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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3183책 (탈초본 141책) 고종 42년 5월 6일 무인 8/9 기사 1905년 光緖(淸/德宗) 31년
○ 從二品李冕宙等疏〈曰〉, 伏以臣等, 以忠烈公臣河緯地貫號之被誣於河相驥事, 前月十八日, 有所陳疏, 而特〈禮式〉(蒙禮)院稟處之批, 伏俟歸正之期矣。 構誣之相驥, 尙稽伏辜, 指證之魯學, 又有接踵, 近日所謂朴海哲等聯疏者出, 而反歸臣等於構誣, 臣等, 不敢不冒悚荐籲, 條陳辨明, 伏願聖明, 留神澄省焉。 臣等前疏所陳, 乃據太宗·世宗兩朝榜目中河忠烈四父子文科之榜也。 正廟御定莊陵志及洪齋全書[弘齋全書]中河忠烈事實昭載之案也。 邑誌者, 忠烈本鄕之誌也, 當評鄕人之貫, 帳籍者, 忠烈所修之籍也, 當知己姓之貫。 文忠公臣金宗直, 同里見聞之地, 而有彝尊錄, 文貞公臣南孝溫, 同時秉義之賢, 而有朝野輯錄, 文康公臣張顯光, 撰墓碣銘, 文正公臣宋時烈, 撰三仁錄序, 皆當世信筆之大賢也。 歷歷正案, 上自內閣, 外及史庫, 下至邑誌帳籍, 諸賢輩信筆, 皆以貫晉州號丹溪爲載, 臣等所以直據而仰陳者也。 海哲所陳, 乃忠正公臣朴彭年玄孫參奉臣繼昌之記夢云者也, 主簿臣宗祐·翊贊臣崇古之小識云者也, 明使錢送詩之載於遼海編·皇華集云者也, 津寬寺讀書時聯句小序云者也, 輿地勝覽及洛濱·愍節兩書院奉安時云者也, 文穆公臣鄭逑遺集云者也。 彼見臣等所陳國朝以來御覽御命御撰御藏之蹟, 則雖非同郡同里同時之可據, 與夫諸大賢信筆, 已可以自反其前日指證之誣, 使魯學, 掩口斂跡, 斯乃臣子道理, 而反又聯綴諸族之名, 粧撰斷爛之蹟, 爲此相驥聲勢之援耶? 噫, 其所謂記夢者, 譫妄之太甚耳, 夢中, 又何辨貫號也? 其所謂小識者, 因夢而杜撰耳, 安敢以仰陳於君父也? 其所謂皇華集, 朴忠正之詩註也, 而註出於後人, 其所謂聯句詩, 忠文公臣成三問之小序也, 而序出於拾遺, 成·朴兩賢, 俱是六臣中人, 而終始與共於忠烈當時, 寧不知忠烈榜目之貫耶? 藏於內閣者, 孰敢曰贗傳, 而集於劫灰之後者, 容或有爽實矣。 鄭文穆遺集, 初不言忠烈之貫號, 又何以臆說也? 輿覽姓氏條丹城縣名, 始於本朝, 而在不屬晉州時, 故河姓下註曰晉州, 以明其來自晉也。 丹溪縣名, 肇於麗初, 而在屬晉州時, 故河姓下無註, 以明其屬于晉也。 洛濱, 大邱所建之院, 而渠家之所主也。 構誣之說, 自多無據, 愍節, 畿內所建之院也。 都下名鄕, 共爲尊奉, 而其祭忠烈文, 有曰嵩善宅里, 晉陽家世, 此等援據, 不待臣等而自辨矣。 大抵蹟出於全書之前者, 皆入於正廟朝鑑裁, 言出於始澈之時者, 皆由於魯學家指證, 魯學所證, 只是掇拾斷爛之蹟, 而已多粧撰之顯露, 臣等所陳, 俱是重大明正之蹟, 而更有餘外之許多, 此臣等所謂通國所誦之號, 換作通國所無之貫者也。 河源系后, 乃肅廟朝御定也, 龍翼錄用, 乃英廟朝御命也。 今曰龍翼系后者, 顯斥聖朝之成命, 互換人家之祖孫, 蓋因深憎河源之立后, 力換九鎔之新系故也。 河始澈構誣, 乃純廟朝懲勵者也。 今日臣等擧族, 含菀不已, 始澈之刊辨誣錄時, 參判臣光錫, 吏議臣文鉉, 同敦寧臣海朝, 校理臣海淳, 作其序跋, 以爲徵後之蹟。 夫自朝家, 刑配而懲勵者, 將徵於後之何日。 今此相冀之出, 豈非渠輩作俑者乎? 弘齋全書, 乃我東典謨也。 謹按全書載忠烈事條, 貫晉州號丹溪, 蓋自聖裁特書, 而其下若曰, 李墍雜記, 緯地只有二子, 長曰琥, 次曰珀, 其下又曰, 河氏家乘璉·班, 疑爲琥·珀之一名, 其說, 近之, 其下又曰, 此蓋徵信於李墍所錄, 以我正廟神聖之鑑, 於河乘而曰近之, 於李錄而曰徵信。 近之者, 疑似之辭也, 徵信者, 裁定之辭也。 然則全書之去璉存琥, 不可謂河乘誣納之故, 而河錫中之璉·班減享之請, 又何從而出也? 且又指斥臣等曰, 渠雖藉重於全書。 噫, 我東之君臣上下, 莫不尊重此書, 而海哲輩, 獨不謂重耶? 又曰全書懸註, 云見河氏家乘, 謹按全書載忠烈事條, 原無懸註, 而曰懸註, 大聖人御撰之書, 何等謹嚴, 而乃敢以原書所無, 任意添補, 變幻句語, 遂爲告君之辭, 是大不敬也。 陛下覽臣等之疏, 而令禮院稟處, 蓋將監于成憲, 翻誤歸正, 而海哲, 特憂魯學之孑立, 陳此聯疏, 更誣陛下, 此政孟子所謂又從而爲之辭也, 朱子所謂歐公之不忍也。 原其設辭, 皇華集之詩註, 是也, 則兩朝御擢之榜, 歸於何地? 繼昌之記夢, 是也, 則陵誌御定之蹟, 歸於何地? 崇古之小識, 是也, 則全書御撰之語, 歸於何地? 始澈構誣之譜, 是也, 則肅廟系后之命, 歸於何地? 光錫徵後之序, 是也, 則純廟刑配之典, 歸於何地? 夫以一相驥顧念之故, 而語逼列聖, 侵侮列聖, 肆然陳請, 自以謂其說獨爲明正, 世變, 一至此哉? 在昔魯學曾高之世, 講誼篤厚於河忠烈後孫者, 有朴基正·基宏·聖游等, 而或獨札於莊陵志撰次之日, 或聯札於忠烈廟宣諡之日, 又或叔侄異論於松河請援之日, 此等許多書札, 臣等衆目, 已習見於鄕, 忠烈本孫, 又齎來於京, 在朝卿宰, 亦多輪見, 而天門邃遠, 無以仰達耳。 今彼所引諸朴, 槪多前後相左, 竊恐彼疏辭意, 皆魯學之誣, 而非海哲輩所知矣。 若其所謂臣等妄言之罪, 恭俟處分, 而列聖典章之又此誣毁, 忠烈貫號之漸至眩幻, 皆由於稟處之稽緩。 伏乞陛下, 廓揮乾斷, 亟命歸正, 亟施懲勵, 始澈以來誣錄誣譜誣徵諸蹟, 竝卽一一投火, 永杜無窮之患焉云云。 批旨, 省疏具悉。 令禮院, 卽爲覈實歸正。
고종 42년 을사(1905) 5월 6일(무인, 양력 6월 8일) 흐림
42-05-06[09] 충렬공 하위지의 관향과 사손을 바로잡을 것 등을 청하는 종2품 이면주 등의 상소
○ 종2품 이면주(李冕宙)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의 관호(貫號)가 하상기(河相驥)에게 무고(誣告)를 당한 일 때문에 지난 3월 18일에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예식원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는 비지를 특별히 받았습니다. 이에 삼가 바로잡게 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일을 꾸미어 무고한 하상기가 아직 벌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박노학(朴魯學)이 또 잇따라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요즘에는 이른바 박해철(朴海哲) 등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가 나와서 도리어 신들이 터무니없는 일을 꾸민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송구함을 무릅쓰고 거듭 호소하면서 조목별로 변론하여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留念)하시어 살펴 주소서.
신들이 이전의 상소에서 진술한 것들은 태종조(太宗朝)와 세종조(世宗朝)의 충렬공 하위지 사부자(四父子)에 관한 《문과방목(文科榜目)》과 정묘(正廟)께서 어정(御定)한 《장릉지(莊陵誌)》와 《홍재전서(弘齋全書)》 가운데 충렬공 하위지의 일과 관련하여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는 사항에 근거하였습니다. 《선산읍지(善山邑誌)》는 충렬공 본향(本鄕)의 읍지이니 당연히 고을 사람의 관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장적(帳籍)은 충렬공이 직접 기록한 것이니 당연히 자기 성의 관향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마을에서 보고 듣던 처지이던 문충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은 《이준록(彝尊錄)》을 남겼고,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같은 시기에 의리를 지킨 현인(賢人)인데 조야집록(朝野輯錄)을 남겼고,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삼인록서(三仁錄序)를 지었는데 모두 당세(當世) 신필(信筆)의 대현(大賢)들이니, 역력한 정안(正案)입니다. 위로는 내각(內閣)과 지방 사고(史庫)의 문서부터 아래로는 읍지와 장적, 여러 현인들의 믿을 만한 기록까지 모두 진주(晉州)를 관향으로, 단계(丹溪)를 호(號)로 기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은 다만 그것들을 근거로 우러러 진달하였을 뿐입니다.
