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강은 눈에서 불길이 뿜는듯 무서운 눈으로 백운도사를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낮이 익은 용두채(龍頭寨)의 두령 법유(法臾)와 석갑채(石岬寨)의 법연이란 놈의 얼굴도 보였다.
그밖에 이름을 몰랐지만 오천(吳天), 화여호(華如虎), 화여교(華如蛟), 원무적(袁無敵), 전대용(全大勇) 같은 소경사의 장수들이 거기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여장군이 있었는데 그 두 여자가 바로 죽은 법묘의 정부 채요리와 옥야차(玉夜叉)였던 것이다.
무강은 다음 순간 바위 하나를 방패로 삼고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더니 그 화살을 다시 먹히는 시간을 노려 비호처럼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용아의 안전을 돌볼 여유도 없었다. 오로지 그의 검이 번뜩이는 곳에 수십명씩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오천, 화여호, 화여교, 원무적, 전대용 같은 무리들이 필사적으로 그를 막았지만 무강의 적수는 아니었다.
무강이 맨 먼저 달뎌드는 오천의 허리를 검으로 치자, 그 반전(反轉)하는 검은 벌써 화여교의 목을 날리고 있었다. 이와같이 순식간에 나머지 전대용, 화여호, 원무적이 거의 때를 같이 해서 거꾸러지자,
『얏!』
하고 채요리가 한가닥 은사슬로 된 밧줄을 던졌다.
은사슬 끝엔 작은 갈구리들이 달려 있었다. 그것이 무강의 칼에 감기었다.
채요리는 사슬이 무강의 검에 감긴 것을 보자 타고 있던 말을 잡아타고 달리려고 했다. 말 힘에 못이겨 무강이 검을 뺏기면 그를 생포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강은 버티었다. 몇 순간 말과 사람의 힘 다루기처럼 버티다가 무강이 힘을 갑자기 늦추었다.
이와동시 무강은 끌리는 밧줄의 힘을 이용하여 공중을 날아 말 위로 내려앉으며 채요리의 허리를 걷어찼다.
이 뜻하지 않은 공격에 여자는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모든 것이 일어난 일이라 백운도사를 비롯한 법유, 법연도 입만 딱 벌릴 뿐이었다.
이때 함성이 들리며 백운도사의 군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보니까 여쌍인, 유호신, 천면랑, 홍수객, 철개, 담란 등이 함성을 올리며 닥치는 대로 적을 죽이며 오는 것이 아닌가.
무강은 채요리를 사로잡고 그들을 맞으며 기뻐했다.
그들은 무강을 보자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이들이 왜 갑자기 나타났느냐 하면, 며칠 전부터 소경사 패들이 진강채의 앞고지를 점령하고 투석기(投石器)며 강력한 궁대(弓隊)를 동원해서 공격해 왔었다. 그래서 심히 위급한 지경이었는데, 별안간 산 아래 쪽이 소란스럽고 앞고지를 점령했던 놈들도 그 쪽을 도우려 간 것같았으므로 산채의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왔다고 했다.
『반갑습니다. 형님!』
여쌍인은 무강의 손을 잡으며 어쩔 줄 몰랐다. 호신도, 철대도, 홍수객도 기타 모든 두령들이 무강의 출현을 감격하고 기뻐했다.
무강은 선고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러자 무강은 그것을 기뻐하며 산채의 두령들과 진강채로 돌아갔다.
백운도사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가 증원군을 급히 요청하는 모양인지 조용했다.
산채로 돌아가자 무강은 곧 중앙 교의에 앉으며 여러 두령들과 작적 계획에 들어갔다.
각가지 의견이 백출(百出)했으나, 무강의 주장으로 새벽녘 더욱 적이 강화되기 전에 기습을 하기로 의견이 통일되었다.
그래서 이날 저녁은 몇몇 보초만 요소 요소에 배치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여름밤은 무정하게 짧기만 했다. 선고와 오랜만의 정담(情談)도 아쉬운데 벌써 새벽 먼 동이 희끄므레 동터 왔다.
