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황남동일대에 있는 고분군으로 사적 제 40호이다. 현재 대소 20여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고, 1973년 발굴이후 대릉원으로 조성되어 보존되고 있다. 직경 80m 높이20m에 이르는 왕릉급의 대형분에서 부터 불과 수 m의 소형분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양한데 여기에는 미추왕릉, 검총(100호분), 황남대총, 천마총 등의 고분이 포함되어 있다.1973년에는 155호분이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조사되었고, 또 같은 해에 영남대 박물관과 부산대 박물관에 의하여 주변지역이 조사되었다. 외형상 토총인 이 고분들의 내부구조는 발굴 결과 대부분 고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으로 밝혀졌지만 151호분은 횡구식 석곽분이었다. 현재 지상에 남아있는 봉분의 수는 20여기이나 1973년도 고분공원 조성당시 지상에는 흔적도 없는 고분들이 지하에서 수백기 발견된 바 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대형 고분들 사이사이 지표 아래에는 봉분이 파괴된 고분 또는 원래에 봉분이 없었거나 작았던 소형 고분들이 무수히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 유물로는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고 금제 귀걸이와 환두대도, 마구류, 토기류가 주로 나왔으며 상감이 되어 있는 유리구슬과 여러 가지 형태의 옥이 출토되기도 했다. 고분 축조 방향은 월성에서 서북방향으로 축조되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천마총
황남동고분군의 발굴된 고분군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고분이 155호 고분인 천마총이다. 1973년 발굴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말다래가 출토되었는데 말다래에 날개달린 말이 그려져 있어 천마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말다래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는 마구를 말한다.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는 자작나무껍질을 여러겹 겹쳐 누벼서 만든 것이며 국보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마총은 바닥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인 원형봉토분이며,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이다.
천마총의 축조양식은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 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에 다시 냇돌을 깔았다. 그리고 냇돌층위에 다시 목곽을 설치했다. 목곽내부에 부장품을 넣은 궤와 시체를 넣은 목곽을 수직되게 안치했다. 목곽위를 다시 냇돌로써 쌓아 덮었으며, 그 냇돌층을 다시 진흙으로 발라 다졌다. 마지막으로 이 위에 흙을 쌓아 봉분으로 하였다. 천마총은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천마도 말 아래를 위시하여 금관, 금모자, 새날개모양 관식, 금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총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천마총 금관은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이 두껍다. 금관의 앞면에는 4단으로 된 출자모양의 장식이 3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2줄 있다. 그리고 출자 모양의 장식에는 곡옥이 13개씩 달려있고, 사슴뿔 모양의 장식에는 곡옥이 5개 달려있다. 현재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은 경주민속공예촌에서 삼선방을 운영하던 고 김인태 선생께서 제작하신 것이며, 진품은 경주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피장자의 주인공에 대하여는 제20대 자비왕, 신라 제21대 소지왕 또는 제22대 지증왕이라는 설이 있다.
2. 황남대총
황남동 고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표주박처럼 조형한 고분이 98호 고분이며, 황남대총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남분의 높이는 23m이고, 북분의 높이는 22m로서 남분이 조금 높다. 황남대총의 긴지름은 120m이고 짧은지름은 80m로서 고분공원 뿐만 아니라 신라의 모든 고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분이다.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 관리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황남대총으로 명명하였으며, 현재는 외형이 복원되어 있다. 남분과 북분중 남분이 먼저 축조되었고, 얼마후 남분을 북분에 연결시켜 축조하여 표형분의 형태가 된 것이다. 남분에서는 60세 전후로 판단되는 남자의 유골이 안차되어 있고, 금동관, 금허리띠, 금으로 된 장식과 칼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북분에서는 금관, 은허리띠, 금구슬, 금팔찌, 금반지,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서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고 피장자가 칼을 착용하지 않은 대신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락바퀴란 방추차라고도 하며, 실을 잦는데 쓰이는 도구이다. 게다가 은허리띠에 부인대라고 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여자의 무덤이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황남대총은 부부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남편이 먼저 죽어 남분을 쌓았으며 그 뒤 아내가 죽자 남분과 연결시켜 북분을 쌓아 전체모습이 표주박처럼 생긴 표형분이 되었다. 또한 남분주곽 내부에는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어 순장의 실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첨 성 대
첨성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6)대에 만들어진 천문대로서 천기를 관측하고 별자리를 살피려고 쌓았다. 현재 동양에 남아 있는 최고의 천문대일 뿐만 아니라 직선과 곡선이 간결하게 조화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기도 하다.