박해철이 진달한 것은 바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현손(玄孫)인 참봉 박계창(朴繼昌)이 꿈을 기록한 내용과 주부(主簿) 박종우(朴宗祐)와 익찬(翊贊) 박숭고(朴崇古)가 지은 소지(小識)에서 운운한 내용, 《요해편(遼海編)》과 《황화집(皇華集)》에 기재되어 있는 명(明) 나라 사신(使臣)을 전송하는 시(詩)의 내용,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을 때 지은 연구(聯句)의 소서(小序)의 내용,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낙빈서원(洛濱書院)과 민절서원(愍節書院)에 봉안(奉安)할 때 운운한 내용과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유집(遺集)의 내용입니다.
신들이 진달한 바의 국조(國朝) 이래로 열성들께서 친히 보고 정(定)하고 편찬하고 대궐에 보관해 둔 문적(文蹟)들은 비록 같은 고을 한마을에서 동시에 근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대현의 믿을 만한 글과 더불어 저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들이 이전에 증거 댄 것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반성할 수 있었을 것이니 박노학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고 나서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신하 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또 여러 일족의 이름을 연명으로 써서 단편적이고 분명하지 않은 문적을 꾸며 하상기의 허세를 돕는단 말입니까.
아, 그 이른바 꿈을 기록한 것이야말로 매우 심하게 망녕된 것입니다. 꿈속에서 또 어찌 관향과 호를 변별한단 말입니까. 그 이른바 소지(小識)라는 것은 꿈을 근거로 꾸며 낸 글일 뿐이거늘 어찌 감히 군부(君父)께 우러러 진달한단 말입니까. 그들이 《황화집》에 있는 충정공 박팽년의 시에 대한 주석을 가지고 말했는데, 그 주(註)는 뒷사람이 지어낸 것입니다. 그 이른바 연구시(聯句詩)에 대해 충문공 성삼문이 지은 소서(小序)를 가지고 말했지만 서(序)는 빠진 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삼문과 박팽년 두 현인은 모두 육신(六臣) 중의 한 분으로 종시토록 충렬공과 함께하였으니, 당시에 어찌 방목에 기재된 충렬공의 관향을 몰랐겠습니까.
내각에 보관되어 있는 것에 대해 누가 감히 조작된 것이며 전란 뒤에 수집된 것은 혹 사실과 어긋나는 것도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문목공 정구의 유집에서는 애당초 충렬공의 관향과 호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는데 또 어찌하여 억설을 주장합니까. 《동국여지승람》 성씨조(姓氏條)에는, 단성현(丹城縣)의 명칭은 본조(本朝)에서 시작되었는데 진주(晉州)에 속해 있지 않을 때이므로 하성(河姓)의 아래에 진주라고 주를 달아서 진주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단계현(丹溪縣)이란 명칭은 고려 초기에 비롯되었는데, 당시는 진주에 속해 있을 때이므로 하성의 아래에 주를 달지 않아 진주에 속한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낙빈서원은 대구(大邱)에 건립된 서원인데 그들 박씨 집안에서 건립을 주관하였습니다. 이에 관한 그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대부분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민절서원은 기내(畿內)에 건립된 서원으로 서울의 명경(名卿)들이 함께 존봉(尊奉)하여 충렬공에 대한 제문(祭文)에는 ‘숭선(嵩善 선산(善山)의 옛 이름)의 향리(鄕里)에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옛 이름) 하씨가 대대로 살고 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런 증거들은 신들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판명이 될 것입니다. 대개 이런 자료들은 《홍재전서》가 지어지기 이전에 나왔는데, 모두 정묘께서 사실을 확인하셨습니다. 하시철(河始澈)이 변론할 때에 나온 말들은 모두 박노학 가문에서 증거를 댄 데서 나온 것인데 박노학이 증거로 댄 것은 단지 단편적이고 분명하지 않은 사적들을 주워다 엮은 것으로 이미 대부분 꾸며 냈음이 드러났습니다.
신들이 진달한 것은 모두 중대하고 매우 분명한 사적이며 그 외에도 허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그들이 온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호를 가지고 온 나라에 없는 관향으로 바꾸었다.’라고 아뢴 것입니다. 하원(河源)을 후사로 삼도록 한 것은 숙묘조(肅廟朝)에 어명으로 결정한 것이고, 하용익(河龍翼)을 녹용(錄用)한 것은 바로 영묘조(英廟朝)에 내린 왕명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용익을 후사로 삼았다.’라고 말한 것은 열성조(列聖朝)께서 내리신 명령을 드러내 놓고 배척한 것이고 남의 가문의 가계(家系)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는 대개 하원을 후사로 세운 것을 깊이 미워하여 하구용(河九鎔)이 새로이 후사가 되도록 힘껏 도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시철의 무고는 바로 순묘조(純廟朝)에서 징계를 받았는데도, 지금 ‘신들의 일족은 여전히 억울한 마음이 한이 없습니다.’ 하고, 하시철이 《변무록(辨誣錄)》을 간행할 때에는 참판 박광석(朴光錫), 이조 참의 박문현(朴文鉉), 동지돈녕부사 박해조(朴海朝), 교리(校理) 박해순(朴海淳)이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지어서 뒷날 증거할 기록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형배(刑配)하여 처벌한 일에 대해 장차 뒤의 어느 날을 대비한단 말입니까. 이번에 하상기가 출현한 것도 어찌 그들이 옳지 못한 전례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홍재전서》는 바로 우리나라의 전범이 되는 전적(典籍)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홍재전서》에서 충렬공에 대해 기재한 조항에서는, ‘관향은 진주이고 호는 단계이다.’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사실을 살피고 헤아려서 특별히 쓴 것입니다. 그 아래에는, ‘이기(李墍)의 《송와잡기(松窩雜記)》에, 하위지는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장자(長子)는 하호(河琥)이고, 차자(次子)는 하박(河珀)이라고 하였다.’ 하였고, 그 아래에는 또 이르기를, ‘《하씨가승(河氏家乘)》의 연(璉), 반(班)은 아마도 호(琥), 박(珀)의 또 다른 이름인 듯하다고 하였는데 그 설이 그럴듯하다.’ 하였고, 그 아래에는 또 이르기를, ‘이는 이기가 기록한 것에서 증험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우리 정묘(正廟)께서 신성(神聖)한 통찰로 《하씨가승》에 대해서는 ‘그럴듯하다.’라고 하고 이기의 기록에 대해서는 ‘믿을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그럴듯하다는 것은 의심스럽다는 말이고 믿을 만하다는 것은 단정 짓고 재가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홍재전서》에서 연(璉)을 제거하고 호(琥)를 남겨 둔 것에 대해 하씨 가문에서 근거 없는 가승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석중(河錫中)이 하련과 하반에게 올리는 제향을 없애자고 청했다.’는 말은 또 무엇을 근거로 한 것입니까. 게다가 또 신들을 배척하면서, ‘저들이 비록 《홍재전서》에 크게 의지하였지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 우리나라의 군신 상하가 모두 이 《홍재전서》를 존중하거늘 박해철의 무리만 유독 존중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또 말하기를, ‘《홍재전서》에 달려 있는 주(註)에, 《하씨가승》을 보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삼가 살피건대, 《홍재전서》에서 충렬공의 일이 기재된 조항에는 원래 달려 있는 주가 없는데 달려 있는 주라고 말하였습니다. 대성인(大聖人)께서 어명으로 편찬한 책이야말로 얼마나 근엄(謹嚴)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감히 원서(原書)에 없는 것을 제멋대로 보태어 구어(句語)를 변환(變幻)시켜서 마침내 임금에게 아뢰는 말로 삼았으니, 이는 크나큰 불경(不敬)입니다.