무강은 곧 비전투원과 최소의 병력만 남기고 부대를 편성했다.
그렇게 편성된 병력은 모두 구백 명이었다. 무강은 이 병력을 육대(六隊)로 나누었다.
제 일대의 대장은 무강, 병력은 이백 명.
제 이대의 대장은 유호신, 병력은 역시 이백 명.
제 삼대는 여쌍인이 대장으로 병력이 이백 명.
그리고 제 사대, 제 오대, 제 육대는 홍수객, 철개, 천면랑이 대장으로서 일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게 했다. 그리고 담란은 특별히 무강의 부대에 속하게 했다.
이날 새벽 다행히 안개가 자욱하니 끼어 있었다. 무강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발굽에는 짚신을 신겨 소리를 나자 않게 했다. 군졸들의 칼과 검에도 헝겊을 싸도록 하여 소리내지 않게 엄명을 내렸다.
묵묵하니 무강군은 새벽길을 진출했다.
무강은 마상에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기습을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만 병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소경사의 병력은 아무리 줄잡아도 삼천 명은 되었다. 여기에 만일 근직의 관병(官兵)까지 합세한다면 그 수효가 일만을 넘을 것이었다.
그래서 미처 구원을 받기 전에 백운도사의 군을 전멸시키고 그 여세(餘勢)를 몰아 소경사를 들이칠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어느덧 무강군은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아직 적과의 접촉은 없었다.
해는 떠올랐지만 우유빛 안개가 쫙 깔리고 있었기 때문에 시야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나가고 있었는데 전방에서 바라 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선봉으로 나간 제사, 제오, 제 육대의 누군가 적과 부딪친 모양이었다.
바라 소리를 듣자 무강은 말을 타고 바로 뒤를 따르는 소두목에게,
『마표(馬標)를 세워라!』
하고 명령했다.
마표란 장군의 위치를 부하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무강이 그렇게 외치자 소두목은 곧 마표를 세웠다.
일월(日月)을 그린 대장기, 마침 기는 바람에 나부끼어 펄럭이었다.
다시금 바라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근처는 모두 강 벌이었다. 갈대가 여기저기 우거지고 갈수기(渴水期)를 맞은 샛강에는 이따금 마른 강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안개는 여전히 짙었다. 한편 군사끼리도 조금만 떨어지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눈앞에 낮은 언덕이 아련하니 떠올라 왔을 때였다.
그 아래 갈대 숲에서 참새가 우하고 날았다.
열을 따르던 담란이 자기도 모르게 말고삐를 당기며,
『무강 두령!』
하고 외쳤다.
그러나 무강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계속 말을 달리며 쏜살같이 가고 있었다.
해는 이미 퍼져 올랐다. 무강의 뒤를 바짝 따르는 기마 무사의 등에 짊어진 마표가 아름다운 빛을 남기며 안개 속을 언덕으로 치달려 올라갔다.
『두령!』
담란도 지지않고 말을 몰아 무강을 뒤쫓아갔다.
『조심해야 합니다. 적병놈들이 이미 이 근처에 나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제따위 백운놈이 감히 맞아 싸운다?』
『의심스럽습니다. 참새가 날은 쪽이......』
그럴 때 또 참새 떼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날았다.
무강이 이때 담란의 이 충고를 왜 무시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란 실수가 있는 법, 무강으로선 백운도사가 싸움을 피하지 않고 싸워주는 것이 승산이 있다 믿었던 것이다.
안개가 차츰 엷어졌다. 무성한 갈대 숲이 보이고 그 속을 헤치며 달려가는 자기편 군사의 늠름한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때 무강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전방, 측방.....아직 거기까지는 자기 부대가 있을 리가 없는 곳에 번쩍 창검이 빛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무강이 생각했을 때 생각지 않은 곳곳에서 바라 소리며 괭과리 소리가 울리고 동시에 낯익은 기치가 나타났다.
