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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柏軒先生文集附錄卷之一 / 年譜
二十三年丙戌(1886,고종23) 先生四十四歲。
三月。鳳里閔公 璣容 訃至。
고종 | 22 | 1885 | 을유 | 光緖 | 11 | 43 | 봄, 南冥 曺植이 講道하던 雷龍亭을 중건하고, 허유와 함께 강학하다. ○ 松沙 奇宇萬이 내방하다. |
老柏軒先生文集卷之四十五 / 墓碣銘 / 鳳里閔公墓碣銘 幷序
蘆沙奇先生講道湖南。得聖賢不傳之緖於遺經。四方學者摳衣問業者日益衆。而獨以規模已定。篤實有餘。大蒙許可者。鳳里處士閔公璣容其人也。一字華衮。百世可信。盛矣哉。公字仲浩。璣容後改以璣植。而晩故初名著。閔氏驪興大族。自高麗尙衣奉御稱道始顯。鐘鼎聯世。僕射公懿,文景公令謨最著。至愉以大提學。知麗運訖。避地通津鳳翔里。自是世家通津。簪纓蟬爀。不讓勝國。有早從牛溪先生學。後以勳封驪陽君謚景靖者曰仁伯。仁伯有子垶。殉節江都。諡忠愍。尤菴先生立傳以表章之。於公爲九世祖也。方忠愍之殉也。一家男女長幼正冠笄。從容就義。鳳翔街上。十二烏頭。有光於東國。崇節勵行。其家法有自。曰衡周。曰魯欽。曰養耇。高曾祖三世諱也。考曰羲文。性醇謹質直。非其力不食。晩生公雖甚愛。義方嚴。公所著感慕錄。使讀者可涕。妣韓氏淸州人。李氏全州人。公李氏出。外祖廷喆也。公以純祖甲申。生于鳳翔里第。少孤貧窶。奉母入頭流山中。棲屑於天嶺會稽之間。幾三十年。晩居堤川以卒。壽六十有二。葬于堤之高論村右乾坐之原。配李氏。全州人淑之女。生一男二女。男丙益。女適金顯玉,鄭樂元。旣葬。顯玉收拾公遺文若干卷。屬不佞校讎。丙益拜泣走書五百里乞銘。顯玉亦將命焉。不佞起而謝辭曰。余於公夙抱執鞭之願。而旣不可得。則得相萬年之役。非幸歟。公行治之實。耳之而未及目。不目海中山。口三花樓臺。曩也吾哭公文一句語所以發也。柰公何。顯玉又誦其孤之言曰。義理精微。仁智之所見不同久矣。一言脗合。濯舊見而發新知者。今古幾人。惟先人有之。又曰先人之知某。某之知先人。一以心不以面。能模寫先人之心者。非某伊誰。不佞愀然良久曰何忍辭。公幼習擧業。旣長出入於方技外書者累年。一日偶於舊篋。得擊蒙要訣。慨然自失曰。而今而後。始知吾父母之恩。始知吾不孝之罪。始知聖人之不可以不學也。遂發憤力學。立心以不欺爲本。行己以篤恭爲主。刻苦謹嚴。雖竆且死而不悔。至於性理之說。不免爲見聞所局。雖以師門之昭晳痛闢而未敢遽信。雖以高足如顯玉之強辨。無隱而不卽允諾。留作商量。不敢騰口。久而後有得焉。觀於記聞數條。可見其孤所謂濯舊發新。信不誣矣。公之友多矣。知公如此者。不佞獨嘗蒙許。何忍辭。銘曰。
早悅何傷。一變則醇。迹公平生。要訣中人。允矣湖南。實寫公眞。表揭阡道。用貴千春。
1 | 閔璣容 | 1824 | 1885 | 閔璣植 | 驪興 | 仲浩 | 鳳里 |
1 | 閔璣容 | 1824 | 1885 | 閔璣植 | 驪興 | 仲浩 | 鳳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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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閔璣容 | 1824 | 1885 | 祭閔鳳里 璣容 文 | 祭文 | 鄭載圭 | 老柏軒集 | b146_094d |
2 | 閔璣容 | 1824 | 1885 | 鳳里閔公墓碣銘 幷序 | 墓碣 | 鄭載圭 | 老柏軒集 | b146_224a |
태천집(苔泉集) (1874)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인 민인백(閔仁伯)의 시문집. 6권 2책. 목활자본. 1874년(고종 11) 후손 민기용(閔璣容)에 의해 편집ㆍ간행되었으며, 아들 민성(閔垶)의 〈용암실기(龍巖實記)〉가 합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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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柏軒先生文集卷之三十九 / 祭文 / 祭閔鳳里 璣容 文
嗚呼。公其歸乎。竟作百年神交矣。公之問學德行之懿。聞於師友之間者稔矣。而猶是耳三花樓臺。不目海中山。安能得其眞境哉。以勉誨於我者。可知存省於己。篤信好學。守死善道。非公之自寫其眞者耶。推以及人。一何懇到。十行華墨。如對眞範。嗚呼。吾於公所不見者特外眞。其內眞則固若朝暮遇矣。公其歸乎。其歸也亦所不見者耳。其朝暮遇者則自若也。奚悲焉。每懷仰高風。念進德之日卲。冀良箴之續聞。嗚呼其不可復矣。遙望一慟。誰識其悲。惟靈尙其鑑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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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제14권 / 서(書)
김풍오 현옥 에게 답하다 경오년(1870, 고종7) 9월〔答金豐五 顯玉○庚午九月〕
한번 만나본 것도 뜻밖이었는데 손수 쓴 편지가 뒤이어 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편지를 보낸 뒤로 상(喪)을 치르면서 한결같이 편안한지 궁금하네. 나는 이전과 같은 모습이네. 편지에 보여준 뜻이 상세하여 나를 멀리하지 않은 심정을 깊이 알았으나, 그대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었네.
