함께 하는 '행복한 소수' 만을 위해 작품을 창조해 낸다면, 그 작품은 타인에게는 전달될 수가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이란 누구든지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미학적 작품은 실패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3의 조건 ― 이것은 내가 '의미의 자명성' 이라 부르려는 것입니다. 미학적 체험 자체 내에서 겪어진 정서에 의해 예술 작품의 의미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만큼, 그것은 이 체험 이전에 혹은 이후에 주어지는 어떤 설명에 종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학적 체험이란 그것이 실제로 겪어지는 순간에 스스로에게 명백해야만 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직 정서에게만 명백하기 때문에 사유에 의해서, 특히 작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만든 사람이 하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는가를 이야기해 주는 사유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음악의 심적 의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가능하지만, 그래도 이 분석이 우리로 하여금 그 실제로 겪은 체험은 되찾게는 못하는 것이고, 실제 체험을 명확하게는 해주겠지만 역시 '되찾게는' 못할 것입니다. 체험을 되찾기 위해서는 체험을 되풀이해야만 합니다. '미학적 체험' 이란 그 분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렸듯이 의미의 자명성은 예술 작품의 제조건에서 기인한다고 했습니다. 이 조건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 작품 탄생의 순간과 장소에서, 다시 말하면 만든 사람이건 보는 사람이건 간에―왜냐하면 이들은 모두가 동일한 현상에 대한 의식이므로―예술 작품과 마주하고 있는 인간의 의식 가운데에서 이 조건을 포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선 음악에서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음악이 내가 무언가 과학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고 또 내가 오랜 체험을 했었기 때문에 현상학적 연구를 계속 해올 수 있었던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가 들려 오고, 여러분들에게는 허공 중에 멜로디를 그려 가는 것이 바이올린인 것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이올린은 결정된 주파수에 의한 소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어가면서 퍼지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청각은 대수적인 것으로, 다시 말하면 주파수는 우리 귀에 단순한 크기로서 지각되고, 이 주파수의 비율인 음정도 역시 단순한 크기로서 지각되며, 이 주파수의 비율의 '곱' 인 음정의 연속체는 이 크기들의 '합' , 음정들의 합으로 지각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귀 에 있는 달팽이관의 경사진 부분 위에 자국을 남기는 이 크기들은 각각의 소리들을 달팽이관 위에다 이 기관의 축에 대한 상대적인 높이로 자리잡게 합니다. 이와 같이 멜로디를 만드는 것은 악기가 아니라 우리의 귀이고, 마치 소리들이 공간 가운데에 하나의 선(線)을 그리는 것인 양 소리를 지각하는 것도 바로 우리의 귀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작용하는 것이 오직 우리의 귀뿐이라면 이 선은 칠판 위에 그어진 선처럼 정적(靜的)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멜로디가 나타나게 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 아니 그보다 먼저 만든 사람에게 있어서 정서 활동이 청취 활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이 선을 공간 속에서의 소리의 움직임으로 지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실제 체험 가운데에서 하나의 음 위치로부터 다른 음 위치로의 이동이란 일종의 감성적 긴장이고, 이 긴장을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음향 영상이란 곧 소리라는 거울 속에 비쳐진 이 긴장의 반영일 뿐입니다.
음악 전체가 감성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은 결국 멜로디가 하나의 리듬 구조를 갖는다는 점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의 정서 활동과 모든 심적활동은 사실 우리의 호흡이 갖는 규칙적 반복성(chdence)의 토대 위에서 그 형태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멜로디의 모든 여정(旅情)이 규칙적 반복성의 구조를 갖게 되어, 음악은 우리를 자체만의 시간―이 세계의 시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내적으로 체험된 시간―, 음악의 규칙적 반복성으로 측정되는 시간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멜로디의 음 구조와 리듬 구조는 함께 태어나며, '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따로따로 구성해서 나중에 합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멜로디를 이루기 위해 함께 솟아오른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든 미학적 행위 가운데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어 내가 지금 잠시동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의식활동의 특수한 조건을 내포하고 있으니, 그것이 곧 '순수 반성' 현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 내에서 활동이며 행동함에 있어서 이 세계와 지각에 의해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순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는 우리의 내적 활동과 외적 활동, 우리의 주관적 활동과 객관적 활동 사이에 완벽한 합치가 이루어지고, 우리의 주관성은 사건들 가운데로 자리잡게 되어, 객관적인 모든 것이 생겨나면서부터 주관성과 결부되고 따라서 객관적인 모든 것이 주관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바에 대해 납득할 필요를 느낍니다. 바로 이 순간에 이 세계와 또 이 세계 내의 사물과 맺고 있던 우리의 내적 연결이 끊여져 버리고 우리는 이 세계와 이 세계 내에서의 우리의 행위로부터 '거리'를 갖고서 이들을 훑어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사유에 의해서 납득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사유에 의해 반성하기 위해 훑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2 차 적' 반성이고, 반성할 때의 인간이 갖는 자연 상황인 것입니다. 순수 반성 가운데서의 인간은 반성하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반성이라고 말한 때 뜻하는 것은 바로 이 2 차 적 반성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2 차 적 반성을 그대로 반성이라 한다면 우리의 모든 '선험적(先驗的)인' 것의 근원인 순수 반성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차적 반성은 일단 만들어져 있는 사물, 일단 완결된 행위에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2 차 적 반성은 이미 구성되어 있는 음악이나 회화 혹은 문학 작품에 관련되는 것이며 이론적 사유와 기법과 사유의 특수 상황인 것입니다. 순수 반성 가운에서라면 기법은 자연적 인 것입니다만, 기 법적 사유란 이같이 창조되어져 있는 기법에 대한 반성인 것입니다.
음악이 인간의 정서 활동의 진정한 '의미', 그러니까 감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표현인 이유는 음악이 바로 순수 반성적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음악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 까닭은 이제 곧 살펴보게 될 이유에서입니다. 순수 반성 가운데에서 의 인간의 모든 지향성(志向性)은 행하고 있는 것에 향해져 있으나 그래도 그는 자기 자신에게 현전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자신의 밖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또 자신에게 '비(非)반성적' 으로 현 전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 의식으로서의 '비 반성적' 자아 의식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술 속에서 인간은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의 자신을 모두 바치며 그의 진실을 우리에게 내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술 창조의 주체가 비 반성적 자아 의식이라는 사실은 이제 우리가 음악적 창조 행위 가운데에서 확인하게 될 대단한 중요성을 갖습니다.