그것도 엄청난 수효였다. 그리고 마상의 적장, 그것은 학처럼 마른 설은화상이 아닌가.
『오!』
무강은 외쳤다.
『저놈은.....저놈은 설은이다!』
그러나 설은 옆에서 한 놈이 말을 달려왔다. 이자는 청운도사(靑雲道士)로서 쌍검을 썼다.
청운이 제법 위세당당 쌍검을 춤추며 으시됐다.
참새 떼가 또 머리 위를 날았다. 그제야 담란이 입을 열었다.
『두령! 벌써 적의 원군이 도착했나 싶습니다.』
『으흠!』
무강은 그렇게 신음하듯 한마디 하더니, 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듯 말을 몰아 언덕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두령! 가벼이 몸을......그런 무모한 짓은 삼가시오!』
하고 담란도 쫓아 내려갔지만, 벌써 난전이 된 피아의 군사들간에 벌어진 싸움에 말려들어가 담란은 덤벼드는 적병을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확실히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달려오는 적장이 설은인 것을 알고 무강이 어찌 그것을 참을 것인가. 성나서 적병을 풀베듯이 처넘기고 달려가는 무강 뒤에 담란이 필사적으로 쫓아가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서서 무강은 먼저 비오듯 하는 화살 세례를 받았다. 담란이 대도를 바람개비처럼 돌려 이 화살을 막아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 구더기들! 진강채에 담란이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호통을 치며 적병을 쓸어 넘겼다. 손식간에 스무 명쯤 죽어 자빠졌다.
무강은 그런 담란의 뒤를 쫓아오며 역시 적군의 목을 베어 던졌다. 그리고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는 설은을 노려보며,
『내 맹세코 저놈을 죽이리라!』
하고 이를 갈았다.
『담란 장군이다. 길을 비켜라! 네 놈들을 모조리 황천객으로 보낸다음 너희 마누라들을 내 첩으로 삼으마!』
그 때 적군 속에서 키가 작달막한 사나이가 뛰어나왔다.
『오 담란! 너는 오늘이 마지막이로구나. 계집의 배 탈 생각은 그만두고 네놈의 전직인 중 흉내나 내어 염불이나 외워라.』
『뭐? 너는 웬 졸병이냐! 졸병은 꺼져버려!』
그러나 그 도보의 군사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난 잘 안다. 이 중놈의 오입쟁이야!』
『뭣이!』
담란은 화를 내고 창을 번개처럼 내 찔렀지만 그는 제비처럼 날쌔게 몸을 피했다.
『네......네놈은 누구냐?』
『하하......나 말이냐? 나는 법연이란 어르신네다.』
『법연? 그럼 강도의 두목놈이로구나. 옳지 네놈의 간을 도려내어 오늘밤의 술안주를 삼으마.』
담란은 마구 후려댔다. 그러나 그의 대도는 번번히 빗나갔다.
이 때 한쪽에서 또 기성을 지르며 법유가 달려들었다.
고전이었다.
무강은 정운도사를 맞아 싸우고 있기 때문에 구할 틈이 없었다.
담란은 이때 난생 처음 두 강적을 만나 자기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깨달았다.
소낙비같은 땀이 흘러서 눈 속에 들어왔다. 그럴수록 상대방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법연의 이마에는 땀하나 없고 빙그레 웃기조차 하는 게 아닌가.
(보통 놈이 아니로구나. 이 놈이 이렇게 센 놈일 줄이야!)
그런 느낌과 동시 담란은 본능적으로 몸의 위험을 느꼈다.
그러자 이때 또 설은 쪽에서 두 장수가 뛰어나와 담란을 집중 공격했다.
그것은 소경사의 동아(東衙)와 서아(西衙)의 우두머리인 법성(法性)과 법색(法色)이었다.
네 명의 공격을 받자 점점 꿀리기 시작했다.
