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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도강은 영암군의 속현, 탐진은 장흥부의 속현이었다. 주현이 서로 달랐다. 고려의 지방정치는 주현과 속현의 지방 향리가 실세이었다. 주현은 안렴사(정5 품)가 파견되었으나 그 임무가 통치는 아니었다. 향리는 중앙관료와 동급이며 이들을 호족이라 부른다. 하지만 기반이 안정된 토착세력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할 듯하다.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는 데릴사위 제도라서 특정 성씨만의 집성촌을 이루기는 어렵고 외부에서 성씨들이 이동해 온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성씨 중심의 집성촌은 없다. 그리고 향리가 되거나 중앙관료로 진출하거나 중국 유학을 가지 않으면 성을 쓸 이유도 없었다. 조선시대의 기본단위 집성촌과는 달리 고려시대의 기본 단위는 더 넓은 범위의 군과 현이다. 사찰 중심으로 만 명 중심의 두레라는 형식으로 살았다. 집성촌은 조선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송나라에서 이양법 모심기가 도입되어 농업이 발전하면서 100백 정도의 작은 단위인 동·리가 발전하고 집성촌이 생겨난다. 여기는 성씨가 중심이 된다. 참고자료: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2화 및 13화.
조선 초 1417년(태종17년)에 도강과 탐진이 합쳐서 나주목 관할의 강진현이 된다.
아래 글에서 고려시대의 도강과 탐진의 상황을 살펴 보자.
자료 소스: 김덕진 교수의 '손에 잡히는 강진 역사'<23>고려에 의해 도강군과 탐진현으로 (강진일보, 승인 2014.09.02). <광주교대 교수/ 역사교육학>
고려는 혼란한 호족의 시대를 평정하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후 국가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지방제도도 새롭게 개편했는데, 우선 전국을 5도 양계로 편성했다. 도(道)라는 광역 행정구역이 우리 역사상 처음 등장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때 전라도(全羅道)도 처음 나타났는데, 전주와 나주에서 한 자씩을 따서 작명한 것이다.
도가 지역감정의 모체가 되고 있다며 도라는 행정구역을 없애 잘게 쪼개자는 의견도 있으니, 지역감정의 원인을 엉뚱한데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고려는 군현도 개편했다. 강진에 있는 양무군을 도강군(道康郡)으로 바꾸었지만, 탐진현을 그대로 탐진현(耽津縣)으로 두었다. 강진 지역의 고을이 도무→양무→도강, 동음→탐진으로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백제 때부터 고려 때까지 1천년간 강진 땅에는 두 개의 고을이 있었다. 우리 역사의 장기 지속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무 → 양무 → 도강, 동음 → 탐진… 강진의 이름이였네 (이는 정확하지는 않음. 탐진은 현재의 탐진읍성과 바다쪽(남쪽)을 지칭함).
도강군의 토성은 김(金), 조(趙), 황(黃), 임(任) 4개
탐진현의 토성은 최(崔), 조(曹), 유(兪), 안(安), 정(鄭), 하(河) 등 6개
1. 내륙의 도강군
고려 때 도강군은 북쪽 내륙의 현재 병영 부근에 위치했다. 병영면 중고 마을에는 향교가 있었던 터라는 곳이 전해오는데, 향교는 고려 초기부터 등장했으니 전언은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중고와 가까운 하고 마을에는 동헌터, 빙고등, 옥사터로 알려진 곳이 전해온다. 하고 마을이 옛 도강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인 것 같은데, 도자기나 기와 및 청자 파편이 출토되고 있으니 확실한 것 같다. 현지 주민들도 그렇게 들어왔다고 한다. 병영의 넓은 들을 감안하면 고을이 들어서고도 남을 조건이다.
고려때 도강군의 치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병영 하고마을 회관앞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도강은 금릉(金陵)을 별호로 했다. 이 별호는 지금까지 강진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도강에는 회선정(會仙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도강 치소에 있었을 것 같은데, 하고 마을 사람들은 동네 뒤 동산에 있었다고 한다. 출장 관리들이 오르고서 읊은 시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김극기(金克己)가 “산과 시내는 바로 그림 같고, 환영 같은 누대는 귀신의 솜씨를 빌렸는가”라고 읊었으니, 경치가 아름다웠던 것 같다. 그 터에 오르니 실제 주변이 훤하게 내려다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도강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屬縣)이었다. 속현을 관장하는 고을이 주현(主縣)이었는데, 주현에만 수령이 파견되었다. 바로 이 주현⋅속현제도가 고려 행정제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도강은 영암의 속현이었다. 영암의 수령이 도강을 다스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도강에도 마침내 1172년에 감무(監務)라는 수령이 파견되어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감무는 일종의 임시직이어서 온전한 지역통치에는 한계가 있었다. 도강의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고려 말에는 도강군에도 군수라는 수령이 정식 파견되었다. 박원계(朴元桂, 1282~1348)라는 사람이 지군(知郡), 즉 도강군의 군수가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2. 해안의 탐진현
반면에 탐진현은 남쪽 해안가의 현재 읍내 부근에 위치했다. 탐진현 치소는 나중에 강진현 치소로 활용되어 오늘날 강진군 소재지의 모태가 되었다. 탐진은 오산(鼇山)을 별호로 하였고, 도강처럼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었다. 고려가 망할 때까지 인접 장흥의 속현이었다.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일조했건만, 도강과 탐진은 영암과 장흥에 예속되었다. 하지만 월남사⋅백련사의 존재나 대구면 일대의 청자 생산으로 보아 그 위상은 결코 낮지 않았을 것이다.