음악에 관계되는 모든 음정들이 대수적인 것이라고는 했습니다만, 이 대수들이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대수적인 속하지 않는다면 음악적 체험이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가운데에 아무런 대수 계산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 수식은 그 베일을 벗겨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 대 수식이란 바로 옥타브 내에서 4 도 음정에 대한 5 도 음정의 비율에 기초한 조성 전망(perspectuves tonales)에서 소리들을 조직하는 체계로, 음계의 근원이며 음악에서 작용할 수 있는 소리들을 선택하는 이유이고,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언어의 구문론이 그 언어가 갖는 의미의 자명성의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갖는 의미의 자명성의 조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창조자로서의 음악가가 그의 선율과 화성을 그려 나갈 음향 공간이란 '이미 구조화된' 공간으로 조성 법칙, 음악적 조성 법칙이라 불리 우는 소리의 조직 법칙을 설정하며, 또 음악 가운데에서 작용하는 대 수식에 의해 결정되는 조성 전망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음악이란 조 성적 혹은 다 조 적인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 의미의 자명성을 잃지 않고서는 무조적(無調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보았듯이 음악 가운데서 활동하는 의식은 비 반성적인 자아 의식이고 따라서 이는 조성 법칙에 대한 비 반성적 의식, 곧 음악적 구조들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비 반성적인 순수 실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실상 서구 음악의 의식은 그의 전 역사를 통해 그 '까닭' 도 모르면서 조성을 실천해 온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그 자체 내에 조성 감각을 지녀 왔다 함은, 그것이 조성 법칙에 대한 순수 '직관' 이었다는 말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창조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이 의식은 끊임없이, 새로이, 자생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이론도 없이 창조를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론이란 언제나 '사후(事後)'에 오는 것이니까요. 서구시대 이전까지의 음악 의식은 그의 조성법칙을 '찾고 있는 중' 이었습니다. 이미 이 의식은 5 도 음정과 4도 음정 그리고 옥타브 음정에 의거해 있었습니다만, 그 중간 음정의 결정은 계산과 추론 혹은 악기들의 경험적 제작 가운데에서 그러니까 이차적 반성 가운데에서 이루어졌고, 조성 구조들이 이처럼 미리 정해졌다는 것은 곧 음악 의식이 '밖으로부터' 결정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해서 고대 문화의 여러 발상지들―중국, 일본, 인도, 페르시아, 아랍 제국, 그리이스―은 각기 나름대로의 음악을 다듬어 냈으며, 이 음악은 일단 주요전형(典型)으로 구성된 후 그대호 남아, 역사 가운데에서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고 영속되어 온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소통될 수 없는 닫혀진 세계들이었습니다. 음악가가 안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직관을 갖고 있던 조성 법칙으로부터 자기 규정을 하기 위해서는, 음악 가운데에서 활동하는 감성적 의식이 '자족적인 것' 이어야만 했고, 이 순간의 조성 법칙이 보편적인 인간항(項)인 까닭에 음악은 만인에게 소통 될 수 있는 언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렇게 해서 이 언어는 우주적인 유효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구 시대의 음악 의 여명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서구의 음악 의식에 의해 획득된 자족성의 증거는 이 의식이 배태한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이스인들의 7 음 음계로부터 출발한 음악 의식은 반음계를 배태했고, 순수 선율에서 출발하여 다 성 음악과, 마치 바탕 위에 그 형태가 기초하듯 선율이 화성으로부터 떠오르는 화성에 기초한 음악까지를 배태해 온 것입니다. 노래로 불러지는 가사에 의해 그 형식을 다듬고 난 음악 의식이 화성 진행 가운데에서 자족적 형식, 가사도 음악 외적인 주제도 없는 소위 음악의 토대를 찾아 낸 것입니다. 동시에 음악 의식은 가능한 모든 표현 기도(企圖)를 가능한 모든 음악의 장르에서 탐사하기 시작했으니, 푸가와 소나타 그리고 심포니에서는 자기 표현을, 교향시와 표제 음악,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리이트, 릴릭 드라마(le drme lyrique)에서는 무엇인가의 표현―다시 말하면 서정성(lyrisme)을 표현했고, 거기에다가 무곡과 발레에서는 표상적인 음악까지 고려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19 세기 말, 20세기 초엽에 와 있으며, 음악은 드디어 그 의언어를 모두 다듬어 낸 것입니다. 이 말은 음악가가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은 음악가는 역사를 통해 얻어진 조성 언어를 자기 방식대로 사용하는 개별적인 스타일을 통해서만 새로운 창조를 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1914년 대전을 전후로 해서 인정받던 음악가들―라벨, 파야, 스트라빈스키, 바르트크, 힌데미트, 오네거 등등의 음악가들은 조성 음악의 최후의 가능치인 다조성이 가능성까지를 답사해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세게 초에서부터 쉔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은 무조성의 유혹을 받았고, 조성적이라 일컬어지는 구조들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고안해 낸 12음 혹은 음렬 기법을 가지고 조성 음악의 본령인 감가의 자명성을 잃은 그런 음악들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조니(Feruccio B. Busoni)의선동을 받은 다른 음악가들은 음 구조를 지배하는 대수식에 포함될 수 없는 음정들인 1/4음정과 1/3음정을 음악에 도입하려 했고, 메씨앙(Olivier Messiaen)과 보리스 블라쉐(Boris Blacher) 같은 사람들은 리듬 구조와 음 구조를 분리해―이것은 7 죄종(罪宗) 가운데 하나입니다―각각에다가 따로 따로 의 법칙을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음악가들은 전자 음악을 만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소음을 가지고 음악을 하겠다던 삐에르 샤에페르(Pierre Schaeffer)나 존 케이지(John Cage)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존 케이지 같은 사람은 심지어 침묵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두 가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하나는, 전자 음악이 우리의 음 구조들을 그 리듬과 함께 재생시키는 것인데 이것은 조성 음악의 형편없는 모방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순전히 전자적인 음색들은 우리 악기들의 음색이 갖는 표현적 특성을 갖지 못하고 기껏 갖는다고 해봐야 그저 라디오 방송이나 축음기 식의 녹음과 같은 경우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전자 음악이 우리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음정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음악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 전자 