나의 못난 계책으로 말하자면, 우선 비교하며 상상하는 수고로움을 놔두고 처음 배우는 어린애로 자처하여 날마다 일과를 정한 다음에 다른 생각은 하지 말게. 이렇게 3, 5년 공부하면 아마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도리(道理)가 귀결되는 곳이 있을 것이네. 만약 하수(河水) 말하기를 마지않는다면 갈증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웅덩이에 괸 물을 마시는 자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매우 염려되네. 인편이 재촉하여 이만 줄이네.
[주-D001] 김풍오(金豊五) : 풍오는 김현옥(金顯玉, 1844~1910)의 자이다. 본관은 김해, 호는 산석(山石)이다. 어려서 산음(山陰)의 아촌(鵝村)으로 이사하여 민기용(閔璣容)에게 수학하고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57년 부친상을 입고 목포로 옮겨 민재남(閔在南)에게 수학하였으며, 그 뒤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문집에 《산석집(山石集)》이 있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이덕현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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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제2권 / 시(詩)
민경락 영설 에게 드리다〔奉閔景洛 泳卨〕
내가 경락을 한번 만나보았는데, 옛날 서로 알았던 사이와 같았으니 그것은 중호와 똑같은 민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편에 중호를 말하였으니, 보는 사람은 이해해주기 바란다.
중호는 십년 전의 친구로서 / 仲浩十年舊
고가의 기풍 있음을 알았네 / 已識古家風
남유한 군과 무슨 인연인가 / 南遊君何因
생면의 만남이 아닌 듯하네 / 若非生面逢
앉은 자리에 다른 말 적고 / 坐次少別語
중호의 궁한 형편 말하였네 / 說到仲浩窮
갈대 시들어 한해 저무는데 / 蒹葭歲已晏
나물국도 부족하니 어쩌리요 / 藜藿柰未充
가는 달에 편지가 도착했는데 / 去月有書到
돌아간 길에 고향 지났다 했네 / 歸路故山通
그대 돌아가면 필히 상대하리니 / 君歸必相對
문안의 말 다 하지 못하노라 / 寒暄語未終
말해다오, 강 위의 오두막집에 / 爲言江上廬
아직도 백발의 늙은이 있음을 / 尙有垂白翁
[주-D001] 중호(仲浩) : 민기용(閔璣容, 1824~?)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호, 호는 봉리(鳳里)이다. 제천(堤川)에서 거주하였으며, 기정진의 문인이다.[주-D002] 문안 : 본문의 ‘한훤(寒暄)’은 추위와 더위라는 뜻으로 문안, 안부 등을 의미한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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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제5권 / 서(書)
민겸오에게 답하다 기사년(1869, 고종6) 정월〔答閔謙吾 己巳正月〕
정진(正鎭)은 조의를 표하며 답장을 드립니다. 섣달에 예장(禮狀) 한 통을 천령(天嶺)에 사는 민중호(閔仲浩) 편에 부친 것도 늦었는데 얼마 안 있어 중호가 체류하여 출발하지 못하다가 정월 초에야 떠났으니, 아직 전달되지 못한 것이 확실하지만 조만간 받아보실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 주시니 바로 이때에 온 것입니다.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은 넓고 큰 덕을 지닌 분이지만 오히려 말하기를 “효자(孝子)가 먼저 편지를 보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형의 이 편지는 어찌 상식을 크게 뛰어넘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돌아보니 부끄럽고 땀이 나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형은 나를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십니까. 