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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 현종실록 1권, 현종 대왕 행장(行狀) 164-1
현종 대왕 행장(行狀)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원(棩)이며 자(字)는 경직(景直)이니, 효종 대왕의 아들이고 인조 대왕의 손자이다. 어머니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는 의정부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이다. 효종이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에 심양(瀋陽)에 볼모로 들어갔는데, 신사년001) 2월 4일에 심양 관소(舘所)에서 대왕을 낳았다. 왕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두세 살 적부터 행동거지가 범상하지 않았는데, 4세에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다. 인조 대왕이 무엇을 물을 때마다 어른처럼 대답하였으므로 인조 대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다. 여러 왕자·왕손과 함께 궁중에서 자랐는데, 인조 대왕이 항상 말하기를,
"이 아이는 보통 아이보다 특별히 다르니 내 뒷날의 근심이 없겠다."
하였으니, 대개 기대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효종이 미처 귀국하지 못하였는데 왕이 부모를 사모한 나머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적마다 축원하기를,
"부모가 어서 돌아오게 하여 내가 뵐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적마다, 그 지방002) 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보았다. 왕이 5세에 궁중 안의 시아(侍兒)가 쑥대 화살[蓬矢]로 그의 동기를 쏘아 눈을 다치게 했다는 말을 듣고 골육을 해친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그를 멀리 내쫓아 버렸다.
인조가 한번은 증선지(曾先之)003) 의 《사략(史略)》을 펴놓고 제왕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대해 죽 들어 물었는데, 요(堯) 순(舜)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질다고 대답하고, 걸·주에 이르러서는 매우 나쁘다고 대답하였다. 인조가 묻기를,
"요 순은 어째서 어질고 걸·주는 어째서 나쁜가?"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요임금은 흙으로 계단 세 층을 만들었고, 금옥(金玉)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였으며, 그의 인자함은 하늘과 같고 그의 지혜로움은 신과 같았으니, 어찌 어질지 않습니까. 걸·주는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창고에 채워 놓는가 하면 궁전과 누대를 화려하게 지었으며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비방한다고 하고 의견을 올리는 자를 요망한 말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나쁘지 않습니까."
하니, 인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한번은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피(豹皮)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왕의 나이 이때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 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부모가 쓰는 의복이나 거마(車馬), 그리고 기용(器用)에 있어서는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공경을 다해 다루고, 감히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부모의 경계를 들으면 기뻐하였다. 때로 여염집에 나가 임시 거처하면서 부모가 원하지 않는 바는 감히 행하지 않았는데 곁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가까운 이웃 중에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어 시자(侍者)가 꾸짖어 금하자, 왕이 말리기를,
"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번은 궁중에서 나오다가 떨어진 옷을 입고 얼굴색이 검은, 합문(閤門) 밖을 지키는 군졸을 보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하니, 시자(侍者)가 대답하기를,
"얼고 굶주려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왕이 탄식하다가 옷을 주도록 명하고 또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남은 밥을 계속 주되 그가 천경(踐更)004) 을 마칠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곤궁하여 굶주린 사람을 볼 적마다 불쌍히 여기고 반드시 구휼해 주었다. 어렸을 적에 나타난 그의 효성과 우애 그리고 자애와 밝은 덕이 이와 같았다.
기축년005) 2월에 인조가 인정전(仁政殿)에 친히 납시어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冊封)하였는데, 자태가 우뚝하고 의도(儀度)가 한아(閑雅)하였으므로 백관이 서로 하례하였다. 강서원(講書院)을 설치하고 강관(講官)을 두었는데 학문에 더욱 부지런하였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주(註)까지 정밀하게 잘 외웠으므로 강관이 탄복하였다. 이해 5월에 인조 대왕이 승하하고 효종 대왕이 왕위를 잇자, 왕이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보도(輔導)가 더욱 갖추어지니 슬기로운 덕이 날로 진취하였다. 효종이 또 왕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고 일찍이 농부로 하여금 후원(後苑)에 들어와 밭을 갈게 하고는 왕으로 하여금 보도록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소가 사람에게 공이 있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야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게 이와 같은가 봅니다."
하고, 자주 일컬었다. 왕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무릇 한번 보고 들은 것마다 잊지 않았다. 일찍이 《맹자(孟子)》를 다 읽고 나자, 효종이 시험해 보려고 일시에 모두 외우게 하였는데, 7편을 다 외우는 동안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효종이 매우 놀라고 기뻐하였다.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독서하는 일이 아니면 부모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부모의 몸이 편치 못하면 밤낮으로 부축하고 시중을 들며, 비록 물러가 쉬라고 명하여도 물러가지 않았다.
신묘년006) 에 가례(嘉禮)007) 를 행하였는데, 왕비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임진년008) 에 입학(入學)하는 예를 행하고 선성(先聖)009) 에게 전을 드리며 배알하였다. 이어서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다. 예의에 맞는 거동이 장엄하고 중후하며 강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 주위에서 듣는 선비들이 너나없이 감탄하며 기뻐하였다.
기해년010) 5월 4일에 효종이 승하하자, 왕이 상막(喪幕)에서 상(喪)을 주관하면서 상례를 옛날 예법대로 하며 슬퍼하고 야위움이 《예경(禮經)》보다 과도하게 하였다. 5일이 지난 9일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안색에 슬픔을 띠고 곡하는 소리가 애처로우니 뭇 관료가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 송시열(宋時烈), 좌참찬 송준길(宋浚吉) 등이 실로 상례를 주관하였는데, 대왕 대비(大王大妃)011) 에게 대행 대왕(大行大王)012) 을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게 하였다. 이는 대개 《의례(儀禮)》 주소(注疏)에 ‘비록 승중(承重)하였더라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가 있다.[雖承重不得爲三年者有四種]’는 설을 채용한 것이다. 성복(成服)013) 하기 전에 송시열이 이에 대해 포의(布衣)인 윤휴에게 물으니, 윤휴가 말하기를,
"예(禮)에 ‘임금을 위해 참최(斬衰)를 입고 내종(內宗)·외종(外宗)이 모두 참최(斬衰)를 입는다.[爲君斬內外宗皆斬]014) ’는 문구가 있으며, 또 제왕가(帝王家)는 종통을 중시하고 있으니, 네 가지 설[四種說]015) 은 아마도 쓸 수가 없을 듯하다."
라고 하였으나, 송시열이 따르지 않았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삼년의 설을 옳게 여겨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보고하고 그 설을 따르려 하였으나, 송시열이 이미 네 가지 설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말하기를,
"국제(國制)에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장자나 서자(庶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그 의논을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대신의 의논도 모두 송시열의 뜻과 같으므로 마침내 기년의 복제가 행해졌다.