음악은 우리에게 음악이 갖는 인간적인 표현성 을 되찾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초기의 전자 음악가들은 그 들 스스로가 그들의 기계를 통해 음향을 만들어 냈습니다만, 힐러(Hiller)와 아이작슨(Isaacson)은 1956년 시카고 근교의 우르바나(Urbana) 대학교에서 '일리야크(Illiac)'라는 전자 기계에 의해 작곡된 현악 4중주를 들려주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 기계를 가지고 리듬 상으로 조직된 음악적인 음정들을 생산해 냈습니다만, 그 음정들을 조직하는 수고는 그들의 기계에게 맡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이 음악 뒤에는 기계의 눈먼 메카니즘 이외에 그 누구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현악 4중주가 아무리 음악과 비슷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 인간에 의해 체험된' 정서 활동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음악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불확정성(l'aleatorisme)'을 잊을 뻔했습니다. 불확정성이란 연주가에게 어떤 자유, 때로는 텍스트를 연주해 내는 데 있어서 무한정하기까지 한 자유를 넘겨주는 음악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술이 만일 '어떻게'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라면 그 '어떻게' 가 바로 여기서는 독단적인 것이고 우연적인 것이 됩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지적하기를, 예술에서의 우연이란 유효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엉뚱한 미학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열거한 모든 기도들은 음악의 제조건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음악이 갖는 감각의 자명성이나 혹은 그것의 인간적인 의미를 잃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음악은 어떻게 해서 우리를 아름다운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일까요 ? 이는 우리의 정서 활동이 그 가운데에서 아무런 영매(靈媒)도 없이 그 스스로의 영상을, 좀더 나아가 소리를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순수하고 단순한 반영을 만나는 까닭에서입니다. 인간의 의식이란 오직 스스로의 반영 가운데에서만 스스로를 알아보는 그 무엇입니다. 음악 속에서 정서를 움직이는 정서의 감각적 반영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감동적 충격' 이며, 인간을 그 환락 가운데로, 예를 들어 우리가 자연의 아름다운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그러한 존재의 충만감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미(美)의 경험은 이와 같이 해서 진(眞)의 경험과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catharsis)' 라는 이름으로 그가 비극과 음악에서 만났던 '정서의 순화'를 지칭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정서를 이 세계의 우연성 가운데에서, 그리고 매우 자주, 다양한 사유와 다양한 감정들의 우연성 가운데에서밖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음악적 정서란 어떤 혼합물도 아니며 그의 순수한 정수(精粹)로 환원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우연성이 벗겨진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음악적 영상이란 그 자체가 소리들이라는 거울 속에 비쳐진 정서의 반영의 까닭에 우연성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음악은 카타르시스이며, 음악이 우리에게 미적 감동을 일으키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음악은 그 어떤 다른 예술보다 더욱 순수하고 더욱 충만된 형식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음악에서 보여지는 정서는 '아무런 영매도 없이' 이 정서를 화려하게 꾸며 주는 이미지 가운데에서 단순히 체험되기만함으로써 스스로의 참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음악 가운데에서 오직 우리의 감수성의 표현만을 보아 왔습니다만, 이제 우리는 왜 음악이 감동적인 것인가 하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음악이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무슨 감정이건간에, 음악이 의미해 내는 그 감정들 때문이 아니라 음악이 그 감정들을 미의 감동 가운데에서 체험하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음악이란 항상 아름다운 것이거나 아니면 실패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미적 감동이란 다양한 질서를 갖는 것으로 가벼울 수도 있고 심오한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싸르트르의 다음과 같을 말은 옳은 것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미를 그 형식에 의해서, 혹은 그 내용에 의해서 정의해서는 안된다. 단지 그 존재의 밀도에 의해서 정의해야 할 것이다」따라서 우리가 위대한 음악이라 부르는 것은 가벼운 음악보다는 더욱 큰 존재의 밀도를 갖는 음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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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서는 미적 체험이 음악과는 다른 본질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우리를 아름다운 속에서 살게 하지만 회화는 우리를 아름다움을 '앞에' 두기 때문입니다. 회화에서 우리는 화폭 위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마치 아름다움이라는 정서가 얼굴이나 풍경 혹은 사물들의 완벽한 배치의 표현에서, 혹은 사과 접시나 생활 광경 또 때로는 가련하고 불쾌하고 또는 괴기 스럽기까지 한 어떤 특성의 완벽한 표현에서 비롯되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이 두 가지 경험 사이의 차이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우리에게 와 닿는 사건 사이의 차이입니다. 어쩌면 회화 앞에 선 우리는 감동― '무엇에 의해 움직여지다' ―보다는 오히려 동요― 뒤흔들리다― 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회화가 완벽할 때 우리를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은 곧 거기에도 '카타르시스' 가 있다는 점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아비뇽의 피에타 Pieta d' Avignon〉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심이 아니라, 이 군상(群像)들의 표정 이외의 모든 우연성 이 사라져 버린 '인간의 위대한 연민'을 겪기 위해서는, 그림의 초월적인 의미로까지 곧바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화가와 마찬가지로 시인의 감동도 하나의 영매―그의 언어―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말에 의해 '움직여질수'도 있고, 또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감정들과 이미지들로 해서 '뒤흔들릴 수' 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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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울리는 회화와 시에까지 왔습니다.