폐하께서 신들의 상소를 보시고 예식원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셨으니, 장차 성헌(成憲)을 살펴 그릇된 것을 바로잡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박해철은 박노학이 고립되는 것을 특별히 우려하여 이런 연명 상소를 아뢰어 다시 폐하를 속였으니, 이는 바로 맹자(孟子)의 이른바 ‘잘못하고서도 뒤이어 변명까지 한다.’는 것이요, 주자(朱子)의 이른바 ‘구양수(歐陽脩)도 차마 하지 않은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말을 따져 보건대, 《황화집》의 시에 대한 주가 옳다면 양조(兩朝)의 과거 급제자를 기록한 방목의 진위는 어디로 돌아가며, 박계창이 꿈을 기록한 것이 옳다면 《장릉지》의 임금이 친히 확정한 사적의 진위는 어디로 돌아가며, 박숭고의 소지(小識)가 옳다면 《홍재전서》에서 임금이 친히 쓰신 말들은 어디로 돌아가며, 하시철이 거짓으로 꾸민 계보가 옳다면 후사를 잇도록 한 숙묘의 명은 어디로 돌아가며, 박광석이 뒷날을 대비하여 썼다는 서문(序文)이 옳다면 순묘께서 형배시킨 일은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저들이 일개 하상기를 돌보아 주려고 열성조를 핍박하는 말을 하고 열성조를 모욕하면서 방자하게 청을 올려서 스스로 자기네들의 말만이 분명하고 바르다고 여기고 있으니, 세도(世道)의 변화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예전 박노학의 증조와 고조 세대에서는 충렬공 하위지의 후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자로 박기정(朴基正), 박기굉(朴基宏), 박성유(朴聖游)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장릉지》를 편찬할 때에 단독으로 서찰(書札)을 보내기도 하였고, 충렬공의 사당에 시호(諡號)를 내려 주던 시기에 연명으로 서찰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또 송도 하씨가 구원을 청할 때에는 숙질간(叔侄間)에 다른 논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허다한 서찰은 신들의 여러 눈으로 이미 고향에서 익숙하게 보았고 충렬공의 본손(本孫)이 또 서울로 가지고 왔으므로 조정에 있는 경재(卿宰)들도 대부분 돌려가며 보았습니다만, 지엄하신 성상께는 우러러 아뢸 길이 없었을 뿐입니다. 지금 저들이 끌어다 댄 여러 박씨의 자료는 대부분 전후 사실이 서로 어긋납니다. 아마도 저들이 올린 상소의 내용은 모두 박노학이 꾸민 것으로 박해철의 무리도 모르는 내용일 것입니다.
저들이 이른바 신들이 망언(妄言)한 죄에 대해서는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만, 열성조의 제도와 처분이 또 이렇게 기만당하고 훼손되며 충렬공의 관향과 호가 점점 혼란스럽게 된 것은 모두 품처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바로잡도록 명하시고 속히 징계를 시행하시어 하시철 이래의 날조된 기록과 족보, 거짓 증거와 사적은 즉시 일일이 불속에 던져 버림으로써 끝없이 이어질 근심을 영원히 막아 주소서. ……”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예식원으로 하여금 즉시 사실을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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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3200책 (탈초본 141책) 고종 43년 9월 7일 신축 6/9 기사 1906년 光緖(淸/德宗) 32년
○ 掌禮院卿臣李道宰謹奏, 在前從二品臣李冕宙等上疏, 從二品臣朴海哲等上疏, 竝令禮式院稟處事, 批下矣。 取見李冕宙等疏辭, 則以爲, 臣等謹按河忠烈, 卽端廟朝六臣中一也, 當丙子判命之日, 早知二子靡孑, 姪子龜童, 幼或可全, 券記家産, 不使混入於別庫祿俸之藏, 而隱然示傳世之意, 托養其外家, 觀於忠敬公臣鄭澔識文, 蓋得忠烈之心矣。 肅廟乙酉, 有蕩滌立后之命, 而(忠)文〈忠〉公臣閔鎭厚, 啓以河源爲后, 源, 卽龜童之冠名也, 英廟癸亥, 有錄用祀孫之命, 而忠貞公臣金在魯, 奏以龍翼爲寢郞, 龍翼, 卽河源之嫡孫也, 又於庚寅, 因正獻公臣閔百祥奏稟而宣諡焉, 正廟丁酉, 因忠靖公臣金尙喆奏稟而旌閭焉, 純廟甲子, 因忠正公臣李時秀奏稟而不祧焉, 陛下亦於戊子, 錄用祀孫大運爲都事, 忠烈家繼絶闡揚之典, 於斯備矣。 若其貫號之證, 則昔我正祖宣皇帝以天縱之聖, 洞覽今古, 博考典籍, 親載忠烈事始末於莊陵誌及弘齋全書, 俱曰貫晉州號丹溪, 其他布在一國之蹟, 有難枚擧, 而謹撮其著見者言之, 太宗壬午文科榜, 曰河澹, 晉州人, 澹, 卽忠烈之父也, 世宗己酉文科榜, 曰河綱地, 晉州人, 綱地, 卽忠烈之兄也, 又戊午文科榜, 忠烈, 與其弟紀地聯登, 而俱曰晉州人, 今其榜目, 俱在內閣, 可按而知也。 且夫本道帳籍及善山邑誌, 文忠公臣金宗直彝尊錄, 文康公臣張顯光所撰墓碣銘, 皆書貫晉州也, 文貞公臣南孝溫朝野輯錄, 文正公臣宋時烈三仁錄序, 皆書號丹溪也, 又按故臣李墍松窩雜記, 緯地只有二子, 長曰琥, 次曰珀, 東鶴寺引魂記, 書以池璉·池班, 全書, 若曰池與河字似而書訛, 琥·珀與璉·班, 字異而數相符。 又曰, 今存琥·珀而不錄璉·班, 此皆一字斧鉞, 片言金石, 百世以竢而不惑者也, 純廟癸巳, 松人河始徹, 更提全書中, 已去之璉·班, 潛掇全書中, 不載之僞蹟, 變號爲貫, 欺天誣日, 其時禮堂忠敬公臣趙萬永, 據以全書奏處而刑配之, 丹貫之說, 斷不可復出於世矣。 不意今者, 河相驥又襲河始徹未驗之蹟, 指證朴魯學無稽之言, 敢以通國所誦之號, 換作通國所無之貫, 訴于禮院, 上眩天聽, 以其子九鎔, 不揆來歷, 不計世次, 直爲忠烈之祀孫, 以河大運家御定立后, 謂僞系而打破之, 又以其所奉不祧〈之〉祠命旌之閭, 謂僞造而請毁撤之, 又以其所守全書之蹟, 謂贗作而請爻周之。 噫, 相驥一出, 列聖之典謨, 先賢之信筆, 掃地盡歟, 臣等請以魯學之誣辨之, 彼雖晩生無知, 亦忠正公臣朴彭年後孫也, 同時被禍之日, 乳下孤孩, 存保一縷, 有若河龜童之托養外家, 而又被同時籍沒, 朴蹟河蹟, 俱是沒入, 則有何遺漏獨傳於渠家也。 且或有伊後收輯, 魯學高祖參判臣基正, 出入經幄, 參聽於陵誌撰次之日, 必其盡齎家藏, 先自上達, 以體我正廟博採之意也。 今安有四百年始出之蹟, 突爾立證於變貫之彼河, 遂使播傳者, 疑眩於是, 粧撰者, 藉托於是, 然則魯學無稽之言, 反有重於全書中, 聖裁之案乎? 彼一種駔儈, 不識事體, 不顧分義, 自以爲世無難事, 而惟大賢遺裔, 竊欲占取而無跡耳。 所以誣毁列聖朝典章, 而又誣全書, 欺侮列聖朝成命, 而又欺陛下, 司敗按律, 當置何辟, 且夫一國掌禮之臣, 學識宜其明也, 見得宜其精也, 寧不知先朝之有金石典謨, 先賢之有幾家信筆, 而乃反誘奪於一時膚受之訴, 遽爾上奏, 若可以箝制天下萬口之公論, 此臣等之所痛恨也。 臣等草莽之臣耳, 猶且涵濡乎列聖朝生成之化, 所守者列聖之典章也, 所誦者正廟之全書也, 所尙者忠烈之風節也, 忽見此無前之極變, 彝衷自激, 不忍岸視, 已爲聯疏〈於〉政府禮院, 而玆敢齊聲仰籲于黈纊之下。 伏願陛下, 監于成憲, 廓揮乾斷, 將七年十月十九日掌禮院奏本, 亟行繳銷, 以繼弘齋全書不錄璉·班之志, 誣罔先賢之河相驥, 嚴加誅罰, 以述純廟朝刑配始徹之事也。 取見朴海哲等疏辭, 則以爲, 臣等先祖忠正公臣彭年, 與成·李·河·柳·兪五臣, 同被丙子之禍, 臣等之於五臣, 事之如先祖, 苟或有關於五臣之義理, 則必挺身當先, 不避斧鉞之誅, 而明辨乃已者也, 忠正公玄孫參奉臣繼昌, 嘗値忠正忌日, 夢五臣竝臨, 話到絶祀, 色甚悵然, 覺不勝哀感, 遂竝祀五臣, 而其官爵未復之前, 紙榜祝式, 不敢書職銜, 只稱鄕貫姓某先生於忠烈公臣河緯地曰, 丹溪河先生, 伊時據[去]古未遠, 必有明證而然矣。 奉祀至一百五十餘年, 而及其伸雪後, 因各處建院, 以儒論遂廢之, 此乃通國之所共知, 而臣等先祖主簿臣宗佑, 翊贊臣崇古, 嘗著小識, 有曰河先生貫丹溪, 此皆臣家世傳確據也, 且忠烈遺墨, 手書以丹溪, 而或以疑其別號, 則有大不然者, 自可昭著矣。 其送明使倪謙·司馬恂詩, 與忠正公及忠文公臣成三問等二十七人, 各書鄕貫, 而忠正公則曰平陽, 平陽, 卽順天古號, 忠文公則曰昌寧, 故相臣河演則曰晉陽, 忠烈公則曰丹溪, 載在於中國之遼海編, 東方之皇華集也, 且謹按忠文公遺集, 有曰與高靈申叔舟, 赤村河緯地, 讀書於津寬寺, 赤村, 卽丹溪古號也, 其各書貫之時, 忠烈, 何獨書號耶? 輿地勝覽, 有丹溪縣[丹城縣]古號赤村·丹溪, 而丹城各姓記中, 有一河, 河字下, 分註以晉州, 此其本晉州而居丹者也, 其下丹溪各姓記中, 又有一河, 無分註, 此其本丹溪而卽忠烈之河也, 逮肅廟朝, 洛濱·愍節兩書院創建時, 亦書六臣之貫而曰丹溪, 且夫忠烈之無號, 昭在於文穆公臣鄭逑遺集, 則此皆曾往所存之據, 非爲河氏是非而粧撰者矣。 往者河龍翼繼後時, 初無貫鄕之曰丹, 曰晉是非, 則只知以河爲繼後矣。 及其河始澈之辨誣也, 始覺龍翼之爲晉河, 已有所發明, 然而竟未歸正, 事不如誠, 迄今含査, 耿耿不已, 是以始澈, 刋行辨誣錄時, 臣等擧族, 靡不用極, 故參判臣光錫, 吏議臣文鉉, 同敦寧臣海朝, 校理臣海淳, 作其序與跋, 以爲徵後之蹟矣。 臣等於忠烈事實, 雖片言隻辭, 若有臆見誣構, 將以何面目, 立於先祖廟庭乎? 