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텔주교일기에서 군산과 관련된 내용 발취
1896년 11월 27일 가는정이 공소방문 ‘가는정이는 반은옹기꾼이고, 반은 농사꾼들이다. 긴 수염의 김요한 회장은 상당히 부자라고 한다. 저녁때는 성사 집전’이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 - 가는정이 공소는 현 군산시 서수면 관원리 원관원 마을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현 서수면 마룡리 7번지 일대로 이지역의 마을이른이 활운정 가는정이다. 군산지역 주교의 최초 사목방문지다.
1898년 6월 27일 ‘이(내수)아오스팅 신부가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군창으로 가기위해 오늘아침 용산에서 떠났다.’ - 이내수신부는 호남출신 최초사제이다. 2번째는 김양홍 신부, 3번째는 이약슬 신부다. 이내수 신부는 당시 새신부로 목포로 가기위해 길을 떠난것이고, 용산은 약현성당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1899년 5월 25일 ‘조성협(趙性協)의 내방. 외무국장을 지낸 조성협이 옥구군수와 군창의 감리로 임명되었다.’
1899년 11월 26일 ~27일 서천 용화실 교우촌 방문 ‘용화실은 새 항구인 군창으로 통하는 용당 나루터에서 10리도 안 된다. -중략- 첫눈이 내렸다. -’용화실은 이전한 장항역 뒤, 용당 나루는 장항 휴먼시아아파트 부근이다,'
1900년 2월 14일 ‘르 장드르 신부와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가 제물포를 거쳐 군창과 전주로 떠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1866년의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 청취를 위해 모임을 갖게 될 것이다.' - 당시 르 장드르 신부는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해 설치된 교회재판소의 시복 수속 판사로 있었으며 당시의 증언은 시복에 상당한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1900년 9월 29일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가 제물포로 떠났다. 그는 배편으로 군창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전주로 간다. 전주에서 보두네 신부의 관할지 중에서 한 작은 지역을 할당받게 될 것이다.’ - 전라도 출신 2번째 신부인 김양홍 신부는 9월 22일 서품을 받고 초임발령지로 전주로 갔다가 진안 어은본당의 초대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1901년 7월 6일 ‘장교들이 드디어 오늘아침에 떠났다. 프와넬 신부도 1847년에 난파한 글로아르호와 빅토리외즈호의 잔해를 찾아보고자 고군도로 가는 소탐험 여행을 위해 알루에트호와 동행하고자 제물포로 갔다.’ - 1839년의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을 학살한 데 대한 해명을 받을 목적으로 1847년 8월 10일 고군산군도 신시도에 이르렀다가 좌초한 프랑스 군함에 대한 조사를 하였다. 당시 이들 함대를 이끌던 사람은 라피에르 함장이었으며 그 함대에는 조선에 들러오고자 통역관 신분으로 탑승한 최양업부제와 매스트르 신부가 승선해 있었다. 신시도에 표착해 약 한달여간 생활하다가 9월 12일 신시도를 출발해서 중국으로 돌아갔다.
1901년 7월 11일 ‘벨로이 함장이 기쉐 호의 케리넬씨와 함께 왔다. 이 두 배는 어제저녁 제물포에 도착했다. 알루에트호는 프랑스선박들의 흔적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야영을 했던 섬의 산허리에서 난파당한 사람들이 지나간 오솔길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배는 오늘저녁 체푸로 다시 떠났다.‘ - 기세 호의 함장은 드 쉬르지 로 제물포항에 정박하여 프랑스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7월 19일 뮈텔주교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수속을 위한 서류들을 프랑스에 전해주도록 기쉐 호로 가져다주기도 했다.
1902년 8월 21일 ‘맬리장 신부는 군창을 거쳐 충청도 지방을 일주하기위해 기낭신부와 함께 떠났다. - 서울에서 충청도 지방을 갈 때 경기도를 거쳐가는 육로가 있었으나,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해로로 군창 지금의 군산에 도착해 거기서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였다.
1902년 8월 27일 ‘오늘 군창으로 배가 있는 것 같아, 페네신부는 그것을 이용해 바로 그의 본당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환전문제로 제물포로 가는 비에모 신부와 함께 오늘 7시 기차로 떠났다. 어제저녁부터 가끔 비가 내리고 있다.’ - 페네 신부는 1899년 제주읍에 제주본당을 창설한 이래 1909년까지 그곳의 본당신부로 있었다. 제주도를 가기위하여도 군산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1902년 9월 27일 ‘미알롱 신부가 강경, 군산, 제물포를 거쳐 도착했다. 그는 홍콩의 요양소에서 금년겨울을 보낼 예정이다.’ - 당시 미알롱 신부는 제2대 되재 본당 주임신부로 요양을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면서 군산을 거쳤다.
1902년 10월 10일 ‘미알롱 신부가 군창과 되재로 돌아가기 위해 아침에 제물포로 떠났다.
1903년 5월 26일 ‘오늘 비에모 신부가 군창으로 가는 배를 타고 전라도에 갈 목적으로 제물포로 출발했다.’ - 비에모신부는 초대 되재성당 주임신부였다.
