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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에서 보는 사물의 감각화, 혼돈과 질서
이 돈 배
시는 사상이나 감정을 정서적으로 표현하여 심미적 즐거움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시는 미적 감동이며 인생의 탐구라는 점에서 내면적 성찰과 자기구원에 있다 할 것이다. 시인은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정서와 이미지를 통한 선악의 판단과 진실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감화의 경지에 이루게 한다. 우리는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삼라만상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시원한 소나기가 지나간 서녘하늘에 피었다 사라지는 무지개는 오랜 시간 기다려 주지 않으므로 환영이 오히려 신비롭다.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경이로운 현상계의 내면에는 영롱한 색깔과 빛으로 나타나는 진아(眞我)의 세계가 실재하고 있다. 사물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귀중한 것과 무의미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형상이요 이미지이다. 우리가 접하는 사물의 시세계에서 시인들은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시간과 공간의 원형 심상으로부터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더 나아가 모든 사물을 대상으로 육화하고 영성을 불어넣음으로써 정서를 감응으로 불러들인다.
우리는 어떤 현상들과 접하면서 자아라고 하는 자기 나름의 의식을 가지게 된다. 흄(David Hume)은‘자아는 경험의 집합체’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자신의 육체에 내재하는 무의식적인 본능과 정신적 의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한 체험 속으로 몰입 할 때는 다른 나인 타아(他我)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나의 의식과 지각으로부터 나의 존재와 나는 누구인가라는 언명은 모든 사물의 감각화에 대한 연상으로 연결 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현상에서 형상의 변용에는 상(相)변이라는 규칙에 의해서 그 형태가 변한다. 물인 경우 자연조건에 의해 이슬이 되고 서리, 눈으로 변하게 된다. 또 시공간적 표현이나 담겨진 모양에 따라 옹달샘, 호수 등이 되고 도랑, 시냇물, 강 등으로 이름 붙여진다. 사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한다. 역(易)의 사유체계에서 우주는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인간과 모든 만물이 서로 유기적 연속체임을 의미하고 형상의 전환이나 새로운 변환과 재생 등의 연속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술적 창작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력과 다양한 방향성을 유지하면서 재창조되고 발전한다. 주기성이 없는 질서를 갖는 혼돈의 세계에서 내부에는 리듬과 율동이 있는 흐름을 통한 언어의 배열이 중요하다. 이러한 원소들이 시를 쓰기 위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가마솥에서 조주하는 용융의 대상으로 사물을 정련하는 사물의 감각화의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사물과의 접합
우주속의 물, 불, 바람과 소리는 서로 교합하는 영혼의 존재로 우리 안에 내재한다. 시인은 감성으로 생명의 순서를 찾아나서는 추적자이다. 자연현상에서 볼 때 물과 불의 교접에서 나오는 것은 소리이며 빛이다. 우리는 순간의 소리와 빛의 교성을 듣는다. 물이 폭포수가 되어 바위에 부딪치면 맑은 소리의 공명이 일어나고 거품이 되어 계곡을 울리는 메아리로 변한다. 노을이 바다를 적시는 것은 빛과 물의 통섭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성정이 다른 구름들의 접합으로 천둥과 찰나의 번개를 만들어낸다.
누가 쪼개 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김혜순.「지평선」일부.〈시인세계 27호 .2009.봄〉
아스라이 보이는 지평선은 하나의 만남이고 땅과 하늘의 교접이다. 봄의 계절에는 발진(發陳)하는 기운이 만물에 발생하므로 생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베풀어야 하고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하늘에는 해가 있고 땅에는 생명이 움트는 넓은 대지가 펼쳐 있다. 잉태는 단일하게 이루어질 수 없으며 갈라진 하늘과 땅이 맞닿아 합일되어 진동하는 순간 어두운 밤과 흰 낮, 그 매와 늑대는 서로를 녹여내는 상처와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혼합된 영혼과의 접합을 이룬다.
