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출신지역 | 시호(諡號) | 성(姓) | 휘(諱) | 자(字) | 이력약기(履歷略記) |
⑲ | 兗國(연국) | 復聖公(복성공) | 안(顔) | 회(回) | 자연(字淵) | 공자 제자중에 일인자이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전형(典型) |
⑳ | 郕國(성국) | 宗聖公(종성공) | 증(曾) | 삼(參) | 자여(子與) | 증점(曾點)의 아들로 공자의 초기제자이고 효경(孝經)을 찬술함 |
⑴ | 沂國(기국) | 述聖公(술성공) | 공(孔) | 급(伋) | 자사(子思) | 공자의 손자이고 중용(中庸)을 찬술함 |
⑵ | 鄒國(추국) | 亞聖公(아성공) | 맹(孟) | 가(軻 | 자거(子車) | 맹자(孟子), 공자사상의 뒤를 이은 두 번째 성인이라고 함 |
* 연(兗), 성(郕), 기(沂), 추(鄒) ; 고대 중국 9주(州)중에 4개주를 나라로(國) 높여 표기함
⑶ 配(배) ; 함께 나누어서, · 나눌 配, 짝 배, 종사할 배, 아내 배
⑷ 費公閔損(비공민손) ~ 潁川侯顓孫賜(영천후전손사)는 공문(孔門) 10철(哲)을 거명한바 그 약기이력(略記履歷)을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한다.
상주향교배향(配享)공문10철(公門十哲)
시호(諡號) | 성 휘(姓 諱) | 자(字) | 이력약기(略記履歷) |
費公(비공) | 閔 損(민 손) | 子騫(자건) | 공근단정(恭謹端整)하고 심정(沈靜)하여 공자는 공의 덕행을 크게 칭찬하였다. |
鄆公(운공) | 冉 耕(염 경) | 伯牛(백우) | 공자가 노나라 사구(司寇)시에 중도(中都)의 재상이었다. 맹자는 ‘성인의 전체를 갖추었다’고하였다. |
薛公(설공) | 冉 雍(염 옹) | 仲弓(중궁) | 마음이 넓고 크며 중후하여 정치적 역량이 탁월하였다. 논어 옹야편에 공의 덕행이 실려있다. |
齊公(제공) | 宰 予(제 여) | 子我(자아) | 공자 열국 주유에 끝까지 동행하였고 언변에 뛰어났으며 외교에 재주가 있었다. |
黎公(려공) | 端木賜(단목사) | 子貢(자공) | 마음이 곧고 언변에 능하였으며 낙관적 이었다. 특별히 상업 활동에 재질이 뛰어났다. |
徐公(서공) | 冉 求(염 구) | 子有(자유) | 천성이 낙관 활발하였고 솔직 온화하였다 공자는 정사(政事)에 제 일인자로 지목하였다. |
衛公(위공) | 仲 由(중 유) | 子路(자로) | 강직 용맹하여 의를 숭상하였다. 정사에 탁월하였고 효도에 정려하였다. |
吳公(오공) | 言 偃(언 언) | 子游(자유) | 유가에서 주장하는 예악정치를 실천하였다. 공자 학단에 늦었지만 배움에 철저하였다. |
魏公(위공) | 卜 商(복 상) | 子夏(자하) | 일생을 청빈하게 지냈다. 문학에는 자하 라고 할 만큼 공자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
穎川侯(영천후) | 顓孫師(전손사) | 子張(자장) | 빈천한 출신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항상 공경히 듣고 실천하였다. |
⑸ 道國公濂溪周先生(도국공염계주선생) ~ 徽國公晦庵朱先生(휘국공회암주선생)은 중국 송조(宋朝) 6현(賢)으로 그 이력을 다음과 같이 표로 약기(略記)한다.
상주향교 배향(配享) 송조6현(宋朝六賢)
시호(諡號) | 호(號) | 성 휘(姓 諱) | 이력약기(履歷略記) |
道國公(도국공) | 濂溪(렴계) | 周敦頤(주돈이) | 북송 때 철학자로 북송5자중 한사람이다. 청빈 강직한 관료였으며 송대 성리학의 연원이었다. |
豫國公(예국공) | 明道(명도) | 程 顥(정 호) | 북송5자중한사람으로 주돈이를 사사하였다. 송대 유학정신을 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 |
洛國公(낙국공) | 伊川(이천) | 程 伊(정 이) | 형 정호와 함께 주돈이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아 송대성리학의 2정자로 이기이원론을 근본사상으로 하였다. |
新安伯(신안백) | 康節(강절) | 邵 雍(소 옹) | 북송5자로 우주만물의 발생 순서를 상수에 의해 연역하는 원리로서 선천학을 제창하였다. |
郿 伯(미 백) | 橫渠(횡거) | 張 載(장 재) | 북송5자의일원, 역경을 종주로 하고 중용을 목적으로 하는 독자적인 철학사상을 세웠다. |
徽國公(휘국공) | 晦庵(회암) | 朱 熹(주 희) | 남송의 유학자로 앞의 5현사를 이어 온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방대한 사상체계로 하는 주자학을 창시하였다. |
⑹ 弘儒侯氷雪齊薛先生(홍유후빙설제설선생) ~ 文純公玄石朴先生(문순공현석박선생)은 우리나라 출신 18현사(賢師)로 그 이력을 다음과 같이 표로 약기한다.