무강은 이때 다시 가세한 백운과 청운의 두 도사놈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담란의 위기를 보자 있는 신기를 다하여 몸을 일으키자 먼저 청운도사의 옆구리를 한 칼에 벰과 동시에 백운도사의 왼쪽 팔을 베었다.
그런데 이 순간, 법연의 장창이 담란의 허벅다리를 뚫고 나가는게 아닌가.
그리고 대검을 높이 들며 달려드는 법성!
무강은 그것을 보자 도망치는 백운을 내버려두고 때마침 가까이 있던 놈의 단창(短槍)을 빼앗아 휙 던졌다. 그러자 그 단창이 가슴팍을 관통시키고 나갔지만 이미 이때는 담란이 낙마한 후였다.
천하장사인들 이것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담란은 찔린 창자루를 쥐고 일어나려 했으나 여기에 두 번째 적의 대검이 날아들었다.
『오!』
무강은 눈 앞에서 죽어가는 담란의 비참한 모습을 보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놈들!』
비록 청운이 거꾸러지고 백운이 팔 하나를 잃고 달아났지만, 법연, 법유, 법색 세놈이 일시에 달겨들었다. 그리고 정족산의 남아(南衙), 북아(北衙)의 우두머리인 법천(法天), 법민(法珉)도 각각 쌍도끼로 춤추며 달겨들었다.
무강은 닥치는 대로 적병을 쓰러뜨렸다. 어지간한 무강의 보검도 톱날처럼 이가 빠졌으며, 무강은 검이 못쓰게 되자 적의 장검을 빼앗아 들고 휘둘렀다.
이처럼 혈전을 거듭하기 이미 반 시각. 무강도 지쳤다.
그런데도 밉고 미운 설은에게는 한 발자국도 접근 못하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메뚜기 같은 졸개들만 죽이기에 정력이 낭비되었다.
이럴 즈음―.
적진의 일각이 무너지며 적병들이 산산히 흩어졌다. 그리고 산이 무너지듯 바닷물을 떠엎듯 호통 소리가 들렸다.
『이 구더기들아! 진강채에 여쌍인이 있음을 몰랐느냐!』
그것은 바로 제 이대의 두령 여쌍인이었다. 그는 무강의 위급을 보자 진형을 장사진(長蛇陣)으로 바로잡고 유성과 같이 적의 일각(一角)을 충살(衝殺)했다.
여쌍인은 어디서 구했는지 장정 몇 명이 가까스로 들만한 통나무를 휘두르며 무인지경처럼 무강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애마(愛馬)도 이런 무게를 감당 못했는지 도보였다.
무강은 여쌍인의 출현에 힘을 입었다. 그리하여 다시 힘을 내고 용(勇)을 뻗쳐,
『엿!』
하였을 때 그의 앞을 가로 막았던 법연의 머리가 칠척(七尺)은 공중에 날랐고 다음 검이 번뜩였을 때 법유의 가슴에선 선혈이 분수처럼 뿜고 있었다.
이와같은 상황 변경에 당황한 것은 법색, 법천, 법민 세 놈이었다. 그들은 무강을 버리고 모두 내뺐다.
『이놈들아, 도망치느냐!』
무강이 다시 쫓아가며 법색의 등 허리를 두 쪽 냈을 때—.
그 순간이었다.
무강의 두 눈 앞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눈이 부셔서 멈칫했다.
놀라운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햇빛이 퍼져서 밝기만 하던 천지가 홀연 암흑 세계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수많은 귀졸(鬼卒)들이 무강을 향하여 밀물처럼 반격해 왔다.
설은화성이 도술 도회법을 써서 귀졸을 동원한 것이었다.
무강은 귀졸들을 마구 베어 넘겼다. 그러나 베고 보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한낱 종이였고 낙엽이었다.
무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깨닫자 무강은,
『후퇴다! 후퇴! 모든 군사들은 물러나라!』
하고 비통하니 절규했다.
第 五十四 章 決 戰(낙장 이어짐)
진강채에 돌아온 무강군의 병력은 삼분의 일로 줄어들어 있었다.