曩在癸卯, 洪惟皇帝陛下, 特施曠恩, 有五臣繼後之命, 而掌禮卿臣李容稙, 以河氏貫鄕事, 質問于臣等之宗孫魯學, 故魯學, 以丹溪爲是對之, 而豈敢有一毫愛憎之言乎? 自禮院, 據實奏稟, 而至於河九鎔繼後一款, 乃朝家處分, 非臣等之所敢言也, 繼後則非但於河氏而已, 其他四家亦然, 而噫, 彼李疏, 曰河相驥詣證魯學無稽之言, 以通國所誦之號, 換作通國所無之貫, 其所構誣, 罔有其極, 渠以蔑學, 只據一邊之說, 有此逕庭之擧耶? 覽之未半, 頭髮橫豎, 旋不勝悚汗, 數百年世傳文蹟, 可謂無稽乎? 以忠烈所無之號, 其可謂通國所誦乎? 以勝覽昭載之貫, 其可謂通國所無歟? 渠雖藉重於弘齋全書, 全書懸註, 云見河氏家乘, 則非特書之意, 而河錫中所以誣納渠家乘者也, 忠烈, 元有四子璉·班·琥·珀, 竝享于鶴寺, 自有光廟處分而錫中, 至有璉·班減享之請,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噫嘻痛矣。 於是晉河之誣案益著, 而今彼冕宙輩, 不克詳審, 以黨私陋習, 陷入於不測, 眩惑天聰, 豈不寒心哉? 河相驥之指證, 自是指證, 慮人之指證, 而不敢辨忠烈之貫號耶? 晉河之尤怨, 自是尤怨, 慮人之尤怨而不敢辨忠烈貫號耶? 臣等之所辨者貫號, 而不敢擅者繼後也。 伏乞陛下, 廓揮乾斷, 亟降處分, 以治冕宙輩妄言之罪, 而快雪忠烈公之變辱事也。 嗣後李冕宙等再疏, 令禮院, 卽爲覈實歸正事, 命下矣。 取見其疏辭, 則以爲, 臣等前疏所陳, 乃據太宗·世宗兩朝榜目中, 河忠烈四父子文科之榜也, (正)正廟御定莊陵誌及弘齋全書中, 河忠烈事實昭載之案也, 邑誌者, 忠烈本鄕之誌也, 當詳鄕人之貫, 帳籍者, 忠烈所修之籍也, 當知己姓之貫, 文忠公臣金宗直, 同里見聞之地, 而有彝尊錄, 文正公臣南孝溫, 同時秉義之賢, 而有朝野輯錄, 文康公臣張顯光, 撰墓碣銘, 文正公臣宋時烈, 撰三仁錄序, 皆當世信筆之大賢也, 歷歷正案, 上自內閣, 外至史庫, 下至邑誌帳籍諸先輩信筆, 皆以貫晉州號丹溪爲載, 臣等所以直據而仰陳者也, 海哲所陳, 乃忠正公臣朴彭年玄孫參奉臣繼昌之記夢云者也, 主簿臣宗佑, 翊贊臣崇古之少識云者也, 明使餞送詩之載於遼海編·皇華集云者也, 津寬寺讀書時聯句小序云者也, 輿地勝覽及洛濱·愍節兩書院奉安時云者也, 文穆公臣鄭逑遺集云者也, 彼見臣等所陳國朝以來御覽御命御撰御藏之蹟, 則雖非同郡同里同時之可據, 與夫諸大賢信筆, 已可以自反其前日指證之誣, 使魯學, 掩口斂跡, 斯乃臣子道理, 而反又聯綴諸族之名, 粧撰斷爛之蹟, 爲此相驥聲勢之援耶? 噫, 其所謂記夢者, 譫妄之太甚耳, 夢中, 又何辨貫號也? 其所謂小識者, 因夢而杜撰耳, 安敢以仰陳於君父也? 其所謂皇華集朴忠正之詩註也, 而註出於後人, 其所謂聯句詩, 忠文公臣成三問之小序也, 而序出於拾遺, 成·朴兩賢, 俱是六臣中人, 而終始與共於忠烈, 當時, 寧不知忠烈榜目之貫耶? 藏於內閣者, 孰敢曰贗傳, 而集於劫灰之後者, 容或有爽實矣。 鄭文穆遺集, 初不言忠烈之貫號, 又何以臆說也? 輿覽姓氏條, 丹城縣名, 始於本朝, 而在不屬晉州時, 故河姓下, 註曰晉州, 以明其來自晉也, 丹溪縣名, 肇於麗初, 而在屬晉州時, 故河姓下無註, 以明其屬于晉也, 洛濱, 大邱所建之院, 而渠家之所主也, 構誣之說, 自多無據, 愍節, 畿內所建之院也, 都下名卿, 共爲尊奉, 而其祭忠烈文, 有曰崇善宅里, 晉陽家世, 此等援據, 不待臣等而自辨矣。 大抵蹟出於全書之前者, 皆入於正廟朝鑑裁, 言出於始澈之時者, 皆由於魯學家指證, 魯學所證, 只是綴拾斷爛之蹟, 而已多粧撰之顯露, 臣等所陳, 俱是重大明正之蹟, 而更有餘外之許多, 此臣等所謂通國所誦之號, 換作通國所無之貫者也, 河源繼後, 乃肅廟朝御定也, 龍翼錄用, 乃英廟朝御命也, 今曰龍翼繼後者, 顯斥聖朝之成命, 互換人家之祖孫, 蓋因深憎河源之立後, 力援九鎔之新系故也, 河始澈構誣, 乃純廟朝懲勵者也, 今曰臣等擧族, 含鬱不已, 始澈之刋辨誣錄時, 參判臣光錫, 吏議臣文鉉, 同敦寧臣海朝, 校理臣海淳, 作其序跋, 以爲徵後之蹟, 夫自朝家刑配而懲勵者, 將徵於後之何日, 今此相驥之出, 豈非渠輩作誦者乎? 弘齋全書, 乃我東典謨也, 謹按全書載忠烈事條, 貫晉州號丹溪, 蓋自聖裁特書, 而其下, 若曰李墍雜誌, 緯地只有二子, 長曰琥, 次曰珀, 其下, 又曰河氏家乘璉·班, 疑爲琥·珀之一名, 其說近之, 其下, 又曰此蓋徵信於李墍所錄, 以我正廟神聖之鑑, 於河乘而曰近之, 於李錄而曰徵信, 近之者, 疑似之辭也, 徵信者, 裁定之辭也。 然則全書之去璉存琥, 不可謂河乘誣納之故, 而河錫中之璉·班減享之請, 又何從而出也? 且又指斥臣等曰渠雖藉重於全書, 噫, 我東之君臣上下, 莫不尊重此書, 而海哲輩, 獨不爲重耶? 又曰全書懸註云見河氏家乘, 謹按全書載忠烈事條, 原無懸註, 而懸註大聖人御撰之書, 何等謹嚴, 而乃敢以原書所無, 任意添補, 變幻句語, 遂爲告君之辭, 是大不敬也, 陛下覽臣等之疏, 而令禮院稟處, 蓋將監于成憲, 翻誤歸正, 而海哲, 特憂魯學之孑立, 陳此聯疏, 更誣陛下, 此蓋孟子所謂, 又從而爲之辭也, 朱子所謂歐公不忍也, 原其設辭, 皇華集之詩註, 是也, 則兩朝御擢之榜, 歸於何地, 繼昌之記夢, 是也, 則陵志御定之蹟, 歸於何地? 崇古之小識, 是也, 則全書御撰之語, 歸於何地, 始澈構誣之譜, 是也, 則肅廟系[繼]後之命, 歸於何地, 光錫徵後之序, 是也, 則純廟刑配之典, 歸於何地, 夫以一相驥顧念之故, 而語逼列聖, 侵侮列聖, 肆然陳請, 自以爲其說, 獨爲明正, 世變, 一至此哉? 在昔魯學曾高之世, 講誼篤厚於河忠烈後孫者, 有朴基正·基宏·聖游等, 而或獨札於莊陵誌撰次之日, 或聯札於忠烈廟宣諡之日, 又或叔姪異論於松河請援之日, 此等許多書札, 臣等衆目, 已習見於鄕, 忠烈本孫, 又齎來於京, 在朝卿宰, 亦多輪見, 而天門邃遠, 無以仰達耳。 今彼所引諸朴, 槪多前後相左, 竊恐彼疏辭意, 背魯學之誣, 而非海哲輩所知矣。 若其所謂臣等妄言之罪, 恭竢處分, 而列聖典章之, 又此誣毁, 忠烈貫號之漸至眩幻, 皆由於稟處之稽緩。 伏乞陛下, 廓揮乾斷, 亟令歸正, 亟施懲勵, 始澈以來誣錄誣譜誣證諸蹟, 竝卽一一投火, 永杜無窮之患云矣。 竊伏査兩河所爭, 卽惟曰繼後與貫鄕耳, 繼後事則臣, 恭閱我正祖宣皇帝御製弘齋全書莊陵配食錄。 若曰肅宗辛未, 復官, 乙酉, 以緯地從子源之孫, 繼緯地後, 英宗戊寅, 贈吏曹判書, 賜諡忠烈, 予丁酉, 旌其閭, 伊後純廟甲子, 命施不祧, 此皆我列聖朝因諸名碩建白, 施之以曠絶之恩典也, 延諡及旌閭不祧, 皆行於河源之家, 倫序已定, 宜乎變動不得, 而年前因河洛瑞構誣呈單, 請以河九鎔繼嗣, 自本院上奏, 雖蒙特允, 今此歸正之命, 寔由我皇上敬重先王朝處分之聖念, 則繼後一事, 仍舊無變, 允合歸正。 至若貫鄕, 一則曰丹溪, 一則曰晉州, 而其曰丹溪云者, 所據者乃朴魯學家記夢及私藏辨誣錄與斷爛諸傳記而已。 其曰晉州云之所據者, 乃國朝榜目·弘齋全書及諸名碩所遺信筆也, 公私輕重之間, 眞贗自判, 臣又按莊陵誌, 昭載河忠烈晉陽貫, 而乃敢潛擦板本, 改刻丹溪, 據此則彼筆之許多誣跡, 蓋可知矣。 粵在純廟癸巳, 河錫中·河始澈兩人, 有此貫號爭辨, 而故豊恩府院君臣趙萬永, 以禮曹判書, 回啓蒙允, 刑配始澈者, 辭嚴義正, 已成斷案, 依此施行, 恐合事宜, 河九鎔家新造祀板與旌閭, 令漢城府, 卽爲埋安, 毁撤, 安東郡所在祠板, 仍舊奉安, 河洛瑞所犯罪狀, 有浮於河始澈, 令法部, 照律懲判, 何如? 謹上奏。 奉旨今此所奏, 正確明晢, 依所奏施行, 永爲不易之典, 曾前判付繳銷。
고종 43년 병오(1906) 9월 7일(신축, 양력 10월 24일) 맑음
43-09-07[14] 충렬공 하위지의 계후를 변경시키지 말 것 등을 청하는 장례원 경 이도재의 계
○ 장례원 경 이도재(李道宰)가 삼가 아뢰기를,
“전에 종2품 이면주(李冕宙) 등의 상소와 종2품 박해철(朴海哲) 등의 상소에 대해 모두 예식원(禮式院)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비지를 내리셨습니다.
이면주 등의 상소를 가져다 보니,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하 충렬공(河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은 단종조(端宗朝)의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죽임을 당하는 시기를 맞이하여, 두 아들은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조카 하귀동(河龜童)은 어리므로 혹 목숨을 보전할 수도 있을 것임을 일찍 알고는, 가산(家産)을 유권(遺券)에 기록할 때에 별고(別庫)에 보관하여 둔 녹봉은 그 유권 안에 섞여 기재되지 않도록 하여, 은연중에 그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려는 뜻을 보이고 자신의 외가에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니, 충경공(忠敬公) 정호(鄭澔)의 글을 보면 충렬공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숙종(肅宗) 을유년(1705, 숙종31)에 사육신의 죄를 탕척(蕩滌)하고서 후사(後嗣)를 세우라는 명이 있자,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가 아뢰어 하원(河源)을 후사로 삼았으니, 하원은 하귀동의 관명(冠名)입니다. 영조(英祖) 계해년(1743, 영조19)에 사손(祀孫)을 녹용(錄用)하라는 명이 있자, 충정공(忠貞公) 김재로(金在魯)가 아뢰어 하용익(河龍翼)을 참봉(參奉)으로 삼았으니, 하용익은 하원의 적손(嫡孫)입니다. 