상주향교 배향(配享)우리나라 출신 18현사(賢師)
왕조별 | 시호(諡號) | 호(號) | 성휘(姓諱) | 생몰(生沒) | 이력약기(履歷略記) |
신 라 | 弘儒侯 (홍유후) | 氷雪齋 (빙설재) | 薛 聰(설 총) | 650~740경 | 경덕왕시유학자, 이두창시,9경을 처음강론 유학이 발전계기 |
文昌侯 (문창후) | 字; 孤雲(고운) | 崔致遠(최치원) | 857~ ? | 헌강왕시유학자 유,불,도교를 융합3교조 화론전개.공자존숭 | |
고 려 | 文成公 (문성공) | 晦軒(회헌) | 安 珦(안 향) | 1243~1306 | 주자학최초도입 문교진흥을 위해 섬학전설치, 우주론적 이기보다 심성 수양론을 중시 |
文忠公 (문충공) | 圃隱(포은) | 鄭夢周(정몽주) | 1337~1392 | 공양왕시성리학자,성균관대사성,주자가례사회윤리확립,동방유학의조종으로세칭함 | |
조 선 | 文敬公 (문경공) | 寒暄堂 (한훤당) | 金宏弼(김굉필) | 1454~1504 | 김종직문인,무오사화때사사,소학으로실천궁행에정려,수기치인근본원리견지,동방5현의일원 |
文獻公 (문헌공) | 一蠹(일두) | 鄭汝昌(정여창) | 1450~1504 | 김종직문인, 갑자사화부관참시 , 리기2원론,인욕이천리를덮어악함이생성한다는선악천리론제창 | |
文正公 (문정공) | 정암(정암) | 趙光祖(조광조) | 1428~1519 | 김굉필문인,기묘사화로사사,조선도학파정착최초인물로왕도정치(지치주의)구현노력 | |
文元公 (문원공) | 晦齋(회재) | 李彦迪(이언적) | 1491~1553 | 청백리,좌찬성역임,양재역벽서사건연루강계유배,우주론과수양론을포괄하는사상견지 | |
文純公 (문순공) | 退溪(퇴계) | 李 滉(이 황) | 1501~1570 | 동방유학집대성,소수서원사액,주자서절요등성리학저술다수,거경궁리와리기2원론견지 | |
文正公 (문정공) | 河西(하서) | 金麟厚(김인후) | 1510~1560 | 김안국문인,퇴계와성균관동문수학,중용사상기반천명도를그림,주자학지도이념정착기여 | |
文成公 (문성공) | 栗谷(율곡) | 李 珥(이 이) | 1536~1548 | 어머니 신사임당 에게 글 배움, 모두9차례 과거장원, 격몽요결 등 저술 다수, 기호 학파의 연원 | |
文簡公 (문간공) | 牛溪(우계) | 成 渾(성 혼) | 1535~1598 | 율곡과 6년간 4단7정논쟁도의교, 임난광해군호종, 퇴계를 흠모사숙, 기발리승일도설견 지, | |
文元公 (문원공) | 沙溪(사계) | 金長生(김장생) | 1548~1631 | 율곡문인,청백리,조선예학의태두,주자학을기반한수신예실천 | |
文烈公 (문열공) | 重峯(중봉) | 趙 憲(조 헌) | 1544~1592 | 율곡문인,퇴계사숙,절의도학겸비학자,임난김산전투의병순국 | |
文敬公 (문경공) | 愼獨齋 (신독재) | 金 集(김 집) | 1547~1659 | 김장생의자,이조판서때효종과북벌계획,부친의예학연구발전 | |
文正公 (문정공) | 尤庵(우암) | 宋時烈(송시열) | 1607~1689 | 노론정파의영수, 율곡학통계 승, 1,2차 예송으로 정계실각 | |
文正公 (문정공) | 同春堂 (동춘당) | 宋浚吉(송준길) | 1606~1672 | 율곡문인,정경세의사위,기발리승일도서학설견지,文.書에능함 | |
文純公 (문순공) | 玄石(현석) | 朴世采(박세채) | 1631~1695 | 김상헌문인,소론의영수,궁리.거경.역행에전념, |
⑺ 從(종) ; 따라가서 · 좇을 從 · 좇다, 따르다, 다가서다, 시중들다, 모시다
⑻ 상(尙) ; 바라옵건데, 두루두루 빠짐없이, · 숭상할 尙, 오히려 상, 바라건데, 높이다,
⑼ 饗(향) ; 흠향(歆饗)하시옵소서
이상 축문의 내용을 종합하여 풀어보면
“이제 단기4348년 을미 2월 3일 춘계석전을 맞이하여 상주시장 이정백은 감히 밝혀 고 하나이다. 대성지성문선왕 이신 공자께서는 유교를 창도하시고 그 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어른이시니 길이길이 만세토록 좋은 상정의 날을 맞아 깨끗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제사 지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정성을 다하여 맛있는 고기와 술 그리고 좋은 선물을 정성스럽게 담아 법식에 따라 진설하여 경건하고 진실하게 받들어 올립니다. 이어서 선사들이신 안자, 증자, 자사, 맹자께서도 함께하시고 공문10철, 송조6현 우리나라 현사18현께서도 같이 좇아서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문장이다.
향교는 모시는 성현(聖賢)의 위패수(位牌數) 에 따라서 대설위(大設位)로부터 중(中),소(小)설위로 구분하는데, 대설위 향교는 상주와 같이 관찰사가 재임하는 감영(監營) 고을에 두었다. 대설위의 전형(典型)은 공자와 배향위 4성인을 일컽는 5성현(聖賢)과 공문10철, 송조6현 등 21위를 대성전(大成殿)에 모시고 대성전 아래 동서무(東西廡)에 중국현사 94현, 우리나라 현사 18현을 각각 56위씩 나누어 모셔서 모두 133위의 위패를 봉안(奉安)하였다. 그러다가 8.15광복이 되고 1949년과 1961년도에 단행한 향교개혁에 따라서 동서무에 중국현사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현재는 5성위와 공문10철, 송조6현, 우리나라 현사 18현으로 모두 39현의 위패를 대성전에 승봉합사(陞奉合祠)하였다
3. 사례별(事例別) 축문(祝文)
축문은 행사의 류형에 따라 그 종류가 많고 사례별로 내용이 다르다.
축문의 류형을 크게 나누어 보면 먼저 가정의 기제사(忌祭祀) 축을 들 수 있고 묘제축(墓祭祝), 상례축(喪禮祝), 이장축(移葬祝), 석물(石物)의 입석축(立石祝), 가토(加土)시 개사초축(改莎草祝), 그리고 종묘사직(宗廟社稷)과 능묘제축(陵墓祭祝)), 서원(書院) 단소(壇所) 사당(祠堂)의 향사(享祀)축, 묘우(廟宇)에 각종 고유(告由)축, 기우제(祈雨祭)축, 시산제(始山祭)축, 개업고사(開業告辭)축, 마을 동제사축, 심지어 묘소에 화재나 수재를 당할 때 위안고사를 하는 축 등등 전통시대에는 신위(神位)를 대상으로 하는 의례(儀禮)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모두 축이 있었다. 현대에 와서도 일부전통가문의 제사와 서원, 단소, 사당의 행사에는 독축 절목을 반드시 행하고 있으며, 마을 동제(洞祭)나 기우제(祈雨祭) 그리고 대중들이 모이는 현대식 행사에서도 가끔씩 축문을 읽는 사례도 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의례의 축문은 앞에서 거론한 상주향교 축문에서 예시한바와 같이 문안의 기본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겠으나 사례별 경우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현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알아 둘 몇 가지 사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가. 가정의 기제사(忌祭祀) 축문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부모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기제사를 지낸다. 전통적인 기제사에서 3헌(獻)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초헌관이 제주(술잔)를 올린 후에 축문을 읽는 독축(讀祝)의 의절(儀節)을 행한다. 이와 같은 의례는 세태가 변하면서 주사자 혼자 잔을 올리고 독축을 생략하는 이른바 무축단잔(無祝單盞)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전통가문의 종가(宗家)에서나 예전 범절을 지키고자 하는 집에서는 제사에 독축 의례를 반드시 지키는 집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기제사에도 4대봉사의 경우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제사 때 마다 날자가 다르고 제사의 대상에 대한 주사자의 관계가 다른 만큼 축문에서도 몇 가지 문안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기제사 축문의 기본을 아버지 제사를 예시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 한다
전통적 가정 기제사축문 “예”
①維 ⓶歲次③乙未④九月壬戌朔⑤十一日壬申⑥孝子⑦吉童 ⑧敢昭告于
⑨顯考學生府君⑩顯妣儒人豐壤趙氏⑪歲序遷易⑫諱日復臨⑬追遠感時⑭昊天 罔極⑮謹以⑯淸爵庶羞⑰恭伸奠獻⑱尙⑲饗
유 세차 을미 9월임술삭 11일 효자 길동
감소고우
현고학생부군
현비유인풍양조씨 세서천역 휘일부림 추원감시 호천망극
근이 청작서수 공신전헌 상향
위 축문의 내용을 풀어보면,
① ~ ⑤, ⑧, ⑮, ⑱, ⑲ 항은 앞에 상주향교 축문의 예와 같다. 다만 ③, ④, ⑤ 항은 제사당일의 년 월 일 에 따라 다르고 ⑧항의 경우 아내에는 敢(감)자를 쓰지 않고 아들에는 敢昭(감소) 자를 쓰지 않는다.
