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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6장45~56절
제목 : 물 위를 걸으시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기적의 평행 본문은
마 14:22-33 ; 요 6:16-21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평행 본문이 없습니다.
이 기적 사건은 앞서 급식 기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52절에서 급식 이적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물 위에서 일어난 기적이 본문 이외에 4:35~41에서 나오는데 그 기적의 주제는 자연 현상까지 제압(制壓)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주제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은 4:35-41에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제자들과 합유하기 위해 취하신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 제자들을 강 건너 벳새대로 보내시고 홀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날이 저물 때 풍랑으로 힘겨워하는 제자들에게 위로 걸어오셔서 바람을 잠잠케 하십니다.
1.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45~46절)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 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십니다(45절)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 급식 기적 직후 예수님은 친히 무리들을 서둘러서 해산시키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배로 떠나보내고 있습니다(32절 주석 참조).
그 상황은 매우 급한 것처럼 비춰집니다.
특히 본문에서 “즉시”(유데오스)와 “재촉하사”(에나그카센, ‘억누르다’, ‘강권하다’, 강요하다‘는 뜻)란 말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몰아세우셨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금 전까지 고조되었던 급식 기적의 분위기와는 달리 서둘러 군중을 해산시키고 장소를 옮기려 한 까닭입니다.
마가는 그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행 본문인 요6:14, 15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즉 급식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선지자”곧 메시야라고 하면서 그분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비록 당신을 메시야로 알되 인간들의 궁극적인 구원자로 알기 보다 정치적(政治的) 성격의 메시야로 호해함으로써 극도의 흥분 상태로 이끌리던 무리들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기 위해,
예수님은 그들과의 교제를 잠시 중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가라고 지시한 장소는 “벳새다”입니다.
평행 본문 마14:22-33에서는 지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 위의 기적 직후 닿은 곳이 “게네사렛”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요 6:17에서는 가버나움을 향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기적을 언급하고 있는 3복음서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듯 행서지가 “벳새다”, “가버나움”, “게네사렛” 등으로 나타나는 것은 서로 비슷한 방향에 위치하기 때문에 나타난 착오 때문일 수도 있고 또한 도착한 곳과, 육지 도착 후 다시 재개된 사건과 그 발생한 곳이 각 복음서간에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불일치는 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엄급된 “벳새다”는 32절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급식 기적 사건이 일어났던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ias, 눅 9:10)가 아니라 갈릴리 서안의 가버나움 근처에 위치한 또 하나의 벳새다일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 선교의 활발한 전개를 위해서 뿐 아니라 무지한 민중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훼파(毁破)하기 위해 갈릴리 해안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의 목적을 수행해 가셨습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이 가장 많이 모여 당신께 가장 극진한 칭송을 할 때가 바로 당신께 가장 위험한 위기적 상황임을 자각하셨던 것입니다.
2)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46절)
예수님은 군중들을 다 해산시키고, 제자들을 떠나보낸 후 혼자 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들어갑니다.
문자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기도하실 목적으로 “산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단순히 외견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심한 갈등이나, 고민 또는 밀려오는 고독감을 이기지 못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요 6:14,15에서의 보고(報告)처럼 그때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31절 주석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 곧 고통과 배척당함과, 죽임당해야 할 사명 완수를 방해하는 바로 이 같은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들의 무지에 대한 염려를 해결하시기 위해 산속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가 함께 예수님께서는 헤롯왕의 박해가 임박해 옴을 예감하시어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혼자 조용히 하나님과의 깊은 영교(靈交)를 하시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로 예수님이 활동 초기에 자신의 기적사건을 비밀에 부치도록 지시했던 사실과(1:44), 지금의 공개된 대규모 대중 집회를 서둘러 해산시킨 점, 그리고 6:14에서 묘사된 헤롯의 불안을 종합해보면 헤롯의 공격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으며, 그 문제로 예수님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큰 사건을 전후하여 혼자 기도하는 경우가 어려 번 있었습니다(1:35 ; 14:32-36 ; 눅 3:21 ; 5:16 ; 6:12 ; 9:18, 28 ; 11:1 ; 22:41, 44).