왕이 평소에 유술(儒術)을 중히 여겼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선왕조(先王朝)016) 때부터 선비라는 이름이 있어 크게 일시의 추앙을 받았고 선왕도 그들을 매우 신임하였다. 왕에 이르러서도 그들을 중시하고 예로 받들었으므로 대체로 조정의 큰 의논은 대부분 송시열 등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송시열은 실로 성질이 집요하고 편당짓기를 좋아하였으며 학식이 없었다. 그가 의논드린 국제(國制)란 것도 실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상(大喪)의 제도가 아니었으므로, 그 논의를 들은 사람은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효종 대왕의 행장을 지어 올리자, 왕이 서찰을 내려 이르기를,
"요(堯) 순(舜)의 도는 효도와 공순일 따름이다. 요순의 치세(治世)를 이루려면 요순의 도를 다해야 한다. 선왕은 이것으로써 몸을 닦고 교화(敎化)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으셨다. 또 세상의 일을 몹시 개탄하신 나머지 어진 사람과 출중한 사람들을 예로 초빙하여 심복으로 삼고 도의(道義)를 서로 닦아, 이 세상을 삼대(三代)의 시대로 만회하고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하였으니017) , 이는 실로 선왕의 뜻으로서 평일 수립한 커다란 규범이다. 그런데 지금 이 행장 중에는 그다지 거론하지 않았다. 이 한 조항을 명백하게 써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서찰이 나오자, 이를 본 신하들은 선왕을 천양(闡揚)하려는 생각과 계술(繼述)하려는 뜻에 너나없이 감복하였다.
이때가 한창 무더운 여름철인데다가 상막도 좁고 누추하였으므로 측근의 신하가 서늘한 가을이 될 때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거처를 가린단 말인가. 좋은 곳을 가려 지내면 몸은 편안하겠지만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하였다. 10월 27일에 효종 대왕을 영릉(寧陵)에 장사지냈다. 초하루와 보름날의 제전(祭奠)마다 심한 병을 앓지 않을 경우에는 대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가서 능침(陵寢)을 참배할 적에 슬피 곡해 마지않으니 근시(近侍)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게 울움을 터뜨린 자도 있었다.
이 해에 노인을 우대하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을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였으며, 충효(忠孝)와 절의가 있는 사람, 청백한 관리, 전쟁터에 나가 죽은 사람의 자손에게도 세시(歲時)마다 음식물을 지급하였다. 형벌을 남용한 관리는 종신토록 금고(禁錮)시키고 서명(叙命)018) 의 문부에 써넣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때 내수사(內需司)의 무명 1천 필을 내려 어린아이에게 징수하는 면포에 보태 쓰게 하여, 어린아이 9천 명에게 징수하는 군포(軍布)를 견감하였으며, 징수한 군포 중 외방에서 쓰는 것은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저축된 것을 쓰도록 명하였으며, 서울에 납입하는 수량은 상평창(常平倉)의 백금(白金) 5천 냥으로 대체해 주었다. 또 명하여 제도(諸道)에서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대신 징수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비어 있는 군인의 액수를 충정(充定)하는 조처를 느슨히 하였으며, 각도의 대동미(大同米)를 감하고 산릉(山陵)에 진상하는 물선(物膳)을 줄였다.
해서(海西)에 수재가 들었다 하여, 특별히 재해입은 전세(田稅)를 면제하고 신역(身役)을 견감하였다. 호남·경기·호서에서 수납하는 세미(稅米)를 차등있게 감해주고, 흉년이 특히 심한 곳은 더 감해 주었으며, 다른 도에도 그렇게 하였다. 북도에 흉년이 들었다하여, 공물과 부역을 임시로 감해 주고 정배(定配)된 사람을 남방으로 옮기었다. 그리고 관서 지방의 걸식하는 유민(流民)들에게는 관향(管餉)의 미곡으로 사람의 수효를 계산하여 무상으로 주게 하였다. 왕이 즉위하여 정사를 환히 습득하고 백성의 고통을 보살폈으므로 거행한 바가 모두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그 고통을 제거해 주는 일이었다.
즉위 1년인 경자년019) 정월에 단천(端川)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공은(貢銀) 4천 냥을 감해 주었다. 사관(史官)을 좌참찬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어 도타이 타일러서 올라오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자, 왕이 도타이 타일러서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영동·영서의 대동미를 견감하여 그 도의 진휼에 보태 쓰게 하였다. 어사를 보내어 영동·영서·관서에 떠돌아다니는 북도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구휼하여 안주케 하였다. 강원도의 삼세(三稅)020) 중에서 수미(收米)021) 와 노비의 공포(貢布)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재령(載寧)에 사는 김두영(金斗榮)이란 자가 고변하였는데 70여 인을 불러 심문하였으나 그런 사실이 없었다. 김두영에게는 무고율(誣告律)을 받게 하고 무고당한 모든 사람에게는 모두 양식을 주어 방면하였으며, 금부의 이졸(吏卒)에게 재물을 빼앗긴 자에게는 모두 찾아서 되돌려 주게 하여 너그럽게 보살펴 주는 뜻을 보였다.
2월에 호구(戶口)의 법을 더욱더 엄밀하게 하였는데 우윤(右尹) 권시(權諰)의 말을 따른 것이다.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지난번 흉년이 들었을 적에 백관의 녹봉을 ‘모두 감해야 한다.’고 여러 신하들이 말하였으나, 선부왕(先父王)께서 특별히 어공(御供)을 재량해서 감하고 백관의 녹봉은 그대로 두게 하셨다. 지금도 비록 궁핍하지만 녹봉을 먼저 감할 수는 없으니 어공 중에 감할 수 있는 것을 또 뽑아 아뢰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에 비변사에서 남은 정포(丁布)를 강원 감사(江原監司)에게 내려 재해를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또 서울과 지방의 노인에게 음식물과 쌀·포목을 나누어 주었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지급한 물건이 너무나 보잘것없다고 하자 왕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베풀려고 하는 은덕의 뜻을 어찌 이같이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고을의 수령들에 대해 벌을 논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90세나 1백 세 된 노인에게는 특별히 명주와 솜을 더 주도록 명하고 또 문·무과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빈궁하여 양식을 싸 가지고 올라오지 못하는 자는 연도의 각 고을로 하여금 양식을 공급하게 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전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효종 대왕에게 기년복(朞年服)을 입어 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논하고, 《의례(儀禮)》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에도 역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取嫡妻所生第二長者立之亦名長子]’는 말을 인용하여 말하고 또 아뢰기를,
"소현(昭顯)이 이미 세상을 일찍 떠났고, 효종께서 인조 대왕의 둘째 아들로 종묘를 이었으니 대비(大妃)께서 효종을 위해 자최 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함은 예(禮)로 볼 때에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혈통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므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體而不正不得爲三年]’는 것으로 비교하였으니, 신은 그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 소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난점을 제기하면서 어물어물 결정하지 못하고, 정희 왕후(貞熹王后)022) 가 예종(睿宗)을 위해 입은 복제(服制)를 《실록(實錄)》에서 고증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가령 어떤 집안에 10여 명의 아들이 있는데 전중(傳重)한 다음 잇따라 죽을 경우 모두 참최복을 입어 주어야 합니까? 주소(註疏)에 이미 둘째 아들부터는 서자(庶子)가 된다는 의의를 분명히 말하였는데, 허목은 꼭 첩의 아들이라고 하니, 예의 뜻이 과연 이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의논은 이르기를 ‘제왕가(帝王家)는 왕통(王統)을 잇는 것을 소중히 여기므로 태상황(太上皇)023) 이 사군(嗣君)024) 을 위해서는 비록 지자(支子)로서 입승(入承)하였다 하더라도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정체(正體)이든 정체(正體)가 아니든 모두 삼년복을 입어 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은 기년 복제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극력 말하고 또 《예경(禮經)》의 장자(長子)·서자(庶子)의 설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서자(庶子)라는 칭호는 물론 첩의 아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임금의 아우[母弟]도 또한 서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라고 해도 지장이 없습니다. 옛날에도 물론 적자(嫡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운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예를 제정할 때에는 반드시 장자와 서자(庶子)의 구별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설은 물론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있고, 황면재(黃勉齋)025) 의 《통해속(通解續)》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감정(勘定)을 거치지 않았으니 그 설이 과연 허목이 말한 바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병 때문에 의논을 개진하지 못하였다. 사관이 강화(江華)의 《실록(實錄)》을 고증하여 아뢰기를,