⑥ 孝子(효자) ; 이때의 孝 자는 조상의 제사를 이어가는 상속자라는 뜻으로 맏이효 자 또는 조상 제사 받들 효자라고도 한다. 본문은 아버지 제사의 경우인 만큼 ‘효자’라고 표기하지만 할아버지 이상은 孝孫(효손), 孝曾孫(효증손), 孝高孫(효고손), 으로 표기하고 맏아들이 아닐 경우는 효자를 빼고 ‘자’자만 쓴다
⑦ 吉童(길동) ; 주사자의 이름
⑨ 顯考學生府君(현고학생부군) ; 하늘같이 높이 받드는 아버지시여 라고 풀어본다.
이 항에서 ‘考’ 자는 아버지를 뜻하는 까닭에 할아버지 이상에는 祖考(조고), 曾祖考(증조고), 高祖考(고조고)로 표기하고 學生(학생)이라는 용어는 벼슬을 하지않은 일반 서민을 뜻하므로 덕망이나 관직의 품계 또는 직위에 따라 處士(처사), 郡守(군수), 경찰서장, 육군소장, 등등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아내, 형, 동생, 등등 사자(死者)에 따라서 문안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⑩ 顯妣儒人豐壤趙氏(현비유인풍양조씨) ; 자상하신 어머니시여, 아버지 제사에 내외분이 함께 하셔서, 라고 의역(意譯)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이항의 ‘妣’자 역연 어머니를 뜻하는 글자이니 만큼 할머니 이상에는 祖妣(조비), 曾祖妣(증조비), 高祖妣(고조비)로 표기하고 孺人(유인) 이라는 용어도 아버지에 學生 이라는 용어와 같은 격인만큼 고위(考位)의 덕망과 직위에 따른 적정한 용어를 표기하며 성씨는 어머니, 할머니의 성씨에 따라서 해당성씨를 표기한다.
아버지 제사에 어머니를 합사(合祀)하는 것에 대하여는 이설이 있기도 하나 대개 부부간에 정(情)으로 함께 모신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어머니 제사일 때는 ⑩항의 어머니를 먼저 쓰고 ⑨항, 아버지를 쓰는 것이 합당하다.
⑪ 歲序遷易(세서천역) ; 해가 바뀌어, 세월이 흘러,
⑫ 諱日復臨(휘일부림) ; 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다시 돌아오니, 라는 뜻인데 아내와 동생이하 제사에는 亡日復至(망일복지)라고 하여 예사말을 쓴다.
⑬ 追遠感時(추원감시) ;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각이 사무쳐
⑭ 昊天罔極(호천망극) ; 부모님의 은혜가 높고 넓은 하늘과 같습니다.
이 항목에서 할아버지 이상에는 不勝永慕(불승영모 ;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 이길 수 없나이다.)라고 쓴다.
⑮ 淸酌庶羞(청작서수) ;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서,
⑯ 恭伸奠獻(공신전헌) ;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올리오니,
이 항목에서 아내나 동생 이하에는 陳此奠儀(진차전의)라고 쓴다
이상 축문의 전체 내용을 풀어보면
“이제 (올해) 을미년 9월 11일에 맏아들 길동이는 감히 아버님과 어머님 영전에 고 하나이다. 어느 듯 세월이 흘러서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다시 돌아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각이 사무쳐 아버님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넓어서 끝이 없아옵니다. 삼가 맑은 술과 여러 음식을 차려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드리오니 바라옵건데 흠향 하시옵소서”
라는 문장이다.
나. 묘제(墓祭)의 축문
농촌에 추수가 끝나면 조상 묘소에 묘사를 지낸다. 묘사는 시조(始祖)로부터 중시조 그리고 부모에 이르기 까지 윗대 묘소 전부 찾아 지냈지만 현대에 와서는 성묘(省墓)로 가름하는 집도 있다고 하나 시조(始祖)를 비릇하여 중시조(中始祖), 입향조(入鄕祖) 그리고 당대에 드러났던 현조(顯祖)에 대하여는 어느 집안이던지 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 상례이다. 대체적인 묘제의 축문을 여기에 옮긴다.
維 歲次 乙未 十月壬辰朔 十七日戊申 0代孫00 敢昭告于
顯 0代祖考 處士府君 氣序流易 時維仲秋 霜露旣降 瞻掃封塋 不勝感 慕 謹以
淸酌庶羞 祗薦歲事 尙饗
유 세차 을미 10월임진삭 17일무신 0대손00
감소고우
현 0대조고 처사부군
기서유역 시유중춘 상로기강 첨소봉영 불승감모 근이
청작서수 지천세사 상향
이제 을미년 10월 17일에 0대손 00는 삼가 0대 할아버님께 고합니다. 어느 듯 절기가 바뀌어 늦은 가을이 되니 찬 이슬이 내렸습니다. 이에 할아버님 묘역을 쓸고 봉분을 바라보면서 감동하고 사모하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맑은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공경을 다하여 세사를 올리오니 바라옵건데 흠향하시옵소서
다. 상례(喪禮)의 축문
전통의 의례(儀禮)에서는 사람이 운명하면 초상으로 부터 소상, 대상을 치루고 담제(禫祭)를 지내며 다시 길제(吉祭)에 이르기 까지 혜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제사를 지내는데 일반적으로는 초상과 소, 대상 즉 삼년상(三年喪)에 드리는 예절을 상례 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과정을 지나는 제사 절목마다에는 축문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그 내용이 각각 달라서 현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까다롭다. 현대에 와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100일 탈상(脫喪)으로 변하였다가 최근에는 3일 탈상 내지 당일 묘지 현장에서 탈상하는 사례가 허다하다고 하니 급진적으로 변하는 세태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으랴. 그렇다고 하드라도 부모를 잃은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예를 갖춘다고 하면 100일 정도는 상주(喪主)로서의 처신을 분별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필자 자신의 개인적 생각이다. 이와 같은 필자의 견해에 따라서 본고에서는 부모의 100일 탈상 경우를 예로 한 의절(儀節)의 제례 축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부모 이외 가족의 경우는 축문의 내용문 일부가 다를 뿐이지 형식은 같고 탈상 후에 담제나 길제의 축문은 전통을 지키는 전통씨족의 일부 가문을 제외하고는 이행하는 집이 없기 때문에 생략 한다.