이렇듯 어려운 일, 위험하고 힘든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이 지니신 능력과 권위와 지혜가 과연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가를 조용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실로 혼잡한 곳을 피하여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산”)에서 그분과 속 깊은 영적 교제를 하신 예수님에게 그 어떤 어려운 난관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2. 물 위를 걸으시다(47~52절)
1)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님께서는 홀로 뭍에 있습니다(47절)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 묘사로,
본 사건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배경 설명입니다.
급식 이적이 있었을 때 이미 저녁때가 되었으므로(35절)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는 것은 아주 긴 시간이 아닌 약간의 시간이 경과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때의 시간은 계절적으로 본 사건이 유월절 기간에 있었던 것으로 단정한다면(31절) 오후 6시가 넘어가는 늦은 저녁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유월절의 보름달 아래서 해변에 있는 사람은 능히 호수 한 가운데 있는 배를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지금 기도하러 들어가셨던 산에서 내려오셔서 해변의 평지에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산”(오로스)에 계신 것이 아니라 “뭍”(게), 곧 바다에 대칭되는 육지 위에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배의 위치는 갈릴리 바다의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이 얕은 곳을 걸어 온 것이 아니라 깊은 곳을 그것도 한 가운데까지 걸어왔음을 암시해줍니다. 또 예수님이 뭍에 서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이 뭍에서부터 바다 가운데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 설정(設定)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갑니다(48절)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바람이 거스리므로,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보다 200m 아래에 위치하여 주변의 협곡을 통해 회오리 같은 바람이 가끔 불어와 파도를 일으키기도 합니다(4:37 주석 참조).
이 바람은 제자들이 가는 방향에서 마주 불어오는 역풍(逆風)으로, 배를 목적지에서 자꾸만 이탈시켜 항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묘사는 첫 번째 바다 위의 기적에서 묘사된(4:37) “광풍”과는 성격이 다른 은근하고도 끈덕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계속 바람이 불고 있었으므로 멀리서도 항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부정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제자들의 현재 당하고 있는 고초를 신적인 직관(intuition)으로 조용히 응시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밤 사경 즈음에. 유대인들의 시간 구분법으로는 밤을 3등분하는 것이(초경-해질때부터 오후 10시까지, 이경-오후 10시부터 오전 2시까지, 삼경 곧 새벽-오전 2시부터 해 뜰때까지) 상례였으나,
그들이 로마 통치하에 편입됨으로써 밤을 4등분하는(일경-오후 6시에서 9시, 이경-오후 9시에서 12시, 삼경-새벽 12시에서 2시,
사경-새벽 3시에서 6시) 관례가 생겨났습니다.
마가는 바로 이 로마인의 시간 부분법에 맞추러 본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물위를 걸어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는 그들의 곁을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었다”가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의도를 표현한 것이기 보다 그 순간 막 일어나려는 일을 목격한 사람이 받은 독특한 인상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W. W. Wessel).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향해 소리치지 않았다면 곧장 지나치기라도 할 듯이 그 배를 향해 곧장 걸으신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스치듯 걸어가셨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이 구절은 결코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난을 간과하고자 하심이 아니요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들이 당신을 향한 믿음을 보일 때,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들 배로 초청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며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보일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히 11:6).
즉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에 근거한 초청(招請)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Lenski).
3)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릅니다(49절)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유령인가하여 소리 지르니.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온 예수님을 보면서 놀라고 있습니다.
특히 “소리 지르니”(아네크랔산)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고함치며 두려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제자들의 심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실로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실체가 없는 환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마 14:26 주석 참조).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경험에만 따른 추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한계(限界)였습니다.
한편 이 장면은 당시 유령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민담 형식으로 널리 소개되어 있었던 것임을 반영해 줍니다.