이 몸은 본래 허약한 체질로 태어나 병이 쌓여 숨결조차 미약하건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여든 살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몸뚱이는 사람과 같지만 장부(臟腑)와 정신은 가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젊었을 때에 책 속에서 간신히 주워 모았던 것들은 모조리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버렸으며, 아침에 보았던 사람도 저물녘이면 이미 누구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손자들도 해 질 녘에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소리만 듣고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손목은 뒤틀려서 붓을 놀리기만 하면 찌르는 듯이 아프고, 부모의 기일(忌日)에도 참여하지 못한 때가 가끔 있습니다. 묘소에 참배하는 것도 한 해가 지나도록 한 번도 가지 못했으니, 이것이 무덤 속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무덤 속에 있는 사람으로 처신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고향 마을에 친척들의 길흉사에도 모두 위문하지 못하고, 친구들의 편지도 긴급하게 의심난 점을 물은 것이 아니면 으레 답장을 빼먹습니다. 사방에서 실수로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할 경우에도 입을 꼭 다물고 한 글자도 짓지 않는 것은 감히 스스로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힘이 미치지 못하고 정신도 통하지 않아서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명(命)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저번에 중호(仲浩 민기용)편에 부친 위장(慰狀)은 아이들의 손을 빌려서 썼지만, 평생 어울린 처지로 헤아려 볼 때 마땅히 별고(別告)가 있어야겠기에 붓을 잡았습니다. 시험 삼아 생각해 보았으나 연무가 가슴에 자욱하여 두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겸오(謙吾)가 나의 포숙(鮑叔)이라면 어찌 나의 늙고 혼몽한 상황을 모르겠는가. 모른다면 말해본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붓을 던지고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보내온 편지를 보면 나를 모른다고 말할 수 없지만 나를 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오로지 무덤 속의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할 만한 일은 상중에 있으면서 정력이 쇠해지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겉과 속이 툭 트여서 마음을 숨긴 바가 없고, 남을 위해 충심을 다하고 교제를 신의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겸오(閔謙吾)가 되는 까닭이요, 이것이 그윽한 난초는 골짜기에 있어도 맑은 향기가 저절로 퍼지는 이유입니다. “함께 올라가는 것을 뿌리치지 않는다.”라는 한 마디 말은 말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찌 그리 말이 망녕된 것입니까. 옛 집이 묘소와 가까워서 이곳에서 거처하고 잠을 잔다고 하셨는데, 문공 선생(文公先生 주희)이 이미 한천(寒泉)에서 행했던 일이니, 내가 어찌 감히 찬사를 드리겠습니까.
소전(疏餰)의 예절은 반드시 자신을 굽혀 고례(古禮)를 따르십시오. 언제 일흔 노인을 위한 예절이 만들어진 적이 있었습니까. 다만 혈기(血氣)를 짐작하여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니, 이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를 들어서 남에게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리 집안에 일찍이 당숙 한 분이 계셨는데 본래 성품이 의젓하였습니다. 늙어서 상을 당하자 남과 마주하여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내가 채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과 마주하여 먹게 되면 예법이 통째로 무너지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야말로 노인들이 거상(居喪)하는 하나의 본보기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군현(君賢 민치완(閔致完))이 이른 나이에 명성을 날리니 재주로 보면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배우고서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하고, 벼슬을 하고서 여유가 있으면 배우라.”는 것처럼, 두 가지에 그 힘을 다해야 한다고 경서에서 가르쳤습니다. 다른 무슨 처방이 있겠습니까.
