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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마음으로 떠나는 변산여행
8월 9일[금]~10일[토]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2019년
마음으로 떠나는 변산여행
8월 9일[금]~10일[토]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2019년
마음으로 떠나는 변산여행
8월 9일[금]~10일[토]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2019년
마음으로 떠나는 변산여행
8월 9일[금]~10일[토]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마음으로 떠나는 변산여행
8월 9일[금]~10일[토]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8월 9일[금]~10일[토]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8월 9일[금]~10일[토]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8월 9일[금]~10일[토]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좋은사람들
∞ 일 정 ∞
◆ 8월 9일 : 대전출발(4시) → 함라도착(5시) → 격포(6시)
식사(1시간) → 원광선원(8시 30분)
→ 잠자리 * 석양에 해 떨어지는 모습 관람
◆ 8월 10일 : 산책 → 아침(7시) → 청학동(8시 30분)
→ 하섬(9시 30분) → 하섬출발(11시 30분)
→ 점심(12시) * 섬 체험
→ 대전도착 (3시)
◆ 참석자
성 명 | 연락처 | 직 장 | 비 고 | |
1 | 김관철 | 010-8613-5861 | ||
2 | 김영수 | 010-5456-1286 | ||
3 | 변창전 | 010-6401-7693 | ||
4 | 이재헌 | 010-2121-8456 | ||
5 | 장광천 | 010-5408-7036 | ||
6 | 장석근 | 010-2233-1500 | 음악 감독 | |
7 | 한송희 | 010-5438-8201 | ||
8 | 서광덕 | 010-3410-1063 |
1. 변산반도
변산반도의 면적은 부안군 5개면에 걸쳐 총 1백 57㎢ 이고, 해안선도 35㎞나 된다.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로 변산반도는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품은 해륙국립공원으로 지정(88년)됐다. 이곳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지 및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관광지의 요건과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해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변산반도는 어느 한 곳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느끼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경관도 변화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는 외변산도 절경이지만 내륙의 내변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부안의 인물
매창(梅窓) :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량(桂娘)
1573년 ~ 1610 / 37세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어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매창>
3. 변산 8경
4. 원광선원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5. 봉래정사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봉래산 실상사지 옆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1) 실상초당터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봉래정사에서 바라본 인장바위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삭두암을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석두암터
석두암은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6. 하 섬
하섬은 변산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약 2㎞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하여 연꽃 하(遐)자 하섬이라고도 하고,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변산반도에 위치한 서해 최고의경관을 자랑하는 하섬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져 있고, 기암괴석의 만물상으로 해금강의 절경을방불케 한다. 고독한 신비의 섬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경 4~5일 동안 길이 1km와 폭 10m 의 바닷길이 열리면서 걸어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전북 부안군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속하며 변산면의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약 2km, 성천포구에서 약 1km 떨어진지점에 있다.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연꽃같다 하여 연꽃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1950년대에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쓰고 있어 수양을 위해 예약한 원불교 신도나 신도와 동행한 일반인만 출입할 수 있다.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200여 종의 식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섬으로, 중앙에 지하 60m에서 솟는 석간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음력 1일과 15일을전후하여 간조 때가 되면 2~3일 동안 너비 약 20m, 길이 2k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모래와 개펄이 적당히 섞인 바닷길을 걸으며 굴·해삼·조개 등을 딸 수 있다.
또한 변산반도의 하섬은 1년에 몇 번씩 바다가 갈라지며섬까지 길이 열린다. 섬으로 가는 바닷길엔 게, 조개, 굴 등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모세의기적'이 일어난다. 하섬은 새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새우 하(鰕) 자를써서 '하섬'이라고도한다. 섬 한가운데에는 원불료 대종사가 왔다가 지팡이를 꽂아 물이 솟게했다는 샘이 있다.물맛이맑고 개운하며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솔바람 소리와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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