1) 초상시(初喪時)
가) 발인축(發靷祝)
발인은 영구(靈柩)가 장지로 떠날 때 간단한 제 의례시의 축문으로 다음과 같다.
今 遷柩就轝 敢告
靈輀旣駕 往卽幽宅 載陳遣禮
금 천구취여 감고
영이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앞의 문장은 영구(靈柩)를 상여나 영구차에 모시기 전에 알리는 축문이고 뒤의 문장은 영구를 실은 뒤에 행하는 축문인데 대개 영구를 실은 뒤에 합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축문을 풀어보면
이제 아버지(어머니)를 상여(영구차)에 모심을 고합니다.
아버지(어머니)를 모시고 곧 유택으로 가기 전에 애통 스러움에 보내드리는 예를 올리면서 영원히 하늘나라로 떠나심을 고하나이다.
라고, 하는 뜻이다.
나) 묘 현지 산신축문(山神祝文)
묘 현장에 성분(成墳) 완료 후 주변의 적당한 장소에서 상주 가족 이외 타인이 산신에게 이 묘를 잘 보살펴 달라고 하는 뜻을 담은 제사로 다음과 같다.
維 歲次 乙未 十月朔壬辰 十七日戊申 儒學 000
敢昭告于
土地之神 今爲處士(學生及某官) 豐壤趙公 窆玆幽宅 神其保佑
俾無後艱 謹以 淸酌脯醢 祗薦于神 尙饗
유 세차 을미 10월 17일무신 유학 000
감소고우
토지지신 금위처사(학생급모관) 풍양조공 폄자유택 신기보우
비무후간 근이 청자포해 지천우 신 상향
을미년 10월 17일에 유학 000은 감히 고하나이다.
토지지신이여 이제 풍양조공의 묘를 마련하였으니 신께서 도우셔서 후일에 어려움 이 없도록 하여 주시옵기 맑은술과 포해로서 삼가 드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다) 평토고사축문(平土告辭祝文)
성분 후에 상주(喪主)가 묘전에 드리는 고사(告辭)로서 형체(形體) 즉 육신은 묘지에 두고 지금 부터는 신혼(神魂)을 모시고 집으로 떠난다는 것을 고하는 축문으로 반혼(返魂)의 의례 축문이다.
維 歲次 乙未 十月朔壬辰 十七日戊申 孤子000
敢昭告于
顯 考處士府君 形歸芚穸 神返室堂 魂帛仍存 伏惟尊靈
舍舊從新 是憑是依
유 세차 을미 10월삭임진 17일무신 고자 000
감소고우
현 고처사부군 형귀둔석 신반실당 혼백잉존 복유존령
사구종신 시빙시의
을미 10월 17일 아버지 없는 외로운 자식 000는 감히 아버지 영전에 고하나이다.
하늘과 같이 높으신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육신형체(肉身形體)는 묘소안 광중에 계시고 혼신(魂神)은 아버지가 게시던 집에 혼백으로 모시 고저 엎드려 아뢰오니 높으신 아버지 신영(神靈)께옵서는 살아 계시던 집과 새로 마련한 이 묘소를 의지하소서
라고 하는 문장인데 고자(孤子)라고 함은 아버지 상(喪)에 쓰고 어머니 상에는 애자(哀子), 양 부모를 여이었을 때는 고애자(孤哀子)로 쓴다.
라) 반혼고사축문(返魂告辭祝文)
혼신을 집으로 모시고 와서 드리는 의례의 축문이다
維 歲次 乙未 十月壬辰朔十七日戊申 孤子000
敢昭告于
顯 考處士府君 事畢奉安 禮當立主 拘於事勢 未能如禮 依具束帛
還安室堂 伏惟尊靈 是憑是依
유 세차 을미 10월임진삭17일무신 고자000
감소고우
현 고처사부군 사필봉안 례당입주 구어사세 미능여례 의구속백
환안실당 복유존령 시빙시의
을미년 10월 17일 아버지 없는 외로운 자식 000은 감히 아버지 영전에 고하나이다.
하늘과 같이 높으신 아버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묘당에 신주로 모시는 것이 당연하나 사정이 허락되지 않아 예를 다 갖추지 못하여 혼백에 모시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업드려 비옵건데 높으신 아버지 신령께서는 여기에 의지하여 주 시 옵소서
마) 우제축문(虞祭祝文)
발인에서부터 반혼 까지 자손이 드렸던 의례는 제사가 아니고 혼령께 고하여 알려 드리는 고사(告辭)이고 우제(虞祭)는 초우(初虞)로부터 재우(再虞), 삼우(三虞)에 이르기 까지 집에서 행하는 제사의례(祭祀儀禮)이다. 전통에 따르면 대개 초우는 집에 돌아온 첫날 저녁에 드리고 재우, 삼우는 일진(日辰)을 가려서 날자를 정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초우 다음날을 재우로, 그 다음날을 삼우제로 행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우제축문은 날자와 초, 재, 삼, 이라는 해당 글자만 다를 뿐이지 같은 문장이다.
維 歲次 乙未 十月壬辰朔 十七日戊申 孤子000
敢昭告于
顯 考處士府君 日月不居 奄及初虞 夙興夜處 哀慕不寧
謹以 淸酌庶羞 哀薦 尙饗
유 세차 을미 10월 17일임진삭 17일무신 고자000
감소고우
현 고처사부군 일월불거 엄급초우 숙흥야처 애모불령
근이 청작서수 애천 상향
이제 을미년 10월 17일에 아버지를 잃은 슬픈 아들 000은 삼가 아버님 영전에 고하나이다.
하늘과 같이 높으신 아버님 세월은 머물지 않고 흘러서 어느듯 초우가 되었습니다. 밤낮으로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에 편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애통 한마음으로 처음 제사의 예를 드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라나이다.
