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씨 문중이 다시 벼슬길을 연 것은 의충의 증손 위종부魏宗復의 대부터다. 그는 한성삼군의 높지 않은 벼슬을 지냈다. 그에게는 유형由亨·유정由貞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로부터 파가 나뉘어져 담양·관산파(유형)와 행원파(유정)로 나뉜다. 유형의 증손 덕원德元은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싸웠고 덕의德毅와 덕화德和는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따라 전란을 치렀다. 이중 특히 덕의는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석 달을 걸어 의주까지 찾아가 임금을 모시는 충성을 보여 명나라 장수 여응종으로부터 “동국에 산은 오직 천관天冠(장흥에 있는 산)이요, 사람은 덕의가 있을 뿐이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조에 위씨 집안을 빛낸 가장 큰 이름은 최근 학계로부터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호남 실학의 거목 위백규魏伯珪다. 호를 존재存齋 또는 계항桂巷이라 일컬었던 그는 1727년 장흥 방촌傍村에서 태어났다. 8세에 이미 시를 지었고 시詩·서書·화畵에 능했다. ‘발적천관사發跡天冠寺 제공상춘호梯空上春昊 부시인간세俯視人間世 진애삼만리塵埃三萬里(천관사를 나서서 공중을 사다리 삼아 봄 하늘에 올랐네.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온통 티끌에 싸여 있구나.)’는 그가 9세 때 지은 시다. 자라며 학문에 더욱 힘써 제자백가는 물론 천문·지리·역서 등을 두루 섭렵했다. 그가 읽은 책이 자그마치 요즘 기준으로 3트럭분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25세 때 병계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며 더욱 깊이 있는 학문을 닦았다. 1798년(정조 22)에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왕성한 의욕으로 「사서차의四書箚義」, 「환영지寰瀛誌」, 「정현신보政弦新譜」, 「존재집存齋集」, 「고금古琴」, 「격물설格物說」, 「원류原類」 등 자그마치 9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통은 이이, 김장생, 송시열, 권상하, 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론계이며 향촌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강한 현실 비판 의식이 저술에 나타나고 있어 학문적 성격은 경세적 실학의 색채다. 위백규가 32세(영조 35년) 때 지은 「정현신보」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보다 50여 년이나 앞서 비슷한 사회 개혁 방략을 제시한 경세서다. 특히 그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91년이나 빨리 조선전도朝鮮全圖를 그렸다. 그의 학문은 그야말로 모든 방면에 걸쳐 백과전서 격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이 인근 강진에 유배 오기 3년 전에 타계한 위백규는 종택 뒷산을 다산이라 하고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자락에 정자를 짓고 ‘다산정사茶山精舍’라 하였다. 정약용이 유배지인 백련사에 지은 ‘다산초당茶山草堂’보다 훨씬 앞선 셈이다. 정약용의 롤모델(role model)이 바로 위백규였다.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마을은 위백규의 생가 마을로 600여 년 동안 장흥 위씨가 살아온 집성촌이다.
관향 장흥의 역사와 현대 인물들
관향인 장흥長興의 역사를 보면 삼국 시대 때는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다. 신라에서 마읍현馬邑縣으로 고쳐서 보성寶城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수녕현遂寧縣으로 고쳐서 영암靈巖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장흥부長興府에 내속來屬시켰다. 1392년(태조 1)에 수녕현遂寧縣의 중녕산에 성을 쌓고 중심지로 했으며, 1413년(태종 13) 장흥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652년(효종 3) 장흥현으로 강등되었다. 1896년에 전라남도 장흥군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라도 장흥도호부 수녕遂寧의 성으로 위魏·박朴·조曺·함咸 4성이 기록되어 있다. 수녕이 장흥에 내속되고 관산冠山이라는 별호가 있었기에 수녕 위씨가 장흥 위씨로 개칭되고, 관산 위씨라고도 하였다.
근현대의 인물로는 일제 때 소련 연해주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위석규魏錫奎(1883∼l913)가 있다. 그는 관산파 위덕의의 9세손이다. 위씨들은 현대에 들어서도 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각 방면에 고른 진출을 보인다. 우리나라 항공 공학의 권위자인 위상규, 외교관 위성락, 위철환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위승호 육군 중장, 위성곤 국회의원, 위승희 시인, 위성용 재무부 경제협력국장, 위성미 골프선수(전·현직 구분 안 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