탐진현의 치소가 있었던 강진읍성 일대 모습이다. 지금은 군청이 들어서 있고 그 앞쪽으로 주택들이 밀집돼 있다. 강진읍성도 단계적으로 복원하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다.
3. 토성(土姓)이란?
이상을 보면, 고려의 행정제도에 수령이 파견되는 고을과 그렇지 않은 고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령이 파견되지 고을은 수령이 파견된 인접 고을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가령, 수령이 없는 도강과 탐진은 수령이 있는 영암과 장흥의 감독을 각각 받았다. 하지만 속현에 대한 주현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지휘감독 뿐이었고, 속현의 실질적인 통치 권한은 속현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도강과 탐진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누구였을까? 고려 때에 지방사회를 통치한 사람들은 향리(鄕吏)였다. 향리들은 신라말~고려초의 호족들을 재편한 것인데, 그 세력에 따라 위상이 달랐다. 이들은 토착 세력가로써 고을의 행정실무에 참여하여 조세와 군역의 부과, 호구와 전결의 파악 등을 담당했다. 수령이 임명되지 않았던 강진의 경우에도 향리의 역할과 권한은 막강하여 사실상 최고 지배층이었다. 향리를 배출한 집단을 토성(土姓)이라고 한다. 이들은 자기 고장의 행정실무에 종사하면서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어 중앙에 진출하기도 했으니, 향리층과 관료층이 한 집단이었다. 정도전 같은 인물도 향리 집안 출신이다. 향리층(이족)과 관료층(양반)이 각각 나뉘어져 있는 조선과는 다른 모습이다.
4. 도강과 탐진을 본관으로 한 성씨
전체적인 윤곽은 이 정도로 그치고, 이제 눈을 강진 땅 전체로 모아보자. 도강군의 토성으로는 김(金), 조(趙), 황(黃), 임(任) 4개 성이 있었고, 탐진현의 토성으로는 최(崔), 조(曹), 유(兪), 안(安), 정(鄭), 하(河) 등 6개 성이 있었다(『세종실록 지리지』). 모두 10개 성씨인데,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성씨로는 도강 김씨, 탐진 최씨, 탐진 안씨 3개 성씨뿐이고, 탐진 하씨는 몇 집 남아 있는 정도라고 한다(『강진군지』).
나머지 성씨들은 나중에 자신의 본관을 다른 본관으로 바꾸었다. 가령, 도강 조씨는 나중에 본관을 풍양으로 바꾸었다. 조선 세종 때에 과거에 장원 급제한 후 청렴근면으로 관료생활을 마감하고서 나주에 퇴거한 조주(趙注)가 도강 조씨 인물로 추정된다. 이 외에 도강 황씨는 본관을 창원으로, 도강 임씨는 본관을 장흥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탐진 조씨도 나중에 본관을 창녕으로 바꾸었다. 벼슬이 시중에 오르고 용과 바둑을 두었다는 일화가 남긴 조정(曺精)은 탐진 조씨 사람인 것 같다. 고려후기에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유력 가문으로 발돋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탐진 유씨는 본관을 기계로 바꿨다. 탐진 정씨는 중간에 사라진 것 같다.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로 들어갔고 돌아와서 청해진을 설치한 정년(鄭年)은 탐진 정씨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현재 강진에 살고 있는 도강이나 탐진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적은 편이다. 전국적으로도 몇 안 된다. 이런 일은 한국 역사에서 흔한 일이어서 전국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성씨가 도강 김씨, 탐진 최씨이다. 도강 출신 인물로는 인종 때에 활약했던 김함(金諴, 1076~1147)이 있다.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에서 관리로 활동했는데, 본관이 경조(京兆)였다고 하는데, 도강 김씨 인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김응정이 있고, 태인의 도강 김씨는 지역 명문가로 활약했다. 탐진 최씨 가운데 중앙에 진출한 인물로는 최사전(崔思全, 1067~1139)이 있다. 왕실 의사가 되었다가,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워 병부 상서에 올랐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관직에 역임했는데, 의술로 벼슬길에 올랐다고 한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최보가 유명한데, 많은 후학을 두었고 『표해록』을 남긴 장본인이다. 이 외에 탐진 안씨가 있는데, 공민왕 때 홍건적을 방어하는 데 공로가 컸던 안우(安祐)가 탐진 안씨이다. 안우의 집이 읍성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5. 향·부곡·소는 어떤 규모?