또 경인년(1770, 영조46)에 정헌공(正獻公) 민백상(閔百祥)의 계품으로 인해 공에게 시호(諡號)가 내렸고, 정조(正祖) 정유년(1777, 정조1)에 충정공(忠靖公) 김상철(金尙喆)의 계품으로 인해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으며, 순조(純祖) 갑자년(1804, 순조4)에 충정공(忠正公) 이시수(李時秀)의 계품으로 인해 부조묘(不祧廟)가 허락되었습니다. 폐하께서도 무자년(1888, 고종25)에 사손인 하대운(河大運)을 녹용하여 도사(都事)로 삼으셨으니, 충렬공 가문의 끊어진 대를 잇고 공적을 드러내는 은전(恩典)이 여기에서 갖추어졌다 하겠습니다. 관향(貫鄕)과 호(號)의 증거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께서는 타고나신 성덕(聖德)으로 고금의 역사를 통람(通覽)하고 전적(典籍)을 널리 고찰하여 충렬공 사적(事績)의 시말을 《장릉지(莊陵誌)》와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친히 기재하셨는데, 두 책에 모두 이르기를, 「관향은 진주(晉州)요, 호는 단계(丹溪)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타 온 나라 안에 퍼져 있는 문헌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지만 삼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을 모아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종(太宗) 임오년(1402, 태종2)의 《문과방목(文科榜目)》에 「하담(河澹)은 진주 사람이다.」 하였으니, 하담은 곧 충렬공의 부친입니다. 세종(世宗) 기유년(1429, 세종11)의 《문과방목》에 「하강지(河綱地)는 진주 사람이다.」 하였으니, 하강지는 곧 충렬공의 형입니다. 또 무오년(1438, 세종20)의 《문과방목》에는 충렬공이 동생 하기지(河紀地)와 나란히 과거에 급제했는데, 모두 진주 사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금 그 방목이 모두 규장각에 있으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도(本道 경상도)의 장적(帳籍) 및 《선산읍지(善山邑誌)》, 문충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의 《이준록(彝尊錄)》,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도 모두 관향이 진주라고 쓰여 있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의 조야집록(朝野輯錄),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삼인록서(三仁錄序)에는 모두 호가 단계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한 살펴보니 옛 신하 이기(李墍)의 《송와잡기(松窩雜記)》에 「하위지(河緯地)는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하호(河琥)요 차자는 하박(河珀)이다.」라고 하였고, 동학사(東鶴寺)의 초혼기(招魂記)에는 지련(池璉)과 지반(池班)으로 쓰여 있는데, 《홍재전서》에서 「지(池)는 하(河)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 쓰인 것이고 호(琥)ㆍ박(珀)과 연(璉)ㆍ반(班)은 글자는 달라도 사람 수는 일치한다.」고 하였고, 또 「지금 호와 박만 남겨 두고 연과 반은 수록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매우 엄정한 판단이요 금석(金石) 같은 판결로서 먼 후세에도 의심하지 않을 바입니다.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에 송도(松都) 사람 하시철(河始徹)이 《홍재전서》에서 채택하지 않은 연과 반에 대한 설을 다시 제기하며 《홍재전서》에 실리지도 않은 거짓 사적을 슬그머니 끌어 와 호를 관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임금을 기만하였습니다. 당시 예조 당상이었던 충경공(忠敬公) 조만영(趙萬永)이 《홍재전서》의 내용을 근거로 처분하기를 아뢰어 그를 형배(刑配)시키니 단계가 관향이라는 설은 끊어져서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 하상기(河相驥)가 또다시 하시철이 들었던, 사실 확인이 안 된 사적을 그대로 인용하고 박노학(朴魯學)의 황당무계한 말을 증거로 대며 감히 온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호를 나라를 통틀어도 없는 관향으로 주장하는 소장(訴狀)을 장례원에 올려 위로 성상을 현혹하고는 그의 아들 하구용(河九鎔)을 그 내력(來歷)을 살피지도 않고 충렬공과의 세차(世次)를 따지지도 않은 채 곧바로 충렬공의 사손으로 삼았으며, 왕명으로 정했던 하대운 집안의 입후(立后)는 위계(僞系)라고 하여 타파하였고, 또 그들이 제사를 받들었던 부조묘와 어명으로 내린 정려문은 위조(僞造)라고 하여 철거할 것을 청하고, 또 근거해 온 《홍재전서》 속의 사적이 조작된 것이라고 하여 삭제를 청하였습니다. 아, 하상기가 한번 출현하자 열성조께서 마련한 규례와 선현(先賢)의 글이 완전히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신들은 박노학의 무고(誣告)에 대해서 변정(卞正)하겠습니다. 그는 나이 적고 지각 없는 사람이지만 또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입니다. 충정공과 충렬공이 동시에 화를 당했을 때에 젖먹이 어린아이가 겨우 목숨을 보전한 것은 하귀동이 외가에서 양육되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적몰(籍沒)을 당해 박공의 사적과 하공의 사적이 모두 몰입(沒入)되었는데, 어떻게 유편(遺編)이 그 가문에만 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혹여 그 이후에 수집된 것이 있었다면 박노학의 고조인 참판 박기정(朴基正)이 경연(經筵)에 출입하고 《장릉지》 편찬에 참여했을 때 필시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것을 모두 가져다가 자진해서 바침으로써 우리 정조께서 널리 자료를 수집하시는 뜻에 부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찌 400년 동안 없었던 문적이 비로소 나와 관향을 바꾼 저 하씨(河氏)들의 주장을 입증함으로써 마침내 지금껏 전해 온 사실이 의심받게 되고 허물을 꾸미고 숨기는 자가 이를 의탁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를 인정한다면 박노학의 황당한 말을 《홍재전서》에서 정조께서 내리신 판단보다 되레 중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일종의 사기꾼으로서 사체를 알지 못하고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않은 채 스스로 세상에는 못할 일이 없다고 여기고는 오직 대현(大賢)의 후손 자리를 몰래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방법이 없자 열성조께서 시행하신 전장(典章)을 무고하여 훼손시킨 데다 《홍재전서》의 내용을 헐뜯어서 열성조의 처분을 무시하고 또한 폐하를 기만했으니, 법사(法司)의 처벌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 나라의 예(禮)를 담당하는 신하는 학식이 밝아야 하고 견문이 정밀해야 하는데도, 어찌하여 선조(先朝)에 금석 같은 전적(典籍)이 있고 선현의 몇몇 가문에 수필(隨筆)이 있음을 모른 채 도리어 한때의 절박한 하소연에 유혹되고 정신을 빼앗겨서 천하 사람들의 공론을 막을 수 있다는 듯이 곧바로 상주하였으니, 이것이 신들이 통한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신들이 포의(布衣)일 뿐이지만 그래도 열성조께서 돌보아 주신 교화를 입어왔으니, 고수하는 것은 열성조의 전장이며 읽는 것은 정조의 《홍재전서》이며 숭상하는 것은 충렬공의 기개와 절의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에 없던 이런 큰 변고를 겪게 되니 충정(衷情)이 절로 격분되어 차마 좌시할 수가 없기에 의정부와 장례원에 연명 상소(聯名上訴)를 올리고 이제 감히 성상께 한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법에 비추어 보시고 단호히 결단을 내리시어 광무 7년(1903, 고종40) 10월 19일에 장례원에 주하하셨던 것을 속히 철회하심으로써 《홍재전서》에서 연과 반을 수록하지 않은 뜻을 계승하시고 선현을 기만한 하상기에게 엄한 형벌을 가하여 순묘조에 하시철을 형배했던 일을 이으소서.’ 하였습니다.