부봉(副封)한 글은 너무 허술했습니다. 당시 어리석은 소견으로 “나의 입장에서 오늘의 시사(時事)를 말할 때 지극히 중대하고 가장 긴급한 것이 이보다 더할 게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식견이 미치지 못하고 역량이 부족하기가 마치 강한 활을 당기는 것과 같았으니, 한 푼 한 치인들 어찌 억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백수(百壽)를 누리라는 말씀은 꾸짖고 욕을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나는 날마다 공자가 원양(原壤)을 꾸짖었던 한 구절을 외우며, 이마에 손을 얹고 저승자사가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죽은 뒤의 묘도문(墓道文)을 말씀하셨는데 또한 실없이 익살을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선현 중에서 스승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천진교(天津橋)의 원숭이가 한수(漢水)의 물가와 현산(峴山)의 위를 왕래한 적이 있었습니까. 동한(東漢) 시대에는 조빈경(趙邠卿)이, 우리 동방에는 퇴도옹(退陶翁)이 모두 스스로 명문(銘文)을 지었으니, 그만두지 않을 생각이면 이 분들을 본받는 것이 옳겠지요.
권신원(權信元)은 이름이 우인(宇仁)이며 정읍(井邑)에서 살았는데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곤궁함을 견뎌내며 절조(節操)가 있었으나 성격이 퍽이나 막혔고 또 그 잘못된 견해가 공부 속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공부가 미치지 못해 설득할 힘이 없어서 끝내 머리카락 한 올도 움직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8월 보름에 산방(山房)으로 들어갔는데, 산은 취서산(鷲棲山)이요 암자는 관불암(觀佛庵)이라고 합니다. 겨우 승려 두세 명이 있었고 산도 벌거숭이였으나, 시야가 퍽 트여서 답답한 마음을 씻어내기에는 좋은 곳이었습니다. 올 때에 한 권의 책도 휴대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눈을 감은 채 화두(話頭)를 든 중의 모습을 취해 보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매일 옷을 걷어붙이고 찾아와 어울려서 간혹 손님이 주인보다 두세 배나 많아 묵묵히 앉아 있으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재미없이 한 해를 보내고 지금은 다시 행장을 꾸려 산을 내려와 목숨이 다하기를 기다리는데, 아직도 그리되지 못하였습니다.
중장통(仲長統)이 말하기를 “걱정일랑 하늘 위로 날려 보내고, 수심일랑 땅속에 파묻어 두리라.” 하였으니, 나에게 무슨 근심거리가 있겠습니까. 부처가 말하기를 “사대(四大)가 각각 흩어지면 지금 이 허망한 몸은 또한 어디에 있는가.” 하였으니, 나에게 무슨 즐거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어슬렁어슬렁 왔다가 유유히 떠나면 이걸로 그만입니다.
재종질 양연(亮衍)이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몽점(蒙點)되어 6일에 사은숙배하러 길을 떠나니, 뜻밖의 광영에 온 집안이 감축하고 있습니다. 편지 종이의 끝을 자르지 않으시니 그 뜻이 매우 참되고 정(情)도 매우 두텁지만, 내 가슴속에 낀 운무는 위서(慰書)를 쓸 때와 같습니다. 좋은 지면(紙面)에 예전처럼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니, 형은 반드시 답답하다고 한 번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자세히 적은 것 또한 보내주신 편지가 심장을 뛰게 한 것입니다. 편지 속에서 한 번 찾아오겠다는 뜻을 은근히 보여 주셨는데, 한 가닥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한바탕 기이한 만남을 이룰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바랄 수는 없습니다.
○ 보내주신 각종 선물은 대단히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상중에 술과 고기를 벗에게 보내준 것은 노형이 지나치게 소탈해서 그럴 수도 있으나, 후생과 소년들이 본보기로 삼기는 어렵겠습니다. 매우 편치 않습니다.
