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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直 1431 1492 善山 季昷 佔畢齋 文忠
점필재집 시집 제10권 / [시(詩)]
윤담수의 운에 차하다[次韻尹淡叟] 담수는 단계(丹溪)에 있는데, 자기 모부인의 수연(壽筵)을 베풀면서 시(詩)로써 나를 초청했으나 내가 가지 못하였다. 바로 정월 11일이다.
훤당께서 이날에는 근심을 타파하고 / 萱闈此日破忡忡
옥잔에 뜬 거품을 대번에 비우셨으리 / 玉斝浮蛆一擧空
멀리 생각컨대 단계의 웃고 즐기는 곳에는 / 遙想丹溪歡笑處
매화 뺨과 버들 눈이 동풍에 아양을 떨겠네 / 梅顋柳眼媚東風
잘못 화산을 향하여 근심을 품었노니 / 枉向花山抱有忡
춤추는 적삼 노래하는 부채 이미 공허해졌네 / 舞衫歌扇已成空
사람으로 하여금 진주목이 부끄럽게 하여라 / 令人羞殺菁川牧
그대의 미인은 지금도 그대 밑에 있구려 / 羅綺當年立下風
담수에게 기녀(妓女)가 있어 나의 기녀 종랑(鍾娘)과 함께 모두 화산 사람인데, 종랑은 지난 해에 병들어 죽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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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居正 1420 1488 達城 剛中, 剛仲, 子元 四佳亭, 亭亭亭 文忠 達城君
사가시집 제13권 / 시류(詩類)
장난삼아 윤담수(尹淡叟) 동경(同庚)에게 주다. 담수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갔다가 막 돌아왔다.
쇠하고 병든 연래에 수척해짐은 놀랍지만 / 衰病年來瘦可驚
풍류는 아직도 동갑내기가 있어 기쁘구려 / 風流尙喜有同庚
그대는 도곡의 풍광호를 노래했는데 / 君歌陶穀風光好
남들은 번천의 낙백행에 비유한다네 / 人比樊川落魄行
태상의 간장이 철석 같은지는 못 믿겠고 / 不信太常腸似鐵
관기들로 육병 쳤다는 소식만 들었다오 / 似聞官妓肉爲屛
나는 이미 진흙에 붙은 개지가 되었건만 / 我心已作霑泥絮
머리털 달린 참료라서 정이 일어나는군 / 賴有髮參惹起情
사명 받든 이의 풍류는 이도 한때려니와 / 奉使風流此一時
늙을수록 강장해지는 게 바로 남아라오 / 老當益壯是男兒
재계할 때는 아내의 원망이 너무 괴롭지만 / 淸齊太苦妻曾怨
행락할 때는 기녀가 따름을 과시할 만하리 / 行樂堪誇妓自隨
사별이 응당 생이별의 고통만 못한 법이니 / 死別不如生別苦
좋은 인연이 되레 악연의 기회가 되었구려 / 好緣翻作惡緣期
정녕하게 다시 거듭 찾을 언약 맺었겠지 / 丁寧更有重來約
그늘 이루고 열매 가득해지기 전에말일세 / 不待成陰子滿枝
그 누가 우물을 두서너 줄로 에워싸서 / 誰敎尤物兩三行
돌아가려는 사신의 간장을 녹였단 말인가 / 惱殺將還奉使腸
단산 길은 성산과 인접해 아주 가까운데 / 丹山路接星山近
하루에 갈 길을 닷새 남짓이나 걸렸다지 / 一日程爲五日强
가련도 해라 남아의 눈물을 다 쏟았건만 / 可憐洒盡男兒淚
부모의 나라를 떠난 때문도 아니었구려 / 不爲去遲父母鄕
또 묻노니 포도주는 거듭거듭 기울였는가 / 且問葡萄重倒否
어두운 마음속이 원래 전쟁터라네 / 窨中元是戰爭場
[주-D001] 그대는 …… 노래했는데 : 북송(北宋) 때 도곡(陶穀)이 사신으로 남당(南唐)에 가서 스스로 상국(上國)의 사자(使者)임을 자부하여 의연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곳의 학사(學士) 한희재(韓熙載)가 기녀 진약란(秦蒻蘭)을 역졸(驛卒)의 딸인 것처럼 도곡에게 소개하여 도곡이 마침내 신독(愼獨)의 경계를 망각하고 그녀와 가까이 지내면서 ‘풍광호(風光好)’ 한 사곡(詞曲)을 지어주기까지 했다가, 그 후 남당의 후주(後主)가 도곡을 위하여 베푼 주연(酒宴)에서 후주가 기녀 진약란으로 하여금 ‘풍광호’를 노래하며 도곡에게 술을 권유하도록 하자, 도곡이 그제야 속은 것을 깨닫고 군색한 처지가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주-D002] 남들은 …… 비유한다네 : 번천(樊川)은 두목(杜牧)의 호인데, 그의 견회(遣懷) 시에 “방탕하여 강호에 술 싣고 다니노라니, 가냘픈 미인들은 손 안에 가볍기도 해라.〔落魄江湖載酒行 楚腰纖細掌中輕〕”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여기서 말한 낙백행(落魄行)은 곧 방탕하게 술이나 싣고 다니는 것을 이른 말이다.