그리고 유령에 대한 인상은 심히 두려운 존재로 퍼져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실체로 여기지 못한 것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 즉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것으로 믿었던 예수가 갑자기 시. 공을 넘어 물위로 나타난 사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4:35~41에서 광풍 제압 기적을 경험한 제자라면 적어도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 침착했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는 바람 불고 혼란스런 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을 분명히 식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해 유령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심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체온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4) 그들이 다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50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안심하라(다르세이테).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는 뜻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용기와 위로를 더하는 강한 명령입니다.
그들은 이제(현재형) 더 이상 바람과 유령의 악몽에 짓눌리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담대히 떨쳐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 위로의 말은 치유 이야기 속에서도 자주 나옵니다(10:49 ; 마 9:2, 22).
따라서 이 단어의 사용 의미는 분명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의미의 문제 해결을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는 바람으로 인해 향해가 곤란한 상황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령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니”(에고 에이미, It is I)라는 말은 마치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의 표현인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표현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출 3:14).
따라서 예수님의 “나” 선언은 곧 신의 현현(theophany)으로서의 당신의 존재 계시로 이해됩니다(요 8:58).
이러한 예수님의 자계시(自啓示)는 심한 두려움에 놓여있던 제자들에게는 더 없는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바람과 풍랑과 지구의 중력까지도 정복하시고 바다 위에 우뚝 서 계신, 그분이 바로 제자들이 믿고 따른 자신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지닌 모든 공포와 유혹을 물리쳐주실 수 있는 만유의 주이심을 “내니”라는 그 한 마디를 통해 전달하신 것입니다. 한편 “두려워 말라”(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장 그 무서워하는 상태를 중단하라(stop fearing)는 참으로 단호한 명령입니다.
이제 나 예수님이 너희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께서 그 험한 바다 위를 친히 걸어오신 이유이며 목적이었습니다.
5)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51절)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수님의 기적이 물 위로 걷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바람을 잠재우는 권능까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무언의 명령으로서 바람의 기운을 지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결국 이 기적의 주제는 자연을 다스리는 신적(神的) 권위가 예수님에게 있음과 그러한 권능의 모든 귀결점은 바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마가는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베드로가 물에 뛰어든 사실에 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마 14:28-31).
이는 아마도 마가에게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베드로가 자신의 철없이 날뛰던 모습을 통한히 여긴 나머지 물에 뛰어든 장면에 대해 침묵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 말은 내색하지 않고 놀란다는 말인데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심과 당신께서 배위로 오르시는 것과 동시에 바람이 잠잠해진 사실을 보고 놀라와하는 표현입니다.
평행 본문 마14:33에서는 제자들이 그들 앞에 서신 예수님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신적 권위를 느끼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는 장면입니다.
6) 그들이 마음이 둔하여 졌음이러라(52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가는 물 위에서 일어난 두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놀란 일을 제자들이 급식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앞선 오병이어의 이적의 의미, 곧 우주의 주관자와 참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이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실 뿐 아니라 물결을 잠재우신 것을 보고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로 그들의 가장 큰 과오는 험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지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가족론적 지식(知識)의 결핍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마 14:33 ; 16:16 ; 요 6:68, 69 등에서 자신들의 예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전인격적으로 수용하고 그 삶에서 구체적으로 이해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모히려 “마음이 둔하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3. 병자를 고치시다(53~56절)
게네사렛에서의 활동을 요약하여 치병 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행 본문은 마 14:34-36에만 나옵니다. 내용도 서로 비슷합니다. 그리고 두 본문 모두 의도적으로 압축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즉 본문은 수많은 사건을 요약한 일종의 삽화로서 “치료자”되신
그분의 이미지를 강렬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1)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53절)
예수님 일행은 호수 건너 게네사렛에 도착하셨는데 그곳은 호수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Magdala) 북쪽의 광야이든지 아니면 광야에 있는 한 도시였을 것입니다(Dalman).
게네사렛은 한 도시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갈릴리 서안의 한 평야지대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게네사렛 평야의 토양이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많은 촌락들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s)는 이곳에 대해 “이곳은 자연의 야심작(野心作)이라 불리울 수 있다.