회화의 역사에서는 음악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소구와 고대 문명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음악에서의 이차이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기독교적 탐구의 결과로 인해 오직 서구에서만 음악 의식이 그의 자족성을 얻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시각 의식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족적인 것이고 따라서 조형 예술은 어디에서나 동일한 조건을 받는 것이므로, 일본 회화나 비잔틴 회화는 (그리이스 조각은 제외하더라도) 우리의 회화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중국을 제외한다면 고대의 음악은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일 뿐으로 단지 기록상의 흥미만을 가질 뿐입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직립 자세 때문에 우리의 공간 시각은 수평과 수직에서 본 사물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공간적 시각이란 유클리드(Euclide)적인 것이고, 유클리드 기하학은 우리가 공간을 도식화하는 첫 번째 시각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건축가들 은 기하학적인 도형을 사용하는 것이고, 미개인들은 그들의 그림을 기하학적으로 만드는 것이며, 또 이슬람 미술 가운데에서의 아라베스크나 동양의 카페트의 도안이 언제나 직선과 다각형의 형태와 관련되고 2 차 곡선의 아치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회화에 있어서의 '황금 분할'(주: 직사각형의 두 변의 비례가 가장 안정감을 주는 경우에 대한 수학적 해결로서 직사각형의 두 변을 a, b 라고 할 때 (a + b) : a = a : b 가 되게 비례를 잡은 것임. 이 비례는 약 1 : 1.618 이다)의 자생적 사용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비록 등가물(等價物)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겠지만― 옥타브 내에서 의 4 도 음정에 대한 5 도 음정의 비율, 혹은 5 도내에서의 자연적인 단 3 도에 대한 장 3 도의 비율과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감각의 사항들은 보고 듣는 방식의 '규준'을 세우는 우리 지각 의식의 상관적 활동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차적 사실들을 환기한다는 것은 유치한 짓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전위 잡지에서 뽑은 이런 문장, 아드리앙보비(Adrien Bovy)가 1948년의 우리의 대담 가운데서 인용하던 다음 과 같은 문장을 대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사물의 근본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상투적인 인습 같은 것은 모두 끝자났다」쉔베르크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조성은 하나의 인습(因習)이었던 것입니다. 음악가들이 그들의 음악을 순수한 수열, 조합으로 정의하기 시작했을 때, 에르네스트 크레네크(Ernest Krenek, 1900∼오스트리아 출생의 미국 작곡가―역주)는 이렇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감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서구 회화 또한 서구 음악과 마찬가지로 그의 민족적 혹은 지역 적 흐름의 연속적이거나 혹은 동시적인 접합 행위의 산물입니다. 내가 보기에 서구 회화의 특성을 이루는 것은 공간에 대한 강박 관념, 가시 말하면 2차원의 캔버스 위에다 3차원과 원근법을 나타내겠다는 열망입니다. 사실상 서구 회화는 르네상스, 그러니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원근 화법을 '객관화' 해 낸 것입니다. 이는 음악이 화성을 발견해 냄으로써 바탕 위에 기초한 형태라는 구조를 획득하여, 화성적인 조성 전망(이것은 순수 선율이나 음성에 의한 다성 음악의 경우처럼 선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전망입니다) 위에 기초하게 된 것과 거의 같은 시대의 일입니다.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의 기독교 시대에 와서 획득한 '자아에 대한 감성적 의식의 자족성'의 결과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내가 보기에 너무도 중요한 것이어서, 비록 하찮은 것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로서는 그 본질을 밝히고자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아와 세계 앞에 현 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세계의식으로서의 자아 의식이며 또한 자아 의식으로서의 세계 의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태양의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는 한 이 두 가지 의식의 구조는 서로 혼동이 될 것이며,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 두 개의 의식 구조는 존속하면서도 서로가 구별되게 됩니다. 자아 의식도 이제 더 이상 그의 감각의 노예가 아니고 스스로가 자족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사건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풍요를 약속하는 것인 만큼 또 위험한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는 화가는 자기 앞에 오직 2차원의 화폭만을 가지고―비잔틴의 모자이크나 회화가 증거하듯―2차원으로 환원된 얼굴이나 사물들을 재현해 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로 화가는 캔버스의 평평한 표면 위에가 3차원을 가진 세계를 재현해 내게 된 것입니다. 회화는 이제 우리의 양쪽 눈의 '주관적' 인 공간 시각에 맞아떨어진다는 뜻에서 이 세계의 '사실적(寫實的)' 인 의미행위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화성 시대의 음악은 우리 내적 세계의 '사실적'인 의미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정서의 '움직임' 이란 감성적 '상태' 라는 바탕으로부터 그 형태를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아 의식의 이 같은 자족성의 쟁취는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적 개인주의로 몰고 가려 했고, 또 우리의 자유가 우리의 이 세계와의 유대에 의해서 조건 지워 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이 세계와의 유대를 끊고서도 절대 자유 가운데에서 활기를 띤다고 느끼는 상태로까지 몰고 가려 했던 것입니다. 이때 화가는 그의 화폭 위에가 그 자신의 세계, 여러 요소들은 현실 세계로부터 빌어 온 그의 세계― 왜냐하면 그의 모든 자료들은 바로 현실 세계에서 비롯된 거이기니까요―, 그러나 또 그 나름대로 조직하고 구성한 세계를 의미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평면 위에가 구성되는 이상, 그것 역시 2 차원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화가는 심지어 자신의 육체와도 유대를 끊어 버린 것이 될 것이고, 순수 의식이 되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폭의 그림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그림을 돌려서 혹은 비껴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상투적인 인습 같은 것은 모두 끝장났다」―이것 이 바로 입체파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구상 혹은 비구상 미술의 회화 세계인 것입니다.
