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함성이 멈추다
▲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프로야구는 국민을 우민화하려는 전두환 씨의 3S(Sports, Sex, Screen) 정책 중 하나라며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연이어 프로축구까지 생겨나 우리나라에도 프로 스포츠의 세계가 열렸다. 한때 사직 노래방이라 불릴 만큼 프로야구의 인기는 좋았다. 인기가 높아진 데는 지방색도 한몫 거들었다. 호랑이가 안방에 등장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운동장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부산의 거인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패하면 여간 난리가 아니었다. 휴지와 빈병이 그라운드로 날아드는가 하면 어김없이 반나체의 ‘원더맨’이 등장해 관리원들과 한바탕 백병전을 펼쳤다. 소주를 파는 일명 쥐약장사도 있었고 쥐약을 먹고 난동을 부리는 관중도 있었다. 그러다 차츰 야구장엔 질서가 생겨나고 그에 따라 보다 즐거운 응원문화가 자리 잡았다.
▲ 처음 프로야구가 등장해 우민화 정책과 갈등을 이루던 시기에도 나는 야구를 즐겼다. 가끔 이런 일로 친구들과 막걸리 자리에서 핀잔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날이 갈수록 야구의 세계는 재미있었고 몰입했다. 중요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사직구장으로 향해 말라비틀어진 통닭과 아가씨 가방에 몰래 반입한 소주를 즐겼다. 뜨거운 태양 아래 뜨뜻한 소주 한 잔의 목 넘김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인다.
▲ 야구에 빠진 시절, 결혼기념일은 못 외워도 좋아하는 타자 타율과 팀 승률, 타순까지 줄줄 외우고 다녔다. 한 친구는 어느 팀이든 간에 선수 이름만 대면 출신 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까지 머릿속에 담고 다녀 경기 관람시 필수요건이었다. 운동장에 모인 모두가 야구 감독이었고 해설가였다. 경기가 열린 날에 자신이 응원하던 팀이 지면 온종일 우울했고 짜릿하게 이기면 기분이 좋은 하루가 열렸다. 스토브리그와 동계훈련 기간에는 늘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했고 개막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 그러다 점차 야구에 대한 열정이 시들어 갔다. 아니 야구보다 더 중한 일이 늘어나 야구로 가는 신경이 차단된 이유인 것이다. 그 죽고 못 살던 야구가 연기되어 열리지 못해도 평상심을 유지한 것을 보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세월이 흐른다든지 아님 다른 급한 일이 생기면 삶의 중요 순위가 바뀐다. 야구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못했지만 야구장에 갈 수도 없는 현실이다. 코로나19로 전대미문의 사태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우민화 정책이라 피 터지게 외치던 목소리도 야구에 빠진 나날도 다 한 줌의 포말 같다. 우민화 정책 속에서도 우린 1등 국가로 성장했다. 단지 야구는 야구일 뿐 그것을 다루는 생각이 달랐던 것이 아닐까?
발행인 / 예성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