첨성대의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각형의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으며,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각 석단의 높이는 약 30cm정도이고 화강암 하나하나가 같은 형태이지만, 각 석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첨성대의 기단이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으로 되어있는 사실은, 옛날 사람들이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단부는 남쪽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도정도 돌아서서 있는데 방향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도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cm정방형의 창구가 나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은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으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거쳐 있어 정자를 이루고 있다. 제27단의 원통부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여진 정자석이 두 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정상부의 사각형을 이룬다. 정자석은 민족항일기에 광복 후에 자리를 바로 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수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도 정도 돌아가 방향을 하고 있다.
또 첨성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첨성대 축조에 사용된 돌의 숫자입니다.
석재의 수는 종해 365개라고 하여 왔으나, 기단석까지를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1962년 12월 당시 경주박물관장이던 홍사준과 정영호 등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개, 지대석 8개, 기단석 12개, 상부의 정자석 8개, 중간의 정자석 8개, 남측문주 2개, 27단의 판석 1개로서 총 401개이다.
13단과 15단의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창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창구를 통해 출입하면서 관측하였으리라는 추측을 하기 때문에 흔히들 천문대였을 것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 구멍 높이까지는 내부가 흙으로 메어져 있는데, 원래부터 그랬는지 역사가 지나면서 관리소홀로 흙이 자연히 메워져서 그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일년의 날수와 같다고 한다.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 맨 위의 정(井)자 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한쪽 너비 5.2m 되는 사각형 기단 위에 밑지름 5.1m되는 원형으로 돌축대를 쌓아올려 만든 돌 건축인데 그 윤곽이 S자형으로 곡선을 그리며 솟았으므로 전체의 모양은 마치 황새병(매병)을 세워놓은 듯한 고운 맵시이다. 첨성대의 정상은 지름 2.5m로 좁혀졌는데, 그 위에 길이 2.5m 되는 직사각형의 돌로 입구(口)자 형으로 된 귀틀을 얹고 다시 귀틀을 얹어 첨성대의 높이는 9.10m가 된다. (밑지름 4.93m, 기단너비 5.18m) 부드러운 윤곽을 그리며 솟아오른 첨성대의 정상과 그 안에 힘찬 직선으로 엮어놓은 정(井)자형 귀틀이 세겹으로 놓여 있다. 첨성대는 힘찬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이 하나로 조화된 신비한 돌 건축인 것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합친 곳에 신라의 아름다움이 있다. 아버지처럼 엄격한 위엄을 가졌으면서도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덕을 한 몸에 지니신 석굴암 부처님의 모습에도 이러한 신라 美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첨성대의 정남쪽 중앙에 네모난 문이 있고 그 문턱에 사다리를 놓았던 흔적이 있다. 밖에서 사다리로 올라가서 문안에 들어서면 안은 정상까지 뚫여 있다. 이 안에서 천문을 보았는지 이 안에 사다리를 놓고 다시 정상까지 오르내렸는지 그것은 지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첨성대에서는 일기예보와 일식 같은 현상을 살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오늘날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별의 움직임을 보고 나라운수를 점치는 일도 첨성대에서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흔히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고, 또한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기네스북에 "세계 최초의 천문대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확히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사료(史料)의 부족때문인지 정설이 없다고들 한다. 그래서 보통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 돌 하나하나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답사 포인트] ㆍ 대능원(천마총)에서 나와서 주차장의 왼쪽편으로 걸어가면, 첨성대로 가는 길이 보인다. 대능원 주차장에서 첨성대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기 때문에 보통 대능원 관광후 도보로 이동해서 관광을 하는게 좋다. ㆍ 예전에는 대형버스가 첨성대 바로 앞까지 갔었지만, 교통량이 많아서 첨성대가 기울고 있다는 학계의 발표이후로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되었다. 보다 일찍이 이러한 조치가 취해 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걸어가기에 전혀 부담이 없고, 첨성대 옆 야생화동산이 조성되어 있어 봄, 여름, 가을까지 늘 꽃을 볼 수 있는 동산이 마련되어 있어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이 야외촬영을 하는 곳으로 인기가 좋다.
