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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긍휼한 마음으로 받는 행복
마 5:7
■ 이야기 속으로
2003년 3월에 진 웹스터가 쓰고 이주령씨가 번역한 “키다리 아저씨”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나서 고등학생이 된 쥬디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항상 남의 옷을 얻어 입고, 남의 학용품을 빌려 쓰면서도 고아원에 있는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아낌없는 사랑으로 돌보는 아이였습니다. 몹시 힘들게 공부했지만, 착하고 글 쓰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이 고아원에 어린아이들을 입양하거나 기부금을 내려는 부자 후원자들이 많이 왔었는데, 그들이 다녀간 후에 원장 선생님이 쥬디를 방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쥬디야, 이곳에 온 분들 중에 한 독지가가 네가 쓴 글을 보고 너에게 대학 공부를 시켜 주겠다고 하시는구나! 이 독지가는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만 키다리 아저씨라고 이야기해주기만을 바라신단다. 너는 이제 대학에 갈 텐데, 대학에 들어가면 한 달에 한 번씩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써드려라.” 그래서 쥬디는 꿈에서 그리던 대학에 가게 된 것입니다. 기숙사가 딸린 아주 비싼 대학인데, 키다리 아저씨는 쥬디가 기죽지 않도록 학비 이외에도 예쁜 옷과 가구와 책들을 쥬디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꼬박꼬박 보내주어서, 쥬디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생활하였습니다. 여름 방학이면 아름다운 농장에서 쥬디가 글을 쓸 수 있도록 사소한 것까지 배려해 주었습니다. 쥬디는 너무도 고마워하면서, 이 분이 도대체 누구일까 무척 궁금해 하면서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약속 때문에 더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는 날, 키다리 아저씨에게서 쥬디를 만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쁜 마음에 가장 예쁜 옷을 입고 키다리 아저씨가 살고 있다는 뉴욕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대학 시절 쥬디와 가장 친하던 단짝 친구의 오빠가 서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항상 친구 집에 놀러갈 때마다 쥬디에게 그토록 착하고 친절하게 잘해주던 오빠였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는 언제나 쥬디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남을 긍휼히 여기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이렇게 남에게도 긍휼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동화의 내용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말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구원을 베푸시고 그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긍휼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늘날 과 같이 많은 열매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주 부르는 ‘소명’ 이라는 복음송의 모델에 된 사람은 바로 고인이 된 “최춘선” 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김포평야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동경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유학시절 “사선을 넘어서”의 저자 ‘가가와 도요히꼬’가 세운 빈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20대에 김포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무렵 죽을병을 앓았는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고침 받은 게 너무 감사해서 더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되어 평생을 주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하며 살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뒤에 김포평야의 수십 리 땅을 분할해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집을 짓고 살게 해주었습니다. 최 춘선 씨는 상해 임시정부시절 김구 선생을 모시고 나라를 위해서 분투한 독립투사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분은 지난 30여 년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긍휼함을 가지고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는 신을 신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지하철 등지에서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며 복음을 전하고 살았습니다. 그분은 젊은 남자를 만나면, “미스터 안 중근, 진짜 안중근, Why two Korea?” “멋진 이순신, 진짜 이순신, Why two Korea?” 라 외치고, 젊은 여성에게는, “미스 유관순, 진짜 유관순, Why two Korea?”라 외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진짜 안중근, 이순신, 유관순 같은 애국자가 되었다면 왜 나라가 둘로 갈라졌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이 한이 되어 맨발로 거리를 누비는 90의 노인의 삶을 생각하면, 그리고 우리의 치욕의 역사를 생각하면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좀 더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행동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듯 긍휼을 깨닫고 자신이 진정 긍휼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도 긍휼을 베풀며 사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 먼저 확인해 볼 질문
당신은 어떠한 상황에 긍휼한 마음이 생기나요?
■ 주제 속으로
예수님께서는 4가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이시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의에 주린 마음,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번 주제는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받은 복에 관한 주제입니다.
헬라어로 긍휼이란 “엘레오스” 라는 단어입니다. 그 의미에는 “은혜, 친절, 축복” 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칫 잘못하면 남을 긍휼이 여겨야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보이는데 그런 말만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남을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자신도 긍휼함을 입은 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해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행동 하였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는 내가 죄 지은 자를 사하여주었기 하나님도 내 죄를 사하여 달라는 조건을 단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사죄하심이 필요한자이여서 남을 내가 정죄할 수 없다는 뜻과 같이 나도 긍휼하심을 입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런 사람이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복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긍휼함을 입은 자로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지 남에게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에 복이 있나니 라는 하나님께 긍휼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남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있기에 나도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미가 더 큰 것입니다.