빛이 공기층을 지날 때는 푸른색 영역의 빛은 많은 양을 산란하고 붉은색 영역의 빛을 잘 통과시키므로 해가 뜨고 질 때 수평선이 붉게 물들어 보이게 된다. 젖은 모래나 옷의 색깔이 마른 상태에서와는 다르게 보이거나 출렁이는 회색 물결, 어둠에 묻힌 흙빛 같은 검은 바다의 모습은 사물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자연 스스로의 특이한 현상이다. 화자는 여기에서 해와 달, 너와 나를 아우르는 공간에서 상호 공존하는 영혼과 육체로 인한 갈등적 요소를 수용한다. 이는 자연에 저항이거나 독립적일 수 없는 당연한 응답을 스스로 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의 형상을 볼 때, 빛이 지나는 과정에서 그 이미지의 시적 표현은 반사와 굴절하는 현상에 의해 펼쳐지는 스펙트럼을 어떻게 배열하여 잘 조절해야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싹 틔움, 생장
우리가 존재하는 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한 축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우리 몸 안에는 소우주가 그대로 존재 한다. 따라서 시인의 할 일은 우주 내에 존재하는 원형의 상상력을 통해 삶의 진실을 꺼내는 것이다. 야생사과는 우리의 심장을 나타내며 복숭아를 반으로 쪼갠 모습은 모태와 같은 원초적 창조의 원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명관에서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을 동일시하는 물활론자(hylozoist)들은 모든 존재의 형태는 생명과 영성이 있는 피지스의 구현으로 보았다. 그들은 모든 물질은 신성으로 충만해 있으며 우주 자체가 그의 숨결인 영혼으로 연결하는 일종의 육체로 보았다. 헤라크레토스는 우주는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하는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는 사물을 보고 느낄 뿐 만 아니라 그들을 사유하는 능력을 가진다.
나이를 모르는 우람한 느티나무는 가지가 많다
굵다란 가지마다 자잘한 가지를 뻗고
자잘한 가지는 가는 가지를 촘촘히 달고 있다
느티나무의 무성한 그늘을 기리는 이여
짙푸른 녹음아래 정자에서
나날이 웃고 울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즐기는 이여
하늘 향해 뻗은 가느다란 가지마다
빈틈없이 잎을 달고 있는 모습 보시게
가느다란 가지만이 잎을 다는 생의 경이를 보시게
우람한 역사의 줄기를 살찌우고
우수수 낙엽이 되어 종적 없이 사라질
초록 이파리같이 빛나는 이야기들 보시게
...............
-최두석.「느티나무」일부.〈투구꽃〉
인간에게만 슬픔과 눈물의 감성이 있는 건 아니다. 하늘과 구름에도 눈물과 상처가 있다. 부끄러움이 있다. 자연현상에도 기쁨과 증오, 분노와 질투가 있으며 칠정오욕이 있어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상징화 한다. 화자는 가느다란 가지가 잎을 달고 있는 생의 경이를 보면서 낙엽이 되어 종적 없이 사라질 삶의 이야기들을 들추어 보자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별의 생성과정에서 우주의 기원을 찾으려 노력한다. 반짝이는 별, 그 푸른 찬란함이 다하면 적색의 거성으로 변하고 더 진화하여 백색 왜성이 되어 소멸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빠져 나오는 고통을 배운다. 쓰라림과 고통을 익히기 위하여 자유로운 새소리, 꽃향기를 맡으며 맑은 물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을 떨치려 몸부림친다. 혼돈의 세계에서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조각된 어느 여인상을 예술가들은 미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도덕론자들은 외설적이라고 비판 한다.하이젠버그가 말하는 불확정성원리는 모든 사물의 행동이 예측 불가능함을 의미 한다. 미지의 세계는 지진, 해일이나 허리케인 같은 예견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변화시키며 함몰한다. 따라서 불확실한 일들이 순간적이거나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우주안의 모든 현상들은 서로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유한한 세계에서 불멸을 찾아 헤매고 있으며 시를 노래하고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고통의 존재 의식에서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혼돈과 질서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삶의 방향을 제시 한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것은 하나의 불변의 진리이며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흐름의 방향을 열역학 법칙에서 제시한다. 인간은 커다란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고 특히 시는 아름다운 질서를 가진다. 자연에서 어느 한 현상을 감지하는 것은 가능하나 다른 더 많은 현상들의 감각화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도 동일하게 이미저리한다. 어떤 현상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이 일어나고 존재한다. 무질서를 양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엔트로피라는 값을 제시하는데 열은 항상 뜨거운 물체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며 결코 반대 방향으로 스스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진리가 어떤 독립된 체계에서는 무질서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며 이러한 현상에는 어떤 방향성이나 질서가 있어서 물질의 소모가 진행된 후에는 다시 복원되지 않는다. 공기 중에 흩어진 담배연기나 따뜻한 물과 찬물이 섞인 후에는 이를 원상으로 분리 할 수 없듯이 외부와 단절된 독립적 체계에서 전체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한 영역에서 질서가 성립되면 다른 영역에서는 무질서가 진행되며 질서에서 무질서의 일정한 방향으로 평형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날에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지 못한 것은 공장에서 피어 있는 꽃 생각 때문이네