계 림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으로 사적 제19호이다. 신라의 건국초부터 있던 숲으로 고목이 무성하다. 처음 시림이라 하던 것을 김알지 탄생의 상서가 있은 뒤로 계림이라 부르고 마침내는 나라이름으로 하였다.
탈해왕 9년(65년)에 왕은 밤에 금성 서쪽 시림 숲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신하를 보내어 이를 살펴보게 하였다. 사자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빛으로 된 조그마한 궤짝 하나가 나무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돌아와 그 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한 다음 그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얼굴이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아주 총명하고 지력이 많았는데 이름을 알지라 하고 그 금궤 속에서 나왔으므로 성은 김씨라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또한 나라이름으로 하였다.
13대 미추왕 이후 신라의 왕은 주로 김씨들이었는데 계림은 시조 탄강지로써 더욱 숭앙되었다. 지금 숲 가운데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비는 1803년(조선 순조3년)에 세운 계림에 관한 비이다.
내물왕릉
내물왕
신라 제17대 왕(재위 356∼402)이다. 성은 김씨.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미추이사금의 사위로, 『삼국유사』 왕력에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갈문왕의 아들 또는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말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미추이사금의 동생 또는 조카로도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계보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다만 미추이사금과 일정한 근친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왕호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각기 다르게 기록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내물왕대에 '마립간(麻立干)'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여 『삼국유사』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립간'은 군장(君長)에 대한 존칭어인 왕호로 짐작되고 있는데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국가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왕권강화로 인해 내물마립간 이후부터 박·석·김의 삼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이루어진다.
내물마립간은 대내정비와 더불어 중국과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가져 377년과 382년의 두차례에 걸쳐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부견의 전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당시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신라에 위협을 주자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백제군과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원은 고구려의 내정간섭으로 이어져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내는 등 자주적 발전기반은 확고히 마련하지는 못하였다.
이밖에도 내물마립간 때에는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거나, 397년 흉년이 들자 백성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독산성주가 300명의 주민을 이끌고 투항하자 백제와의 외교문제가 있었으나 이를 받아주었으며, 395년동북경지방에서는 말갈의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는 등 내외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내물왕릉
사적 제188호인 이 능은 흙을 올려 만든 원형봉토분으로서 봉분 밑 둘레에 자연석으로 호석을 쌓고 있다. 이러한 외형의 고분은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기의 왕릉에서 볼 수 있다. 평지에 마련된 것으로 보아 적석목곽분일 가능성이 높으나 봉분의 윗부분이 내려앉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횡혈식 석실분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정식으로 발굴이 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고분의 크기는 밑지름이 2.2m이며 높이는 5.3m이다.
월 성(반월성)
월성(반월성)은 안압지 동남 편에 위치한 신라의 왕궁이다. 월성은 일반적인 신라시대의 석성과는 달리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문천(사천) 북안의 낮은 언덕을 연결하고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곽의 형태가 반월형을 이루고 있다. 동서, 북쪽은 낮은 12개의 산봉을 연결하여 쌓았고 남벽은 자연지세를 많이 활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이 단애를 이루기 때문에 거의 성벽을 쌓지 않았다. 성벽기저부까지 문천의 물이 와 닿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성안지반의 높이는 성밖보다 약 7m가 높고 남천을 접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성벽은 약간 높은 언덕과 같이 토루가 둘러져 있다. 현재 성벽중 가장 높은 곳은 국립경주박물관과 연접한 곳에 있는 동남쪽으로 약 10~18m가 된다. 성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 성 전체둘레는 1841m, 면적은 약 6만여평에 달한다.