어느 사람은 자신의 삶도 어려운데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다면서 아무도 모르게 해 달라면서 물질을 가지고 온 성도도 있으며, 어려운 형편에서도 선교에 써 달라고 하면서 거금을 헌금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남을 긍휼하게 여길 때 나도 긍휼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드리는 것이기에 더욱 하나님께서 그 손길을 받으시고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에게도 더 큰 손길로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잠언 11장25절에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고 하였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긍휼함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행동을 그렇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로 바울은 소개하였습니다. 긍휼의 은사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후하게 주시었습니다. 받을 수 없는 자격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었습니다. 그러기에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일을 오래두면 썩는 것과 같이 긍휼을 가지고만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 주제에 대한 확인
당신은 긍휼한 마음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 말씀 속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스스로 긍휼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를 회복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영원’이라는 복도를 달려오셔서 ‘우리의 죄’ 라는 장애물을 뛰어넘고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세상에 들어오셔서 우리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긍휼을 예수님은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긍휼의 복은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긍휼에는 다음과 같은 적극적인 행동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1) 긍휼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하려는 사람들은 항상 그 사람에 대하여 긍휼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긍휼하신 눈으로 그 상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관에서 살려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실 때 주님의 눈은 바로 그 과부를 불쌍히 보는 긍휼의 눈이었습니다. 13절을 보면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긍휼의 눈을 뜨고 상대방의 삶의 구속구석 찾아서 살피고 돌봐 주는 곳에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문제를 보면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 상대방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위해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강도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동족도 강도만난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데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상대도 해주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가서 그 사람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33-34절에 보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고 하였습니다. 즉 강도를 만나서 쓰러진 사람을 보자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보는 긍휼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같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긍휼의 손길을 펼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플 때에 의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받으면 그 의사를 통해서 자신이 지금 가진 병의 문제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병을 낫게 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긍휼의 손은 바로 이같은 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주님께서 진정한 이웃으로 표현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그 다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다 행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35절을 보면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이 사미리아인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으시지만 우리는 손이 있다.” 고 말입니다. 남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손길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며 바로 예수님의 손길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4) 긍휼의 발걸음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도우려한다면 도울 곳을 찾아 가든지 그 사람을 만나든지 아니면 상대를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중풍에 들린 친구를 위하여 네 친구는 긍휼의 발걸음을 걸었습니다. 그 긍휼의 발걸음은 도우려고 그 장소에까지 가는 발걸음이었고, 그 사람을 함께 매고 달려야 하는 발걸음이었고 함께 걸음을 맞추어서 걸아야 하는 발걸음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오자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친구를 메고 또 다시 지붕으로 올라가야하는 사랑의 발걸음 이었습니다. 그 긍휼의 발걸음은 주님의 칭찬을 받았고 그 친구를 병에서부터 해방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는 감격과 감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긍휼의 발걸음을 가진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가 부흥되고 성도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 정리 및 확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즉 그도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라는 책을 쓴 영국의 토마스 모어는 믿음이 좋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어는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중상모략에 빠져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최후 진술 때 모어 경이 재판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재판관님, 오늘만은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그리고는 친구여,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주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후에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평생토록 복음 증거자의 인생을 살았으며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서 스데반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손잡고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당신도 예수 믿고 나중에 저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손잡고 영원토록 기뻐하며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서 재판관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선한 말을 합니까?” 토마스 모어 경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A. T. 피어슨 박사는 긍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용서하는 마음이요.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마음이요. 해를 받아도 보복하지 않는 마음이요. 미움 대신에 사랑으로 갚아주는 마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구원받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사 돌보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미워하는 이웃과 우리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내가 원망하는 이웃보다 내가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악한 자보다 더 악한 나의 심령이 주님의 긍휼로 치유되고 회복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미워하고 정죄하는 대신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보복하고 고통을 주는 대신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이웃들이 치유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성도들에게 더 풍성한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확신의 질문과 결단
1. 우리가 긍휼한 마음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행동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긍휼한 사람은 어떤 특징 있나요?
3.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은 무엇인가요?
■ 다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저희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구원을 받았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구원이 주님의 긍휼이셨듯이 우리도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보기를 원합니다. 정욕에 잡히지 않고 오직 긍휼의 사람으로 살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