[주-D001] 예장(禮狀) : 여기서는 위장(慰狀)으로, 민재남의 어머니 상(喪)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주-D002] 천령(天嶺) : 경남 함양(咸陽)의 옛 이름이다.[주-D003] 민중호(閔仲浩) : 민기용(閔璣容, 1824~?)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호, 호는 봉리(鳳里)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주-D004] 효자(孝子)가 …… 된다 : 사마광의 《서의(書儀)》에 보인다. 여기에서 효자는 부모의 상을 당한 상주를 지칭한다.[주-D005] 장부(臟腑) : 원문의 ‘내경(內景)’은 한의학 용어로, 음(陰)의 내신(內神)인 장부(臟腑)를 가리킨다.[주-D006] 문공 선생(文公先生)이 …… 일 : 주희가 부친 주송(朱松)의 상을 당했을 때 한천정사(寒泉精舍)에 거처하면서 삭망(朔望)에만 와서 궤연(几筵)에 절을 하였다. 한천정사는 주희가 강학하던 장소이며,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한 곳으로도 유명하다.[주-D007] 소전(疏餰)의 …… 따르십시오 : 나이와 건강을 감안하여 상중의 의식주 생활을 융통성 있게 하라는 충고이다. 원문의 ‘소전’은 재소 전죽(齋疏餰粥)의 준말이다. ‘재소’는 상복을 말하고, ‘전죽’은 죽을 말하는데, 《예기》 〈단궁(檀弓)〉의 소(疏)에서 “된 것은 전(餰)이라고 하고, 묽은 것은 죽(粥)이라고 한다.” 하였다.[주-D008] 채식하려는 : 원문의 ‘행소(行素)’는 상을 당하여 고기나 고기가 든 음식을 먹지 않고 채식(菜食)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고기를 먹는 것은 개소(開素)라고 한다.[주-D009] 배우고서 …… 배우라 : 《논어》 〈자장(子張)〉에서는 “벼슬을 하고서 여유가 있으면 배우고, 배우고서 여유가 있으면 벼슬하라.[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하였다.[주-D010] 부봉(副封)한 글 : 기정진이 1866년(고종3)에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즉 프랑스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한강 연안과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건을 일으켰을 때 올린 〈병인소(丙寅疏)〉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부봉’은 한(漢)나라 때 임금께 글을 올릴 때에 반드시 두 통을 만드는데, 하나를 부봉이라고 한다. 상서(尙書)가 그 부봉을 살펴서 옳다고 인정되면 임금께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주었다.[주-D011] 나는 …… 외우며 : 기정진이 이때 나이가 72세였으므로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은 한 것이 없고 오래 살고만 있다고 겸손하게 한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가 친구 원양(原壤)의 무례한 행동을 꾸짖으며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고 장성해서는 칭찬할 만한 일이 없고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이 상도(常道)를 파괴하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적(賊)이다.”라고 하였다.[주-D012] 천진교(天津橋)의 …… 있었습니까 : 전고(典故)와 문맥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문장대로 옮겨 놓았다.[주-D013] 조빈경(趙邠卿) : 한나라 때의 학자 조기(趙岐, 108~201)로, 자는 빈경이다. 경서(經書)에 밝고 재예(才藝)가 있었다. 《맹자장구(孟子章句)》 및 《삼보결록(三輔決錄)》의 저서가 있다.[주-D014] 퇴도옹(退陶翁) : 이황(李滉, 1501~1570)으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ㆍ퇴도(退陶)ㆍ도수(陶叟)이다.[주-D015] 잘못된 견해 : 권우인(權宇仁)의 성리설을 지칭하는 것으로, 《노사집》 권4에는 기정진이 권우인에게 보낸 성리 논변서가 여러 통 실려 있다.[주-D016] 취서산(鷲棲山) : 장성군과 고창군 경계에 있는 산 이름이다.[주-D017] 중 : 원문의 ‘사리(闍梨)’는 범어 ācārya의 음역인 아사리(阿闍梨)의 준말로, 제자를 바른길로 인도하며 가르치는 모범적인 스승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중들의 모범이 될 만한 고승을 지칭하는데 중을 통칭하기도 한다.[주-D018] 옷을 걷어붙이고 : 원문의 ‘건상(褰裳)’은 옛 유적을 찾아다니는 일과 관계되는데, 당(唐)나라 노조린(盧照鄰)의 《석질문(釋疾文)》에서 “이에 양식을 싸서 스승을 찾아가고, 옷을 걷어붙이고 고적을 탐방한다.[於是裹糧尋師,搴裳訪古.]” 하였다.[주-D019] 걱정일랑 …… 두리라 : 후한(後漢)의 중장통(仲長統, 180~220)은 자가 공리(公理)인데, 자신의 호방하고 원대한 뜻을 표현하여 “백 가지 생각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지극한 요체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 걱정일랑 하늘 위로 날려 보내고, 수심일랑 땅속에 파묻어 두리.