[주-D003] 관기(官妓)들로 육병(肉屛) 쳤다 : 당 현종(唐玄宗) 때 양 귀비(楊貴妃)의 오라비인 양국충(楊國忠)이 권력을 휘두르며 극도로 사치를 부렸는데, 한겨울이면 항상 몸집이 비대한 비첩(婢妾)들을 자기 앞에 죽 늘어세워서 그 온기(溫氣)로 자기 몸을 다습게 하면서 이것을 ‘육병풍(肉屛風)’ 또는 ‘육진(肉陣)’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주-D004] 나는 …… 되었건만 : 소식(蘇軾)이 일찍이 서주(徐州)에 있을 때, 전당(錢塘)에서 승(僧) 참료(參寥)가 찾아왔으므로, 소식이 한 기녀로 하여금 장난삼아 참료에게 시를 요구하도록 하자, 참료가 절구 한 수를 불렀는데, 그 시에 “술동이 앞의 얌전한 낭자가 많이 고맙지만, 그윽한 꿈 좋이 가져다 양왕이나 꾈지어다. 선심은 이미 진흙에 붙은 버들개지가 되어, 동풍을 쫓아 위아래로 미쳐 날지 않는다오.〔多謝尊前窈窕娘 好將幽夢惱襄王 禪心已作霑泥絮 不逐東風上下狂〕”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선심(禪心)은 마음이 아주 고요하게 갈앉아서 전혀 동요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주-D005] 머리털 …… 일어나는군 : 참료(參寥)는 소식(蘇軾)과 교유한 승(僧)의 이름인데, 그는 기녀에게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않았지만, 저자 자신은 아직 머리털이 있는 속인이라서 애정을 느끼게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주-D006] 늙을수록 …… 남아(男兒)라오 : 후한(後漢)의 명장 마원(馬援)이 일찍이 농(隴), 한(漢) 지방을 전유(轉游)할 적에 항상 빈객들에게 말하기를 “장부는 뜻을 가짐에 있어 곤궁할수록 더욱 견고해져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강장해져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7] 정녕하게 …… 전에말일세 : 당(唐) 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일찍이 호주 자사(湖州刺史)로 있던 친구를 찾아가 노닐 적에 그곳의 이름난 미인들을 다 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으므로, 자사(刺史)에게 청하여 물놀이〔水戱〕를 베풀어서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고는, 자신은 직접 구경꾼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살펴보니, 그중에 노파를 따라 구경 나온 10여 세쯤 된 여아(女兒)가 참으로 국색(國色)인지라 그 노파에게 “지금은 여아를 맞아들일 수 없고 후일로 미루어야겠으니, 내가 10년 뒤에 호주 자사가 되어 와서 여아를 맞을 것이로되, 만일 그때까지 오지 않으면 다른 데로 시집을 보내시오.”라고 말하고, 중폐(重幣)를 주어 약혼했는데, 그 후 14년 만에야 호주 자사로 부임하여 가보니, 그 여아는 다른 데로 시집간 지 3년이 되었고 두 아들까지 낳았으므로, 두목이 그들 모녀를 불러 만나 보고 돌려보내면서 이별을 슬퍼하여 읊은 시에 “내가 본디 봄을 찾은 게 워낙 더디었으니, 슬퍼하며 꽃다운 시절 한할 것도 없어라. 거센 바람이 불어 짙붉은 꽃 다 떨어뜨리니, 푸른 잎새 그늘 이루고 가지엔 열매가 가득구나.〔自是尋春去較遲 不須惆悵恨芳時 狂風吹盡深紅色 綠葉成陰子滿枝〕”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주-D008] 우물(尤物) : 특별히 뛰어난 미인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8년 조에 “대저 우물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기에 넉넉하니, 진실로 덕의가 아니면 반드시 재앙을 입게 된다.〔夫有尤物 足以移人 苟非德義 則必有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9] 부모의 …… 아니었구려 :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공자가 제 나라를 떠날 때는 인 쌀을 건져서 급히 떠났고, 노 나라를 떠날 때는 ‘더디기도 해라 나의 떠남이여.’라고 하였으니, 이는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도리인 것이다.〔孔子之去齊 接淅而行 去魯 曰遲遲吾行也 去父母國之道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萬章下》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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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시집 제13권 / 시류(詩類) / 화산(花山)에게 장난삼아 주다. 2수