2) 탈상(脫喪)
앞에서도 밝힌바 있거니와 전통적으로는 우제(虞祭) 이후에도 졸곡(卒哭), 소상(小喪), 대상(大喪), 담제, 길제(吉祭), 등 여러 번의 제사에 따르는 축문이 각각 있으나 생략하고 시류의 변화에 따라 현대에 행하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가) 납골묘(納骨墓)봉안고사(奉安告辭)
납골묘 또는 납골당에 화장한 유골을 봉안 할 경우에 드리는 축문이다
維 歲次 乙未 十月壬辰朔 十七日戊申 孤子000
敢昭告于
顯 考處士府君 世俗變易 謹隨風潮 墓堂配享 事畢葬儀 伏惟尊靈 永 世是寧 謹以 酒果用伸 虔告謹告
유 세차 을미 10월임진삭 17일무신 고자000
감소고우
현 고처사부군 세속변역 근수풍조 묘당배향 사필장의 복유존령 영세시령
근이 주과용신 건고근고
하늘과 같이 높으신 아버님 세상풍속이 변하여 형편에 따라서 납골묘에 봉안 하 는 것으로 장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데 영세토록 영민 하옵기 삼가 주과를 차려 경건하게 고하나이다.
나) 수목장(樹木葬) 봉안고사(奉安告辭)
維 歲次 乙未 十月壬辰朔 十七日戊申 孤子000
敢昭告于
顯 考處士府君 今以茶毘 靈廟樹木 花蝶遊庭 自然相隣 昌平永世 謹以
酒果用伸 虔告謹告
유 세차 을미 10월 임진삭 17일 무신 고자000
감소고우
현 고처사부군 금이다비 령묘수목 화접유정 자연상린 창평영세 근이
주과용신 건고근고
하늘과 같이 높으신 아버님 오늘 화장으로 납골을 숲에 영묘를 모시고저 하오 니 꽃과 나비가 노는 정원에서 자연을 이웃하여 영민하소서 이에 삼가 주과를 차려 올려 경건하게 고하나이다.
다) 일년, 100일, 3일, 등 탈상(脫喪)
維 歲次 乙未 十月壬辰朔 十七日戊申 孤子000
敢昭告于
顯 考處士府君 日月不居 奄及** 夙興夜處 哀慕不寧 三年奉喪 於 禮至當
事勢不逮 魂歸墳墓 謹以 淸酌庶羞 哀薦祥事 尙饗
** ; 朞年(1년), 百日(100일), 參日 등 합당한 문구를 삽입함
유 세차 을미 10월임진삭 17일무신 고자000
감소고우
현 고처사부군 일월불거 엄급** 숙흥야처 애모불령 삼년봉상 어례지당
사세불체 혼귀분묘 근이 청작서수 애천상사 상향
하늘과 같이 높으신 아버님, 세월이 흘러 아버님 돌아가신지 어느듯 (일년, 백일, 삼일)이 지나는 동안 밤낮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마음 편하지 못하였습니다. 마 땅히 삼년을 봉상하여야 하오나 세속에 따라 상복을 벗 고저 하오니 영혼은 묘소 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에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슬픈 마음으로 상사를 드리오니 흠향 하 시옵소서
라. 서원(書院)의 축(祝) ; 도남서원의 축문을 중심으로
서원은 일생동안 유교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적을 남겼던 선현(先賢)의 위폐를 모시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길이 본을 받고자 하는 수도교학(修道敎學)의 장(場)이다. 서원에서도 향교와 같이 봄, 가을 또는 일년에 한 차례 엄격하고 까다로운 절차에 따른 향사(享祀)를 봉행하는데 여기에도 독축(讀祝)의 시점이 가장 핵심적 의례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서원 축문의 예를 편의상 상주의 대표서원이라고 할 수 있는 도남서원의 축문을 들어보기로 한다. 서원의 축문은 대개 모셔진 선현 각위별(各位別)로 생시에 높은 도덕적 행적을 축약(縮約)한 문장으로 구성 되어 있어 도남서원 역연 창설당시에는 문충공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한 5현사(賢士) 각각 축문이 있었다. 그러다가 1617년(광해9)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추배(追配)하면서 5현 각위의 축문을 하나로 단일화 하였다. 도남서원의 축문을 상고하기로 한다.
1) 창설당시 봉향 5현 각위 축문의 본문(本文)
0.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倡明絶學 吾道始東 不有先覺 孰開後蒙
창명절학 오도시동 불유선각 숙개후몽
절학(儒學)을 밝히고 인도하여 우리의 도(儒道)를 동방에 시작 하셨도다.
선각이(포은을 지칭) 아니시면 누가 몽매한 후학을 열어 주었으리까
0.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先立乎大 蹈繩循墨 篤信好學 殞不迷側
선립호대 도승순묵 독신호학 운불미측
먼저 대도를 세우시고 승묵(法度)에 따라 행하셨나이다.
독실하게 믿으시고 학문을 좋아하여 운명시 까지 원칙을 지키셨도다.
0.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心存思道 務在踐實 持敬之功 夷險若一
심존사도 무재천실 지경지공 이험약일
마음은 도를 생각하는데 있었고 힘쓰는 것은 실천에 있으셨도다.
공경으로 지신한 공은 편하거나 험하여도 한결 같으셨다.
0.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居敬精義 緝熙日新 立言垂範 惠我後人
거경정의 집희일신 입언수범 혜아후인
공경하게 살고 의리에 정통하여 덕화의 빛이 날로 새로워 졌더이다.
말씀으로 모범을 보여 후세에 은혜를 베풀었나이다.
0. 퇴계(退溪) 이 황(李 滉)
敬義成德 禮樂在躬 博約之學 繼開之功
경의성덕 예악재궁 박약지학 계개지공
공경과 의리로 덕을 이루셨고 예악을 몸에 지니 셨도다.
박학과 약례의 학문을 펴셨고 유학을 계승하고 개발한 공이 크셨습니다.
2) 축문 5을 하나로 하다. - 1635 (인조13)
維天佑文 維地炳靈 旣偈于始 亦集厥成 儒鐸迭振 紹往開後
유천우문 유지병령 기게우시 역집궐성 유탁질진 소왕개후
하늘은 사문(斯文)을 도우시고 땅은 정령(精靈)을 빛내시어 비로소 번성 하옵고 또한 그 거룩하신 덕을 모았소이다. 유도의 경계를 갈아들며 떨치시어 전현(前賢)의 뜻을 글로 이어받아 후학을 열어 장려하셨나이다.
축문은 대개 위 5선생 각위 축문과 같이 4문단 16자로 구성하는 것이 상례인데 5위의 축문을 하나로 하는 합축문(合祝文)은 6문단 24글자로 하였다는 것은 특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도남서원에는 주벽(主壁) 5현(賢)을 봉향(奉享)한 이후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 준(李 埈)을 추배(追配) 하였는데 추배 4현사에 대한 축문은 없고 앞에 향교 문항에서 거론한바와 같이 배식상향(配食尙饗)으로 행사한다.
마. 마을 민간신앙(民間信仰) 제의(祭儀)의 축문(祝文)
전통시대에는 마을의 민간신앙으로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여러 가지 제사의례가 있었다. 제사의 종류를 열거해 보면 성주제(聖主祭), 조왕제(竈王祭), 삼신제(三神祭), 등 가신제(家神祭)를 비롯하여 산신제(山神祭), 서낭제, 동구제(洞口祭), 정주제(井主祭), 보제(洑祭), 등등 신(神)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에는 거의 제사를 지내고 제사에는 반드시 축문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상주시 화북면의 민간신앙 제의 사례 몇 가지를 들어보기로 한다.
