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시>
미장센 외 2편
윤의섭
꿈속에선
공원 벤치에 앉은 아이의 뒷머리가 있었다
꿈에서 벌어진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였는데
왜 거기 앉아 있었을까
허름한 골목
폐타이어 화분에 핀 채송화를 슬쩍 스쳐가는 바람은
불어야만 했던 것이다 단역배우처럼
서툰 벽화는 꼭 서툴러야 했고
담장 위를 걷던 고양이에겐 기억나지도 않을 오후겠지만
그래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잊을 수 있다는 기적으로
밥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토록 사소한 종말들
악몽을 꿨는데 아이의 뒷머리가 또 놓여 있었다
채송화는 시들어 죽었고
그 곁으로 바람은 여전히 불어야만 했다
산 너머에선 천둥 치며 비구름이 몰려오고
나는 얼마나 잠깐 화창했던 생물이었던 걸까
비가 오기까지 나는 벤치에 앉아 있다
미연
눈 내리는 풍경을 담았지만 눈 밖으로 꺼낼 수 없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날 눈의 점자를 읽었지
차가운데 포근한 적막은 처음부터 늙었고
눈 사이로 서성이는 겨울나무 마녀 따위는 동화일 뿐이듯
너는 없었지 오래된 일이지
벤치는 그대로였고 나는 유일한 등장인물이었고
대사는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쓰인 침묵
이야기 끝까지 들어봐
어떤 특이점은 바이올린 현이 튕길 때처럼 폭발한다는데
그렇게 갑자기 눈이 그쳤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무너지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엔딩
눈을 바라보지만 너는 읽지 못해서
이야기는 지어지고
이야기는 미리 살아본 예언쯤이고
부록을 사는 중이다
작가의 생애까지 가봐야 하지만
어느 날엔가 누군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연혁이란 무서운 것이다
사슴 죽이기
잠은
아기 울음 같은 신음으로 깨곤 했다
신음의 끝자락이 들렸고 방금까지 누군가 지켜보고 있던 흔적 옆자리의 온도
그러나 지상의 모든 아침에 나 혼자 깨어난 듯하여
아픈 일이 쌓이면 이야기가 된다
왜와 그래서 사이의 전말은 잊히고
고사목에 핀 불가역적 꽃은 잔인하다고 전해진다
신음은 간신히 새어나오기 위해 고통의 뿌리를 살려둔 것이다
울타리 너머에서 간간이 들리는 사슴 울음을 아기가 우는 소리로 알고는
사슴 농장에 주말마다 사람들이 찾아드는 이유와 아기 울음과의 상관성은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밤마다 들리던 울음이 끊긴 뒤에도 귓가에 혹은 몸 안에서부터 들리는 울음
공포란
지워지지 않은 기억과 예감 아직도 잠이 들면 잠 밖으로 나와 살을 떨며 살려달라고 우는
사슴 울음의 가느다란 신음으로 끝나는 선혈 같은 아침
이를테면 가장 선한 죄의식
받아들이기 싫은 운명을 같이 알고 있는 죄
도망치듯 잊어버리려고 한 죄
신음이 멈추지 않아
불가역적 뿔이 계속 돋아나고
<신작시>
신전 외 2편
윤의섭
이제 가을이어서 책을 덮고
나는 눈을 감는다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과
아직 공활하지 않은 하늘을 그려보다
다 읽지 않은 결말을 원하는 대로 지어내다
나는 눈을 뜬다 다시 가을이어서
새벽부터 울던 매미소리가 그치고
나무들은 묵묵히 단풍 들기 시작한다
늦은 여름의 장례였다
이 결말은 순리지만 평범해서
아무도 경배하러 오지 않는 한 페이지일 뿐이어서
왜 이토록 쓸쓸한 서사일까
책속에 모두 덮이고
왜 간신히 생존한 것일까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비의 기둥이 세워지고
바람의 제단이 놓이고
여기 나는 끝없이 지워지고 다시 쓰이는 문장처럼 기거한다
무(巫)
휩싸인 게 아니라 나를 연 것이었다
들어와서는 그러나 갇혔으므로 지병이다
소원은 무수히 빌었다
생일 촛불을 불면서 일출이나 별똥별을 보면서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주문인 듯 중얼거리며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 써봤고
금줄을 훨씬 넘어 차를 몰아 보았고
작두나 항아리 대신 절벽 끝의 바위를 타보기도 했다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인간은 인간이 된다
내 안에 집이 지어지고 마당이 놓이고 담장이 쌓인다
꽃이 시들고 피어나길 반복하는 날들이
웃다 새침하다 수다를 떨다 잠드는 날들이
모두 영원 사이에 지나간다
무엇이 들어와 갇혔는지도 잊히고
지나갈 액운이었다고 믿어버리고 싶을 때
나는 어느 고대 지층에 남아있을 문명의 잔해보다 고스란히
갇힌다
담장에 돌을 괴고 꽃 뿌리를 북돋아주다 잠이 들면
영원의 하루가 흘렀다
유령은하
길 끝에는 길이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속도로 가을은 늙어갔고
야간등산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지나 몇몇은 다음 계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기까지 와보지 않았다
언제부터 파국 너머로 내딛기를 멈춰왔던 것일까
말라붙은 저녁의 태양처럼 나는 건조한데
방금 스쳐간 누군가에게선 베이비 로션 냄새가 났고
내게선 수십 년이 거슬러 흐른다 너는 다른 로션을 바른 적 없었다
그러므로 감각이 고통스러우면 기억이 아픈 것이다
내가 덜 미치고 내가 덜 다가섰을 때
숨은 거라고 믿었다면 들키지 않았을 뿐이며
내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길의 관성을 어긴 채 늘 길의 궤도 안으로 되돌아간 것이라면
원일점에 다다랐어도 견뎌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감옥이니
한 뼘 창문으로는 곧 눈의 은하가 흩뿌릴 것이다
가로등이 켜지고 기억이 소등된 자리에
<시인의 에스프리>
신전에 기거하는 무신론자
