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의사. 본명은 김점동(金點童). 세례명은 에스더(Esther). 박유산과 결혼하면서 박에스더로 불리게 됨
서울 정동에서 평범한 선비 계층인 김홍택(金弘澤)과 연안이씨 사이에 넷째 딸로 태어남. 그가 열 살 될 무렵 아버지는 가세가 빈궁해지자 미감리회 초대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G. Appenzeller)의 집에 들어가 잡무를 보게 되었고 이런 관계로 어린 그는 선교사들을 가까이에서 대할 수 있었다. 정동에 미감리회 여선교사였던 스크랜턴 대부인(M.F. Scranton)이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할 때인 1886년 11월, 그는 할머니의 완고한 고집을 꺾고 아버지의 후원 속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에서 영어ㆍ산수 등 일반 과목 외에 주기도문ㆍ찬송ㆍ기도 등의 예배의식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는데 박에스더는 이러한 예배의식을 통해 영혼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888년 어느 여름,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그는 죄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두려움으로 영혼의 불안함을 느끼던 중 죄를 자백하고 구원을 비는 기도를 통해 마음속에 확신과 평안을 느끼는 신앙체험을 하였다. 믿음의 확신을 얻은 그는 다른 동료 학생 2명과 함께 1891년 1월 25일 올링거(Ohlinger)에게 세례를 받았고, 에스더(Esther)라는 세례명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은 김정동에서 김에스더(金愛施德)로 바뀌게 되었다.
이화학당 시절 영어 실력이 남보다 뛰어나 선교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박에스더는 1890년에 내한하여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 후에 동대문부인병원) 의사이자 이화학당 교사로 취임한 셔우드(Rosetta Sherwood)의 통역관 일을 맡게 되었다. 1888년 여름의 신앙체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그는 셔우드와의 만남을 통해 의료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 셔우드는 보구여관에서 특별히 의학반을 편성하여 기초 의료를 가르쳤는데 박에스더는 그 반 학생이 되어 양의학을 배우게 되었고, 셔우드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를 지도해 나갔다. 셔우드는 1892년 6월 같은 의사이자 선교사로 온 홀(W.J. Hall)과 결혼하여 홀 부인이 되었고, 박에스더는 1893년 5월 24일 홀의 조수였던 박유산과 결혼하였으며,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구전통에 따라 이름이 김에스더에서 박에스더로 바뀌게 되었다.
결혼한 홀 부부가 1894년 5월 평양 개척선교의 사명을 띠고 평양으로 이주하자 박에스더 부부도 동행하였다. 그러나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중에 구휼활동을 벌이던 홀이 11월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홀 부인은 12월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귀국하는 홀 부인에게 박에스더는 미국에서의 의학공부 뜻을 비쳤다.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박에스더 부부의 미국 유학 길이 열리게 되었다. 박에스더는 1895년 2월 뉴욕의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해 9월 뉴욕 유아병원에 간호원으로 근무하여 의료 실습을 받는 한편 개인교수를 찾아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6년 10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 수업을 받았고, 1900년 6월에 졸업하였다. 이 과정 중 남편 박유산은 셔우드가(家)의 농장 농부가 되어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던 중 아내의 졸업을 21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의사가 된 박에스더는 1900년 11월 20일 귀국하였고, 귀국하는 커틀러(M.M. Cutler)의 후임으로 서울 보구여관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홀 부인이 재차 내한하여 평양에서 기홀병원(紀笏病院)을 시작하자 그곳에 부임하여 다시 홀 부인과 합류하였다. 박에스더는 평양에 부임한 지 10개월 만에 3천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의료활동과 함께 그는 미감리회 여선교회 선교사로 임명받아 황해도ㆍ평남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고 홀 부인에 의해 기홀병원 안에 설립된 맹인학교(홀 부인은 1894년 한 교인의 눈먼 딸을 교육하기 시작했던 것을 확대시켜 맹인학교를 세우고 귀머거리까지 교육하였다)와 간호학교의 교사로도 활약하였다. 1909년 4월 28일 경희궁에서 고종 태황제가 친임한 가운데 대한부인회 등이 주최한 해외 유학 여성 환영회가 베풀어졌을 때 박에스더는 하란사(河蘭史), 윤정원(尹貞媛)과 함께 은장(銀章)을 받았다. 그러나 과중한 진료업무와 결핵을 앓게 된 그는 홀 부인의 정성어린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910년 4월 13일 서른 다섯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