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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은 남궁원 동지가 2002년부터 활동한 사회주의정치연합(준) 에서 발행한 정치 팸플릿이자, 빛나는 전망 출판사 첫 출판물이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당, 평의회, 노동조합에 대한 레닌과 유럽 좌익공산주의자의 논쟁’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이 논쟁에서의 중요한 입장 차이는 계급투쟁의 기성세대에게는 혁명 전통의 문제이며,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는 세대에게는 맑스주의의 연속성과 혁명적 코뮤니스트 운동의 길을 열어주는 기준선이기도 하다. 8·15 해방 이후 노동계급의 공장자주관리 투쟁과 조선공산당, 전평
1945년 해방 이후 일제하 식민지 권력기구가 무너지면서, 밑으로부터 스스로 조직한 조선 노동계급의 자발적 행동과 투쟁은 친일자본가들의 기업과 공장에 대한 접수와 관리를 쟁취하려는 노동자 공장자주관리운동 및 공장폐쇄나 조업단축에 대항하는 해고반대투쟁과 퇴직금 요구투쟁 등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중 가장 중심적인 운동은 노동자 스스로 생산을 통제하는 “공장자주관리” 투쟁이었으며, 이러한 투쟁은 반제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맹아로 볼 수 있다.
8·15 해방 직후 노동자공장자주관리투쟁은 광범위한 대중투쟁이 폭발하는 ‘혁명적 상황’과 결합되어 있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은 단순히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해방 후 조선경제의 전반적인 재편방향과 새로운 국가건설의 수립과 결합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주요하게 8·15 해방 직후 아래로부터 스스로 조직한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투쟁과 조선공산당 (이하 조공)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는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조선 노동계급의 공장자주관리 투쟁
일제 통치하 조선의 식민지자본주의적 발전과정 및 공업 확장은 타 식민지들과 달리 대조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1943년 한국의 노동자 총수는 1백3십만 명이었다. 다른 식민지 중국, 타이완보다 2배 내지 3배 빠른 비율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일제의 패망은 공업뿐만 아니라 조선의 경제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해방은 조선의 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 자본의 철수와 기술의 부족을 가져왔고 공업생산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다. 해방 후 공업 생산의 감소는 당연히 노동자 수의 감소와 대량실업, 임금하락으로 나타났다. 1946년 11월 남한 전체의 실업자 수는 110만 2천 명으로 파악되었다. 해방 후 실업 노동자 수는 일본자본의 철수에 따른 폐업, 조업 단축 외에도 전재(戰災)민, 나아가 해외동포, 북한 동포의 월남과 더불어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일제식민지 권력의 붕괴와 일제자본의 철수에 따른 정치 경제적 조건은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이 등장하는 주요한 객관적 배경이었다. 이러한 점에 볼 때 해방 후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은 노동자계급투쟁의 발전 속에서 직접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해방이라는 조건과 상황에 규정된 자연발생적 성격이 강하였다. 노동자공장자주관리 투쟁의 주체적 측면에서 보자면, 감옥에 갇혔던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이 일제히 출소했다는 점, 식민지시대 명맥을 지켰던 비합법조직이 해방 뒤에 대중조직으로 바뀌어 모습을 드러낸 측면이다. 아울러 해방 이후 등장한 공장자주관리위원회 투쟁은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영향과 무관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 경제투쟁에 노동자들의 각종 기념일 투쟁과 정치투쟁을 배합시켜 민족해방투쟁의 선구에 나선 바 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자본가계급 및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고, 특히 민족개량주의에 대해 단호하게 투쟁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전시체제로의 전환에 따라 약화되지만, 8·15 해방공간에서 폭발적인 투쟁으로 노동자공장자주관리투쟁, 전평을 낳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11월4일 기준으로 16개의 산업별 노조에 7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와 관련된 노동자 수는 8만 8천여 명을 헤아렸다 (『해방전선』 제8호)고 한다. 이것은 당시 1,194개의 분회 중에 약 61%의 분회에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어 있고, 조합원 수 217,073명 중에 약 41%의 조합원들이 공장관리위원회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된 728개의 사업체는 당시 15,180개의 전체 산업별 사업체 수의 약 4.8%, 공장관리위원회와 관련된 8만 8천여 명은 전체 산업별 노동자 수 931,442명 중에 약 9.4%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공장관리위원회는 일제와 자본가, 임금인상, 퇴직금, 해고 해산 수당 요구투쟁 등을 거쳐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신념, 종교의 차이, 노조의 가입 여부에 관계없이 공장관리와 생활터전 확보를 목표로 지역 부문에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공장관리위원회는 광산, 토건, 금속, 화학 등 부문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 이는 