같은 탈선 행위가 같은 시기에 음악에서도 빚어졌습니다. 12음 음악은 음악가의 본래의 거처인 조성 세계와 관계를 끊었고, 쉔베르크의 후예들이 리듬의 구조와 음 구조를 분리시켰을 때, 그들은 음악 의식과 그 육신의 유대를 끊어 버리고 만 셈입니다. 결국에 가서 전자 음악에서 음악가들이 음정 구조와 리듬의 구조 그리고 강세와 음색들을 모두 따로따로 결정하였을 때, 이들은 전적으로 인공적인 음악의 세계, 인간의 영혼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모든 내재성이 사라져 버린 공산품(工産品)일 뿐인 음악의 세계를 구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역사적 흐름이 여기에 이르자 음악에서건 회화에서건간에, 미학적 체험의 본질적인 조건들―대상의 필연성,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의사 소통 가능성, 감각의 자명성, 초월성―은 모두가 문제점을 띠게 되었습니다. 만일 작품에만 유일한 초월성이 예술가의 주관성 에 관계된다면, 그래도 이것이 통주관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내가 피카소의 〈만돌린을 든 남자〉를 볼 때, 사람이고 만돌린 이 고간에 모두가 조각 조각이 나서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는 이 그림 앞에서 나는 아무런 '대상'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기하학적인 형태의 짜 맞추기만을 두 눈에 담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멀리서, 그리고 세로로 보았을 때 나는 그 색체의 배열 가운데에서 하나의 풍경―풍경이 지니는 모든 '미학적' 특성을 다지니고 있는 하나의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피카소나 브라크(Georges Braque)의 작품이 갖는 이와 같은 측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나 시리코(Giorgio Chirico)의 초현실주의 적인 그림은 화폭 위에다가 어떤 질서에 의해 짜 맞추어진 잡다한 대상들을 모아 놓고 있습니다. 화가에게는 틀림없이 이 짜 맞추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 테지만, 그것이 과연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게르만 사람으로서, 음악적 기질을 갖고 있는 폴 클레(Paul Klee) 는 예를 들어 다양한 명암을 지니고 서로서로 접합되어 있는 작은 정사각형들과 같은 이상한 그림을 그립니다. 그의 시각 의식은 그의 대상을 창조합니다. 음악적 의식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시각 의식은 그의 대상에 어떤 감성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작은 정사각형, 그것들은 작은 정사각형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나타내질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그림이 갖는 감성적 의미는 분명 전달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술 장르의 혼돈입니다! 순수한 감성은 비록 그것이 자연적인 느낌이라 하더라도 오직 음악에 의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일 따름으로,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순수 감성의 영역은 아닌 것입니다.
추상 혹은 비구상 예술의 경우는 이것들이 회화적 체험을 순수한 감각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듭니다. 여름 하늘에서 잿빛 구름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때면 나는 거기서 일종의 위협을 느끼지만, 위협이 되는 것은 구름의 잿빛이지 잿빛 그 자체는 아닙니다. 내 생각으로는 색채가 회화에서 감성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 색채가 두 대상 사이에 난 어떤 구멍을 메우거나 그림의 바탕색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오직 그 무엇인가의 색채로서일 뿐인 것입니다. 두 가지의 상보적(相補的)인 색채를 모아 놓는 것은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것이지만, 마치 감성의식인 음악 의식이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는 4 도 음정과 5도 음정을 모아 놓는 것이 아무런 감성적인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색채의 조합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색채나 원 혹은 소리들과 같은 순수한 감각적 사항들은 누군가 가 여기에 부여하는 감성적 의미 이외에는 그 어떤 감성적 의미도 지닐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반드시 통주관 적일 필요가 없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회화에서의 '오브제(objet)' , 음악에서의 '모티브(motif)' , 그리고 시에 있어서의 '이데(idee)' 의 필연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화에서의 오브제(objet), 음악에서의 모티프(motif) 그리고 말에 의해 환기되는 어떤 이데(idee)가 통주관적인 항은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오브제와 모티프와 이데를 지각 할 수 있게 해주는 '감각적인 것' 이 모두에게 있어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 모든 예술들이, 이제 내가 피카소에게서 찾아보고자 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피카소는 조각 작품에 유사한 이런 것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염소의 두개골과 병 하나를 마주 보게 해놓았는데, 이 두개골은 석고를 바른 자전거 안장으로 만들어졌고 그 뿔 역시 석고를 바른 자전거의 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병은 휘어진 기와 위에 병목이 솟아 있고, 그 마개에는 굵은 못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염소의 두개골과 병이지만, 뼈로 된 진짜 두개골과 유리로 된 진짜 병이 갖는 감각적 특성은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카소의 흥미를 끈 것은 오직 이 대상들의 형태와 공간 속에서의 그것들 의 배치일 뿐입니다. 그는 회화나 조각 앞에서 '순수 미학적' 태도를 견지하였는데, 내 생각으로는 이제까지 이야기된 대부분의 화가들이 다 그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화폭 가운데에서 오직 '어떻게' 만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 무엇을' 이라는 문제는 파악할 수 없거나 부재하거나, 아니면 무엇이든 다 되거나 혹은 아무 뜻도 없는 것이 됩니다. 이 같은 작품들 앞에서는 더 이상 '마음의 동요'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기껏해야 '순수 미학적 만족' 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최근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태도입니다. 그의 발레 음악〈아곤 Agon〉은 대단히 정묘한 대위법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감동적 실체가 빠진 대위법의 유희로 보입니다. 발랑쉰느(George Balsnchine)의 안무를 보며 이 음악을 극장에서 듣노라면, 안무와 음악 사이에 너무도 기가 막힌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어 모두가 커다란 충족감을 느낄 수 있지만, 이 만족감은 음악에서 오는 것이거나 순전히 형태상의 문제인 안무로부터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이 양자가 서로서로 에게 완벽하리만큼 합치되고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트라빈스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피카소에게서도 한 가지 실패, 이러한 실패로 고통받지 않는 다른 예술가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느낄 수 없을 그런 실패가 있었으니, 이 실패란 내 생각으로는 사랑의 결핍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예술을 사랑할 뿐, 그들의 예술이 그들을 함께 연루케 하는 사물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것은 오직 걸신들린 '욕망' 일 뿐입니다. 장밋빛 시대와 청색 시대의 그림에 대해 피카소 스스로가 이것이 감상성(感傷性)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감상성을 치유코자 했던 그는 사랑을 치유해 버렸고, 뒤 이은 작품에서 그는 사랑보다는 증오를 표현한 것입니다.