박해철(朴海哲) 등의 상소를 가져다 보니, ‘신들의 선조인 충정공 박팽년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다섯 신하와 함께 병자년에 화를 당했기에 신들은 오신(五臣)을 선조(先祖)처럼 섬겨왔습니다. 그러니 오신의 의리에 관한 일이 있다면 이는 반드시 앞장서 형벌도 피하지 않고 명확하게 변론하고야 말 일입니다. 충정공의 현손(玄孫)인 참봉 박계창(朴繼昌)이 충정공의 기일(忌日)에 오신이 함께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들의 화제(話題)가 제사가 끊어진 데에 이르자 심히 서글픈 안색을 띠었다고 합니다. 꿈을 깨고서도 슬픈 감회를 이길 수가 없어 오신을 같이 제사 지냈는데, 관작(官爵)이 회복되기 전이라서 지방(紙榜)과 축문(祝文)의 서식에 감히 직함을 쓰지 못하고 관향과 성(姓)과 아무개 선생이라고만 썼습니다. 충렬공 하위지에 대해서는 단계(丹溪) 하 선생(河先生)이라고 하였는데, 그때는 옛날과 거리가 멀지 않았으니 필시 명확한 근거가 있어서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제사를 받든 지 150여 년이 지나서 신원(伸冤)된 후에 각처에 서원(書院)을 세움에 따라 유생들의 논의로 제사를 그만두게 되었으니 이 사실은 온 나라가 모두 아는 바입니다. 그리고 신들의 선조인 주부(主簿) 박종우(朴宗佑), 익찬(翊贊) 박숭고(朴崇古)가 이에 대해 쓴 소지(小識)에 「하 선생의 관향은 단계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온 명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충렬공의 유묵(遺墨)에 친필로 단계라고 쓰여 있는데, 혹 별호(別號)로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명(明) 나라 사신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을 전송하는 시를 지을 때 충정공과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등 27인과 함께 각기 관향을 썼는데, 충정공은 평양(平陽)이라고 하였으니, 평양은 순천(順天)의 옛 명칭이고, 충문공은 창녕(昌寧)이라고 하고, 고(故) 상신(相臣) 하연(河演)은 진양(晉陽 진주의 옛 이름)이라고 하였으며, 충렬공은 단계라고 한 기록이 중국에 있는 《요해편(遼海編)》과 우리나라의 《황화집(皇華集)》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충문공의 유집(遺集)을 삼가 살펴보니,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 적촌(赤村) 하위지와 함께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적촌은 단계현(丹溪縣)의 옛 명칭입니다. 각자의 관향을 쓸 때 어찌 충렬공에게만 호를 썼겠습니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단성현(丹城縣)의 옛 명칭은 적촌과 단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성의 각성기(各姓記) 중에 하씨(河氏)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河) 자(字) 아래에 별도로 주(註)를 달아서 「진주가 본관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본관은 진주이면서 단성에 거주하는 사람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아래 단계의 각성기에 하씨가 또 있는데 별도로 주를 달지 않았으니, 이는 본관이 단계라는 말이며 바로 충렬공이 속한 하씨입니다. 숙종조에 이르러서 낙빈서원(洛濱書院)과 민절서원(愍節書院) 두 서원을 창건할 때에도 사육신의 관향을 썼는데, 단계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충렬공에게는 호가 없었음이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유집에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는 모두 옛날부터 있었던 증거이지, 하씨들의 시비를 가리기 위하여 꾸며 낸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하용익으로 계후할 때는, 애초에 하용익의 관향이 단계인지 진주인지 시비를 가리지 않았으니, 단지 하씨로 계후한다는 것만 알았던 것입니다. 하시철이 변무(辨誣)할 때에 비로소 하용익이 진주 하씨라는 것을 알고서 이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끝내 바로잡히지 않은 채 일이 정성처럼 되지 못하여 지금까지도 마음에 맺힌 억울함이 끝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하시철이 《변무록(辯誣錄)》을 간행할 때에 신들의 온 집안이 있는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참판 박광석(朴光錫), 이조 참의 박문현(朴文鉉), 동지돈녕부사 박해조(朴海朝), 교리 박해순(朴海淳)이 《변무록》의 서(序)와 발(跋)을 지어서 뒷날을 대비하는 자료가 되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충렬공의 사적에 대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억측이나 거짓이 있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선조의 사당에 설 수 있겠습니까. 지난 계묘년(1903, 고종40)에 삼가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큰 은혜를 베푸시어 오신(五臣)의 계후를 정하라는 명을 내리시자, 장례원 경 이용직(李容稙)이 하씨의 관향에 대해 신들 집안의 종손(宗孫)인 박노학에게 물었으므로, 박노학이 단계가 옳다고 대답하였던 것이니, 감히 어찌 조금이라도 애증이 섞인 말을 했겠습니까. 장례원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품주한 일부터 하구용이 계후가 된 일까지는 조정의 처분이니 신들이 감히 말할 일이 아닙니다. 계후하는 일은 하씨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고 나머지 네 가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 저 이면주의 상소에 「하상기가 박노학의 황당무계한 말을 증거로 대어 온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충렬공의 호를 나라를 통틀어도 없는 관향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는데, 이 얼마나 지독한 무함입니까. 학식이 없는 그가 어찌 한쪽의 설에만 의거해서 이렇게 사실과 어긋난 주장을 한단 말입니까. 그의 글을 반도 보기 전에 머리칼이 쭈뼛쭈뼛 서고 곧이어 끝없이 식은땀이 솟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대대로 전해 온 문적(文籍)을 어찌 황당무계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있지도 않은 충렬공의 호를 온 나라 사람들이 불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기재된 관향이 나라를 통틀어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홍재전서》에 크게 의지하고 있으나, 《홍재전서》에 달린 주에 「하씨 가승(河氏家乘)의 내용을 본 것이지 내가 특별히 쓴 뜻은 없다.」고 하였는데, 이 가승은 하석중(河錫中)이 근거 없이 꾸며서 바친 것입니다. 충렬공에게는 원래 4명의 자식으로 연(璉), 반(班), 호(琥), 박(珀)이 있어서 모두 동학사(東鶴寺)에서 제향을 드렸는데, 이는 본래 세조께서 처분을 내리신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석중은 하련과 하반에 대한 제향을 없애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차마 못 하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여기에서 진주 하씨가 조작한 사실이 더욱 드러났는데도 지금 이면주 무리들은 사실을 상세히 살피지 않고서 사사로운 정리에 매이는 비루한 습속에 젖어 신들을 불측한 처지에 몰아넣고 성상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하상기가 증거하는 것이야 그들 나름대로 증거하는 것이니 그들이 증거하는 것을 염려하여 감히 우리 가문에서 충렬공의 관향과 호에 대해서 변론하지 않겠으며, 진주 하씨가 원망하는 것이야 그들 나름대로 원망하는 것이니 그들의 원망을 염려하여 감히 충렬공의 관향과 호에 대해서 변론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변론하는 것은 관향과 호이며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계후하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단호히 결단을 내리시고 속히 처분을 내리심으로써 이면주 무리들이 망언(妄言)한 죄를 다스리시고 충렬공에게 이른 욕된 변고를 쾌히 씻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후에 이면주 등의 두 번째 상소가 있자 장례원으로 하여금 즉시 사실을 조사해서 바로잡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상소를 가져다 보니, ‘신들이 이전 상소에서 아뢴 바는 태종과 세종 양조(兩朝)의 방목 중에 하 충렬공 네 부자가 들어 있는 《문과방목》과 정조 때의 왕명으로 정한 《장릉지》와 《홍재전서》 중에서 하 충렬공의 사적을 상세히 기록한 부분에 근거한 것입니다. 《선산읍지》는 충렬공 본향의 읍지이니 당연히 고을 사람의 관향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했을 것이고, 장적(帳籍)은 충렬공이 편수(編修)한 호적(戶籍)이니 당연히 자기 성의 본관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충공 김종직은 같은 동네에서 보고 들은 처지에서 《이준록》을 남겼으며, 문정공 남효온은 같은 시대에 의리를 지킨 현인으로서 조야집록을 남겼으며, 문강공 장현광은 묘갈명을 지었고, 문정공 송시열은 삼인록서를 지었는데, 모두 당세에 수필(隨筆)을 쓴 대현(大賢)들이니, 이것들은 뚜렷한 정안(正案)입니다. 위로는 규장각과 지방의 사고(史庫) 문서부터 아래로는 읍지, 장적, 여러 선배들의 수필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향은 진주요, 호는 단계라고 기록되어 있었기에 신들은 다만 거기에 근거해서 아뢰었던 것입니다. 박해철이 아뢴 바는, 충정공 박팽년의 현손인 참봉 박계창이 꿈을 기록한 것과 주부 박종우, 익찬 박숭고의 소지(小識)에 들어 있는 내용과 명 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 지은 시가 실려 있는 《요해편》 및 《황화집》의 내용과 진관사에서 독서할 때 지은 연구(聯句)에 붙어 있는 소서(小序)의 내용과 《동국여지승람》과 낙빈서원 및 민절서원의 두 서원에 봉안할 당시의 일과 문목공 정구의 유집의 내용입니다. 