월성(반월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일제시대와 1979년과 1980년에 부분적인 발굴은 한 바 있다. 전자는 월정교 부근의 성벽을 조사하였는데 성벽의 넓이는 36척(10.9m), 높이는 중앙에서 12척(306m)내외였다. 또한 성벽 밑은 김해식 토기를 포함한 철기시대 문화층이 있었다. 1979~1980년에 있었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은 안압지로 통하는 서북분지로 토성의 기단부 석렬과 구조물에 대한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문과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신하의 조하를 받고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 양궁, 사량궁 대궁을 관할하던 새성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월성에는 호공과 석탈해, 비담과 염종의 난 때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경덕왕과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등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지금은 성터 중간의 높다란 터와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긴 석빙고만 남아 있다. 또한 경주석씨의 시조를 모시던 중신전도 있었으나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동남쪽으로 옮겼다. 동쪽의 명활산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나성의 역할을 하였고 주위에는 사방으로 해자가 둘러져 있어 성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월성의 해자에 대한 발굴이 진행 중에 있어 머지 않아 그 전모가 밝혀진 것으로 기대가 된다. 월성에 대한 명칭은 조선시대 이후로 불려진 것으로 각종 서적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최초로 반월성을 호칭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려명종(AD1170-1197)때의 학자인 김극기가 월정교를 읊은 시에서이다. 이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 실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 반월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고려시대부터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 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불렸다. 현재 월성해자 발굴 중에 재성(在城)명의 와당이 출토되기도 한다. 월성는 시조인 혁거세가 금성을 짓고 난 뒤 138년 뒤인 신라5대 파사왕 22년인 101년에 축조되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석 빙 고
월성(반월성) 북쪽 성루 중간지점에 성루를 잘라서 남쪽에 입구를 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물이 성밖으로 배출되도록 바닥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된 석빙고가 있는데 보물 66호이다.
내부는 동서로 홍예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의 천장에는 세곳에 배기공을 설치하였는데 현재 배기공 위에 덮어놓은 석재는 근래의 수리때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한 것으로 원래의 것은 아니다. 출입구는 높이는 1.78m, 너비 2.01m의 크기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신라시대는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석빙고에 대해서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위치로 옮겼다는 설과 조선시대 축조설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일제시대 일인학자들에 의해 후자는 최근 60년대에 이화여대 진홍섭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진홍섭교수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설치한 이유로는 성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과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고 난뒤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석빙고, 대구시 축후소내에 있는 석빙고비명, 안동의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다는 것을 이유로 조선시대 축조설을 주장했다.
이외에도 축조년대를 알 수 없는 석빙고인 창녕군 영신면 석빙고, 달성군 현풍읍 석빙고, 성주, 고령의 석빙고등을 예로 하면서 모두 조선시대로 축조년대를 추정했다. 아울러 경주의 석빙고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의 석빙고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석빙고 좌측에 있는 석비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부윤이던 조명겸이 목조의 빙고를 석조의 빙고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빙고 입구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뒤에 동쪽으로 100m정도 옮겨 현위치에 재축조 했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남아있다. 현재 영조때 축조한 석빙고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나 이 석빙고가 가장 완전하다.현재 신라시대 석빙고의 위치 확인과 이 석빙고와 구조면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안 압 지
안압지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674년에 궁궐 안에 만들어 놓은 연못으로서 당시의 이름은 '월지(月池)'였다. 태자가 사는 곳이자 왕과 귀족들의 연회장소이기도 하였던 임해전과 월지는 신라시대의 왕궁터인 월성 동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월지는 통일신라가 망한 뒤, 세월이 흘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못주변의 흙이 흘러 들어 못에 갈대가 자라고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조 선시대의 선비들이 안압지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서 남쪽의 건물터는 태자가 거처하던 곳이고,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되었다.
임해전에서 문무왕 이후 역대 왕들이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를 맞아 마지막 잔치를 베푼 곳이기도 한다.
이 월지는 어느 곳에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이것은 당시 신라인의 조경기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못의 안벽 높이는 2.1m정도이고 궁전이 있는 서쪽 호수안은 5.4m로 좀더 높다. 이는 못가의 누각에 앉아 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못 바닥에는 돌을 깔아 놓았는데 이는 수풀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여 답답하고 좁게 보일 것을 미리 방지한 지혜이다. 못 물의 깊이는 약1.8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의 시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물이 들어오고 나가게 하는 시설이다. 물을 들어오게 한 장치는 못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으며 정원 못과 연결되어 있다. 두 개의 수조로 되어 있는 이장치는 약 20㎝간격을 두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넘친 물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넓적한 저수조를 만들었다.
또한 물이 수조를 지나 못으로 떨어지는 지점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놓았는데, 이는 못 바닥의 침식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곳으로 통해 들어온 물들은 연못 안의 곳곳을 돌아 동북쪽으로 물이 나가도록 되 있는 곳으로 흘러나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했음을 알 수 있다.
월지에서는 약 3만여점의 유물들이 나왔는데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신하들이 이곳에서 잔치할 때 못안으로 빠진 것들과 신라가 멸망하여 왕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 등으로 쓸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지금까지 경주의 고분에서 발견 된 유물들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당시 신라시대 궁중 생활을 알 수 있게 하는 실생활용품들이며 그 종류도 다양하여 신라시대 귀족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분 황 사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스님이 계셨던 절이다.