시가 갖는 상황은 시인이 이미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한다는 특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구에서의 시의 사조는 기왕에 형성되어 있는 각 국 언어만큼이나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 언어를 자체가 이미보고 느끼는 어떤 방식의 표현인 셈이므로, 각 민족의 시적 경향이 어떤 공통되는 정서, 서구인의 시적 정서가 되기 이전의 인간 정서였던 공통되는 정서의 다양한 양태를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밝혀 줄 수 있을 흥미로운 연구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의 본령(本領)은, 산문에 비해 볼 때 모든 표현 예술관 마찬가지로 그 정서 가 사유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맡는 순수 반성 행위입니다. 그리고 나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지적하기를, 우리의 정서 활동은 우리의 내부에서 호흡의 규칙적 반복성을 토대로 그 형태를 취한다고 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순수 반성 가운데서만 정서의 표현이 규칙적 반복성과 리듬의 형태를 취한다고 했습니다. 시작(詩作) 활동 가운데에서조차 그리이스인들은 음악에서 작용하는 리듬을 갖춘 규칙적 반복성―단단격(短短格, pyrrique), 단장격(短長格, lambe), 장단격(長短格, trochee), 장장격(長長格, spondee), 장단단격(長短短格,dactyle) 등등―을 분명히 해 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시어의 특성은 그것이 '결정된'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시행을 서로 연결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적 수단인 각운(脚韻)은 시 의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각운은 산문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또 산문이라도 그 규칙적 반복성이 느껴지는 데 따라 시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라뮈(Ramuz)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라뮈의 문체는 구술체입니다. 그의 글을 읽을 때에는 그가 그 규칙적 반복성 가운데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산문(산문) 과 시를 구별해 주는 것은, 싸르트로가 말했듯이, 말이 시속에서 '사물'이 되고 이미지를 만들며, 개념이라는 것을 잊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그런 까닭에 시의 구문은 산문의 구문과 같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몇 개의 단어들이 아무런 논리적 관계없이 연결된다 해도 시적 정서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한 것이 됩니다.
오 양털이여, 목덜미까지 물결 이는
오 곱슬 머리, 오 무심함으로 가득찬 향기여,
황홀 !
이미지들의 이 같은 연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동사는 나중에 야 오고 있고, 그 동사는 자주 연결사(copule) 의 역할 정도로 환원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사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시적 정서로 채워진 단어들의 관계에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의 자연 언어가 산문인 까닭에 시 가운데에서도 산문의 구문을 찾을 수 있을 때에만 시의 의미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시의 구문이 산문의 구문으로부터 떨어지면 멀어질수록 시는 비유적인 것이 되고, 그 이미지들은 더욱 더 기묘한 것이 되며, 시는 난해한 것이 됩니다. 불어에서는 말라르메(Stephane Mallame)로 인해 시가 난해성의 극한에 이른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극한에 이르렀다함은, 시인이 사용할 수 있는 난해성이 그래도 아직은 그 의미를 비쳐 보이게 할 수 있는 한계 내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 한계를 지나서는 시적 정서는 오직 음악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음악이란 이성을 갖춘 감성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목신의 오후 L' APres-midi d' un faune〉에 대해 말라르메는 이렇게 말 했습니다.
첫 숨결의 숲의 요정
네 피리가 뜻을 이루었다 해도
거기에 드뷔씨가 불어 넣은
온갖 빛에 귀기울여라
그러나 불레즈(Pierre Boulez)가 말라르메의 작품을 가지고 곡을 쓸 때 그는 아무것도 분명하게 해주길 못합니다. 그의 음악이 말라르메의 시보다도 한층 더 난해하기 때문입니다.
초현실 주의 시인들은 그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시가 의지해 왔던 것, 즉 모든 이성적 요소를 시로부터 제거해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동기술법(自動 記述法)이야말로 그들의 무의식을 표현해 주고,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 세계와의 유대를 잃어버린 자아 의식의 또 하나의 예인 셈입니다. 산문으로까지 확대된 이 문학 운동은 프로이트의 심리 분석의 영향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무의식' 혹은 '잠재 의식' 이라는 개념은, 일단 구성되고 숙고된 심리적 사실들을 밖에서부터 검토하는 심리학자들에게는 완벽하게 적법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의 구성 활동을 관찰하는 현상학자들의 어휘 가운데에는 포함되지 않는 용어들인 것입니다. 현상학의 시선에서 는 인간의 의식이라 유리고 만들어진 집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베일로 가리워진 영역인 비반성적인 부분과 전(前)사유적인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것들이 반성적인 부분, 즉 '의식적'인 부분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 베일을 벗겨 내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자아 의식이 비반성적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그의 비반성적 활동 가운데에서 자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아 의식이란 어디까지나 의식의 활동이지 무의식적인 활동은 아니기 때문이죠. 따라서 초현실주의자들이 의존하고자 했던 것은, 심리학자들에게가 아니라면 존재하지고 않는 그런 것입니다. 한편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자동적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르니까 어떤 '지향성' 도 없이 우연하게 솟아나는 그런 생각들 말입니다. 그런데 의식이란 본질적으로 '지향적' 인 것입니다―이 말은 이렇게 생긴 생각들이라는 것이 인간에 관해서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금방 그의 추종자들을 실망시켜 버렸고, 초기의 초현실주의 자 가운데 하나였던 루이 아라공(Louis Arsgon)은 〈터져 버린 마음Creve-coeur〉과 〈엘자의 눈동자 Les Yeux d'Elsa〉를 쓰면서 다시 진정한 시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를 고수해 혼 르네 샤르(Rene Char)의 시에서는 나는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시정(詩情)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 그의 복부의 왕관 위로 유출의 궁륭이여
검은 지참금을 속삭여라 !
오 그의 말투의 고갈된 움직임이여 !
성탄이여, 복종할 줄 모르는 자들을 인도하소서,
새로운 다음날의 믿을 만한 편도(扁桃)를.
저녁은 개들은 줄기찬 두려움 사이로 희미한 화전(火箭)들이 여행하는
그의 해적선의 상처를 닫았다.