더구나 무강을 분통케 만든 것은 여쌍인의 죽음이었다. 무강이 벼락같은 불 빛에 눈이 부시고 다시 변하여 용암(溶暗)이 되었을 때 적에게 해를 입었으리라.
이밖에도 담란과 천면랑이 또한 돌아오지 못했다.
무강은 그들을 위하여 제(祭)를 올리고 크게 통곡했다.
『호한(好漢) 여쌍인(餘雙人)!』
그러나 슬픔만 짓씹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곧 산채의 남은 두령을 모아 군의(軍議)에 들어갔다.
『여러 형제들, 오늘 싸움은 적의 장수를 여러 명 죽였지만 아니, 이겼으면서도 진 싸움이었소. 그러니.....』
하고 무강은 잠시 말을 끊었다.
여러 두령들은 묵묵하니 말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단신 적굴을 들어 갈까하오.....야전(野戰)은 숱한 인명(人命)만 살생되니 만큼 직접 적굴로 들어가 설은화상과 자웅(雌雄)을 결할 작정이오.』
이 말에 즉각적으로 반대한 것은 호신이었다.
『안되오. 무강형 혼자를 죽일 순 없소!』
그러나 무강은 고집을 세웠다. 이렇게 고집을 세우자 호신은 다시,
『그렇다면 나만이라도 같이 가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나 무강은 그것마저 반대했다.
『혼자 가나 둘이 가나 위험하긴 마찬가지, 호신형은 부디 산채에 남아서 후사(後事)를 도모해 주시오. 이제 우리 두 사람마저 없다면 이 산채가 무슨 꼴이 되겠소.』
호신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무강의 고집을 더 꺾지 못할 것은 물론, 여쌍인이 없는 이제 호신마저 산채에 없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혼란이 일어나리라.
쫓아가자니 난처하고 안쫓아가자니 염려되기만 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무강은 마지막으로 다짐하듯 말했다.
『여러 형제들이 이 몸을 염려해 주는 것은 고맙기 짝이 없소. 그러나 인명(人命)이란 하늘에 매인 것, 내 스스로 안이(安易)를 취한들 죽을 때라면 죽음이 찾아올 것이오. 모쪼록 내가 없다 하더라도 호신형을 맹주(盟主)로 삼아 산채를 더욱 굳건히 해주기 바라오.』
말을 마치자 그는 한 필의 건장한 말을 타고 산을 내려갔다.
아직도 컴커만 밤중이었다. 무강이 그날의 전쟁터를 지날 무렵엔 넓은 강가 갈대 숲 여기저기에 귀신불처럼 개똥벌레가 날으고 있었다.
무강은 밤새도록 말을 달렸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자 말을 버렸다. 정족산 역시 어마어마한 십이 채도 전날 싸움에 막대한 희생을 입었기 때문에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무강은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산정에 있는 소경사를 향하여 곧자 치달았다.
따라서 자연히 길 없는 곳을 지나고 깎아지른 벼랑도 천신만고 끝에 오르며 한 발 한 발 정족산의 정상을 향해서 올라갔다.
무강이 거번 정상에 올랐다고 짐작 되었을 때 조그만 능선을 넘자 시야가 탁 트였다.
이와 동시 그는 오, 하고 낮게 부르짖었다.
그곳에 계곡물을 막아놓았는데 물 속에 흰 물체가 굽이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심산 계곡에서 흘러드는 물이라 물속의 고기비늘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그런데 아마 인어(人魚)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이것과 같다고나 할까.
여름철이라 하지만 아직 냉랭한 새벽 공기다. 그런데 아름답게 쪽 쪽 고른 사지를 마음껏 펴며 미역을 감는 여인의 모습. 검은 머리가 물 속에서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무강은 잠시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다. 급한 일만 아니라면 옷을 벗고 뛰어들어 어울려 헤엄도 치고 안아주고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는 발길을 옮기질 못했다.