643년에 자장스님께서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스님은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책들을 남겼다. 원효스님이 돌아가시자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분황사 본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전하며, 경덕왕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많은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 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과 당간지주 등이 남아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석재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머리없는 불상들은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분황사의 가람배치와 규모를 확인하기 위하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1991년부터 연차적으로 발굴한 바에 의하면 『品』자 모양 1탑3금당의 창건가람배치임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와 비슷한 가람배치는 북한에 있는 정릉사터등 고구려 초기 절터에서 조사된바 있으나 신라지역에서는 최초로 확인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 후 3차에 걸친 중건과정에서 1탑1금당 형식으로 바뀌었으며, 금당의 방향도 오늘날과 같이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였다.
출토유물은 대부분이 건물에 사용되었던 기와 종류로서 1,50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당시의 불교문화와 신라초기 사찰의 건축양식을 알 수 있었다.
분황사 석탑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서, 634년(선덕여왕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뒤에 몇 차례 보수되었고, 지금 의 탑은 1915년에 수리한 모습이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1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돌을 쌓았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다.
현재 3층까지 남아 있으며, 높이는 13m로 국보 30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1층 네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작은 방을 만들고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으며, 옷무늬가 각기 다르다. 전체적으로 불법을 지키는 신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이다.
탑의 1층 네면에 작은 방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할 때 2층과 3층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우물(삼룡변어정)
신라시대의 우물로 삼룡변어정이라 불리운다.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의 원모양은 불교의 진리(윤회, 화합)를 상징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에는 청지, 동지 그리고 분황사에 한 마리씩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되찾아 세 곳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 그 뒤부터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남아 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화쟁국사비편
우물 옆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비석받침돌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원효의 화쟁국사비를 세웠던 곳이다. 숙종6년(1101)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던 듯 비석받침은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 받침 위쪽에「此和쟁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이라 적고 작은 글씨로 김정희라고 새겨놓았다.
분황사 당간지주
ㅁ 분황사 앞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주변 석조부재들
황 룡 사 지
[황룡사 9층목탑 전시모형-국립경주박물관]
황룡사는 신라 제24대 진흥왕때 처음 세웠던 절로서 사적 제6호이다.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21세 되던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게 하였다. 그로 인해 황룡사라 하였다. 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사찰의 건물배치가 완료된 것 같다.
그 뒤 574년에 5미터가 넘는 본존불을 비롯해서 금동으로 만든 삼존불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본존불을 모시는 곳)을 10년후인 584년(진평왕6)에 세웠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고승 자장의 권유로 구층탑을 건립하게 되는데 당시 신라인의 기술로는 어려워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해 목재와 석재로서 건축하고 김용춘이 신라 장인 200명을 인솔하여 645년에 완공하였다. 탑신부 약 65미터, 상륜부15미터, 전체 80여미터에 달하는 구층으로 된 목탑이 완성됨으로써 4대 왕, 93년간에 걸친 대공사가 마무리되어 명실공히 국가의 절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신라 삼보(세가지 보물)중 장육존상과 9층탑이 이곳에 있었고 솔거가 그린 금당벽화도 여기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 원효스님 등 고승께서 가르침을 널리 알린 곳이다. 그리고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나와 백고좌강회를 열어 부처님의 가호를 빌었다.
1238년(고종25)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절 전체가 불타버린 뒤에는 다시 짓지 못하였다.
황룡사에 대한 발굴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하여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고문헌의 기록과 일치되는 가람변천과정이 발혀졌다.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는 25,000여평의 늪지를 메워 대지를 조성하고 당탑(堂塔)을 배치하였는데, 최종 가람배치는 남쪽으로부터 남문·중문·탑·중금당·강당을 차례로 건립하고, 중금당 좌우에는 동·서 금당을 병렬로 배치한 다음 그 주위에 회랑을 두른 1탑3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독특한 양식이었음이 밝혀졌다.
출토유물은 40,000여점에 달하는데, '皇龍(寺)'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비롯한 와전류가 대부분이지만 토기, 금속용기, 불상 등도 다수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토기와 금속용기는 실생활 용구가 많았으며, 이들과 함께 출토된 다량의 중국계 청자류 등으로 보아 당시의 활발했던 대외 교류상을 알 수 있었다.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백제지역의 익산 미륵사지 발굴조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고고학적 발굴사상 최대규모·최장기간 진행된 발굴로 손꼽히는 중요유적지이다.