1) 조왕제(竈王祭) 축문(祝文)
조왕제는 불(火)의 신으로서 부엌을 다스리는 주부를 보호하는 신으로 부엌의 솥 뒤나 부뚜막에 흙으로 조그마한 단(壇)을 만들고 제를 올리는 의례이다. 조왕제 축문의 예를 여기에 옮긴다.
國有社稷 民有城隍 人各有戴 家有窕王 窕王御位 屋留中央 政我 一家
黜災納祥 疾病斯遠 擧室安康 歲熟農功 倉凜收藏 凡於獸畜 角成羽翔
蒙恩至大 俾也敢忘 視往知來 恃無恐慌 歲一薦誠 吉辰復陽 庶羞雖薄
紙幣丹香 窕王肯顧 歆此崇觴 神安主吉 於萬年長
국유사직 민유성황 인각유대 가유조왕 조왕어위 옥류중앙 정아일가
출재납상 질병사원 거실안강 세숙농공 창름수장 범어수축 정성우상
몽은지대 비야감망 시왕지래 시무공황 세일천성 길진복양 서수수박
지폐단향 조왕긍고 흠차숭상 신안주길 어만년장
나라에는 사직이 있고 백성에게는 성황이 있다. 사람은 각기 믿음과 받드는 곳이 있 으니 집에는 조왕이 계시도다. 조왕께서 우리집 용마루에 자리하고 계셔서 우리 집 을 다스리도다. 재앙은 물리치고 길상은 드리시와 질병은 멀게 하여 온 가족이 편안 하고 농사는 풍년들어 창고에 가득하도다. 기르는 가축도 잘도 크고 있으니 이렇게 입은 큰 은혜 어찌 감히 잊으리까. 지난일 보아 올 일 알겠사와 믿어 두려움 없도다. 일년에 한 차례 드리는 정성 좋은날 동지달 초하루 날 이외다. 차린 것이 박하와 백 지 폐백과 붉은 향 불 뿐이오나 조왕께서 기꺼이 돌보시와 올리는 술잔 흠향 하소서 조왕신 평안하시고 주인 좋은 일 많아서 길이길이 함께하사이다.
위 축문의 내용을 보면 소원이라기보다 은혜를 드러낸 것이며 그 욕망은 고작 가족의 건강, 농사의 풍년, 가축의 성장 등으로 소박하고 단조로운 백성의 심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2) 마을 산신제(山神祭)
산신제의 제신(祭神)은 산 그 자체를 산신으로 믿으며 외경(畏敬)하는 신격으로서 산을 의지하고 사는 부락민들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 하도록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서 이른바 산신령이라고 하여 호랑이를 신격화하고 옛 적에 흔히 있었던 호랑이로부터 화를 입지 않도록 하는 제사 의식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우리시 화북면 용유리 병천마을 산신제 축문을 예로 한다.
병천(甁泉)마을 산신제 축문
山皇大神位前
除避禍厄 維光維榮 極降百福 極消萬殃 於萬斯年 居人信仰 歲歲年年
修德無窮 旣受大德 豈曰疎外 月更歲新 敢齋沐浴 謹以酒果 至誠感祝
好好春風 人人和氣 六畜繁盛 百穀豊穰 虎狼猛獸 逐出遠方 盜賊亂類
莫敢仰敬 時病惡疾 一切消滅 殃消福惠 維其所願 特下慈悲 以護以愛 格斯
산황대신위전
제피화액 유광유영 극강백복 극소만앙 어만사년 거인신앙 세세년년
수덕무궁 기수대덕 기왈소외 월경세신 감재목욕 근이주과 지성감축
호호춘풍 인인화기 육축번성 백곡풍양 호랑맹수 축출원방 도적란류
막감앙경 시병악질 일절소멸 앙소복혜 유기소원 특하자비 이호이애 격사
산황대신위시여 화액을 피하게 해주시어 광영을 비옵니다. 지극하게 백복을 내려주시고 지극하게 만가지제 앙을 없애 주시기를 오래도록 터 잡아 살고 있 는 마을 사람들은 우러러 믿습니다. 세세 년 년이 무궁하게 닦으신 덕으로 이미 큰 덕을 받았으니 어찌 소외 하시리까
새해를 맞이하여 목욕재계하고 삼가 주과를 차려놓고 지성으로 감축하오니 호 호 춘풍에 마을 사람 모두가 화기가 가득하고 가축들이 번성하며 백곡이 풍성 하고 호랑이와 사나운 맹수들을 먼 곳으로 쫓아 버리시며 도적이나 난류들이 없도록 해주시고 돌림병이 일체 소멸되어 재앙이 없고 복이 있도록 특별한 자 비를 내려 주시기를 소원 하오니 사랑으로 보호해 주시옵소서
3) 마을 동신제(洞神祭) 축문
마을 동신제는 동고사(洞告祀), 동구제(洞口祭), 동제(洞祭), 골맥이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지는데 앞의 2)항 산신제를 포함하여 부르기도 한다. 동신제는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 부분의 지형이 허(虛)하다는 관념적 의식에서 나무나 돌을 쌓아 방어적 시설을 하여 신격화 하고 매년 제사를 올리는데 우리시 화북면 입석리 회룡마을의 축문을 예로 한다.
回龍土地之神
維天鐘氣 司地屬民 配于皇天 保斯里巷 靑華淑氣 回龍呈祥 神明所佑
異怪遁藏 至頑知敬 精潔修湮 比端生祥 降祉滌惡 拜奠酒牲 詭焚香越
從有持挾 敢望丕錫 癘疾不入 文明大闡 咸應斯到 六畜滋盛 齊務大本
均等檣事 高築石凜 獻盛循同 星月曜明 天地開除 鑑期格斯 虔告謹告
회룡토지지신
유천종기 사지속민 배우황천 보사리항 청화숙기 회룡정상 신명소우
이괴둔장 지완지경 정결수인 비단생상 강지척악 배전주생 궤분향월
종유지협 감망비석 여질불입 문명대천 함응사도 육축자성 제무대본
균등장사 고축석름 헌성순동 성월요명 천지개제 감기격사 건고근고
오직 하느님만이 기운을 북돋우시고 땅에서 우리 백성을 보살 피시니이다.