일제독점자본의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조선에 진출, 식민지 공업체제로 구축했던 당시의 경제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첫째,일제자본가로부터 공장․회사를 강제적으로 접수 또는 인수/둘째, 공장 회사를 확보하고 관리하는 것 / 셋째, 공장관리에서 실제적 운영단계 / 넷째, 노동조건 개선과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 / 다섯째 일본인과 조선인 중역 자본가를 상대로 한 퇴진․배척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장관리위원회가 계급구성에서 노동자 중심이라 하더라도 앞으로의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 미군정에 흡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장관리위원회가 사회주의세력과 연결되는 것은 운동이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조건이었다. 한편, 미군정은 해방 이후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노자관계를 부활, 강화’하기 위해 1945년 12월6일 ‘조선 내 소재 일본인 재산 취득에 관한 건’이라는 이름의 군정 법령 제33호를 공포했다. 미군정은 일제의 국공유 재산만을 접수하려 한 초기의 방침을 변경시켜 일제의 국공유재산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까지 접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에 의해 노동자 공장접수- 관리운동은 전면 불법화되었다. 미군정의 점령정책으로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강화 확대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이제 공장․회사 안에서 공장관리위원 조직 자체의 존립을 위한 투쟁도 전개해야 했다.
2 조선공산당과 전평
8.15 해방정국 이후에 박헌영의 경성 콤그룹파가 중심이 되어 재건한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은 당시 노동자 농민운동 등을 지도하는 정치적인 조직적 구심체로서 노동자민중운동 전체에 강력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조공의 혁명전략은 전체적으로 노동자 공장관리를 자본주의 노자관계를 극복하는 국유화와 사회주의 전망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조공은 인민정권 수립과 중앙집중적인 정치와 계획경제 차원에서 노동자 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을 지도 감독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혁명전략은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노동자 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의 발전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즉 조공이 노동자 공장관리투쟁을 국유화 정책에 결합시키는 방침은 공장관리운동을 국유화라는 ‘공식적인 틀’과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틀 안에 묶어두고, 이를 벗어나거나 뛰어넘을 경우 극좌적 경향이라고 비판하였다. 실제로 조공은 볼세비키전위당과 노동조합 (구체적 조직표현으로 공산당과 전평) 노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는 보조적인 대중조직의 위상을 지닌 것이었다. 전평은 전반적으로 조공의 정치노선을 수용하면서, 공장관리운동을 노동자 공장관리는 인민정권 수립 뒤에 가능하다고 보고, 공장관리운동을 산업건설과 경제부흥, 인민정권 수립에 종속시키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초기에 노동자공장관리 운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경제부흥, 산업건설에 미군정과 협력을 해야 한다는 입장 아래 노동자들의 파업을 자제해야 하는 유연한(?) 계급정치 노선을 취하기도 하였다. 조공과 전평의 이러한 방침은 해방 직후의 혁명, 곧 ‘미소 협조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을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었으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인민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군정과의 협조정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특히 미군정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공장관리는 적당한 수준에서 자제하여야 했다. 따라서 실천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인민정권 수립 때까지 전투적인 공장관리운동을 자제할 것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공장자주관리운동은 1946년 8월 뒤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미군정이 임명한 관리인을 배척하는 운동은 46년 9월까지 이어지지만 1946년 9월 총파업이 탄압을 받은 뒤에 이것마저 사라진다. 해방 직후 노동자공장자주관리 투쟁은 노동자들이 공장 내에서의 생산경영과 분배과정에서 직접 모든 것을 결정하거나, 자신들이 스스로 지배할 수 있다고 느끼는 기구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노동자 공장자주 관리' 운동은 생산수단과 직접 생산자가 분리되지 않으며, 생산 과정상의 결정이 직접 생산자의 참여 하에서 이루어지고 노동규율이 직접 생산자의 자율적인 의사에 의해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노동자 공장자주관리 운동은 해방 이후 중요한 실천적 이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노동자공장자주관리 투쟁은 노동자 스스로 조직과 투쟁 속에서 만들면서 노자관계를 부정하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나아가는 가능성 및 노동자평의회 ‘맹아’적 시도였다. 노동자민주주의 투쟁의 일환으로서 직접생산자 지배와 통제 강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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