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는 구한말까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단지 목마장(牧馬場)으로만 운영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항이 개항되자 부산으로 들어 온 일본인들이 용두산 부근 초량이나 영도로 모여들어 주거지로 변하기 시작한다. 1890년에는 섬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나룻배’가 생겼다. 처음에는 부정기적으로 운항하던 나룻배가 1895년부터 정기적으로 운항을 하면서 4척으로 늘어났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예상을 깨고 일본이 승리하자 영도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의 수도 급격하게 늘었다. 1910년에는 소위 ‘통통배’라는 불리는 동력선이 나룻배를 대체하였다. 시간이 지나 물류가 활발해 지면서 1930년에는 통통배만으로는 여객과 화물수요가 한계에 이르러 영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고, 당시 해운업자들은 극심하게 반대하였다고 한다. 다리가 완공되면 1,000톤 이상의 배가 북항에서 남항 쪽으로 갈려면 영도를 돌아가야 하는 데 소요시간이 1시간 이상 걸리고 수송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영도와 육지를 잇는 해저터널을 뚫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교량을 들고 내리는 도개식(跳開式) 다리를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 영도다리는 1932년 3월 8일(기공식은 4월 20일)에 착공되어 1934년 11월 23일에 준공하여 개통되었다. 다리 전체 길이는 214.63m, 폭은 18m, 도개부 길이는 31.3m이다. 개통 당시에는 부산대교라 불렀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영도와 부산이 찻길과 전차길로 연결되었다. 이 당시 영도다리는 부산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이름난 명소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온 실향민들이 잃어버린 혈육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이용되면서 전쟁의 아픔과 만남의 장소라는 이미지가 같이 섞여있다. 가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온다.
영도다리 전체 길이 214m 가운데 육지 쪽 31m를 전동식으로 들어 올려 그 밑으로 1,000톤급 선박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영도다리가 개통하던 날 영도와 육지 양쪽에는 무려 6만여 명이 몰렸다고 한다. 당시 영도다리 도개시간은 하루 7회로 각 20분씩이었으나 1935년 6월부터는 하루 2회, 15분으로 축소되어 운영되었다. 이 영도다리는 1966년 9월 1일부터 들어올리기를 중단하였고 전차운행도 폐지되었다. 이러한 역사성을 기억하기 위하여 영도다리는 2006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된다.
그 후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롯데쇼핑이 들어서자 이들과 같이 도심을 개발하기 위하여 2009년 차량을 통제하고, 임시교량을 개통, 확장복원공사에 착공하여 길이 214.63m, 폭 25.3m이며, 도개부 길이 31.3m로 재단장하여 2013년 11월 27일에 영도대교를 다시 개통하였다. 47년 만에 그 옛날의 추억을 되살린 것이다. 일본인들이 만든 다리 위에 일본인들이 만든 전차를 타고 다니던 한국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여 재정비하였다. 엔지니어링 측면에서의 일제 잔재 청산이다. 그리고 이것은 도시계획 분야에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도심재활성화(gentrification)정책의 일환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 달(2015년 11월) 부산 중구청에서는 영도다리 도개 장면을 보기 편리하게 다리 밑에 ‘유라리광장’(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도 7호선의 시점이자 종점인 자리)을 마련하였다. 현재 매일 1회, 14:00~14:15분에 다리를 들어 올려 많은 시민들의 추억을 달래주고 있다.
도시는 때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장소기억을 제공하는 문화적 공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