천황봉에서 우리 마을을 보우하시고 청화산 맑은 기운은 우리 회룡동 마을에 상서 러움을 내려 주시이다. 영명하신 동신의 도움으로 괴이하고 나쁜 것들은 숨겨 감추 게 하여 주시기를 지극한 공경으로 정결하게 제사를 수행하오니 바르게 상서러움이 생기고 악을 말끔히 씻어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면서 엎드려 술과 고기를 드리고 꿇어앉아 향불을 피우나이다. 이에 쫓아 의지하여 감히 나쁜 돌림병이 들지 못하게 큰 하사를 주시고 문명이 크게 천양하여 모두 우리 마을에 이르러 응하도록 비나이 다. 집에 기르는 가축이 잘 자라고 모두가 농사의 근본 됨에 힘써서 고루고루 곡식 이 잘 되어서 곡식더미가 높게 쌓이도록 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다 같이 담아 드리오니 별님과 달님의 밝은 빛으로 천지를 열어 여기에 살펴 주시기를 경건히 고 하나이다.
4) 기우제(祈雨祭) 축문(祝文)
기우제는 가뭄이 극심 할 때 비를 내리도록 기원하는 제사로 우제(雨祭), 천제(天祭), 무제라고도 한다. 상주에서 대표적 기우제는 갑장산 용지터(龍淵)에서 행공한 축문을 예로 하거니와 이 축문은 조선말기 영조 년간으로 추정하는 시기에 당시 상주목사가 주관하였던 기우제에 식산 이만부(李滿敷)가 대신하여 지은 축문이다.
告 淵嶽山 代牧伯 作 息山 李萬敷
有墮維南 華息怪物 庪縣在典 流潤洞澈 金受土功 乃蘊膏澤 胡孽以然
冥化或惑 旣鼓乍霂 淰雲卷飇 我耨而兆 我苗而焦 偏謁浸砠 昭鑑斯邈
丘民麗瘵 惟祈神赫 肹蠁潔精 代衆敢浼 無慳霈霈 上輔眞宰
고 연악산 대목백 작 식산 이만부
유타유남 화식괴물 기현재전 류윤동철 금수토공 내온고택 호얼이연
명화혹혹 기고사목 념운권표 아누이조 아묘이초 편알침저 소감사막
구민려채 유기신혁 힐항결정 대중감매 무간패패 상보진재
첨예한 산이 남방에 서 있고 기괴한 물건들이 모여 살고 있도다. 산제 올리는 법이 있어 만물이 윤택하고 만사가 형통하도다. 금 생 토 오행이 이따라 금이 토의 공을 받으니 마침내 기름지고 윤택함이 쌓이도다. 어찌 요물의 해가 미쳐 이럴 것이랴. 신령의 조화가 혹시 변한 것이로세 이미 신문에 고하여 잠깐 비가 내리더니 비 구 름 걷히고 불바람만 부는구나. 밭에 김매고자 하나 생각도 못하고 곡식 싹은 아예 타 버렸도다. 알현하여 기원하기에도 난관이 많아오니 존신의 밝은 보살핌 멀어졌 소이다. 고을의 백성들이 허로(虛勞)병에 걸려서는 오직 산신의 빛나는 공덕에 기 도 드립니다. 풍성하고 정결한 제수로 여러 사람들을 대신하여 감히 기원 드리오니 단비를 아끼지 마시고 상천 (上天)의 도움 얻어 풍우를 맡아 농사 잘 되게 해 주소서
5) 시산제(始山祭) 축문
현대인들의 등산 레저 문화가 확산 되면서 등산단체에서 첫해 처음으로 단체 등산을 하는 날에 산신에게 올리는 제의례에 전통적 축문의 예시이다.
泰山之神 伏以
素好看山 竝愛自然 肢體鍛鍊 心身修養 登高攀壁 不辭險埈 伏惟 尊神
庶鑑微衷 寧加保裕 以安山行 謹以 酒果 敬伸尊獻 尙饗
태산지신 복이
소호간산 병애자연 지체단련 심신수양 등고반벽 불사험준 복유 존신
서감미충 령가보유 이안산행 근이 주과 경신존헌 상향
태산지신께 엎드려 고하노니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몸을 단련하여 심신 을 수양하며 높은 암벽을 오르고 험준한 곳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신령님께 엎드 려 비오니 너그럽게 살펴 주시고 돌보아주시어 올 한해 무사히 산행을 할 수 있도 록 도와주시기를 빌면서 작은 정성으로 술과 과일을 차려 올리오니 흠향하시 옵소서
이상 현대인들이 접하고 있는 몇 가지 제의례 축문의 예를 들어 보았다. 이밖에도 묘의 면례(緬禮), 묘에 석물(石物)입석(立石), 각종 건물 낙성식. 건물상량고사, 등등 의례행사 행위마다 축문이 있으니 이루 혜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4. 전통축문의 형식과 독축(讀祝)
가. 축문의 형식
전통축문의 형식은 제의례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다르다 하겠으나 일반적으로 .가로 24cm☓세로36cm 정도 또는 16절 정도의 한지(韓紙)에 세로로 하여 작성하는데 아래 위 균형을 맞추어 제를 올리는 대상을 표기하는 줄의 첫 글자와 마지막 ‘향(饗)’자는 다른 줄의 첫 글자보다 한자 높여서 쓰는 것이 상례이다. 축문의 글씨는 반듯한 해자(諧字)로 정성을 드려 붓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나 현대에 와서는 컴퓨터에 서식을 입력 해 놓고 가변성이 있는 부분에 적합한 어구를 삽입하여 편리를 도모 하는 사례도 있다고 하나 편리성 보다는 엄숙한 제 의례를 봉행하는 특수한 분위기에 따라서 원칙대로 여행(勵行)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참고로 도남서원의 축문을 예로하여 별첨한다.
나. 축문의 독축(讀祝)
글자 그대로 제청(祭廳)에서 축문을 읽는 것을 둑축이라고 한다.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太高不可 太低亦不可也 假聲亦不可也 只讀 如泣如訴 如怨如慕也
태고불가 태저역불가야 가성역불가야 지독 여읍여소 여원여모야
너무 큰 소리로 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작은 소리로 해도 안된다. 일부러 필요 없 는 소리를 내도 안되니 다만 읍조려 호소하는 듯 원망하고 사모 하는 듯이 읽어야 한다
라고, 하였으니 조상신위(祖上神位)를 생각하는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흐느끼며 읍조리 듯 조상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하소연 하듯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의 과문한 탓으로 완벽한 고저음절(高低音節)과 박자에 맞는 독축의 전형(典型)을 보지 못하였으나 현대인들이 신문을 읽듯 하면 안되겠지만 제의례 라는 특수성에 맞추어 문단(文段)마다 띄워서 참사자 들이 살짝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엄숙하게 읽어 내려가면 무난한 독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문단마다 적절하게 띄우고 적절한 고저 음절에 따라 읽는다고 하는 것은 먼저 그 축문의 내용을 알아야 하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만큼 축 읽는 사람이 먼저 해당 축문에 대한 내용을 공부하여야 할 문제라고 본다. 축 읽는 축관(祝官)의 자리 위치는 신위(神位)에 술잔을 올리고 정중히 꿀어 앉은 헌관(獻官)의 왼쪽편에 공손히 끓어 앉는 자세로 하는 것이 상례이다. 독축을 할 때 헌관과 축관 이외 다른 참사자 들의 자세에 대하여는 간혹 논란이 되는 경우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 하였지만 제사에 가장 중심되는 시점은 독축을 하는 그 시점이기 때문에 필자의 사견으로는 독축을 할 때 참사자 모두는 국궁(鞠躬)의 자세로 몸을 굽혀 엄숙하고 정중함을 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 하는데 일부 가문에서는 헌관과 축관 이외는 그대로 서 있어도 무방하다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안다.