"예종 대왕이 승하하였을 때에 정희 왕후가 어떤 복을 입었는지 고증할 수 없고, 기년(期年)도 못 되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복을 벗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에 부호군(副護軍)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복제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성인이 상례(喪禮)를 오복(五服)으로 제정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한 것이겠습니까. 친소(親疎)와 후박(厚薄)을 이것이 아니면 구별할 수 없으며, 경중(輕重)과 대소(大小)를 이것이 아니면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이를 사용하면 부자의 윤기가 밝아지고, 국가에서 이를 사용하면 군신이 분의(分義)가 엄해지며,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과 종묘와 사직의 보존과 망함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으니, 이게 바로 막중 막대해서 터럭만큼도 참람하거나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적통(嫡統)을 계승한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體)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적자(嫡子)에게 반드시 참최 삼년(斬衰三年)을 입도록 복제를 만든 것은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조종(祖宗)의 적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사가(私家)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는데 하물며 국가이겠으며, 삼대(三代)의 태평한 세상에서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위태롭고 어지러운 말세의 때이겠습니까. 신민의 마음을 정하고 불만을 품은 자들이 넘보는 것을 끊는 것이 이 상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를 소유한 자가 이 예에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상에 대왕 대비전의 복제는 《예경(禮經)》을 고증해 보면 자최 삼년(齊衰三年)으로 정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는데, 당초 예관(禮官)의 의주(儀註)에 기년복으로 정하였으므로 조야(朝野)의 신민 중에 유식한 이는 모두 놀라고 탄식하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어찌 대통(大統)을 밝히어 백성의 뜻을 정하고 종사를 튼튼히 하는 예라고 하겠습니까. 이야말로 곧바로 의논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연기(練期)026) 가 임박하였으나 적적하게도 국가를 위해 이 말을 올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신이 평소 깊이 생각해 볼 때 종사에 대한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전 장령 허목이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소 한 장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 신은 자신도 모르게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아, 허목의 말은 예를 의논하는 대경(大經)일 뿐만 아니라 실로 국가를 경영하는 지극한 계책이니, 말을 듣지 않으실 경우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곧바로 예관으로 하여금 성경(聖經)에 의거하여 바로잡게 하셔야 할 터인데 송시열에게 다시 물으신 것은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송시열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기대승(奇大升)의 논평을 듣고 깜짝 놀라 옛날의 견해를 바꾸면서027) ‘만일 기명언(奇明彦)이 아니었다면 천고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라고 한 것 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나쁜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고 허물을 어름어름 숨기려는 심산으로, 《예경》의 글귀를 주워모아 자기의 의견에다 뜯어 맞추었으므로 그 사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경(禮經)》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참최복을 입어 주는 것은 오직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는 데 있고 성인이 이 예를 엄하게 하는 것은 다만 종묘의 계통을 잇는 데에 있다는 큰 뜻에 대해, 종시 견해가 미치지 않았고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신은 실로 그 말에 복종하지 못하겠고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 선조(先朝) 때부터 신임하여 위임한 이로는 송시열·송준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일생 동안 강구(講究)한 바는 예학이었고 자기들도 이를 맡을 만하다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만,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 이처럼 소견이 빗나갔는데, 더구나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와 나라를 튼튼히 하고 천하에 위엄을 펼치는 계책을 같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대왕 대비의 복제는 마땅히 삼년으로 의주(儀註)를 고친 다음 팔방에 알려, 대소의 신민으로 하여금 조정의 의논이 이의(異意)가 없음을 환하게 알도록 함으로써 명분을 바르게 하고 국시를 정하여 나라의 형세를 태산처럼 안전한 터전 위에 올려 놓아야 하며, 기년(朞年)만에 복을 벗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아니되고, 삼년상으로 정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소가 정원에 이르자, 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이, 그의 마음씀이 음흉하고 속임수로 허풍을 쳐서 현란하게 한다고 지레 헤아려 아뢰니, 왕이 명하여 그의 소를 돌려주고 그의 관작을 삭탈하여 향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김수항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그의 죄상을 따져보면 비록 국문을 하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를 향리로 내쫓는 조치만으로는 그의 죄악을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兪棨), 부교리 안후열(安後說), 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은 윤선도의 말이 흉악하고 참혹하므로 그의 소를 불태우고 먼 변방으로 내쫓자고 청하였다. 이에 윤선도가 삼수(三水)로 귀양가고 말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혜(李嵇) 등은 소를 올려 국가의 형벌을 바르게 시행할 것을 청하고,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정언 권격(權格),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정수(鄭脩) 등은 엄히 국문하여 율(律)에 비추어 죄를 정하자고 누차 아뢰었으나, 왕이 따르지 않고 다만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우윤 권시가 상소하여, 윤선도를 율에 비추어 죄를 정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극구 말하고, 또 아뢰기를,
"대왕 대비께서 오늘날의 상에 삼년복을 입어야 함은 필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지금 비록 의리로 헤아려 제정한다 하더라도 백세토록 질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시열이 이른바 ‘선왕028) 은 서자가 되어도 지장이 없다.’고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그 잘못된 점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윤선도는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를 말하였으니 그 또한 과감히 말하는 선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논의가 크게 격렬해져서‘죄없는 선비를 죽인다.’029) 라고 한 말과 불행히도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가상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김수항이 그 비답을 봉해 왕에게 도로 올리고 누차 반대의 의견을 아뢰자 마침내 비답을 고쳐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하나, 귀양보내자는 여러 사람의 심정은 결국 어길 수 없다.’는 것으로 분부하였다.
사간원의 이경억·박세모와 사헌부의 윤비경·이무 등이, 윤선도를 논하다가 권시에게 배척을 받았다 하여 그를 논계하고, 부제학 유계는 관료(館僚)인 교리 김만기(金萬基) 이시술(李時術), 부수찬 심세정 등을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 권시의 죄를 논하고 또 윤선도의 소를 불태워버리기를 거듭 청하자, 윤비경·이경억·박세모 등이 또 소를 올려 그를 공격하였다. 정언 권격은, 권시가 흉인(凶人)030) 을 비호한다 하여 파직을 청하였다가 곧바로 중지하였다. 공조 좌랑 이상(李翔)이 소를 올려 권시를 매우 강력히 공격하고, 부호군 이유태(李惟泰)도 입대(入對)하여 그를 극렬히 논하였는데, 심지어는 ‘제갈양이 마속을 죽인 일’031) 을 들어 말하였다. 그 뒤에 대사간 이정기가, 동료가 갑자기 계사를 중지하였다 하여 다시 그를 논하여 파직시켰다.