[百慮何爲? 至要在我. 寄愁天上, 埋憂地下.]”라고 시를 지었다. 《後漢書 仲長統傳》[주-D020] 사대(四大)가 …… 있는가 : 《원각경(圓覺經)》에 나온다. 여기에서 사대(四大)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말한다.[주-D021] 양연(亮衍) : 1831~1911.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덕수(德叟), 호는 사상경수(沙上耕叟), 기정진의 문인이다. 기만진(奇萬鎭)의 아들이며 1858년(철종9)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음직으로 후릉 참봉, 경기전 영, 옥구 현감 등을 지냈다.[주-D022] 몽점(蒙點) : 삼망(三望) 가운데서 임금의 낙점(落點)을 입어 선임(選任)된 것을 말한다.[주-D023] 편지 …… 않으시니 : 민재남이 편지를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남은 종이를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보냈다는 말이다. 남은 종이에다 답장을 써서 보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안동교 (역) | 2017
答閔謙吾 己巳正月
正鎭頓首。竆臘禮狀一度。付天嶺閔仲浩亦晩矣。旣而仲浩滯留未發。正初始去。其未及傳致固然。早晩當入哀鑑。不謂專人委緘。乃在此時。司馬公豈不是盛德寬弘。而猶云孝子不當先發書。兄之此書。豈不出尋常萬萬。內顧慙汗。不知所以寘對。嗚呼。兄其以我爲生在世間也。此身素賦蒲柳之質。積病餘喘。拕到夢寐不到之望八。形殼猶夫人也。而內景魂神逝已久。少時黃卷中艱辛掇拾。都歸先天。朝見一人。暮已不辨阿誰。孫兒黃昏不名。不能聞聲而知。手腕辟戾。運筆輒刺痛。二親忌祀不參。往往有焉。墳塋瞻拜。經年不能一行。此非黃壤中人乎。黃壤人當以黃壤自處。是以鄕里親戚吉凶。都闕相問。朋友書問。非有緊急疑問。一例逋答。四方誤以文墨事。有所求請。噤不敢作一字。非敢自珍惜。力所不及。神所不貫也。雖以獲罪。其柰命何。向付仲浩慰狀。旣倩兒輩手寫。揆以平生相與。宜有別告。故旣呼筆矣。試思之。煙霧塞胷。頭緖莫尋。內自歎曰謙吾若爲我之鮑叔。則豈不知我之耄昏乎。如其不知。頰舌何益。遂投筆而停。今觀來書。不可謂不知我。而亦不可謂知我。何哉。不專以黃壤相待也。所可喜者。哀疚之中。精力不衰。且表裏洞達。無所隱情。爲人忠而與交信。此所以爲閔謙吾。此所以幽蘭在谷。淸香自播。不麾同升。一語言之者何人。何其言之妄也。舊構近墓。居宿于此。文公先生旣行之于寒泉。吾何敢贊辭。疏𩜾之節。跂及俯就。古禮何嘗爲七耋人設但斟酌血氣。行其所可行。在於當人。擧以問人則難乎爲答。如何如何。吾家曾有一堂叔。素性儒雅。老而居憂。未嘗對人食腥曰。吾非行素也。但對人食。則禮防專壞故不爲也。竊嘗妄謂此是老人居憂之一柯則。如何如何。君賢早年登颺。才華則然。學優仕優。交致其力。經訓有之。他有甚麽方文。副封疎綻。當時迂左之見。以爲以吾身說今日事。至重大最緊急。莫此之若故云耳。見識之所不逮。力量之所不到。譬如挽強弓。分寸豈可強也。百壽之說。近於詬罵。吾則無日不誦孔子責原壤一句。額手而望其符到耳。身後墓道。又似戲劇。前哲可師法者何限。而乃有天津橋胡孫。𨓏來漢水濱峴山上耶。東漢則趙邠卿。吾東則退陶翁。皆自作銘文。無已則效此可乎。權信元名宇仁。居井邑。就幽已十餘年矣。其人耐竆有節操而性頗滯。且其誤見。自工夫中出。吾則工夫不逮。說得無力。卒無以動撓一髮矣。去歲八月望。入山房。山曰鷲棲。庵曰觀佛。僧僅三兩。山亦童濯。而眼界頗遼。便於淘洗幽鬱。來時不帶一卷書。擬欲默坐合眼。若看話頭闍梨樣。而朋友每日有搴裳而追逐者。客或二三倍於主人。默坐之計。亦不行矣。無味過年。今不免還束行擔。下山待盡。姑亦未果耳。仲長統曰。寄憂天上。埋愁地下。吾有何憂。佛者之說曰。四大各離。今者妄身。當在何處。吾有何樂。于于而來。悠悠而逝。斯焉已矣。再從姪亮衍厚陵蒙點。初六日發肅命行。榮出不圖。闔宗感祝。紙尾不剪。其意甚眞。其情甚厚。而胷中雲霧。猶夫寫慰書之日也。好箇紙面。依舊還癡。兄必爲之叫鬱一聲。雖然覼縷到此。亦來幅之所鼓動。書中隱然示以一賁之意。若一縷不遂絶。獲成一場奇遇則幸矣。非所敢望也。○各種寄惠甚領感。草土中以酒肉饋友人。或是老兄過於疎脫。難爲後生少年法則。不安不安。노사집 제5권 / 서(書)
민겸오 재남 에게 답하다 무오년(1858, 철종9) 1월〔答閔謙吾 在南○戊午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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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正鎭)은 삼가 절하고 아룁니다. 조직교(趙直敎)가 40자(字)를 들고 갔는데 이렇게 일찍 받아보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방금 영함(令咸)이 소매에 편지를 담고 오니 참으로 바라던 이상의 것입니다. 작별한 뒤로 몇 년 동안 부모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여 옛날처럼 다복하시다 하니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정진은 용렬한 모습이 한결같습니다. 목전에 특별한 사고는 없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이 남김없이 빠져버려 억지로 기운을 차리려고 해도 도리어 술 취한 사람을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올해가 마침 회갑이어서 부모를 여읜 슬픔이 다른 때보다 갑절이나 더합니다. 어찌합니까. 여러 폭의 편지에 자세히 말씀해 주시니 다정한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참으로 짧은 편지로는 답장을 다할 수 없어서 별지에다 적어 놓았습니다.