5. 전통 축문의 현대적 개선(改善)
모든 제사의 축문에 대하여는 그 성격과 중요성을 이미 밝힌바 있거니와, 서두에 지적한 바와 같이 순 한문으로 된 축문에 대한 이해도는 무의미 할 정도로 맹목적이라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 원인은 급격한 세태의 변화로 제사에 대한 의식이 크게 변한 까닭이라고 하겠지만 제의례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시대에 부응하여 참사자를 깨우치는 노력이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몇 가지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저 한다.
첫째 향교나 서원 그리고 조상의 시조, 중시조, 마을 동제사 등 대중이 모여서 행사하는 제사에는 제의례를 주관하는 집례나 축관이 행사 전에 축문의 내용을 알려주거나 한문 내용을 우리말로 해석한 것을 인쇄 고지하여 참사자로 하여금 이해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같은 내용을 행사 때마다 반복한다는 것이 어쩌면 수다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축문에 대한 이해도를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뜻에서 당분간 수년 동안은 이어 가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을까 한다. 아울러서 독축 시에는 참사자 모두가 경건하게 국궁(鞠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병행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제사는 죽은 부모 조상과 살아있는 자손간 대화의 시간이라고 한다. 가정의 기제사와 묘사는 가족적 분위기에서 오손도손 살아 있는 가족 간에 길사(吉祀)이요 대화의 장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축문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한 해 동안 있었던 가정사를 죽은 부모 조상에게 보고(報告)하면서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하고 잘 못한 일은 반성하여 앞으로 고쳐 나가 화합하자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축문의 내용을 이 뜻에 맞추어서 현대식으로 글을 지어 낭독한다는 어떤 유력자의 tv 강연을 듣고 그야말로 본받을 만한 사례로 공감 한 바 있다. 이글이 바로 축문이요 먼저 간 사자(死者)에게 올리는 보고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글 짓는 사람은 참사자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보고, 글의 형식이나 내용이 화려하거나 기교가 부족하여도 허물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사랑받던 어린 초등학생 손자가 할아버지 에게 드리는 편지글이나 동시(童詩)도 무방하고 글 잘하는 자손들의 차원 높은 문장은 더욱 좋은 축문이라고 본다. 나아가 이와 같은 글을 계속 모으게 되면 한 가정의 가족사가 될 것이요, 한 문중의 역사로 발전 할 것이다. 급변하는 세태에 따라 집안에 모든 제사를 한 번에 지내거나 내외분을 한날에 지내는 집안이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제의례의 축문은 정통한 전통적 형식이 있을수 없는 만큼 이에 적정한 문안을 마련하여 행사 할 수밖에 없다.
셋째 상례에서는 제한된 기간에 여러 절차를 거치면서 경황없이 지낼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옛 절차를 그대로 한다는 것이 현대인들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실정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태의 변화에 따라서 대폭적으로 간소화 되었다고 하지만 축문의 내용은 한문 그대로를 낭독하지만 그 내용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 허다하다.
따라서 앞의 상례 조목에서 서술한바 전통 축문을 낭독하되 풀어 해석한 내용의 요지를 알아듣기 쉬운 말로 고(告)하는 것을 병행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를 테면 발인 시에는 “아버지 또는 할머니 이제 천년 만년집 인 묘소 자리로 떠납니다.”
라고 한다든지 평토 고유시는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육신은 천년만년 집 땅속 광중에 모시고 아버지 혼령은 아버지가 살아오시던 집으로 모시고자 하오니 함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넷째 조왕제는 전통시대 민가 주택에서 하던 특별한 민속제로서 아파트 생활을 하는 현대인에게는 있을 수도 없고 농촌 가정에서도 없어진지 오래되어 거론을 생략하고 한발시에 현대에서도 간혹 있는 기우제나 현대인들의 건강증진을 위한 등산 클럽에서 년차 한차례 행사하는 시산제의 경우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 문장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한글로 하여 격에 맞는 문안의 축문으로 행사 하는 것이 옳은 처사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이밖에 묘소에 비석을 입석 하거나 면례(緬禮)이장을 하는 의례의 축문은 가급적 전통의례 전고(典故)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보겠으나 이 또한 어려운 한문 문장보다 한글로 하여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여섯째 불교식으로 절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기독교식 추도식으로 제사의 형식을 가름 한다고 하면 해당 종교 의식 그 자체로 축문은 생략한다.
6. 맺음글
세태는 급격하게 변하였고 앞으로 더 빠르게 변하여 제사 자체의 존속에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도 하지만, 수백년동안 이어져 온 민족적 전통이 어떤 형태로던 이어져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까지는 대체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이에 따라 향교나 서원 그리고 일부 유교적 전통 가정에서는 옛 제사 의례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며 일부이기는 하지만 마을 동제사나 기타 민속적 제의례를 예전대로 이어오는 곳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형법에 제사 방해죄라는 조항이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조항이 있다는 자체가 아직까지는 제도상에서도 제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한다.
제사에는 어떤 형태이던지 제의례의 격에 따르는 축문이 있어왔고 반드시 필요한 제의례 조목이라는 점을 이해하면서 지금까지 향교의 석전의례를 위시하여 서원의 향사, 가정의 기제사와 상례, 그리고 마을의 민간신앙에서 행사하는 몇 가지 제의례에 대한 축문의 내용을 살펴보고 어려운 한문 문장으로 된 축문으로 하여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현대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을 제시 해 보았다.
축문의 사례는 제사의 종류에 따라서 각각 다를 수 있는 만큼 모든 제의례에 축문 전반을 거론 하기는 어렵다 하겠으나 조금 더 많은 사례를 들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몇 가지 대표적 사례로 그쳤고 서술의 내용 또한 부족한 점이 많을 것으로 자인 하면서 독자 재현의 질정(叱正)을 기다리는 바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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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목춘 편저《증보축문집람》2007, 보경문화사
3.이남철 편저《가례서식백과》2002, 한진출판사
4.《도남서원속지》2006, 도남서원 속지 발간위원회
5.《화동승람》1992, 화북면지편집위원회, 계명인쇄사
6.박재식 편《가례편람》2000, 종합출판 문창사
7.김기탁 저《상주 민속문화의 이해》2003, 민속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