처음에 권시가 도성문 밖에 나가 대죄(待罪)할 적에 왕이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위로하고 타이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승지 박세성(朴世城)이, 대론(臺論)이 바야흐로 격렬하다는 이유로 즉시 거행하지 않자, 왕이 진노하여 ‘대간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엄한 분부를 내려 잡아다 국문하고 장차 왕명을 거역한 것으로 죄주려 하였다. 승정원과 양사에서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하였으나 왕이 모두 윤허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대신의 말로 인하여 풀어주었다.
4월에 모든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을 혁파하였다. 또 묘당(廟堂)에 명하여, 강원도에 있는 모든 궁가(宮家)와 각 아문이 떼어받은 시장(柴場)에 대해 의논하여 혁파하고 지금부터 더 설치하지 못하게 하였다. 상평청(常平廳)에 명하여 북도·영동·영서의 굶주린 백성 가운데 도성 안으로 흘러 들어온 자에 대해 각부(各部)로 하여금 보고하게 하여 쌀과 소금을 지급하게 하고, 도성 백성 중에 특히 끼니를 잇지 못한 사람에게도 일체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흥창(可興倉)에 바쳐야 할 영(嶺) 밑 11개 읍의 전세(田稅)를 가을을 기다렸다가 거두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7월에 크게 가물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가을 이후에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때 와서 특별히 거행하였다.
8월에 각 아문에서 매매한 이식(利息)을 이웃과 일가붙이에게 나누어 징수하는 폐단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흉년에 이미 어공(御供)을 감하였으니 관원들의 녹봉도 감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공을 줄였다고는 하나 감하지 않은 물품이 아직도 많은데 하필이면 관원들의 녹봉을 먼저 감한단 말인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6일에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는데, 시위하는 장사들에게 당부하여 도로가의 벼와 곡식을 손상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9월에 흉년이 들자 승지에게 교서(敎書)를 초하게 한 다음 팔방에 두루 유시하여 안주하게 하고, 어공(御供) 중의 정미(精米)·중미(中米)와 주방(酒房)의 향온미(香溫米)를 감하게 하였다.
10월에 우레가 치는 재변이 있자 정원과 옥당이 더욱 수성(修省)하시기를 청하니, 왕이 가상히 받아들였다. 이때에 관서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이변이 있었는데, 왕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직언(直言)을 두루 구하였다.
11월에 팔도에 명하여 각각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사위스러운 질병이 있으니 계복(啓覆)032) 을 정지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 천성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건만, 어리석은 백성이 법령을 준수하지 않고 타고난 천성을 회복하지 않아 악한 일을 하기에 이르렀다. 복심(覆審)해야 하는 죄인을 즉시 처리하지 않고 또 그를 엄하게 가두어 두면, 아무리 죄는 비록 사형에 해당되지만 그 정상은 슬픈 일인데, 심지어 죄없이 감옥 속에서 죽는 것이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참담해진다. 금년에 이것 때문에 복심을 거행하지 않고 명년에 또 이것 때문에 복심을 행하지 않는다면 저 죄인들은 모두 감옥 속의 귀신이 되고 말 터이니, 이는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신축 2년 정월에 도성 안에 있는 두 이원(尼院)을 철거하였다. 전에 왕이 승니(僧尼)들이 교화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여 ‘승니들을 모두 환속(還俗)하게 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런데 대신과 옥당이 갑자기 거행하기 어렵다고 아뢰자 왕이 명을 내려 도성 안의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두 곳을 철거하게 하여, 나이 젊은 자는 속인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 자는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헐어버린 불사(佛寺)의 재목으로 학궁(學宮) 및 무관(武館)을 수리하게 하였다. 대체로 불교는 신라 때에 비롯되어 고려 때에 성하였고, 우리 조선조에 와서도 다 제거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와서 시원하게 물리쳤으니, 수천 년 동안 없었던 쾌거였다. 명을 내려 중외(中外)의 음사(淫祀)033) 를 금하고 내탕고의 면포를 내려 서울의 수용(需用)을 보충하였다.
4월에 가뭄이 들자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는데,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속히 너그럽게 방면하여 정체된 죄수가 없게 하라고 하였다. 명을 내려 윤선도의 유배지를 북청(北靑)으로 옮기도록 하였는데, 집의 곽지흠(郭之欽), 헌납 오두인(吳斗寅), 교리 김만균(金萬均) 등이 그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다.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청백하고 충성스런 지조가 있다 하여 3년 동안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하였다. 어사 6인을 삼남(三南) 지방에 나누어 보내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게 하였다. 가뭄이 들자 교서를 내려 자신을 꾸짖고 어선(御膳)을 감하고 술을 금하였다. 그리고 뭇 관원들을 신칙(申勅)하여 공경하고 부지런히 하며 단결하고 화합하도록 하였다. 친히 기우제를 지내려 하자, 경연의 신하들이 성상의 건강이 편치 못한 것을 들어 말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 어찌 내 한 몸을 아껴 백성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조경(趙絅)이 소를 올려 윤선도를 구원하였는데, 대략 아뢰기를,
"가뭄을 고민하는 일로는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는 것을 첫째가는 의의로 삼습니다. 일국의 갖가지 죄수들에 대해 어느 누가 거론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윤선도만 홀로 심리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윤선도의 죄가 무슨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윤선도의 죄는 오직 종통(宗統)·적통(嫡統)으로 효종을 위하여 편든 데에 있을 뿐입니다. 위로는 선왕(先王)께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전하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권면한 것이니, 그 성의가 뚜렷하여 가릴 수가 없습니다. 윤선도가 소를 올릴 때에 누가 전하를 위하여 소를 태워버리라는 계책을 올렸습니까? 신이 삼가 전대의 사서(史書)를 보니, 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웠고,034) 광해주(光海主)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습니다.035) 공민왕과 광해주는 난망(亂亡)을 초래한 임금이 아닙니까. 오늘날의 조정 신하가 요(堯) 순(舜)의 도리로써 전하를 인도하지 않고 도리어 전하에게 난망의 전철(前轍)로 인도하며 직접 멍에를 메고 따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후세에 오늘날의 일을 보는 것이 오늘날에 옛일을 보는 것과 같을까 염려됩니다.