【별지】
옛날에 만났다 헤어지기를 너무 서둘렀는데 헤어진 뒤로도 결국 잊히지 않았습니다. 정진(正鎭)도 그 연유를 몰랐는데, 어찌 깊고 두텁게 축적한 노형의 덕이 나를 심취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편지에 자세하게 말씀하신 바는 모두 진심에서 나온 것이니, 편지를 통하여 다시 얼굴을 뵌듯하여 경도(傾倒)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자(夫子)’ 두 글자는 회옹(晦翁 주희)도 감히 정춘(靜春)에게 받지 못한 것인데,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감히 집사에게 받는단 말입니까. 우리들이 서로 어울릴 때에는 결코 이처럼 지나치게 공손한 예절을 표해서는 안 되니, 부디 삼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을 수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지 않은 것은 이미 지난 일로 뒤늦게 꺼낼 얘기가 아니며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도 모두 적절치 않습니다. 정진도 본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을 구하던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어찌 작은 녹봉이나마 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자신의 성격이 본래 엉성하고 학문 또한 실정에 어둡고 막혀서 세상일과 인정에 끝내 아귀가 맞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점점 없어지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신과 기력마저 다 소모되어 건망증이 고질화하니, 이미 망가진 그릇이나 깨진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부서기회(簿書期會)는 참으로 맡아 처리할 수 없는 곳이니, 평소에 힘을 다해 직무를 보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처지가 되면 오직 사직하고 한가한 데로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따르고자 해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직소(辭職疏) 한 조목은 근세의 수령 중에서 상소하여 사직한 선례가 없어서 다만 처음에는 사람을 정조(政曹)로 보내 정병(呈病 병으로 사직 상소를 올림)하려고 했으나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순영(巡營)에다 드리고 세 번을 왔다 갔다 한 뒤에 전하께 아뢰어 체직되었던 것입니다.
산과 바다를 유람하는 것이 학문하는 일은 아니지만, 물욕에 대해 담담한 사람이 아니면 여기에 맛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노형 같은 사람은 이미 본분상에 긴요한 공부를 하였으니 여가에 노닐며 함양하는 데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명교(名敎 유학)를 훼손했다고 중벌을 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오담 노형(梧潭老兄)은 나와 동갑으로 타고난 기질이 완전하여 실로 우리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데, 무슨 병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궁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우리들은 이처럼 말라빠져서 아무리 젊었을 때 읽지 못한 책을 마음껏 읽고 싶어도 힘을 쓰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오직 ‘구방심(求放心)’ 한 구절을 조석으로 부지런히 일깨워서 크게 추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 늘그막에 할 한 가지 일입니다. 오담 형과 만났을 때에도 이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천왕봉(天王峯)에 올라 유람하는 일도 내게는 늦었습니다. 50리나 100리 되는 거리의 묘소에도 성묘하지 못하고 동기간에도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걸핏하면 몇 년을 넘기는데, 어느 겨를에 여기에 생각이 미치겠습니까. 형의 조카는 사람됨이 매우 평온하니 복가(福家)의 음덕으로 태어난 집안의 젊은이임을 알겠습니다. 감히 고문(高門 상대방 가문)에 축하를 드립니다. 〈회정기(晦亭記)〉를 지어 보내지만 어찌 글이라 하겠습니까. 그저 산중에서 한 번의 웃음거리로 삼으십시오.