오직 나를 위해 피어난 꽃그늘이 있는데
그 꽃들은 생일도 없이 한줄기 꽃으로 피어있네
일하는 사람의 젖은 작업복을 보면서 한나절을 걱정한적 있는데
그의 등에 소금꽃이 하얗게 핀 걸 나중에 나중에야 보았네
등에 핀 꽃을 보지 못하였던 이, 밥풀 냄새 나는 젖은 가슴만을 안고서
그날에
버석버석한 웃음 흘리며 한송이 꽃처럼 흔들, 흔들거렸네
그날에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이는
공장에서부터 따라와 그의 등에 미안하게 앉아 있는 하얀 소금꽃이었네
-이기인.「소금꽃」전문.〈어깨위로 떨어지는 편지〉
허름한 웃음을 흘리며 피어난 한 송이 꽃이 흔들거린다. 그날에, 나를 위해 피어난 꽃그늘이 그의 등에 소금꽃으로 하얗게 피어 있다. 이것을 한참 후에 알았을 때는 자신을 거듭나게 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혼돈의 흐름에서 기존 틀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다른 흐름의 방향을 찾아 나서게 한다. 시인은 이 밥풀 냄새 나는 젖은 가슴만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긴 시간이 존재할 수 없는 절박한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한 한나절을 걱정한다. 그의 존재를 축하해주러 온 그의 등에 피어있는 하얀 ‘소금꽃’,이러한 현상계의 내면에서 사물들은 서로에게 생명을 주어 불생불멸하는 진아의 세계를 찾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겪는 체험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변화되는 사물의 형상에서 얻어내는 질서가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적취를 만들어 내는 자기 탈바꿈을 완성하게 한다.
소멸, 자연으로의 귀환
비가 되어 내리는 물은 강으로 바다로 흘러간다. 모여든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른다. 모든 사물은 자연의 변화에 따라 어떤 형태로 존재하다가 원상으로 다시 돌아와 순환한다. 자신이 고독의 존재를 느낄 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시작과 종말을 체험한다. 어떤 시각에서는 인간이 갖는 의식과 육체의 이중성에서 인간은 건강한 육체에서 건전한 정신이, 아니면 건전한 정신에서 건강한 육체를 가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시인이나 예술가들에 의해 재생하는 삶의 구조는 정밀화가 아니며 그 속에는 입체적 원근법이나 공감각 더 나아가 영혼의 사차원적 존재까지를 확률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표현은 다양화하고 사물에 대한 균형이 필요하므로 자신과 사물과의 연결에서 유기적이거나 기능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어떤 사물에 대한 현상이 한 곳으로만 치우치게 되면 다른 형상의 이미저리 구성은 한 축의 의미를 잃게 된다. 그 결과 예술적 측면에서 볼 때는 무의미하거나 전체적으로 균열이 생겨난다. 수평선에서 해수와 공기가 맞닿은 면은 물도 공기도 아니다. 사막에서는 모래도 아니고 바람도 아닌 모래바람 같은 모호한 사실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으므로 미래의 모든 사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체험한 경험들이나 우리에게 주어진 내면의 세계를 어떻게 잘 조화 시키느냐에 따라 창작의 개념을 넘어 재창조의 의미를 갖는다. 한 인간은 오직 짧은 시간만 지상에 머무르는 한정된 존재임을 안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는 완전히 소멸하거나 소실된다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삼라만상은 서로 공존하며 태어나 성장하고 생성과 소멸의 큰 흐름 속에서 모두 함께 한다. 따라서 시인은 영원히 살기 위해 시를 쓴다.
산들과 잠시나마
고요히 지내려고
산에 오르면
산들은 저희들끼리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한 점 티끌도 안보이게
나를 지운다
-조태일.「소멸」전문.〈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인간은 죽으면 강을 건넌다고 한다. 단순히 강을 건너가는 것만은 아니다. 한 점 스스럼없이 스스로를 지우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지하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죽음의 신 하데스에게 간다. 그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며 또 다른 이름, 플루토(Pluto)는 풍요와 부(富)의 상징이기도 하다. 땅속에 있는 광물인 금. 은이나 석탄 석유 같은 지하자원은 모두 그의 지배 아래에 있다. 대지의 원천인 생명력, 생장력도 그의 것이다. 핵무기를 만드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실험은 대부분 그의 영역인 지하에서 실시된다. 그렇지만 이제 그 영역이 지상으로까지 올라와 있다. 원전의 이탈이 문제점으로 제시되는 시점에서 지구의 모든 생명은 죽음의 공포로 치닫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누출된 방사성물질은 돌이킬 수없는 재앙이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으로 생명의 일부를 앗아가고 위협하고 있다. 이 물질은 수억 내지 수십억 년 동안의 반감기를 가지고 소멸되므로 끝날 수없는 악의 꽃으로 지구상에 파멸의 씨앗으로 남게 된다.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세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니다.
