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5:21~28(신 25), 다 배불리 먹는 새 시대
첫째,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일곱 광주리(32~39).
철병이어의 기적(32~39), 4천명이 먹고도 남은 조각, 부스러기가 일곱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떡은 모든 사람이, 이방인 여인조차도 먹고도 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다 받아갔기 때문에 우리에게 줄 축복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넘치는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수용적인 믿음의 자세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만 예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이방인이요, 그것도 여인인 가나안 여자 하나(22)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고백하면서(“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어떤 교회는 믿음과 은혜와 축복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 시골교회에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새시대에 다 배불리게 먹게 하는 예수님의 충만한 사랑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충만한 은총이 쏟아질 것입니다. 연흥교회의 최장로님은 추수감사절 헌금으로 1억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병원 건물을 지으시면서 빚이 있어서 죽을 때까지 빚을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3년 전에도 아파트 평수를 줄여서 1억을 만들어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과 교회에 계속해서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넘치는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는 자신의 칠병이어를 드리고 주님의 축사를 통해서 5천명이 먹고도 남게 합니다.
둘째, 주 다윗의 자손, 메시야는 이방인도 도울 수가 있다(22~27).
32절에,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나안 여인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미 구원은 흘러 넘쳐서 유대인에게도 주고 남아서 이방인에게도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26)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와 같은 시골교회에는 줄만한 떡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 우리도 이 여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27)만이라도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며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부스러기 은혜가 내게는 1억의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내게는 엄청난 축복이요 내 딸이 고침을 받을 것입니다. “그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내게 주십시오”라 고백하는 바로 그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부르짖어 보십시오. 주님이 넘치는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셋째,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1(28 참조. 16:8~12).
주님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소원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고도 여전히 남습니다. 남은 광주리가 일곱 광주리나 됩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라”(28)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는 그런 은혜의 시대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작은 자였습니다(16:8~12). 떡이 없다고 논의하지 말고 예수님이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충분히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