황룡사 구층목탑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못가를 지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황룡사의 용은 나의 아들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절에 돌아가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 하였다.
자장스님이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말하자, 선덕여왕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탑을 만들게 하였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1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 아홉 개의 이웃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막기 위함이었다.
높이 때문에 여러 차례 벼락을 맞고 또 지진 등으로 기울어져 다섯 차례나 수리하거나 재건하였다는 사실이, 경문왕 13년(873) 탑을 재건할 때 만들어 넣은 사리함내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25년(1283)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 전체가 불타버렸을 때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초석과 심초석만이 남아 있다. 이 심초석은 탑의 무게중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구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m이며, 탑의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탑이었다. 이 높이는 요즈음 건물로 따지면 30층은 될 높이이다. 절 건립 할 때 중심 불탑으로 건립되었으나 이 후 계속 수리를 거듭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전체가 불타버렸을 때 함께 없어졌다. 이탑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593년 동안 여섯 차례를 수리되는 등 숭앙을 받아왔다.
1976년부터 10년간 황룡사터 발굴조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이 목탑터도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목탑터는 발굴 이전부터 금당터와 같이 기단 상면에 노출되어 있어 규모와 초석의 배치형식을 알 수 있었다.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황룡사 장륙상
구층목탑과 함께 황룡사에서 만들었던 신라삼보의 하나. 신라 최고의 보물로 숭앙되던 이 불상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흔적조차 없어지고 현재는 대좌(불상받침돌)만이 금당터에 남아 있다.
이 황룡사장륙상은 573년(진흥왕34)에 만들기 시작해서 그 이듬해인 574년 3월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인도의 아쇼카왕이 보낸 황금과 동으로 장륙존상을 한번에 만들었다고 한다.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5007근인데 황금이 1만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2000근과 황금 1만136분이 들었다고 할 만큼 거구의 금동삼존불상으로 생각된다. 장륙상의 높이는 1장6척이므로 약 4.5m의 우람한 상이 될 것이다.
명칭은 『삼국유사』에 보이듯이 석가삼존상으로 중앙에 석가불, 좌우에는 문수, 보현보살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대좌는 장륙존상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일단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갈 수 있게 홈을 파고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킬 수 있는 홈도 팠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인데 이러한 모양은 좌우 불상대좌도 거의 비슷하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신라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조성된 이 장륙존상은 현재 받침터만 남아 있을 뿐, 원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신라 삼보중의 하나로서 최대걸작품이었을 것이다.
교동 최씨고택
교동에 있는 조선중기의 양반 집으로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이다.
이 집은 최식의 9대조 때 요석궁터라고 전해오는 길지에 임좌방향(壬坐方向)으로 ㄱ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 그리고 일자형의 중문간 행랑채를 연속하여 건축하였고, 서당으로 사용하던 별당과 천석 곳간, 사당은 따로따로 건축하였다. 남향한 대문간 행랑채를 들어서면 곧바로 사랑마당이 되고 서쪽으로 일자형 별당이 동면하여 서 있으며, 사랑채가 남면하여 서 있다. 사랑채는 사랑대청, 사랑방, 침방이 ㄱ자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방과 누마루가 남쪽전면으로 돌출되어 있다. 중문을 돌아서면 안마당이 되고 안채가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늘어서며, 여기에 또 다른 방들이 전면으로 돌출되어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안채 북쪽으로 따로 쌓은 담장속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크기로 건축되었다. 현재 이 집의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 11월 22일의 화재로 소실되어 안채와 천석 곳간만이 남아 있다. 소실된 사랑채의 구조는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높직한 기단 위에 요석궁지에서 모아 온 것으로 생각되는 다듬은 돌로 초석들을 놓고 방주들을 세워 납도리를 받친 민도리집 양식이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판형의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친 뒤 다시 이 위에 원판모양으로 깍아 만든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데,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구조는 사랑채와 같으나, 다만 대청의 전면기둥 한 개와 안방 앞 툇마루에 선 기둥 세 개만은 두루기둥으로 되어 있다. 또 부엌 앞쪽의 방 툇마루에는 계자난간을 가설하였다. 천석 곳간은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으로 맞배지붕의 양쪽 박공에 풍판을 달았다. 정원에서 석련지, 등대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