저들은, 신들이 아뢴 바로서 물론 이것들은 같은 고을 같은 마을에서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국조(國朝) 이후로 군왕들께서 친히 보고 정(定)하고 편찬하고 사고에 보관하신 자료와 저 대현들의 수필을 보았으므로 그들이 이전에 증거 댄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반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노학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고 나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일 텐데 도리어 일가붙이들의 이름을 나란히 쓰고 단편적이고 불분명한 사적을 꾸며서 하상기의 허세(虛勢)를 돕는단 말입니까. 아, 저들의 이른바 꿈의 기록이라는 것은 망녕이 너무도 심하니 꿈속에서 어떻게 관향과 호를 변론하겠으며, 이른바 소지(小識)라는 것도 꿈의 내용을 꾸민 것인데, 어찌 감히 임금께 이를 아뢸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황화집》에 실려 있는 박 충정공의 시에 대한 주는 후인(後人)이 붙인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연구시(聯句詩)에 대한 충문공 성삼문의 소서(小序)는 유고(遺稿)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공(成公)과 박공(朴公) 두 선현은 모두 사육신에 속하는 사람으로 시종 충렬공과 함께하였는데 당시에 어찌 방목에 써 있는 충렬공의 관향을 몰랐겠습니까. 그리고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에 대해 누가 감히 조작된 것이며 전란 후에 수집된 것은 혹 사실과 어긋나는 것도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또 정 문목공(鄭文穆公)의 유집에서는 애초에 충렬공의 관향과 호를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억설을 합니까. 《동국여지승람》의 성씨조(姓氏條)에 있어서는, 단성현(丹城縣)의 명칭은 본조(本朝)에 처음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진주에 소속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하씨 성의 아래에 진주라고 주를 달아 그 성씨가 본래 진주에서 유래하였음을 밝힌 것이며, 단계현(丹溪縣)의 명칭은 고려 초에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진주에 소속되어 있던 때였으므로 하씨 성의 아래에 주를 두지 않아 그 성씨의 관향이 진주임을 밝힌 것입니다. 낙빈서원은 대구에 건립된 서원인데 박씨 가문에서 건립을 주관하였으므로 이에 관한 그들의 조작된 주장은 대부분 근거가 없습니다. 민절서원은 경기도에 건립된 서원으로 도성의 명경(名卿)들이 함께 제사를 받들어 거행하는데, 충렬공에 대한 제문(祭文)에 「숭선(崇善 선산의 옛 이름)의 향리(鄕里)에 진양(晉陽) 하씨가 대대로 살고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근거하건대 신들이 변론할 것도 없이 저절로 변별이 될 것입니다. 대개 이런 자료는 《홍재전서》가 지어지기 전에 나왔는데, 정조조에 모두 사실로 확인된 것입니다. 하시철이 변론할 때 한 말은 모두 박노학 가문에서 증거를 댄 데서 나온 것인데, 박노학이 증거로 댄 것은 단지 단편적이고 불분명한 사적을 모은 것으로 대부분 꾸며 냈음이 뚜렷한 데 반해 신들이 아뢴 것은 모두 중대하고 분명한 자료이며 그 외에도 허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온 나라 사람들이 부르고 있는 호를 나라를 통틀어도 없는 관향으로 바꾸었다.」고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원으로 계후한 것은 숙종조에 왕명으로 정한 것이며, 하용익을 녹용한 것은 영조조에 내린 왕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용익으로 계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열성조께서 내리신 명을 드러내 놓고 배척한 것이고, 남의 가문의 가계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는 하원이 입후(立後)된 것을 매우 미워하고 하구용이 새로이 입후되도록 힘써 돕고자 했기에 말미암은 일입니다. 하시철의 무고에 대해서는 순조조에 이미 처벌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들의 온 집안은 마음에 맺힌 억울함이 끝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하시철이 《변무록》을 간행할 때에 참판 박광석, 이조 참의 박문현, 동지돈녕부사 박해조, 교리 박해순이 서(序)와 발(跋)을 지어서 뒷날을 대비하는 자료가 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조정에서 형배하여 처벌한 일에 대해 장차 뒤의 어느 날을 대비한단 말입니까. 이번에 하상기가 출현한 것도 그 무리들이 불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홍재전서》는 우리나라의 전범(典範)이 되는 전적(典籍)입니다. 삼가 《홍재전서》에서 충렬공의 일을 실은 부분을 살펴보니 「관향은 진주이고 호는 단계이다.」라고 하였는데, 임금께서 사실을 살피고 헤아려서 특별히 쓰신 것입니다. 그 아래에는 「이기(李墍)의 《송와잡기》에 하위지는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하호(河琥)이고 차자는 하박(河珀)이라고 하였다.」 하고, 그 아래에는 또 「하씨 가승에 연(璉)과 반(班)은 아마도 호와 박의 또다른 이름일 듯하다고 하였는데, 그 설이 그럴듯하다.」 하고, 그 아래에는 또 「이 일은 모두 이기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 정조대왕께서 신성한 감식으로 하씨 집안의 가승에 대해서는 「그럴듯하다.」고 하고, 이기의 기록에 대해서는 「사실로 인정한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럴듯하다는 것은 미심쩍어 하는 말이요,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은 단정짓고 재가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홍재전서》에서 연을 버리고 호를 남긴 것을 두고 하씨 가문에서 근거 없는 가승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석중이 하련과 하반에게 드리는 제향을 없애 달라고 청했다.」고 하는 말은 또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입니까. 게다가 그들이 신들을 지적하여 「《홍재전서》에 크게 의지하였다.」라고 말하는데, 아, 우리나라의 상하 군신 중에 이 책을 존중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도 박해철 무리만은 존중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말하기를, 「《홍재전서》에 달려 있는 주에 하씨 가승을 보았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홍재전서》에 충렬공의 일이 실린 부분에는 원래 주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군왕이 친히 지은 글에 주를 다는 것은 얼마나 엄중하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감히 원서(原書)에도 없는 것을 임의로 덧붙이고 구절을 마구 바꾸어서는 군왕에게 고하는 글에까지 썼으니, 이는 곧 불경(不敬)입니다. 폐하께서 신들의 상소를 살펴보시고는 장례원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셨으니, 장차 법에 따라 잘못을 고쳐 바로잡을 것인데, 박해철은 박노학이 고립되는 것을 걱정하여 이렇게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서 다시 폐하를 속이고 있으니, 이것은 맹자(孟子)가 말한 바 잘못을 저지른 데다 이어 변명까지 하는 것이요, 주자가 말한 바 없는 일을 있다고 말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바를 따져 보건대, 《황화집》의 시에 단 주가 옳다면 양조(兩朝) 때에 급제자들을 기록한 방목의 진위는 어디로 돌아가며, 박계창의 꿈을 기록한 것이 옳다면 《장릉지》에서 군왕께서 친히 정하신 사적의 진위는 어디로 돌아가며, 박숭고의 소지(小識)가 옳다면 《홍재전서》에서 군왕께서 친히 지으신 말은 어디로 돌아가며, 하시철이 거짓으로 꾸민 계보(系譜)가 옳다면 숙종께서 계후하라고 하신 명은 어디로 돌아가며, 박광석이 뒷날을 대비하여 썼다는 서(序)의 내용이 옳다면 순조께서 형배시킨 일은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일개 하상기에 대한 고려 때문에 열성조를 핍박하는 말을 하고 열성조를 모독하면서 방자하게 청을 올리고는 자신들의 설만이 옳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니 세변(世變)이 하나같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박노학의 증조(曾祖)와 고조(高祖)의 세대에 하 충렬공의 후손과 교분이 두터운 자로는 박기정(朴基正), 박기굉(朴基宏), 박성유(朴聖游) 등이 있었는데, 《장릉지》를 편찬할 때에 단독으로 서찰(書札)을 띄우기도 하였고, 충렬공의 사당에 시호를 내릴 때에 연명으로 서찰을 띄우기도 하였으며, 송도 하씨가 도움을 청할 때에 숙질(叔姪)간에 이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허다한 서찰을 여러 신하가 향리에서 익히 보았고, 충렬공의 본손(本孫)이 또 이 서찰을 가지고 서울로 오니 조정에 있는 공경재신(公卿宰臣)들 또한 많이들 돌려가면서 보았습니다. 다만 지엄하신 성상께는 감히 올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지금 저들이 인용한 여러 박씨의 자료는 대부분 전후 사실이 서로 어긋납니다. 아마도 저들이 올린 상소의 내용은 다 박노학이 꾸민 것이며 박해철 등도 모르는 내용일 것입니다. 신들은 저들이 이른바 망언한 죄에 대해서는 공손히 처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열성조의 제도와 처분이 또 이렇게 기만당하고 훼손되며 충렬공의 관향과 호가 점차 혼란스럽게 된 것은 모두 품처가 늦어졌기 때문이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바로잡도록 하시고 속히 처벌을 내리소서. 하시철 이후로의 날조된 기록과 족보, 거짓 증거와 사적은 즉시 모두 일일이 불속에 던져서 끝없는 우환을 영원히 막아 주소서.’ 하였습니다.