1903년 6월 10일 ‘ 그리자르 신부와 포리신부가 6월 5일 분쉬 박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었고, 분쉬 박사는 그리자르신부에게 홍콩요양을 권유했다. 그래서 오늘 4시경에 배에 승선했고, 배는 잠시후에 출항했을 것이다. 뱃삯은 30원 90전’
1903년 6월 26일 ‘비에모 신부가 군산에서 오늘아침 첫 열차로 도착했다. - 해석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경부선철도가 1905년 1월 1일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개통되었고, 호남선철도는 그보다 늦은
1914년 1월 11일 대전에서 목포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렇다면 군산에서 첫열차로 도착하였다는 부분은 이상하다. 아니면 원본과 달리 필자가 잘못이기했는지 모르겠다. 또는 되재에서 대전역까지 육로로가서 대전까지 연결되있던 기차를 이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 군산에서 출발했다고 나와있어 이마저도 혼돈스럽다.
1907년 8월 31일 ‘오늘에서야 제물포로 가는 배편이 셋이 있다. 2시경 항구로 내려가 제일먼저 도착한 배를 탔다. 그것은 오하이오 호였다. 다른 배들은 뱃삯으로 7원50전인데 12원을 요구했던 이배는 군산을 들른다. 5시 경에야 출발했다.’ ‘다음날 새벽 6시경에 군산에 도착하여 저녁5시에야 군산을 떠났다.’ - 뮈텔주교는 8월 8일 화물선인 신다이 호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해 다음날 목포에 1시 반에 도착하고 바로 제주로 떠나는 길양환을 타고 2시반에 출발하여 진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출발하여 1시반경 추자도에 닿았다. 8월 11일 추자도 출발 6시간 만에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를 사목방문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군산을 들렸던 것이다.
1907년 9월 24일 ‘프와넬 신부가 오늘아침 제물포, 군산, 나바위에 가기위해 떠났다. 그는 베르모렐 신부의 중국인들의 공사를 검토하러 간다.’
1907년 9월 30일 ‘프와넬 신부는 아주 즐거운 여행을하고 군산과 제물포를 거쳐 오후에 돌아왔다.’
- 나바위 성당의 공사 진행 상황 확인을 위한 프와넬 신부의 여행으로 프와넬신부는 명동성당을 건축하고 전동성당, 계산성당, 나바위성당등을 설계하기도 하였으며 초기 유럽풍의 성당건축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09년 6월 23일 ‘오후에 데예 신부로부터 오늘 군산을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보가 왔다.’
1909년 6월 25일 ‘오늘 저녁 8시 반에야 데예 신부가 도착했다. 안개 때문에 그가 탄 배가 많이 연착했고, 설상가상으로 오후에는 제물포에서 4시 가차 끼지 놓쳤다.’
- 데예 신부는 목포본당 초대신부로 5월 1일 인사발령에 의하여 후임인 투르뇌 신부에게 인계인수를 하고 주교관으로 뮈텔주교의 문서와 업무보조 소임을 위해 주교관으로 부임 중이었다. 목포에서 서울을 갈 때에도 군산을 거쳐 갔다.
1909년 10월 4일 ‘비에모 신부는 군창으로 가는 배가 오늘 오후 3시에 떠나기 때문에 12시 20분 기차로 떠났다.
1909년 10월 13일 ‘프와넬 신부가 10시 기차로 제물포로 떠났다. 군창을 거쳐 전주까지 갈것인데 전주에서 성당을 짓고 있는 보두네 신부가 오라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기 때문이다. 프와넬 신부는 다음주중 돌아올 예정이다.’
1909년 10월 25일 페네 신부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마침 군창으로가는 배편이 있다고 해서 아침에 제물포로 떠났다. - 당시 페네 신부는 수류성당 2대 주임신부로 소임 중이었다.
1910년 10월 18일 ‘프와넬 신부가 전주에서 군창과 제물포를 거쳐 저녁에 돌아왔다. 보두네 신부의 성당 건축은 많이 진척되어 현재 지붕 씌우는 일이 끝났다.
1911년 7월 5일 ‘ 경성 이사청의 타카하시씨가 고아원에 관한 정보를 구하러 왔다. 고아수는 209명, 성영회(聖嬰會)에서 보내는 유지비 1만 프랑, 사업비 5~6천 프랑, 샬트르에서 보내는 1,500프랑 상당의 의류 등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 - 이사청은 경성, 인천, 부산, 마산, 군산, 목포, 평양, 원산, 진남포, 성진 등 10개소에 있었다. 당시 군산지역의 공소에서도 그 도움을 받아 고아를 양육하였다.
1911년 9월 1일 ‘클랭페터 신부가 제물포로 갔다. 거기서 그는 공소 순방을 위해 군산 강경이 등지로 가는 배를 탄다.’ - - 클링페터 신부는 1910년 11월 29일 한국에 입국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사목을 전담하였다.
1911년 6월 11일 드망즈 주교의 성성식 이후 군산지역이 대구교구 관할이 되면서 뮈텔주교의 일기에서는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서해안의 조수간만이 심하여 만조 때에 배를 움직일 수 있어 배시간이 들쑥날쑥 하였다.
이런 이유로 중간 기착지인 군산지역에 사제들이 쉬어갈 공간이 필요하였다.
1890년경 산곡리 산골 교우촌에 공소를 구입해 사제들이 쉬어갈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고 그 거점은 지역공소의 역할을 하였다. 그곳이 산골교우촌이 있던 성산면 산곡리의 산곡리 공소다.
첫댓글 군산을 당시에는 군산에 조창이 있었던 관계로 '군창'이라고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