남주에 풍류객 되어 사명 받들고 왔으니 / 落魄南州奉使還
만년의 풍류가 정말 사안의 동산 같구려 / 風流晩節謝東山
사자가 늘상 으르렁대게 하지 말게나 / 莫敎獅子尋常吼
난간 가의 흑모란을 보게 될까 두렵네 / 怕見欄邊黑牧丹
퇴지는 늘그막에 도류를 사절했고 / 退之老去辭桃柳
거이는 만년에 소만과 이별도 했는데 / 居易殘年別素蠻
병 많은 나는 지금 말과 바꾸길 생각하여 / 多病吾今思換馬
풍취는 온통 이미 화산에 맡겨버렸다오 / 風情都已屬花山
[주-D001] 화산(花山) :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갔다 돌아온, 자가 담수(淡叟)인 윤자영(尹子濚)에 대한 호칭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사가시집 제13권 ‘장난삼아 윤담수(尹淡叟) 동경(同庚)에게 주다. 담수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갔다가 막 돌아왔다.’ 시 참조.[주-D002] 만년의 …… 같구려 : 동산(東山)은 동진(東晉) 때의 명신(名臣) 사안(謝安)이 40여 세까지 은거하던 산인데, 당시 사안이 매양 내외 자질(內外子姪)들과 기녀들을 거느리고 동산의 별장에서 주연을 베풀고 풍류를 한껏 즐겼던 데서 온 말이다.[주-D003] 사자(獅子)가 …… 말게나 : 사자가 으르렁댄다는 것은 부인의 투기가 심하여 남편에게 발악(發惡)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 나라 때 진조(陳慥)의 자가 계상(季常)이고 호가 용구거사(龍丘居士)였는데, 그는 빈객을 좋아하고 가무하는 기녀를 좋아하였으나, 그의 아내 하동 유씨(河東柳氏)의 투기가 워낙 심했으므로, 소식(蘇軾)이 일찍이 그에게 준 시에서 “용구거사 또한 가련하기 그지없어라, 공을 말하고 유를 말하며 밤잠도 안 자다가, 문득 하동의 사자 으르렁대는 소리만 들으면, 주장은 손에서 떨어지고 마음은 아득해지네.〔龍丘居士亦可憐 談空說有夜不眠 忽聞河東獅子吼 拄杖落手心茫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4] 난간 …… 두렵네 : 흑모란(黑牧丹)은 무소〔水牛〕의 희칭(戱稱)이다. 당(唐) 나라 말기 유훈(劉訓)이란 사람은 경사(京師)의 부인(富人)이었는바, 경사에서는 모란꽃 완상을 가장 훌륭한 봄놀이로 여겨 왔으므로, 유훈이 한번은 손들을 맞이하여 꽃을 완상할 적에 무소 수백 마리를 앞에 매어두고 그를 가리켜 “유씨의 흑모란이다.〔劉氏黑牧丹也〕”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투기 부리는 아내 앞에서 쩔쩔매는 남편의 모습을 으르렁대는 사자 앞에서 벌벌 떠는 무소에 비유하여 이른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주-D005] 퇴지(退之)는 …… 사절했고 : 퇴지는 한유(韓愈)의 자이고, 도류(桃柳)는 한유의 애첩이었던 강도(絳桃)와 유지(柳枝)를 합칭한 말이다. 《당어림(唐語林)》에 의하면, 한유에게 강도와 유지 두 애첩이 있어 모두 가무를 잘했는데, 뒤에 유지가 담장을 넘어서 도망갔다가 가인(家人)에게 다시 붙들려 온 일이 있어, 한유의 진주초귀(鎭州初歸) 시에서 “이별한 이후로 길거리의 양류는, 춘풍에 하늘거리며 날려고만 했는데, 또한 작은 정원의 도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 낭군 오길 기다리며 꽃을 안 피우고 있었네.〔別來楊柳街頭樹 擺弄春風只欲飛 還有小園桃李在 留花不發待郞歸〕” 하고, 그 후부터는 강도만 오로지 총애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그러나 강도와 유지 두 애첩을 다 사절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주-D006] 거이(居易)는 …… 했는데 : 소만(素蠻)은 백거이(白居易)의 애첩이었던 번소(樊素)와 소만(小蠻)을 합칭한 말이다. 