윤선도가 죽고 사는 것은 신이 논할 필요가 없고 신이 애석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만, 그가 말씀드린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은 단연코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만일 크게 깨달아 종통의 귀결을 명확이 분변하여 선왕의 실록(實錄)에 밝게 실어서 후세에 예를 논하는 자로 하여금 감히 다른 말이 없게 한다면 신도(神道)에서 찾아보더라도 어찌 인정과 멀겠습니까. 좌우에 오르내리시는 우리 조종(祖宗)의 영혼이 이치상 저승에서 기뻐하여, 견책을 거두어 상서가 되고 한재를 바꾸어 장맛비가 되게 하여 전하로 하여금 우리 자손과 백성을 장구히 보전하게 할 것이니, 그 덕이 뭇 산천(山川)에 가서 제사를 지내어 보답을 비는 것보다 더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소가 주달되자, 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악인과 편당을 지어 터무니없는 말로 허풍을 친다.’고 아뢰니, 그 소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집의 곽지흠(郭之欽), 장령 박증휘(朴增輝) 등은 벼슬을 삭제하여 쫓아내자고 청하고,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정언 권격(權格) 등은 먼 곳으로 귀양보내자고 청하는 등 달이 넘도록 논쟁하였다. 그리고 부제학 유계(兪棨), 교리 이민적(李敏迪) 등은 양사(兩司)의 청을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6월에 장차 태묘(太廟)에 부제(附祭)하는 예를 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진하(陳賀)·반교(頒敎)·음복연(飮福宴)을 정지하고, 환궁(還宮)할 때에도 나례(儺禮)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결채(結綵)하는 등의 일을 모두 정지하게 하였다. 명을 내려 윤선도를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게 하였는데, 대사간 이은상이 탑전(榻前)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7월에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쌀을 옮겨 삼남(三南)을 진휼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술 담그는 쌀을 감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성의 목숨이 죽어가고 있으니, 진실로 우리 백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고, 삼남(三南)의 감사에게 별도로 유시를 내려 각각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살릴 수 있는 계책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7월 7일에 왕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효종 대왕의 부묘례(附廟禮)를 행하고 인종(仁宗)·명종(明宗)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에 조천(祧遷)하였다. 대개 국조의 묘사(廟祀)는 태조의 세실(世室)036) 이외에 사친(四親)037) 을 제사지내는데, 형제는 같은 소목(昭穆)의 제도를 쓰게 되었으므로 인종과 명종 두 위는 이때에 5대가 되어 조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왕이, 양묘(兩廟)038) 를 같이 조천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라고 하여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었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묘제(廟制)의 세대 수를 태조로부터 사친(四親)까지 5세로 잡는다면, 인종과 명종 두 위는 모두 대수 이외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아울러 옮기는 것이 의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일설이 있습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대통의 계승을 중히 여기므로 형이 아우의 뒤를 계승하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계승하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여기어 각각 소목(昭穆)이 됩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서는 역사(逆祀)039) 하는 것을 비평하였고, 주자(朱子)는 ‘송(宋)나라 태조·태종과, 철종(哲宗)·휘종(徽宗)이 모두 형제이긴 하지만 한 세대로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인종과 명종은 비록 형제간이지만 의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위를 합하여 한 세대로 치는 것이 비록 과거에 사례가 있기는 하나,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말씀으로 헤아려 보면, 인조 대왕을 태묘(太廟)에 합부(合附)할 때에 먼저 인묘(仁廟)를 조천하고 오늘 또 명묘(明廟)를 조천하는 것이 올바른 예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앞으로 영녕전(永寧殿)에 옮겨 모실 적에 소목(昭穆)을 둘로 만들어서 과거의 온당치 못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또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는 태조 및 사친(四親)의 신주가 모두 태묘(太廟)에 있으나,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조천한 신주는 모두 영녕전(永寧殿)에 모셔져 있습니다. 태묘는 정묘(正廟)이고 영녕전은 별묘(別廟)인데 높으신 목조께서 별묘(別廟)에 모셔져 있으니, 의리나 예로 헤아려보면 편안한 바가 아닙니다. 송나라 조정에서 의논하는 이가 희조(僖祖)를 별묘에 옮기려 하자, 주자(朱子)가 그 잘못된 점을 극력 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태묘를 송나라 종묘 제도에 비교하고 주자의 설로 증거해 보면, 우리 목조는 곧 송나라의 목조와 같고 주(周)나라의 후직(后稷)에 비교되며, 태조와 태종은 송나라의 태조와 태종 같고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 비교됩니다. 그런데 목조께서 태묘의 윗자리에 계시지 못하고 태조가 태묘의 제1실에 계시니, 이른바 ‘희조(僖祖)는 공업(功業)이 없고 천하를 얻은 것을 자기가 이룩한 것으로 여겨 강약(强弱)을 다투어 비교해 겸손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그 당시 태조께서 효도로 봉양하던 마음이 아닐 듯한데, 어질고 효성스런 군자가 아니라도 그 불가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우리 선왕을 옮겨 합부하는 때를 인하여 서둘러서 예관(禮官)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강구하게 한 다음 목조를 태묘의 제1실로 옮겨 모시어 시조로 삼고 태종·태조 이하의 세실(世室)의 예를 일체 주나라의 옛 제도처럼 하며, 또 태묘에 동서의 협실(夾室)을 만들어 익조 이하 조천한 신주를 모시면 명분이 바르고 이치가 맞게 되며 의리가 밝아지고 일이 온당하여 백 세 이후에 성인이 나오더라도 의혹되지 아니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왕이 그 소를 해조(該曺)에 내리니, 예관이 아뢰기를,
"조묘하는 일은, 인종과 명종 두 위를 아울러 옮기는 데 대해 대신과 유신이 이의가 없었습니다만 그 밖에 진달한 바는 국가의 막중하고도 막대한 예에 관계되므로 해조가 감히 의논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은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고, 원임 대신 정유성(鄭維城)은 ‘대신과 유신이 한곳에 모여 의논하여 그 가부를 정밀히 강구하자.’고 청하였다. 그 뒤에 정태화. 심지원 등이 탑전에서 그 불가함을 아뢰니, 왕이 마침내 회의를 중지시키고 그의 소에도 답하지 않았다. 대체로 종묘의 제도는, 천자는 시조를 체례(禘禮)로 받들어 하늘과 배향(配享)해서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는 맨 처음에 나라를 봉해 받은 임금을 조(祖)로 받들어 태조로 삼아 사친(四親)까지 아울러 5묘(廟)를 세우니, 이것이 예이다.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는 실로 옛날 제도를 따른 것이고, 영녕전의 제도도 제법(祭法)의 ‘단선(壇蟬)의 제도’040) 를 가감하여 조절한 것이니, 곧 선유(先儒)가 이른바 ‘2백 세(世)에 귀(鬼)가 된다.’는 것이다. 송시열의 의견은 선현(先賢)을 모방하되 비의하여 의논한 것이 두서가 없었다. 갑자기 큰 일에 간여하여 옛 헌장(憲章)을 어지럽히려 하였다. 소가 올라가자, 듣는 이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송시열이 이미 복제(服制)의 일로 조정을 그르쳤는가 하면 대통(大統)을 깎아내려 서인(庶人)의 위치와 똑같이 만들었고 또 이로써 오묘(五廟)를 뜯어고치려고 하였으니 천험(天險)041) 을 범하고 조종에 죄를 얻게 되었다."
하였다. 왕이 그 의논을 중지시키고 시행하지 않으므로써 종묘의 조주(祧主)가 움직이지 않고 신과 사람이 제자리에서 편안히 있게 되자, 유식한 장로(長老)들이 왕의 깊고 아름다운 식견에 감복하였다.