삼가 두 하씨 집안이 다투는 사안을 살펴보건대 곧 계후와 관향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계후하는 일에 대해서 신이 삼가 살펴보니, 정조 선황제께서 지으신 《홍재전서》에 들어 있는 장릉배식록(莊陵配食錄)에 이르기를,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復官)시키고, 을유년(1705, 숙종31)에 하위지의 조카 하원의 자손을 하위지의 계후로 삼았으며, 영종(英宗)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를 추증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내가 즉위한 뒤 정유년(1777, 정조1)에 정려문을 세웠다.’라고 하였으며, 순조 갑자년(1804, 순조4)에 부조묘를 허락한다고 명하였으니, 모두 우리 열성조께서 명현(名賢)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에 없던 은전을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시호와 정려문을 내리고 부조묘를 명한 것이 모두 하원의 후손 집안에 행해져서 윤서(倫序)가 이미 정해졌으니 변동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하낙서(河洛瑞)가 사실을 조작한 단자(單子)를 올려서 하구용으로 계후할 것을 청하자 본원(本院)에서 상주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이번에 바로잡으라는 명을 내리신 것은 실로 우리 황상 폐하께서 선왕대의 처분을 중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만큼 계후의 사안은 예전대로 두고 변경시키지 않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게 바로잡는 것이 될 것입니다.
관향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편의 주장은 단계(丹溪)요, 한편의 주장은 진주입니다. 단계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박노학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몽(記夢)이라는 글 및 송도 하씨들이 보관하고 있는 《변무록》과 단편적이고 불분명한, 여러 전해 오는 기록들뿐입니다. 진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근거 삼는 것은 《국조방목(國朝榜目)》과 《홍재전서》 및 여러 명현이 남긴 수필입니다. 그러니 공신력(公信力) 있는 문서와 사사로운 문서 간에 경중을 비교하면 진위(眞僞)가 절로 판명됩니다. 신이 또 살펴보니 《장릉지》에는 분명히 하 충렬공의 관향이 진양(晉陽)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는데, 저들이 감히 판본(板本)을 몰래 긁어내고서는 단계라고 고쳐서 새겼습니다. 이에 근거하면 저 무리들이 허다하게 사적을 조작하였음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에 하석중과 하시철 두 사람이 이 관향과 호의 문제로 다투자 고(故)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이 예조 판서로서 회계(回啓)하여 윤허를 받아 하시철을 형배한 일이 있는데, 준엄한 말과 올바른 의리로 이미 단안 지어진 일이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면 사의(事宜)에 적합할 듯합니다. 하구용의 집안에서 새로 만든 사판(祠板)과 정려문에 대해서는,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즉시 사판은 묻고 정려문은 부수도록 하며 안동군(安東郡)에 있는 사판을 예전대로 봉안하도록 하소서. 하낙서가 범한 죄상은 하시철보다 더하니 법부로 하여금 조율해서 처벌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이번에 아뢴 바는 정확하고도 명석하니, 아뢴 바는 그대로 시행하고 영원히 바꾸지 못하는 규례로 삼으라. 이전에 내린 판부는 취소하라.”
하였다.
[주-D001] 가산(家産)을 …… 하여 : 유권은 하위지(河緯地)가 처형을 당하기 전에 작성했다는 재산 목록 문권(文券)을 말한다. 정호(鄭澔)는 ‘제고사간하선생유권후(題故司諫河先生遺券後)’에서 하위지가 유권에서 집안의 사소한 잡물(雜物)까지도 기록하면서 별고의 녹봉(祿俸)만 기록하지 않은 뜻은 ‘이 유권에 기록된 것만이 집안 재물이며 별고의 녹봉은 집안 재물이 아니다’라는 뜻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하위지는 세조가 즉위한 이후로 받은 녹봉을 별고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古文書集成 권56, 정신문화연구원, 767쪽》 《국역연려실기술 1집, 한국고전번역원, 1977, 451쪽》[주-D002] 은연중에 …… 보이고 : 하위지는 유권에 ‘시귀동국(示龜童𥕏)’이라는 글귀를 썼는데, 정호(鄭澔)는 ‘제고사간하선생유권후(題故司諫河先生遺券後)’의 이 글귀는 하귀동이 장성하여 이 글자로 자(字)를 삼기를 기대하는 하위지의 뜻이 담긴 것으로 그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려는 의도를 비친 것이라고 하였다. 《古文書集成 권56, 정신문화연구원, 767쪽》[주-D003] 《장릉지(莊陵誌)》 : 이 글에서 언급하는 《장릉지》는 모두 정조의 명에 의하여 박기정(朴基正)이 편찬한 《장릉사보(莊陵史補)》이다. 원래의 《장릉지》는 윤순거(尹舜擧)의 《노릉지(魯陵誌)》를 증보하여 권화(權和)와 박경여(朴慶餘)가 엮은 책이다.[주-D004] 단계(丹溪) : 같은 이름을 가진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하위지의 고향 마을인 경상북도 선산읍(善山邑) 영봉리(迎鳳里) 하위지의 집 앞을 흐르는 개천 이름이다. 하위지가 태어날 때 3일 동안 개울물이 붉게 물들었기 때문에 이 개천을 단계라 부르고 또 호(號)로 취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신라 시대에 적촌(赤村)으로 불리다가 조선 시대에 단성현(丹城縣)으로 편입된 고을의 이름이다. 같은 이름이 두 군데 있었던 관계로 단계를 관향으로 보느냐 호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 듯하다. 《龜尾市誌 구미문화원, 158쪽》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 4집, 한국고전번역원, 300쪽》[주-D005] 동학사(東鶴寺)의 초혼기(招魂記) : 1458년(세조4)에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과 단종복위사건(端宗復位事件)의 와중에서 죽은 280명의 명단을 비단에 써서 동학사에 내려 주어 초혼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명단을 초혼적기(招魂籍記)라고 한다. 초혼적기에는 주모자의 이름 밑에 연루되어 죽은 가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권7, 정신문화연구원, 1989, 351쪽》 《국역연려실기술 1집, 한국고전번역원, 1977, 381, 399쪽》[주-D006] 젖먹이 …… 비슷합니다 : 박팽년이 죽을 때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도록 했다. 그런데 아들을 낳자 같은 시기에 딸을 낳은 노비와 바꾸어 기르고 이름을 박비(朴婢)라고 지었다. 성종(成宗) 때에 조정에 자수하고 이름을 박일산(朴壹珊)으로 고쳤다. 《국역연려실기술 1집, 한국고전번역원, 1977, 444~445쪽》[주-D007] 관향을 …… 하씨(河氏)들 : 송도(松都)의 하씨들은 원래 ‘단계(澶溪)’를 본관으로 하다가 ‘단계(丹溪)’로 바꾸었다고 한다. 《古文書集成 권56, 정신문화연구원, 415쪽》[주-D008] 《요해편(遼海編)》 : 1450년(세종32)에 명 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와서 우리나라 문인들과 화답한 시와 작별할 때 지은 시를 모아 엮은 책으로 그가 돌아갈 때 주었다. 《국역연려실기술 9집, 한국고전번역원, 1977, 334쪽》
ⓒ 한국고전번역원 | 양경희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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