- 신석정.「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일부
신석정은「촛불」에서 이상향의 세계를 모성의 원형으로 구원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동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인간상실의 재해와 혼란의 연속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에 대한 공포가 가시기 전에 처참한 체르노빌의 경험은 핵구름이 나흘 만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공을 떠돌아다녔다는 사실이다.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오염된 물질들이 태평양 너머 오천킬로미터 떨어진 알래스카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두 개의 축구공도 있었다.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원전사고와 세계적인 핵무기 개발경쟁은 국경을 허물고 있다. 방사선 피폭 마스크나 방사선이 몸에 퍼지는 것을 막는 요오드화칼륨이 우리 가정이나 여행가방의 상비약으로 안방을 차지하는 시대가 머지않아 도달 할 것이다
영생의 길, 조화
시적 언어는‘정서적 사용’이라는 내연의 의미로 함축적, 주관적으로 사용한다. 사물은 과학적 대상으로 인간과 분리하여 보는 비인격화의 측면이 있지만 시문학적으로는 인격화라는 심미적 개별성이 내재한다. 그러나 출발의 원형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인간이고 우주내의 모든 사물은 소우주의 일상적 형태로 부터 일탈을 제시하게 된다. 까르데날은 인생은 결코 짧지 않고 영원하다고 말한다. 우리들 앞에는 죽음이 아닌 영원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죽기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가시덤불이 땅을 보존하듯이 삼라만상은 서로를 부축하고 의지하며, 생존하면서 보호하며 살아간다. 탄생과 번식, 성장과 죽음이라는 거대과정(Great Process)속에 모두 함께 공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날마다
제 이름 석자 자랑코저 거짓도 내다 걸건마는
하시로 빛나면서
이름을 지우는 이
아름다워라 그대 이름 없는 나무여
요요히
빛나던 이름을 님에게 드렸는가
제 살을 깎아
빵을 만들어 나누어 먹이는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꿇어 물으면
..........,
네 외로움의 끝 그리고 네 기쁨의 시작,
...........
불 같은 사랑 하나 탐하였기
무시로 불 속에 몸을 태워 시나브로
시나브로 여위어 가는 촛불.
.........
몇 천만리의 길이기에
손끝에 와 머무는 따스한 바람도
쓰다듬어 놓아 주면 그뿐 다시
먼 길을 떠나느냐
-강미영,「수녀」일부.〈꽃이 죽어가는 이유〉
오온(五蘊)으로 설명되는 인간의 현실존재를 실천하기 위하여 불가에서는 존재들은 서로 의존하며, 발생하고 유지되면서 변화하고 소멸한다고 말한다. 한편 기독교적 세계관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모든 만물은 알파와 오메가이다. 신에 의한 창조와 구원, 최후 심판 등 일생을 하나의 합일된 개념으로 구분한다. 모든 만물은 위대한 신에 의한 피조물로 인간과 자연은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인간은 자연에 도전하여 그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 그 자체를 참 오묘하고 위대한 존재로 본다. 인간은 자연의 일원이며 극복의 대상이 아닌 융화와 조화를 근본으로 보았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만물의 이치를 깨우쳐 서로 조화를 이루려고 번뇌에서 벗어나려 애를 쓴다. 우주가 내 안에 있으므로 소우주를 내가 품고 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실존의 고독, 사물의 감각화
시를 쓰기 위한 사물의 감각화의 측면에서 위의 인용 시들에 나타나는 작품을 분석해 보면 김혜순의「지평선」은 저 지평선을 누가 쪼개 놓았을까? 윗 눈꺼풀과 아래 눈꺼풀 사이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의 흔적을 맞이한다. 시인은 두 접합하는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상징화 하였다. 내 안과 바깥의 몸부림으로 내 몸은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이 있다.‘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맞닿아’저 노을을 하염없이 물들게 하는 붉은 물이 흐르고 있다. 어쩌면 교합의 순간에 느끼는 여인의 희열과 신음의 고통소리를 들려준다. 