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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其上不曒(기상불교) : 그것의 위가 더 밝은 것도 아니고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 : 결국 아무 것도 없음으로 돌아간다.
도의 실마리
처음 1절은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미시의 세계를 말한다. 하지만 감각할 수 없는 게 비단 극단의 미시 세계만은 아니다. 극대의 거시 세계도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소우주는 물론 대우주를 아직 다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안도 밖도 모두 무한이라 한다. 감각과 인식이 오직 유한의 대상만을 쫓는 것을 생각할 때, 논리적 역설과 모순이 왜 중요한지는 자명해진다. 그래서 그리스나 인도나 중국 모두 논리적 모순과 역설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철학자들과 그들의 학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장이라고 크레타 사람이 말했다'나 '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토끼는 결코 추월할 수 없다' 등 수없이 많은 모순과 역설의 사례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수학에서는 이런 역설과 무한의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공리를 설정하게 된다. 공리는 모순과 신비의 세계를 피하고 비록 임의로 가정한 테두리이지만 그 안에서 확실성의 세계에 안주하겠다는 욕구이다. 하지만 그런 수학도 무수한 난제가 계속 발견되는 것이다. 동학의 수운이 '불연기연不然其然'편에서 말한 불연은 이렇게 논리과 감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가리키고, 기연의 세계는 논리와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기연의 세계란 현상의 세계이며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무한의 세계가 본질의 세계에 가깝다고 추측할 수 있다. 기연이 불연의 바다에 떠있는 꼴이다. 여기서 노자가 수운 같은 분들이 건드리는 것은 불연이다.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이 가 닿을 수 없는 '희미한 것들'! 극소 그리고 극대의 무한 세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바탕!
그것을 2절에서는 '밝혀낼 수 없다'고 말한다. 수운의 어법으로 바꾸면 불연不然이다. 난제 중 난제다. 그리고 그 '희미한 것들'이 '혼연으로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동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혼원일기混元一氣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기至氣를 설명하는 말이다. 분리불가능한 전체성을 일컫는다. 이를 이능화는 대우주의 대생명으로 설명한다. 감각과 인식은 분리된 것만을 인식한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희미한 것들은 분리불가능한 일체이다. 거기엔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하나인 상태로 존재한다. 아니 존재가 존재 이전의 절대무의 상태와 공존한다. 그것일 상징적으로 '하나'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물론 동학식으로 말하면 우주 일기一氣이며, 노자의 도道이며, 무無이며, 허虛이며, 무극태극無極太極이다. 왜 무극태극이냐하면 끊임없이 역동하는 하나이기에 무극태극이다.
3절 '그것의 위가 밝은 것도 아니고, 아래가 어두운 것도 아니다'는 희미한 그것이 미묘하다는 말이다. 위로 드러났다고 해서 밝게 드러난 것도 아니고, 아래로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아예 어두운 것도 아니다. 모두 허와 무 내지 무극태극의 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거 미치겠다. 잡을래야 잡을 수 업고, 볼래야 볼 수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 없다.그러며 있단다. 그러니 감각과 인식을 자꾸 동원하려고 하자 말고 단념하고 그놈을 다르게 잡을 생각을 내야 한다. 이젠 진짜 고수가 되어야 한다. 장님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고래를 잡든 거북이 등을 올라타든, 바다 밑바닥을 걷고 태평양을 헤엄쳐야 한다.
4절은 이 미묘한 것을 더 파고 들어간다. 승승繩繩은 참 묘한 말이다. 도를 나타내는 핵심어다. 우리의 노자는 앞에서 이미 도를 면면약존綿綿若存이라 말한 바 있다. 실을 뽑아내듯 가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가는 시냇물의 흐름이다. 면면과 승승은 같은 말이다. 그런데 승繩은 밧줄을 가리킨다. 밧줄은 두 가닥 혹은 세 가닥 이상이 돌아가면서 하나로 엮인다. 역동하는 우주를 승승으로 표현했다면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우주의 무수한 은하들을 보고, 그것을 다시 시간의 눈으로 보아라. 무극태극이 별 게 아니다. 거대한 우주 밧줄이 요동치는 모양이다. 초끈이론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그러고 보면 냇물도 그냥 실타래처럼 가닥가닥 흐르는 게 아니다. 스크류다. 밧줄처럼 엉키면서 돌면서 흐른다. 자전하며 공전한다. 그게 우주의 운동하는 모양이다. 계곡에 가서 바위 패인 것을 봐라. 무슨 나사가 돌아간 것처럼 돌이 돌아가면 패였다. 그래서 용이 승천한 자국이라는 둥 말하는 것이다. 하기야 용이라는 생명체도 희미한 것에서 탄생한 무극태극의 동물이 아닌가? 그것이 승승繩繩이다. 4절은 이렇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이 끝없이 이어져 결국 아무 것도 없음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순환론이다. 이거 오늘은 자꾸 동학 생각이 난다. 수운은 자신이 얻은 도道를 무극대도無極大道 또는 무왕불복지리無往不復之理(가고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이치)라 말했다. 그의 천명天命은 유교적 천명이 아니다. 도교적 무위이며 자연이다. 노자가 여기서 말한 무물無物은 허虛이며 무無이고, 일기一氣이다.