번소는 노래를 잘하고, 소만은 춤을 잘 추었으므로, 백거이가 일찍이 시를 지어 “빨간 앵도는 번소의 입이요, 버들가지는 소만의 허리로다.〔櫻桃樊素口 楊柳小蠻腰〕”라고 했는데, 뒤에 백거이가 병이 들어 끝내 번소와 결별한 일이 있으므로 이른 말이다.[주-D007] 병 …… 생각하여 : 후위(後魏) 때 조창(曹彰)이 자못 호기(豪氣)가 있었는데, 한번은 우연히 한 준마를 보고는 대단히 좋아하여 그 주인에게 “나에게 미첩(美妾)들이 있어 그 말과 바꿀 수 있으니, 그대가 미첩을 고르기만 하라.” 하자, 그 주인이 한 미첩을 가리키므로 조창이 드디어 그 미첩과 말을 바꾸었던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병이 많아 미첩이 필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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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촌(厖村) 윤자영(尹子濚)이다.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담수(淡叟), 호는 방헌(厖軒)이다. 방촌은 그의 또 다른 호이다. 진주 목사를 지냈고,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편찬 시에 춘추관 기사관으로 참여하였다. 허백당집(虛白堂集)
3 방촌시집서(厖村詩集序) 윤자영(尹子濚)의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성현이 어릴 때 윤자영의 문하에서 배운 적이 있는데, 그의 아들 윤원(尹源)이 유고를 수집 편찬하였다. 성현은 저자의 재능에 비해 목사(牧使)에 그친 일생이 안타깝지만 이 책이 남아 후세에 이름을 전하니 오히려 영화롭다고 말하고, 이 책을 보면 윤자영의 고심(苦心)과 근학(勤學)은 물론, 자제들이 선조의 뜻을 계승하려는 마음도 알 수 있다며 상찬하였다. 허백당집(虛白堂集)
4 윤 선생(尹先生) 윤자영(尹子濚, ?~?)이다.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담수(淡叟), 호는 방헌(厖軒) 또는 방촌(厖村)이다. 사직 윤변(尹汴)의 아들이며, 고려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윤택(尹澤)의 현손이다. 1451년(문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교ㆍ주부ㆍ직강ㆍ장령 등을 거쳤고 1466년(세조12)에 실시한 중시에서 2등으로 뽑혔으며 벼슬은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1455년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편찬 시에는 춘추관 기사관으로 참여하였다. 《허백당집》 문집 권5의 〈평구역기(平丘驛記)〉에도 윤자영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허백당집(虛白堂集)
윤자영(尹子濚) 담수(淡叟), 방헌(庬軒) 출생일1420년(세종 2)
徐居正 1420 1488 達城 剛中, 剛仲, 子元 四佳亭, 亭亭亭 文忠 達城君
金宗直 1431 1492 善山 季昷 佔畢齋 文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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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俔 1439 1504 昌寧 磬叔 虛白堂, 慵齋, 浮休子, 菊塢 文戴
허백당문집 제8권 / 서(序) / 방촌시집서〔厖村詩集序〕
방촌(厖村)의 시고(詩稿)는 무송(茂松) 윤 선생(尹先生)이 지은 것이다. 