희고 검은 낮과 밤을 반복 순환하는 질서 속에서 매가 되고 늑대가 되는 원시의 울분을 삭히면서 쪼개놓은 지평선은 사랑의 결실로 합일되는 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최두석은『투구꽃』에서 나이를 모르는 우람한 「느티나무」는 굵은 가지마다 자잘한 가지를 뻗고 잔가지들은 더 가는 가지를 달고 있다. 우리의 삶은 느티나무의 무성한 그늘을 기리며 짙푸른 녹음아래 정자에서 웃고 울며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가지마디에는 하나의 삶이 대롱거리며 매달려있다. 잎에는 빈틈없이 탐 진 치를 달고 있는 가지보다 더 가느다란 소박한 삶이 갖는 순티나는 진지한 생의 경이를 읽는다. 우람한 역사를 줄기로 남기고 사라질 인생이지만 때로는 초록 이파리같이 빛나는 이야기들이 있어 삶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기인의『어깨위로 떨어지는 편지』에는 등에 하얀「소금꽃」을 피우는 그날에, 당신을 찾아 현란한 혼돈의 가시밭길을 지나며 당신이 탄생한 순간을 축하하러 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울음으로 세상을 울리는 오직 나를 위해 피어나는 그 꽃들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전에 현실을 극복하며 신성한 노동의 한줄기 꽃으로 피운다. 한나절을 살아가기가 고달픈 그의 등에 핀 하얀꽃,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배고픔을 안고 젖은 가슴만을 어루만지는 피어나는 소금꽃을 보며 버석버석한 웃음을 흘리는 흔들거리는 인생을 관조한다.
조태일은『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에서 자신의 「소멸」을 보고 있다.‘고요히 지내려고 산에 오르면 산들은 저희들끼리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한 점 티끌도 안보이게 나를 지운다’고 하였다. 어찌 산과 들만이 자신들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는가? 모든 사물에는 숨겨진 그늘이 있다. 그늘은 진실을 찾는 하나의 구원이고 기대이며 어른거리는 소망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자신을 완전하게 버리면서 자신을 떠나 무아에 들기 위한 피안이 있다. 시는 어디서나 삶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미영은『꽃이 죽어가는 이유』를 생각하며 이상의 세계를 향해 영생의 길을 추구하는 성직「수녀」의 참 모습을 이미저리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날마다 제 이름 석자 자랑코자 거짓도 내다 팔건마는, 그대 있음에 이 세상 이름 없는 나무와 풀이 어디 있겠는가? 요요히 빛나며 드러내지 않는 아름다운 고절한 이름으로 제 살을 깎아 나누는 애틋한 마음, 소롯이 미소로 자신을 태우는 눈물 마른 땅에 아픔을 적시고 있다. 제 몸의 물기로 목을 축이면서도 무시로 불 속에 몸을 태우는 불같은 사랑, 시나브로 여위어 가는 촛불은 하늘거린다. 몇 천만리 길을 떠나는 손끝에 스치는 따스한 바람, 쓰다듬어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너는, 외로움을 삼키는 네 기쁨의 시작으로 창공의 기러기 한 마리 되어 너울너울 날아간다. 거룩한 하늘 길 우러러 꿇어 엎드려 영탄하고 있다.
위에서와 같이 생성과 소멸, 그 안에 삶과 죽음이 있는 사물의 감각화의 의미를 현대 시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혼돈과 좌절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사물은 생과 멸을 반복 한다.선(善)이란 진실이고 우리의 삶은 시적 진실(poetic truth)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왕부지는 사물은 상대적 속성을 갖는 두 측면에서 상호간에 상생과 상극의 균형을 이루며 중정(中正)을 길(吉)이라 하여 가장 선하다 하였다. 그는 길(吉)을 하늘의 도(天道)를 상징화하고 이를 순응하는 인도(人道)에서 찾았다. 그 안에 만물이 있어 삶의 감각화로 사물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멈추어 있는 것 같으나 항상 변화한다는 것이며 그 변화는 일정한 항구불변의 법칙에 따라 진행하므로 진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과의 접합을 통해 인생을 싹틔우고 생장하며 나를 소멸하면서 자연으로 귀환한다. 혼돈과 질서의 영역에서 실재의 현상을 암시하고 서로를 상상하는 사물의 감각화, 그 위에서 시인들은 자기이상의 신성(神性)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돈배 李敦培
고려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서 석 박사학위 취득
송원대학교 교수와 도서관장 지냄, 광주대학교 초빙강사 역임
문학미디어 문학평론 당선.
문예시대 신인 문학상(시). 시집 ‘황새의 눈’
송원대학교 명예교수, 이학박사
E-mail: ledb4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