[주-D001] 민겸오(閔謙吾) : 민재남(閔在南, 1802~1873)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겸오, 호는 청천(聽天)ㆍ자소옹(自笑翁)ㆍ회정(晦亭)이다. 고려조 절신(節臣) 민안부(閔安富)의 후손이며 경상도 산청(山淸)에서 거주하였다. 학당(學堂)을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고, 1867년(고종4)에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회정집(晦亭集)》을 남겼다.[주-D002] 조직교(趙直敎) : 조성가(趙性家, 1824~1904)로,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직교, 호는 월고(月皋)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 경남 진주 출신인데 1883년(고종20)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다. 월봉산(月峰山) 밑에 취수정사(取水精舍)를 짓고 후진교육에 전념하면서 최익현(崔益鉉)ㆍ정재규(鄭載圭)ㆍ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하였다. 장성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고문집》이 있다[주-D003] 40자(字) : 오언 율시(五言律詩)를 말한다.[주-D004] 영함(令咸) : 상대방의 조카의 높여 부르는 말이다. 민재남의 조카 민치량(閔致亮)은 기정진의 문인으로, 187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주-D005] 부모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여 : 원문의 ‘내의(萊衣)’는 노래자(老萊子)의 옷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노래자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며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小學 稽古》 ‘지양(志養)’은 부모의 뜻을 봉양한다는 말이다. 맹자는 증자가 부친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의 일과 증자의 아들이 증자를 봉양할 때의 일을 비교해 거론하면서, 효행은 비슷하지만 증자는 부모의 뜻을 봉양하였고[養志] 증자의 아들은 부모의 몸만 봉양한 것[養口體]이라며 진정한 효도는 뜻을 봉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주-D006] 정춘(靜春) : 유청지(劉淸之)의 호이다. 자는 자징(子澄)으로 임강(臨江) 사람이며 주희(朱熹)의 문인이다. 처음에는 형 정지(靖之)에게 배우고 주희를 만난 후 의리지학(義理之學)에 뜻을 두었다. 주자, 육상산(陸象山), 여동래(呂東萊)와 함께 아호(鵝湖)의 모임에 참가하였고, 주희의 명으로 《소학(小學)》을 편찬하였다. 저서에 《훈몽신서(訓蒙新書)》ㆍ《계자통록(戒子通錄)》ㆍ《묵장총록(墨莊總錄)》 등이 있다.[주-D007] 고을 …… 것 : 기정진은 1857년(철종8) 3월에 무장 현감(茂長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장(辭狀)을 올려 받지 않았다.[주-D008] 아귀가 맞지 않음 : 원문의 ‘조예(鑿枘)’는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라는 뜻으로, ‘사물이 서로 맞지 아니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초나라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둥글게 깎인 구멍에 네모진 기둥 끝을 끼우려함이여, 서로 맞지 않아 들어가기 어려움을 내가 참으로 알겠도다.”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세상과 맞지 않아 포부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말로 쓰인다.[주-D009] 부서기회(簿書期會) : 1년의 회계(會計)를 장부(帳簿)에 기입하여 기일(期日)까지 조정에 보고하던 일이다. 부서(簿書)는 전곡(錢穀)을 출납하는 장부(帳簿)를 말한다.[주-D010] 따르고자 …… 없다 : 안자(顔子)가 일찍이 공자의 무궁무진(無窮無盡)한 도를 깊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다.……마치 우뚝 선 것이 있는 듯한지라, 그것을 따르고자 해도 따를 수가 없다.[仰之彌高, 鑽之彌堅.……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하였다. 《論語 子罕》[주-D011] 정조(政曹) : 인사행정을 취급하는 부서로서, 즉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말한다.[주-D012] 오담 노형(梧潭老兄) : 정환필(鄭煥弼, 1798~1859)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은뢰(殷賚), 호는 오담이다.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이고 정동로(鄭東老)의 아들이다. 함양(咸陽) 개평에서 살았다. 1834년(순조3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기정진은 1849년에 정환필의 부탁으로 〈남계서원 풍영루 중수기(藍溪書院風詠樓重修記)〉를 지었다.[주-D013] 회정기(晦亭記) : 회정(晦亭)은 민재남이 거처한 정자이며, 이 기문은 《노사집》 권21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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