과거에 네 얼굴 위의 장례의 운모(雲母)
비록 이 시편이 르네 샤르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지라도, 이 시는 예술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들 가운데 하나의 자명성이라는 조건에 합당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만일 자동기술법의 결과라 한다면, 자동기술법이고자 하는 바에는 합당한 것 이겠지만 르네 샤르 그 자신은 자동기술법을 단죄(斷罪)해 버린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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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공통된 의견은, 예술에는 취향에 의한 판단을 가할 수 없으며 예술이란 시대에서 시대로, 또 환경에서 환경으로 옮겨지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으로 시간이 다할 때까지 영원히 새로워 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술은 그것이 결정된 의식의 활동에 달려 있고, 또 사용하는 특수한 감각적 재료들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떤 조건의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이 조건의 구속은 예술―예술에서의 개인적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예술로서의―의 역사적인 확장에 한계를 정하는 것이며, 또한 예술가의 창조적 자유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술가에게 속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조건이란 곧 그가 예술을 행할 때의 상황 그 자체이니까요. 이 같은 상황 가운데에서의 예술가는 물 속의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것이며, 그의 자유에 설정된 한계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무리를 하고' , 스스로 거북해 하는 것은 바로 그가 이 같은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무리를 하는 것일까요 ? 그 스스로가 예술에 대해 품고 있는 잘못되고 위험한 관념에 의해서인 것입니다. 만일 쎄잔느(Paul Cezanne)가 자연의 모든 형태는 원추나 원통 혹은 구면체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더라면, 분명 입체파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쎄잔느는 입체파적 작품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나열한 모든 일반 규칙에서 벗어난 길들, 무조, 12음, 전자 음악, 입체파, 초현실주의, 추상 예술 등은 모두가 관념이나 관념의 운동에서 생겨난 것이지 미학적 정서에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술이 순수 반성의 활동이라고 보았습니다만, 작업에 들어가는 순간의 예술가가 2차적 반성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황이니까요. 그가 음악가라면, 음악 가운데로 들어가자마자 곧 '그 사실에 의하여' 순수반성 가운데로 자리합니다. 표상 행위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같은 상태에 남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기법에 관련된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그는 곧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전위적인 음악 말고도 현대 음악에 잘못된 작품이 많은 까닭은 바로 우리 시대의 음악가들이 이해조차 못하면서 기법이나 기법적인 관념 위에서 작업을 시작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화가나 시인은 그들이 '영감을 받았을 때' 순수 반성 가운데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정서'에 의해서일 뿐이고, 또 비록 어떤 관념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해도 이 관념 가운데에서 추구하는 것은 그것에 부여되는 '주관적'인 의미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순수 반성 가운데에서도, 다시 말하면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에 완전히 몰두하여 작업 가운데서 스스로를 잊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그는 음악적 · 회화적 · 시적 정서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이제 해야 할 작품에 대한 이해에의해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때의 이해는 2차적 반성의 본령이라 할 '사변적' 이해가 아니라 '직관적' 이해인 것입니다.
사변적 이해는 무분별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일반 규칙에서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일반 규칙에서 벗어난 가능한 모든 것에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음악가가 음악을 '밖으로부터' 세울 수 있고, 12음의 음렬을 토대로 그 위에 음악을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그는 이 12음을 그의 악기에서뿐 아니라 전자 기계에 의해서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음렬 혹은 음형은 단지 소리를 줄뿐이지 리듬, 강세, 음색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음악가는 이 각각의 요소에다가 새로운 규칙들을 부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후로 음악은 음렬에 의한 소리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가능한 조합의 숫자는 기계에 맡겨질 수 있는 확률 계산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일종의 우연이 될 것입니다. 음악이 우연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면, 어째서 연주에는 우연을 도입하지 않겠습니까 ? 진정한 음악이란 연주된 음악인데 말입니다. 이 엉뚱한 길에는 엄격하고 악마 같은 논리가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 시대의 대중은 예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 사실은 깨달았던 것이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예술가는 예술의 조건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지만, 예술의 산물에 의해서만 예술을 알뿐인 관객이나 청중은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청중이나 관객은 예술이 그 조건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릴 수가 없으며,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과,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 사이의 차이점을 가려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조 음악이 그들 내부에 어떤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그 감동이 명확한 것이 못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느껴지는 감동이라는 것이 무언가 좀 혼돈스러 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체파나 초현실주의의 작품을 앞에 대하면서 더 이상 미적 감동, 아니 도대체 그 어떤 것이든간에 '감동'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기껏해야 '미학적 충족감' 만을 느낄 뿐입니다. 추상 예술 앞에서는 그들이 예술 '작품'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석이나 메달 혹은 병풍과 같은 '공예품'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술 작품은 언제나 인간의 의미인 것이지만 공예품은 오직 '공작'에서의 어떤 기행(奇行)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무조 음악이 우리의 리듬적인 요소를 보존하고 있는 이상 리듬은 그 가운데에서도 그 유효성을 보존하고 있어,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음악성을 가지고 하나의 '제스추어' , 하나의 '감성 신호'를 이루는 것입니다.〈유령선〉서곡의 거대한 물결들에 조성적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물결대로 거대한 물결들로 남겠지만, 그렇게 되면 으악은 더 이상 '의미'가 아니라 단지 '신호' 가 될 뿐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감성 신호라고 순진한 청중은 거기에 넘어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해도 이는 역시 전락(轉落)일 따름입니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정서의 순화 작용인 '카타르시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 점만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즉 미학적 체험이 창조자인 예술가에게 있어 순수 반성이 활동이라면, 관객이나 청중에게 있어서도 그들이 창조자가 작품 가운데에 담아 놓은 것을 다시 찾아 내는 한은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작품의 의미가 자명할 때면 청중은 자연스럽게 그 가운데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 가운데에서 그 의미의 풍요로움을 찾아내는 것은 바로 청중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그의 초월의 힘에 달여 있는 것입니다. 