가만히 누워 있는 여인이 정적(靜的)인 아름다움이라면, 살아 움직이는 발랄한 생명의 아름다움은 그만큼 생생하니 느껴진다.
봉긋한 젖가슴......둥그런 허리. 몸을 뒤챌 적마다 보이는 아련한 음영(陰影).
그 찰나였다.
비로소 여인이 무강의 존재를 의식했다.
무강의 낌새를 눈치 챈 여인이 얼굴에 단풍같은 발그스름한 수줍음을 보이고 물뱀처럼 한번 물 속으로 자맥질을 하더니 날쌔게 밖으로 나와 바위 그늘에 숨었다.
무강은 몰랐지만 그 여인이 바로 소경사 십이채(十二寨)의 하나인 사팔정(死八丁)의 여두령 옥야차(玉夜叉)였던 것이다.
『허허허.....』
무강은 그 여인을 무시하고 지나려 했다. 그 때,
휙!
하고 돌팔매 하나가 날아와 그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휙, 휙!
돌팔매는 계속되었다.
그제야 적의를 느낀 무강은 비조(飛鳥)처럼 몸을 날려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옥야차는 젖가슴만 가리고 돌파매질을 하다가 불의의 습격도 습격이려니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기에 당황했다.
그 틈을 노려 무강은 여자의 젖가슴을 한 팔로 홱 끌어안고,
『이제보니 낯이 익은 소경사의 여두령이시군. 마침 잘 되었소. 설은화상 있는 데로 안내하시지.』
하고 빈정거렸다.
『분하다!』
옥야차는 부르짖듯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러나 대항했자 소용 없음을 알았는지 몸의 힘을 뺀다. 그리고 무강의 눈빛을 애원하듯 바라보았다.
무강은 옥야차의 심정을 헤아리고 빙그레 웃으며,
『옷 입는 여유는 주지. 그러나 딴 생각 먹으면 내 칼이 날은다.』
옥야차는 무강이 놔주자 잠자코 재빨리 옷을 입었다. 옷을 입자 무강은 다시 그를 앞세워 끌어안고,
『안내해라!』
하고 말했다.
옥야차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 길은 다시 가파로와졌다.
그 험한 길 양편에 수백 명의 졸개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옥야차가 무강에게 잡혀 있으므로 멍하니 통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리하여 사팔정은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 다음 신궁처(神弓處) 역시 옥야차가 안내하므로 나무 위며 바위 그늘에 숨어서 활을 겨누고 있던 졸개들도 망연자실 어쩔 줄을 몰랐다.
신궁처를 지나자 길은 다시 평탄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소경사의 우람한 가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강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그와 동시 조금도 방심(放心)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소경사가 가까워지자 졸개들의 수효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가진 무기도 가지각색으로서 도끼, 철장, 청룡도, 사모(蛇矛), 철퇴, 철추(鐵鎚), 각궁(角弓), 양궁(楊弓), 육척봉(六尺棒), 장창(長槍), 그리고 각종 검 따위였다.
그리고 거의 울타리를 치다시피 늘어 서 있었다.
이윽고 정면에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거기 중앙 교의에 설은이 앉았고 왼쪽엔 팔 하나가 잘린 백운도사, 바른 쪽엔 흑운도사(黑雲道士)가 앉아 있었다.
그 앞에 가까이 이르자 옥야차가 별안간 미친 듯이 외쳤다.
『사나이 한 마리를 잡아 왔어!』
『손님을 모시고 왔다고 그래!』
무강은 이렇게 말하고 여기서 옥야차를 해방시켜 주었다.
설은이 아무리 악당이기로서니 단신 찾아 온 자기에게 비겁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무강은 높은 댓돌 아래 공지에 우뚝 섰다.
다음 순간 말없이 불길같은 시선을 설은에게로 향했다.
설은이 그런 무강을 보자 갑자기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첫댓글 아직 367~374페이지가 마무리가안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