선생은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선성군(宣城君) 노사신(盧思愼),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 그리고 우리 백씨와 중씨를 벗으로 사귀었는데, 그 문자를 담론할 때 내가 그 찌꺼기나마 주워들어 식견을 풍부하게 하고 시편을 수창한 것이 권질을 이루었으니 쑥이 삼밭에 나서 곧게 자라고 파리가 천리마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는 것처럼 도움을 받은 것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내가 어렸을 때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부형처럼 존경하는 마음으로 섬겼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나란히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였고 다행히 함께 발영과(拔英科)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학문에 정통하고 문장에 능하였는데 후생들을 권면하여 나아가게 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선비들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추종하였으니 실로 문단의 괴걸(魁傑)이었다.
지금 선생의 아들 윤원(尹源) 씨가 유고 시 한 질을 소매에 넣고 와서 책머리에 서문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시집을 다 읽고 나서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문에 말해 본다.
세상에는 비루하고 용렬한 사람으로 작은 재주도 없으면서 명성과 권세를 발판으로 삼아 현달하게 된 사람이 매우 많다. 그런데 선생과 같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서 제대로 발휘해 보지 못하고 길이 막혀 벼슬이 겨우 한 고을의 목사에 불과하였으니, 어찌하여 하늘은 사람에게 큰일을 할 만한 그릇은 주었으면서 운명을 비색(否塞)하게 하였단 말인가. 한 시대에 명성이 뜨르르한 저들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듯하지만 마치 웅덩이에 고인 근원이 없는 빗물이 아침에 그득하였다가 저녁에 말라 버리는 것과 같아 결국엔 모두 사라져서 자취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렇지 않아 관직은 비록 현달하지 못하였지만 이름은 매우 현달하였으니 일신은 없어져도 그 없어지지 않는 것이 이 시집에 의지하여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쪽은 영화를 누리지 못한 것이 되고 이쪽은 영화를 누리지 못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지금 저 등롱이나 먼지떨이는 지극히 하찮은 물건인데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때가 아직도 남아 있는 관계로 그 자손들이 오히려 보배로 간직하여 완상하고 있는데 하물며 평소 성정을 드러내고 경물을 그려 내어 책을 엮어 놓은 이것이야말로 청전구물(靑氈舊物)이니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소중할 수 있겠는가. 기쁜 마음으로 선조의 업적을 선양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읊조리고 외워 당시의 기상을 떠올려 보게 한다면 그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나는 이 시집을 보고 선생이 고심하여 마음을 기울인 것과 부지런히 학문에 뜻을 두고 정진한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 윤원 씨가 능히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주-D001] 방촌시집서(厖村詩集序) : 윤자영(尹子濚)의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성현이 어릴 때 윤자영의 문하에서 배운 적이 있는데, 그의 아들 윤원(尹源)이 유고를 수집 편찬하였다. 성현은 저자의 재능에 비해 목사(牧使)에 그친 일생이 안타깝지만 이 책이 남아 후세에 이름을 전하니 오히려 영화롭다고 말하고, 이 책을 보면 윤자영의 고심(苦心)과 근학(勤學)은 물론, 자제들이 선조의 뜻을 계승하려는 마음도 알 수 있다며 상찬하였다.[주-D002] 윤 선생(尹先生) : 윤자영(尹子濚, ?~?)이다.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담수(淡叟), 호는 방헌(厖軒) 또는 방촌(厖村)이다. 