그 까닭은 이곳이 근본적으로 서로 섞여 살 수 없는 식물들까지도 함께 섞여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2)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알고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옵니다(54~45절)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예수님 일행이 도착한 시간이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낮 시간일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뭍에 나와 있었고 사람들은 곧 예수라는 사실을 알아 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지역 여러 곳에 다니며 소식을 알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환자들을 메고 예수 앞으로 달려오는 장면을 마가 특유의 분주하고 생동적이며 긴박감 있는 묘사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2:4에서도 한 번 언급된 바 있는 “침상”의 이동 장면은 가히 예수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줍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예수에 대한 명성이 “게네사렛”에서 아주 좋게,
특히 병 고치는 기적으로 신뢰 있게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장면을 급식 기적의 결과와 함께(45절 주석 참조)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인기와 명성, 그리고 영향력은 마치 어떤 크나큰 변화를 예감케라도 하듯이 민중들 사이에 놀랍게 퍼져가고,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정치가들에게도(헤롯처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결국 더욱 짙게 다가오는 핍박(逼迫)의 그림자를 예감케 합니다.
3)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고치심(56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열정적 활동과 사람들의 열광적인 추종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 영역이 어느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조그마한 “마을”이나 잘 발달되고 붐비는 “도시”나 한적한 들판 위에 세워진 “촌”이나를 불문하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그 어디나 선교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보호자들이 환자들을 “시장”에 두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인 시장을 당신의 복음전파 대상지로 택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장”(아고라)은 한 마을 어귀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 이곳에는 마을 법정과 공공 기관이 형성되며, 또 사람들의 상거래와 교제의 장소로 활용됩니다.
이러한 분주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에서 예수님의 선교 사역이 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손을 대게. 먼저 “옷가”란 “옷가에 다느 술”(5:27)을 가리키는 말로서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이 명한 바에 따라(민 15:37-39 ; 신 22:12) 옷가에 술을 달고 다니셨던 것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기라도 허락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간구하니”(파레칼룬)는 무리들의 간곡한 요청이 거듭거듭 계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믿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장면이 혈루증 여인 이야기에서도 나타납니다(5:27).
마가는 이와 같은 열광적이고 열정적이며 생동감 있는 예수님의 치병 활동을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완전한 치유의 은총을 입은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비록 그들의 행동 근저에는 당시 팽배(膨湃)해 있던 미신적 의도가 곁들여져 있었다고 할망정, 예수님이 그들을 치유하신 것은 분명 예수님의 옷가라도 만지기를 열망했던 그들의 순수한 믿음 때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법입니다(히 11:6).
여하튼 본문의 마지막 글귀는 예수님의 활동은 성공적이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 열기가 높아짐을 느끼게 하며 갈릴리 사역이 거의 절정에 다다랐다는 조용한 암시를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십니다(45,46절).
아직 무리가 흩어지지 않았음에도 충분한 휴식을 갖지 못한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시고 마지막까지 사역자리를 지킵니다.
그리고 무리를 모두 보내신 후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1:35, 14:32, 눅5:16,6:12, 9:28).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14: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눅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예수님은 새벽에, 한적한 곳에서, 산에 올라가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무리의 그릇된 기대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으셨습니다.
나는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머무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2) 역풍으로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도우십니다(47~52절).
예수님은 바다 한가운데서 애쓰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십니다.
혹시 인생의 풍랑을 만나 고전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풍랑 가운데에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십니다.
주님이 주실 평화와 안식을 기대하십시오.
3) 나사렛과 달리 게네사렛에서는 놀라운 치유의 역사들이 일어납니다(53~56절).
예수님은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길 소망하는 게네사렛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들을 다 고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안식을 경험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많은 이적을 경험한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합니다(49~52절).
오병이어의 특별한 이적도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다위로 건너오시는 주님을 보고 두려워할 정도로 마음이 둔했습니다.
이적 자체에 열광하기보다는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매일 묵상과 예배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