강진에는 향 1곳, 부곡 5곳, 소가 8곳 존재
고려 행정제도의 특징이라면 속현이 있어 고을 수가 지금보다 더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효율적인 국토 관리를 위해 그러하였을 것 같다. 또 다른 특징을 들라면 속현과 함께 향⋅부곡⋅소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향(鄕), 부곡(部曲), 소(所)란 일반 군현과는 다른 특수행정구역이다. 향과 부곡은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군현 아래의 하급 행정구획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소는 고려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거나 광물을 채굴하는 곳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강진 지역에는 1곳의 향, 5곳의 부곡, 8곳의 소가 있었다. 향으로는 평덕향(동쪽 10리)이 있었다. 평덕향은 나중에 일반 마을로 바뀌었을 것 같다. 그리고 부곡으로는 운수부곡(동쪽 20리), 영가부곡(북쪽 15리), 송계부곡(북쪽 15리), 미포부곡(남쪽 30리), 좌곡부곡(서쪽 60리) 등이 있었다.
나중에 작천의 상류에 있는 송계부곡은 통합 강진 읍치로 잠시 이용되었다가 고읍면으로 변했고, 좌곡산(현 서쪽 65리) 부근에 있는 좌곡부곡은 일반마을 좌일리로 바뀌었다. 이들 향과 부곡은 관아나 향교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관아의 재원을 부담하는 곳이었다. 이와는 달리 소로는 대구소(동남쪽 30리), 대곡소(동쪽 30리), 칠량소(동남쪽 15리), 산계소(북쪽 20리), 산심소(서북쪽 35리), 종옥소(남쪽 50리), 구계소(남쪽 37리), 부원소(남쪽 15리) 등이 있었다. 이들 소는 지방관아나 중앙에 납부할 도자기나 어물 및 광물 등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그 가운데 대구소, 대곡소, 칠량소는 나중에 면으로 승격되었고, 나머지는 일반마을로 바뀌었다. 이상에서 살핀 속현은 물론이고 향⋅부곡⋅소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완전히 사라졌다. 그에 따라 모든 고을에 수령이 파견되었고, 향⋅부곡⋅소는 일반마을로 바뀌거나 면으로 승격되었다. 뿐만 아니라 향⋅부곡⋅소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도 다른 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남해안 섬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완도군이 신설되기까지 여전히 강진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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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만약 1350~1380년 경에 탐진에 연고가 있는 훌륭하신 재상 분에게 왕으로 부터 봉군을 내렸다면 어떤 이름으로 내려질까요? 참고) 죽산이나 죽주는 죽성군으로 봉군을 내린다.
1) 탐진군? 2) 오산군? 3)강진군? 4) 탐성군? 5)오성군? 6) 강성군?
질문2: 만약 당신의 선조분이 탐진에 살았었고, 족보의 시작이 1300년 경이라면 본관으로는 어느 이름이 적합할까요? 참고) 고려시대에 대부분 본관은 그 당시 출신지역명에서 시작하였다. 그 당시 강진은 없었다.
1) 동음? 2) 탐진? 3) 오산? 4) 강진? 5) 도강?
질문3. 고려시대는 지방분권시대입니다. 호족이 지방 세력이고 왕은 지방에 안렴사를 파견하여 호족과의 긴밀한 협조를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왕이 지방 호족을 마음대로 임명하는 중앙집권적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면 순흥 안씨 (지역 연고는 경상도 흥주) 중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분이 있는데 그 분에게 봉군을 내릴 때 아무 연구가 없고 지압 호족이 거느리고 있는 타 지방에 봉군을 내릴 수 있을까요?
1) 있다. 2)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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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土姓)의 추가 해석
https://wunamwiki.org/w/토성분정
자료: 김수태(金壽泰), 고려초기(高麗初期)의 본관제도(本貫制度) - 본관(本貫)과 성(姓)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제8호 43~70쪽, 2000)
토성의 출현시기는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 때 고려후기 지방사회의 변화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사회에 성이 보다 사회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시기, 특히 지방에서 성이 강조되는 시기에 그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서 가계 기록의 편찬과 관련된 연구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고려후기에 郡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들어와서 성의 사용층이 더욱 확대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종서, 앞의 글, pp.92~95.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것은 이른바 신흥사대부 혹은 지방세력의 성장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한다. 이에 지방에서 성을 사용하는 의미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토성이 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이것은 중앙귀족들을 중심으로 본관과 성을 결합하여 사용하는 본관제도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경우 토성의 개념은 본관과 관련시켜 성관 혹은 성씨로 이해하기보다는 성과 관련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지적되듯이 토박이 성, 토착 성으로 해석되는 보다 단순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때 토성과 승려들의 적(등록)이 후삼국시기 이후 고려 초기의 일정한 기간동안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이해도 합리적으로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토성은 고려사회에서 고적이 작성되는 시기, 특히 고려후기의 사회변화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 주) 예문관 대제학 안지가 호남유람 때 지은 '행영'시는 강진의 병영을 가리키며 '오산'시는 탐진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