사직 윤변(尹汴)의 아들이며, 고려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윤택(尹澤)의 현손이다. 1451년(문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교ㆍ주부ㆍ직강ㆍ장령 등을 거쳤고 1466년(세조12)에 실시한 중시에서 2등으로 뽑혔으며 벼슬은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1455년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편찬 시에는 춘추관 기사관으로 참여하였다. 《허백당집》 문집 권5의 〈평구역기(平丘驛記)〉에도 윤자영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주-D003] 달성군(達城君) …… 강희맹(姜希孟) : 성명 앞에 쓴 것은 모두 공신으로 봉군(封君)된 것으로, 그들의 본관이거나 그 본관의 고호를 딴 것이다. 노사신(盧思愼, 1427~1498)과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1468년(예종 즉위년) 강순(康純)과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적으로 익대 공신(翊戴功臣)이 되었으며,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1471년(성종2) 임금을 잘 보필하고 정사를 잘하였다는 의미에서 좌리 공신(佐理功臣)이 되었다.[주-D004] 우리 백씨와 중씨 : 백씨(伯氏)는 성임(成任, 1421~1484)으로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저서에 《안재집(安齋集)》이 있으며, 중씨(仲氏)는 성간(成侃, 1427~1456)으로 시명(詩名)이 높았으나 요절하였는데, 저서에 《진일유고(眞逸遺稿)》가 있다.[주-D005] 쑥이 …… 것처럼 : 벗과의 교유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바르게 성장하고, 범인이 현자의 도움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이 삼밭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아진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는 말이 있고,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쉬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천 리 길을 치달리는 것처럼〔蒼蠅附驥尾, 而致千里.〕 안연(顔淵)이 배움에 독실하긴 하였지만 공자 때문에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주-D006] 발영과(拔英科) : 발영시(拔英試)와 같다. 세조 12년(1466) 단오에 종친과 문무백관을 모아 술을 내려 주고 친히 시험을 보였는데, 이때 합격한 사람은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김수온(金守溫) 등 모두 40인이었다. 대개 재상이 시험에 나아간 것은 발영시로부터 비롯되었고 종친이 시험에 나아간 것은 등준시(登俊試)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주-D007] 윤원(尹源) : 윤자영의 아들이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연산군 1년(1495) 증광시 병과 1위로 급제한 기록이 있고, 《연산군일기》에 사간원 정언, 예조 좌랑을 역임한 기사가 보인다.[주-D008] 벼슬이 …… 불과하였으니 : 윤자영은 1466년(세조12)에 중시(重試) 2등으로 뽑히고 진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世祖實錄 12年 3月 10日》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1 慶尙道 丹城縣》[주-D009] 청전구물(靑氈舊物) : 집안에 전해 오는 유물을 말한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의 집에 도둑 떼가 들어 몽땅 털어 가려 하자, 왕헌지가 침상에 그대로 누운 채 “푸른 담요는 우리 집안의 옛 물건이니 특별히 남겨 둘 수 있겠는가?〔靑氈, 是我家舊物, 可特置否?〕”라고 하자, 도둑들이 놀라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태 (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