형과 아우를 한 세대로 치는 설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가 비록 동당(同堂)에 모시는 전대의 제도를 따르고는 있으나, 대(代)마다 한 실(室)을 만들어 각기 그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송나라 시대에 형제의 신위(神位)를 나란히 모시는 제도와는 같지 않다. 이는 형제를 1세(世)로 잡아 같이 조천하는 것으로서 소목(昭穆)을 달리하여 차례로 옮기는 것과는 본디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두 예는 《예경(禮經)》에 증거가 없고 선유(先儒)들의 논의가 달라 역대마다 각각 한 왕조의 제도가 되었으니, 갑자기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그르니 할 수 없는 바가 있으며, 영녕전에 조천하는 것도 소목을 달리할 수 없다. 그런데 송시열은 대개 그것을 구명하지 못하고 말하였던 것이고 왕은 또 그 설을 버리고 묻지 않은 채 구례대로 조묘(祧廟)에 모셨다.
하교하여, 양전(兩殿)에 바치는 경상도삭선(朔膳)042) 을 명년 가을까지 감하도록 하고, 전라도·공충도(公忠道)의 삭선도 헤아려 감하게 하였다.
8월 23일에 왕이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다.
9월 24일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에게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 이어서 선비를 시취(試取)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어공(御供)을 이미 감하였으니, 관원들의 녹봉 또한 전대로 두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조정의 관원들이 의뢰하는 것은 녹봉인데, 점차로 박해지고 있으니 어떻게 염치를 지키라고 책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1월에 시녀(侍女)를 선발하는 일을 파하도록 명하였는데 사헌부의 청을 따른 것이다.
12월에 명하여 삼남·경기·해서에서 재해를 입은 고을의 조적을 일체 면제해 주고 또 봄에 징수하는 미곡을 감해 주게 하였다. 태복시(太僕寺)의 말 먹이는 곡식 1천여 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였다. 임인 3년 정월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금주령을 내리고 모든 관부 및 어공(御供)의 술에 소요되는 것을 모두 파하였으며 조참(朝參)의 거동에 추수 때까지 음악을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2월에 양남(兩南)에 진휼 어사(賑恤御史)를 보내어 편의에 따라 일하라고 하였다.
3월에 한재로 중외에 명하여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분부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철거하고 직언을 널리 구하였다. 또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불러 재이를 중지시키고 구제하는 계책을 강구하였으며, 윤선도의 위리(圍籬)를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4월에 우참찬 민응형(閔應亨)이 뵙기를 청하고 인하여 윤선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자 왕이 대신에게 물었는데, 정태화도 민응형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옥당의 김만기(金萬基)는 대간(臺諫)이 윤선도의 위리 철거에 대해 쟁집(爭執)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지평 이동명(李東溟)·여성제(呂聖齊), 장령 이정(李程) 등이 드디어 위리를 철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관원을 보내어, 의주·강화·금화(金化)·광주(廣州)·안주(安州)·토산(兎山)·안변(安邊) 등의 병자 호란(丙子胡亂) 전쟁터와 호남(湖南)의 수상 조련 때에 큰 바람으로 인하여 사람이 빠져 죽은 곳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돌림병이 매우 성하자 중외(中外)에 약물과 양곡을 주라고 하였다.
6월에 관원을 보내어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노산군이 영월(寧越)로 물러가 있다가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겼다. 중종·선조·효종조에 모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는데, 이때 와서 다시 행한 것이다. 절행(節行)이 바른 영남의 사람 하홍도(河弘度)·조임도(趙任道)에게 미곡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영남 진휼 어사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굶주린 백성이 대여받은 곡식을 일체 탕감해 주었다. 제도(諸道)에 홍수가 져서 백성이 많이 떠내려가 죽었다. 제도에 명하여 해당 고을에서 매장하라고 명하였다. 명하여 각 아문(衙門)에서 소유하고 있는 배[船]의 숫자를 정하게 하고, 내수사(內需司)·명례궁(明禮宮)·용동궁(龍洞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 등의 배는 현존하는 숫자 이외에 더 늘리지 못하게 하였다.
7월에 서북 감사(監司)에게 인재를 찾아내 아뢰라고 명하였다.
8월에 경기에 경기 균전사(京畿均田使) 민정중(民鼎重)·김시진(金始振) 등을 보내어 전지를 측량하게 하고, 호남의 대동 전결(大同田結)의 미곡과 포목의 수량을 정하였다.
9월 9일에 왕이 건원릉(健元陵)을 참배하였다. 이 해에 고려조의 여러 왕릉(王陵)에 화재와 벌채를 금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남해(南海) 노량(露梁)에 있는 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사당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순신은 선조조에 왜구를 누차 격파하여 충의와 용맹이 가장 드러났고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이다.
계묘 4년 3월에 영녕전을 다시 지었는데, 옛 규모를 넓히고 익실(翼室)을 고쳤다.
4월에 여러 궁가(宮家)의 전결(田結)을 정하였는데, 대군·공주·왕자·옹주가 차등이 있었다. 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 참의 윤선도는 일찍이 우찬성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의논하였다고 소를 올려 송시열을 공박 배척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윤선도가 먼 변방에 위리 안치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심리로 인하여 북청(北靑)으로 옮기었다가 대간(臺諫)의 소장이 또 제기되어 다시 옛날의 유배지(流配地)로 돌아갔습니다. 신이 일찍이 윤선도의 소를 얻어 보았는데, 그 의미와 말투가 대부분 분노에 격동된 데서 나왔고 지나치게 문구를 따졌으니 윤선도의 일은 참으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의 종통과 적통에 관한 말은 실로 명백하고 정확하여 바꿀 수 없는 논의였습니다. 송시열이 비록 산림(山林)의 유아(儒雅)로 큰 명망을 짊어지고 있으나 그가 예를 잘못 의논한 잘못은 참으로 가릴 수 없습니다. 지금 송시열을 옹호하는 사람은 완전히 그 과실을 덮어 주고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의논하지 못하게 하려 하며, 윤선도를 배척하는 사람은 윤선도가 사림(士林)의 화를 빚으려 한다고 지척하여 곧바로 흉적(凶賊)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윤선도가 말한 것이 사리에 지나친 점은 물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어찌 사림의 화를 빚으려는 의사야 있었겠습니까. 사람마다 각각 소견이 있으므로 구차히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론이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견해가 나와 같지 않은 것이 싫어서 억지로 같게 만들고자 하고 사대부의 사이에 조금만 의논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떼를 지어 일어나 공격합니다. 허목이 재차 예를 논하는 소를 올리게 되어서는 먼 지방의 군(郡)으로 내쫓고, 파면되어 돌아온 뒤에는 수용(收用)하지 않았으며, 권시가 이의를 제기하자마자 곧 중한 탄핵을 입었으며, 조경이 윤선도를 구원하는 말을 한마디 하자 간사한 사람으로 지적됨과 아울러 그의 아들까지 연좌의 율(律)을 입었습니다. 조경은 여러 조정을 거친 노성한 신하입니다. 그의 평생 충직하였던 오롯한 지조는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데 지금 갑자기 변하여 간사한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옛 사람이 말하는 ‘사람은 진실로 쉽게 알 수 없지만 사람을 알아보기란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실로 신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윤선도와 본디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니므로 감히 그를 위해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윤선도는 본디 기절(氣節)이 있고 과감히 말하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소를 올려 혼조(昏朝)에서 절개를 세웠고,043) 선조(先朝) 때에는 사부(師傅)의 옛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을 잘못한 과실로 풍상(風霜)이 험난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유배되어 백수의 쇠잔한 나이에 죽을 날이 얼마 남아있지 않으니 참으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끼칠까 염려됩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불쌍히 여기시고 어서 방면하여, 전리에 돌아와 죽게 하소서. 이것 또한 인자한 성주(聖主)께서 사람에게 막하지 못하는 하나의 어진 정사입니다."