종교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미욱한 존재로서의 한 인간인 ‘나’는 모르는 게 한 없이 많고 가끔은 답답하여 어느 좌표에 서 있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와 같은 고민에 빠져들 때가 있는데 아무래도 신을 끌어들여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신전’으로 여겨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신전’이란 지금 신이 있지 않은 곳이다. 어딘가 깨진 틈으로 희미한 빛줄기가 들어오고 대리석에는 먼지가 쌓였고 넝쿨 줄기가 뒤덮인 폐가다. 언제부터 여기 살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내용이다.
나는 신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는다. 다만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선택지에서 한 쪽을 택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을 믿는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무신론자의 세계 건너 쪽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경우에는 무신론자(無神論者)가 아니라 무신론자(無信論者)라고 적어야할 듯하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해보고 파헤쳐보고 꿰뚫어보려는 나의 시도는 한계에 부딪친다. 그렇다고 무신론자임을 바꿀 생각은 없다. ‘시’가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내가 파악하고자 하는 세계에 접근하게 해 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통해서라면 내가 사는 세계의 온갖 신비로움, 온갖 불가사의, 온갖 아름다움, 온갖 비의(秘意) 근처까지 가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온전히 알 수 없는 세계여서 여전히 드는 의문, 복잡한 생각, 명쾌하지 않는 진리 등등이 나의 좌표와 방향을 혼란스럽게 한다.
예를 들면 꿈, 죽음 같은 것은 현실과 공존하는 것인가, 현실 바깥에 존재하는 것인가, 현실은 꿈, 죽음 등이 이루어 놓은 형태는 아닐까, 그러니까 꿈, 죽음 등이 곧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닐까, 핀천의 한 소설(제49호 품목의 경매)에 써 있듯 “명백한 것들 뒤에는 또 다른 형태의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현실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닐까, 우주는 너무나 넓어서 우리 존재는 미미한데 결국 이 우주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이지 않은가, 있지만 있지 않은 존재인가, 질문은 하면 할수록 그 끝은 어떤 근원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근원의 근원까지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가 믿는 신이 있으므로 신전은 있지만, 그래서 우린 모두 신전에 둘러싸여 있고 어쩌다 신전 안에 살고 있기도 하지만 무신론자로서의 내가 사는 신전에는 신이 거주하지 않는다. 신 없는 신전에서 나는 위의 의문에 휩싸여 시를 쓴다. 그래서 적어도 내게 시는 경외롭다.
‘꿈’이라는 화두를 잡고 집중적으로 시를 쓰는 중이다. 꿈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아직 많다. 꿈은 어쩌면 죽음과 닿아 있고, 현재 현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며 우주를 담고 있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 우주가 담긴 것일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세계이다. 우리가 아는 꿈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한다. 꿈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신 없는 신전의 정체성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시에서 그 최종적 실체가 어떻게 드러날지는 아직 모른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이 작업이 끝날 때쯤엔 이 세계의 대략적인 면모가 새롭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무신론자에게는 가장 높은 단계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것이 될 터이고, 신의 입장에서는 가장 아랫단계의 경지에 뭣도 모르는 무신론자가 도달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신이 없는 신전은 그렇게 단순한 인간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간적인 시성(詩性)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윤의섭
1968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1994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문학과지성사, 1996), 천국의 난민(문학동네, 2000),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문학과지성사, 2005), 마계(민음사, 2010), 묵시록(민음사, 2015)이 있고, 2009년 제7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