자, 계속 5절의 도道에 대한 묘사를 보자. '이를 일러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고, 아무 것도 없음의 상징이라 한다'. 볼 수는 없지만 있으니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한 것이고, 없는 것을 가리키니 '상징'이라 말한 것이다. 있지만 감각할 수 없는 것, 없지만 있는 것 그것이 노자가 통찰한 엄청난 세계이다.
6절 '이것을 '황홀'이라 하는데, 앞에서 보아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를 쫓아도 그 뒤를 볼 수 없다'고 했다. 황홀恍惚!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어릿어릿하다. 이거 완전히 도깨비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양자역학의 세계다. 극소의 물리세계 내지 종교체험을 묘사하라면 황홀하다는 이 말처럼 적확한 게 없다. 황恍은 너무나 밝아 분별이 되지 않는 어릿함아고, 홀惚은 어두원 분별되지 않는 어릿함이다. 나는 여기서 혼돈이 된다. 물리학과 종교가 구분이 되질 않는다. 둘 다 황홀하다. 황홀은 앞에서 거듭된 음양과, 극대와 극소, 드러남과 숨음 등 모두를 받으며 통합할 말이다. 진리를 처음 접하면 그것은 감히 황홀한 것이다. 당혹, 두려움, 황홀! 여기까지 얘기가 일단락 되었다. 도에 대한 설명은 끝났다.
7절은 이를 바탕으로 도의 현실적 운용을 말하는 부분이다. '옛날의 도를 가지고 오늘의 일을 처리하라'는 말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류사를 타락사로 규정한 것이 공통적이다. 문명 자체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재밌지 않은가? 서양에 기반한 현대문명이 가진 진화론과 발전사관은 외려 낯선 것이다. 그러니 노자도 옛날의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았던 방식으로 오늘의 삶을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마지막 8절 '옛날의 처음을 알게 되면 도의 실마리를 잡는 것이다'. 불가에 내려오는 말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알아내라는 말이 있다. 부모님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내는 화두다. 처음이 단서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말 저 말 필요 없다.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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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할려고 언제나 동동거립니다. 날마다 동동거리다 어느날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른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자라는 시간이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간은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고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언제나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존재한다고 봐도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다가 결국은 '시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흐르고 모든 만물이 흐르는(변화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변화를 해야 하는지? 왜 한 순간도 같은 순간이 없는지?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왜 변화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있으면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가벼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옛날의 처음을 알게 되면 도의 실마리를 잡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왜 변해야만 하는가?하는 생각을 다시 해 보고, 옛날의 처음이 어쩌면 '현재 이 순간'일수도 있다는 착각을 해 봅니다.
그러게요, 사람은 참 이상한 동물입니다. 없는 시간을 만들어 스스로 거기 갇혀 살고, 없는 의미를 만들어 내려고 평생 애를 쓰니..^^ 그런가하면 저처럼 덧없는 말의 거미줄을 쉼없이 짜기도 하고...^^ 사람은 참 재미납니다.
원래 참 무의미한게 사람의 일생인데(동물다큐이상으로 동물적인고로)의미규정을 제각각 스스로들 하라고 만든거죠 에오처럼 절대의 안정이 목표라면 다 어서어서 죽는게 최선~ 어찌보면 깨달음과의 거리는 죽음과의 거리와 같으니까요 그 거미줄에 세상 한 켠 생판 모르는 저같은 사람도 걸리고 참 재미나긴 합니다 ㅎ
^^ 그러면 역시 제가 거미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