청중은 능동적이 될 것이고, 마치 밝은 곳에 있는 것처럼 명민(明敏)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유로부터 비롯된 명민성이 아니라, 사유와 더불어 심정으로부터 비롯된 정신(esprit)의 명민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의 자명성 혹은 모든 분명한 감각이 작품 가운데에 결여되어 있다면, 청중은 곧 2차적 반성 가운데로 내던져져 버리게 될 것이고 그리고 나면 그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의 모든 상상력이 작용하기 시작하고, 만일 조금이나마 그의 기질이 감동 받기 쉽고 비장하기라도 하다면, 그는 작품에다가 작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나온 특성들을 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합한 현상학의 부재로 인해, 이제까지는 전위 예술에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 왔고, 또 당사자들은 그 혼란을 대중에게 전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사자들 스스로가 바로 자신들이 전위적인 예술가라고 주장했고, 신문과 상인들 그리고 출판업자들과 공모하여 자신들이 미래의 예술을 대표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의 여론으로는 오늘의 음악가라면 불레즈와 스톡하우젠(Kerlheinz Stockhausen) 그리고 노노(Luigi Nono) 라고 합니다만, 내 생각에는 이 20세기의 풍토 가운데에서의 음악가라면 오직 브리튼(Benjamin Britten)과 프랑크 마르땡(Frank Martin) 이 두 사람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이 들의 작품은 음악의 제조건에 전적으로 합치되는 것들입니다. 그들의 작품은 단순히 장인적(匠人的)요소―비록 장인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나 어떤 기법의 산물이 아니며, 이들의 작품들은 그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명백하게 조성감에 의해 표명된 표현 욕구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각기 한정된 표현 영역을 갖지만, 이 영역은 그들에게만 고유한 것이고, 또 그들은 그들의 모든 작품 가운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개성적 스타일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크 마르땡의 음악이 지니는 새로움이란 전위 예술가들의 흥미를 끌 만큼 '선지자적' 인 것도 아니고, 또 브리튼의 음악도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소박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전위 예술가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전위 예술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비평가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라면 전위적인 노선을 따르지 않는 음악이 편견없이 받아들여직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배평가들은 유명해져야 할 작품 앞에서는 이맛살을 찌푸렸고, 오늘날에 와서는 청중은 듣고자 하지도 않는 음악에 흥미를 가져 달라고 커다란 목소리고 간청하면서,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들은 무시해 버리거나 단죄해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쓰는 글이, 그들이 비평 대상인 예술가나 작품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그들 스스로를 판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브리튼이나 제네바의 프랑크 마르땡을 변호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전쟁 진혼곡 War Requiem〉이나〈탄생의 신비 Mystere de Nativite〉, 이 위대한 두 작품만을 예로 든다 해도 이들은 잊혀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전위 예술가들을 옹호하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조성 음악으로부터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이끌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브리튼과 프랑크 마르땡의 작품들은 이러한 주장을 일소에 붙여 버리고 마는 것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12음 음악과 그것의 결과가 미래의 음악이 '아니었다는' 결정적이며 부인할 수 없는 '실천적'인 증거를 가져다 준 셈입니다. 이 같은 경험 이후로는 유네스코나 방송국 그리고 공공 기관들이 길을 잘못 든 것이 명백한 이 음악가들을 더 이상 지지하거나 선전하고 또 장려금을 지불하는 등의 후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치 않았을 것입니다. 또 회화나 시에 있어서도 전위 작가들이 생산해 낸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는, 음악에서의 브리튼이나 프랑크 마르땡의 작품들과 같이 미학적 작품의 제조건을 충실히 만족시킬 몇몇 작품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표현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의 시대는 창조적 시기가 '아니며', 온갖 이유를 다 고려한다 해도 창조적인 시기일 수가 '없다고'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예술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창조해 낸 것은 엉뚱한 것들뿐이고, 또 엉뚱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으로 대단한 열광을 받을 만한 것이 되질 못했습니다. 이 시대가 창조적일 수 있다면 그건 고립된 몇몇 개인에 의해서일 따름이며, 그들은 이 시대로부터 덕을 본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의 개성에 힘입어 그들의 역사적 상황의 불모성을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예술에 있어서의 창조적인 시기가 된다는 것과는 다른 쪽에서 중요성을 갖는 시기이며, 바로 이 점에 대해 우리의 문화 기구들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시대는 우리 자신을 과거와 전세계의 모든 예술과 마주하게 했으며, 우리에게 예술 작품을 조건지우는 것들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갖도록 해주고, 분명한 판단 기준을 제공한 훗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현상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지식'이나 '인지(認知)' 보다도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이 알거나 인지한다고 믿는 것을 '이해하는' 것, 다시 말하면 이것들이 존재 이유와 본질을 개닫는다는 것입니다. 실제에 있어 과학은 이 세계에서 생긴 현상들과 인간적 현상들을 따로 연구하는 반면, 현상학은 그것이 발생론적 현상학(la phenomenologie genetiqe), 그러니까 현상의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현상학인 이상 인간을 이 세계와의 내적 관계 가운데에서 파악합니다. 현상학은 신' 혹은 '자연'이 결합해 놓은 것을 분리해 내지 않습니다. 나는 방금 전에 말씀 드리기를, 오늘날의 어떤 회화들은 보는 사람에게 그저 단순한 '미학적 만족' 만을 가져다 줄 수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점은 극도로 심각한 문제이고 또 우리 시대만의 징후인 것입니다. 예술 작품 가운데에서 가치 있는 것은 '미학적 외양'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미학적 외양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언제나 결국에 가서는 인간의 윤리적 규정인 것입니다. 싸르트르는 우리에게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신은 하늘에 계신 신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나태 나는 신이고, 그의 목소리가 우리의 윤리적 열망, 즉 진· 선·미를 향한 우리의 열망과 혼돈 되는 그런 신입니다. 달이 말한다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실제고 죽은 것은 바로 윤리의 목소리인 인간 내면의 소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윤리를 조건지 우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 세계와의 감성적 관계이며, 특히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우리의 인간 세계와의 관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상학의 계시만이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자족성 획득이 몰고 간 적대적 개인주의로부터 인간을 사회성의 감정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교육'과 같은 외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나 기독교의 도래 시에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내적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예술의 영역을 훨씬 앞지르는 것일 터이므로, 예술에 새로운 토대와 새로운 동기를 제공함으로써 예술의 새로운 운명을 가져다 줄 인간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의 미래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보존되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겨우 몇몇 사람들에게만 살아있을 뿐인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의 구속으로 예술을 돌아가게 해줄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아니고서는 예술의 전반적인 부활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작품들을 듣고 보고 연구하며 스스로를 연마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수련을 쌓은 것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그다지도 엄청난 광란을 보여준 이 시대에도 역시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들, 진정한 예술 작품들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창조적인 몇몇 중요한 인물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을 기뻐하기로 합시다.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