하니, 왕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사간원의 김만균(金萬均)·송시철(宋時喆)·원만리(元萬里)와 사헌부의 정계주(鄭繼胄)·김익렴(金益廉) 등이, 홍우원을 삭탈 관작하여 쫓아내기를 청하고, 옥당의 이민적(李敏迪)·이익(李翊)·정석(鄭晳) 등도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7월에 한재로 인해 분부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도움되는 말을 구하고, 중외의 대소 신료에게,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여 직무에 힘써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불러 흉년 구제의 계책에 대해 강구하였다.
9월에 사도시의 어공에 소요되는 정미(精米)를 감하게 하므로 대신이 그대로 두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관의 봉록을 이미 줄였는데, 어찌 어공(御供)만 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에 명하여 여러 궁가(宮家)의 시장(柴場)을 각자 한 곳에 망정(望定)하여 그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 남겨 두게 하였고, 어장(漁場)과 망장(網場)은 선조조(宣祖朝)에서 하사한 것 이외에는 일체 허락하지 못하게 하고 비록 하사한 곳이라 하더라도 하사받은 자에게만 한정하도록 하였다.
갑진 5년 5월에, 무술년044) 이후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신공(身貢)을 이미 죽은 자의 일가붙이에게 추징(追徵)하는 것을 탕감하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쌀 5천여 석을 경기 지역 고을에 나누어 주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되, 추수를 기다려 이자 없이 도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7월에 우참찬 김수항(金壽恒)을 함경 북도에 보내어 변방의 폐단을 조사하게 하였다. 문·무과의 시험을 시행하여 선비를 뽑았다. 해조(該曺)로 하여금 양남(兩南)의 방백에게 분부하여 《소학(小學)》을 인출해 중외에 반포하고 강독을 권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9월 15일에 왕이 광릉(光陵)을 참배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11월 2일에 혜성(彗星)이 진성(軫星)에서 나오자, 하교하여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였다. 대소의 신료에게 명하여 자기의 직분을 삼가고 부지런히 하며, 정사의 득실(得失)에 대해 자세히 진달하게 하였다.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는 등의 일을 거행하게 하였다. 바람과 천둥의 변고로 인해 내사옥(內司獄)045) 의 죄수를 방면하고 상의원(尙衣院)의 비단 짜는 일을 정지하게 하였다.
을사 6년 1월 1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2월에 혜성(彗星)이 다시 나타나자,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였다. 유생 성대경(成大經)이 상소하여 ‘윤선도를 석방해 과감히 간언하는 길을 열어놓으라.’고 청하였다.
3월에 윤선도의 유배지를 광양(光陽)으로 옮겼다.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그 명을 거둬 들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징수할 곳이 없는 제도(諸道)의 갑진년046) 을 포함한, 이전의 모든 신역(身役) 및 각종 조적곡을 깨끗이 면제해 주었다.
4월에 왕이 온천 행궁(溫泉行宮)에 거둥하였다. 때마침 농사철이었기 때문에 호위하는 본도의 군병을 파해 보냈다. 왕이 질병이 있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중외(中外)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의원이 온천의 물로 목욕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온천 행차는 국조의 고사이다. 왕이 가서 수개월 동안 목욕하니 몸이 쾌히 나았다. 드디어 그 도에 명하여 노인들을 예우하고 효제(孝悌)의 행실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충신과 열녀에게 제사지내고 전조(田租)를 감하고 과거를 보였다. 대궐로 돌아온 후 다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거쳐온 도에 베풀었다. 그 뒤에 여러 차례 거둥하였는데 그 예(禮)는 모두 같았다. 왕이 온양 행궁(溫陽行宮)에 있을 적에 도내의 노인 중 나이 80 이상인 자는 관직이 있건 없건 양인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모두 노직(老職)의 통정첩(通政帖)을 주었다. 고 참판 김장생(金長生),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제독관(提督官) 조헌(趙憲),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에게 도타이 타이르고, 또 온양 경내에 행적이 드러난 사람을 찾아 아뢰게 하여 정표(旌表)하였다. 80세 이상인 노인에게는 가자(加資)하고 90세 이상인 노인에게는 가자하고 또 음식물을 주었다. 경기도로 하여금 대가(大駕)가 경유하는 일로에 일체로 시행하게 하였다.
좌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부호군 이유태 등이 행궁에 와서 뵈었다. 왕이 그들과 함께 서울에 오려 하였는데, 이유태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송시열은 유언 비어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는 직산(稷山)에 이르러 돌아갔다. 송준길은 뒤따라 도성에 들어오니 해조(該曺)에 명하여 식량을 계속 공급하게 하였다.
10월 1일 밤에 비바람이 크게 휘몰아치면서 천둥과 번개가 치니,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초야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실봉(實封)047) 을 갖추어서 아뢰게 하였다. 풍정연(豊呈宴)048) 을 내년 봄으로 물려 행하게 하고, 중외의 관리에게 거듭 당부하여 혹형을 금지하게 하고, 민결(民結)이 궁가(宮家)의 면세 전결(免稅田結)에 몰래 등록된 것은 일체 파하였다.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점유하고 있는 묵혀진 전토를 개간한 백성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중외에 절의와 효행이 있는 사람을 정표(旌表)하게 하였다.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명하여 관하의 아병(牙兵)049) 에게 거두는 포목을 면제하고 오로지 훈련에만 힘쓰게 하였으며, 관서와 경기의 세두(稅豆)를 감하고 그 나머지 도들도 차등있게 감해 주었으며, 포보(砲保)가 바치는 포목을 감하고 병조에 저축해 둔 것으로 충당하여 지급하게 하였다.
병오 7년 1월 17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왕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다. 하늘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고 재이가 겹쳐 발생한다는 이유로 진연(進宴)을 뒤로 물려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였다. 2월에 사간원의 이은상(李殷相)·최관(崔寬)·이익(李翊)·이혜(李嵇) 등이 계사를 올려, 공조 정랑 김수홍(金壽弘)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다. 기해년050) 에 기년복의 제도를 이미 시행하였는데, 김수홍이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복의 제도를 논하면서, 송시열이 기년의 복제를 주장한 잘못을 책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수홍이 사설(邪說)을 제창하여 조정의 대례(大禮)를 망령되이 의논하였다고 논죄하여 삭직(削職)하였다.
3월에 영남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천여 인이 상소하여, 송시열이 주장한 기해년051) 의 기년복이 잘못된 복제임을 극렬히 논하고,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천자와 제후의 상에는 모두 참최복을 입고 기년복은 없다.’는 설을 인용하였으며, 또 《상복고증(喪服考證)》 1책을 올렸다. 소가 정원에 당도하자, 승지 김수흥(金壽興) 등이 ‘주상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동요시키어 선한 사류를 일망타진하려 한다.’고 아뢰니, 왕이 ‘소의 뜻이 온당하지 못하니 물러가 업을 닦으라.’고 비답하고, 이어서 뭇 신하들을 모아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당초 복제에 대해 의논할 때, 윤휴는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은 ‘참최는 신하가 임금의 복(服)을 입는 것이므로 참최를 입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윤휴는 이기고자 기필하여 긴 편지를 왕복하며 쟁변(爭辯)하였습니다. 허목의 논의는 윤휴의 논의를 본받아 기술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번 영남 유생의 소는 오로지 그들의 끄트머리를 주워모아 엮은 것으로 정해진 주된 뜻이 없으나, 그 뜻은 실로 유신(儒臣)을 얽어 모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김만기(金萬基)는 ‘밝게 분변하여 통렬히 배척하시라.’고 청하고, 우의정 허적은,
"삼년(三年)의 설은 유세철(柳世哲)만 주장한 것이 아니니, 유세철을 죄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 의견으로는 반드시 통렬히 분변하는 것을 급한 일로 삼을 필요가 없고 후일 상의해 법을 만들어서 후일의 근심을 막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하였다. 사헌부의 조복양(趙復陽)·정계주(鄭繼胄)·맹주서(孟胄瑞)·어진익(魚震翼)·소두산(蘇斗山), 사간원의 이정(李程)·최일(崔逸)·이동직(李東稷)·정재희(鄭載僖) 등은 율을 상고하여 죄를 결정하기를 청하고, 옥당의 이민서(李敏敍)·오두인(吳斗寅)·이단하(李端夏)·박세당(朴世堂) 등은 또 차자를 올려 그를 논하고,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득우(洪得禹) 등도 상소하여, 기년의 복제를 주장하면서 그를 논척(論斥)하고 그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교리 최유지(崔攸之)가 소를 올려 ‘장자(長子)는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중외에 포고하고 또 국기(國忌)를 판자에 새기어 달아 놓은 예에 따라 각 아문의 청사 벽에 그것을 새기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왕이 그 소를 궁중에 놔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얼마 뒤에,
"국가의 위아래 복제(服制)를 일체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행해야 하고 장자(長子)나 중자(衆子)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만일 예를 논한다고 빙자하여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하는 자는 마땅히 형벌을 시행하겠다."
는 뜻으로 중외에 포고하였는데, 홍명하가 청한 것이었다.
왕이 다시 온양(溫陽)에 거둥하면서 왕대비(王大妃)를 모시고 떠났다.
4월에 왕이 온천 행궁(溫泉行宮)에서 호서(湖西)의 도내에 효행이 드러난 사람을 노인의 예에 의해 음식물을 지급하여 특별히 대우한다는 뜻을 보이게 하라고 명하였다. 온양 및 본도의 각 고을과 경유하는 경기의 일로에 역(役)을 감면해 주되, 지난해의 예에 의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금령을 범하고 물건을 사고 판 사람 및 도망해 돌아온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등의 일을 조사하고 변신(邊臣)을 참형의 죄로 논단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잘못인데, 어떻게 신하들에게 떠넘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또 대신을 사형의 율로 논단하니, 왕이 또 이르기를,
"나의 잘못이므로 내 마땅히 스스로 죄주기를 청해야 하겠다."
하자, 청나라 사신이 그 다음 율로 처결하였다. 좌의정 허적을 북경에 사신으로 보내어 대신은 죄를 면하고 벌금을 물게 되었다.
8월에 일식을 하고 흉년이 들었다 하여,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였다.
9월에 영남의 곡식을 영동과 영서로 옮기고, 해서의 곡식을 북도로 옮겨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명을 내려, 포보(砲保)의 가포(價布)를 감하였는데, 영동·영서·경기·양남(兩南)이 각각 차등이 있었고, 그 부족한 수량은 훈련 도감과 호조에 저축된 것을 가져다 쓰게 하였다. 목화가 귀하였으므로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차등있게 감하고 혹은 미곡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영동·영서의 노비 신공과 병조에서 거두는 군포(軍布)도 그와 같이 하였다.
11월에 징수할 곳이 없는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전부 면제해 주고 을사년052) 이후 신공의 반을 미곡으로 바꾸어 납부하게 한 것도 면제해 주었다. 명을 내려 세초(歲抄)를 정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죽은 자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것을 다 조사해 내서 견감하게 하였다. 어린아이는 실지의 나이 10세를 한계로 하고 10세가 되지 아니한 자는 그 신역(身役)을 일체 감면해 주었다. 그리고 각도에 명을 내려 어린아이에게 신역을 함부로 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을 되풀이하여 일렀다.
제도(諸道)에 명을 내려, 감영·병영·수영의 영장(營將) 집에 있는 군관을 조사해 내서 조정의 조처를 기다리게 하였다. 만일 사실대로 아뢰지 않을 경우 군사의 실정을 속여 보고한 죄로 벌을 시행하게 하였다.
함경도에서 상납하는 공물 중에 우황(牛黃)·표피(豹皮) 등의 물품을 감하였다. 어사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별도의 보고서에 의하여 북도의 안변(安邊)·덕원(德源)·홍원(洪原)·문천(文川)·고원(高原)·경성(鏡城)·경흥(慶興)·이성(利城)·부령(富寧) 등 9 개 고을의 전세(田稅)를 감하였다.
정미 8년 1월 22일에 왕세자의 책봉례를 거행하였다. 양사(兩司)가 임금이 벌금을 물게 되었다고, 청나라로 사신 갔던 사람과 청나라 사신이 관(館)에 있으면서 조사할 때의 상신에게 죄주기를 청하며 합계(合啓)하여 논하니, 왕이 ‘사정을 알지 못하고 대신을 망령되이 논한다.’고 하면서 엄한 분부를 내려 배척하였다. 집의 이숙(李䎘), 장령 박증휘(朴增輝)·신명규(申命圭), 지평 유헌(兪櫶)·이하(李夏), 헌납 김징(金澄), 정언 조성보(趙聖輔) 등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4월에 다시 왕대비를 모시고 온양으로 거둥하였다. 농사철이라고 하여 경기·충청도에 영호 군병(迎護軍兵)053) 을 동원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연로의 노인들에게 지난해의 예에 따라 음식물을 지급하고 도로에 떠돌아다니는 빌어먹는 사람에게는 상평창(常平倉)의 미곡을 내어 주어 구제하고 또한 음식물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관에 명하여 본군의 향교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 행궁(行宮) 부근에 있는 고을의 인재를 수용(收用)하도록 하고, 행궁의 역사에 나온 사람에게는 별도로 우대하여 구휼하게 하였다.
윤사월(閏四月)에 백세 된 노인에게 음식물을 더 내려주게 하였다. 한재로 인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마음을 합하여 조심하고 부지런히 일하도록 권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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