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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naver.com/godnjf12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http://cafe.daum.net/dkdehd63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http://cafe.daum.net/guriever.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격암(格菴) 선생의 마상록(馬上錄) Ⓟ410을 보면,
『察明心 讀讀 有明』
이 말은 잘 명심(銘心)해서 마상록(馬上錄)에 나오는 명(明)자가 나오는 구절들을 거듭거듭 잘 읽어보라고 한 것이다.
잘 읽어 보면 여러분들이 알고 싶은 내용(內容)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차례대로 보도록 하자.
격암(格菴) 선생의 마상록(馬上錄) Ⓟ411에,
『明承美道 源是富)』
이 말의 뜻은 명(明)이 아름다운 도(道)를 이어 계승(繼承)할 사람이며, 그 명(明)은 근본적으로 부유(富裕)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한편 증산(甑山) 상제는 하늘이 성인(聖人)을 태어나게 하여 이 도(道)를 위임(委任)한다고 하였다.
격암(格菴) 선생은 하나님의 명(命)을 받들어 전한다면서, 명(明)이 그 도(道)를 이어 계승(繼承)한다고 하였다.
그 명(明)이 도(道)를 이어받아 계승(繼承)한다며, 증산(甑山)상제께서 말씀하신 그 성인(聖人)즉 명(明)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거듭 말한다면, 명(明)이란 그 성인(聖人)의 별칭(別稱)인 것이다.
다시 분명히 설명하자면, 그 도(道)를 맡기는 사람은 하늘 즉 하나님이고, 그 도(道)를 이어받아 계승(繼承)하는 사람은 명(明),즉 하나님의 아들인 성인(聖人)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마상록(馬上錄) Ⓟ411에,
『明顯致喜文本』 이라고 하였다.
또한 명(明)이 바로 기쁘게도 (해월 선생이) 전해 준 그 글(文)과 책(本)을 밝히게 된다고 하였다.
즉 해월 선생의 후손(後孫)인 그 사람이 바로 명(明)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한 가지 더 가르쳐 주겠다.
격암(格菴) 선생이 쓴 마상록(馬上錄) Ⓟ408을 보면,
『天逢 文武堯舜之君 何以 可見 明稱世界 至昧之人 但知求利 不知 仁義禮智信 負之西元 無老』
즉 하늘이 문. 무. 요. 순(文. 武. 堯. 舜) 임금과 같은 사람을 맞이하게 되는데, 어떻게 하면 가히 세상에서 명(明)이라고 알려진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했다.
즉 하늘이 말하는 문. 무. 요. 순(文. 武. 堯. 舜)과 같은 임금이 세상에는 명(明선생) 이라고 알려진 사람이라는 말이며,
그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까 하는 말이다.
즉 하늘이 그 사람을 기다려 왔다는 말인 것이다.“
라고 말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아! 바로 그 사람이 OO라고 하는 책에 나오는 그 명(明)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냐며, 알 것 같다고들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와 같은 것까지 예언서(豫言書)에 밝혀져 있는지 놀라워하며,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월(海月) 선생은 또한 그의 시(詩)속에서, 자기 자신의 후손(後孫)으로 천지(天地)의 재목(材木)이며, 나라의 동량(棟梁)인 정도령이 태어날 것을 내다보면서 잔치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먼 미래의 일이라 다만 글로써 그의 마음을 전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해월(海月)선생은 고향인 울진(蔚珍)이란 곳이 워낙에 깊은 벽지(僻地) 라서 교통이 불편하고, 또한 워낙 벽촌(僻村)이다 보니 아무리 똑똑해도 중앙(中央)에 나가서도 행세하기가 어려운 것을 뼈아프게 생각한 것이다.
세상이 능력대로 인정받는 세상이라면 야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지금이나 옛날이나 모든 것이 인맥(人脈)이나 학맥(學脈)으로 출세(出世)의 연결(連結)고리가 이어져 있으니, 아무리 혼자 똑똑해봐야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월(海月) 선생의 후손(後孫)이 나타나게 될 때에는, 그 동쪽의 고향이 앞으로 크게 발전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위안(慰安)을 삼은 것이다.”
그러자 맨 앞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던 사람이 질문을 하였다.
“아까 말씀하신 시(詩)와 예(禮)를 이어받은 말은 또한 무엇인가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격암유록(格菴遺錄) 양백론(兩白論) Ⓟ93을 보면,
『天地合德 兩白聖人 禮法更定 先聖道로 敎化萬方 廣濟時에 三豊道師 風飛來라』
천지(天地)의 합덕(合德)으로 오신 양백성인(兩白聖人)이 예법(禮法)을 다시 고쳐서, 먼저 성인(聖人)의 도(道)로 만방(萬方)을 교화(敎化)시키고 널리 구제할 때(廣濟時)에 삼풍도사(三豊道士)가 바람에 날아 온다고 하였으며,
대순전경(大巡典經) 제3장 제자(弟子)의 입도(入道)와 교훈(敎訓) 61절을 보면,
『乾坤의 位次를 바로잡아 禮法을 다시 세우리라』
라고 하여 천지(天地)의 위차(位次)를 바로잡아 예법(禮法)을 다시 세울 것이라고 증산(甑山) 상제께서 말씀을 하셨다.
또한 격암(格菴) 선생의 마상록(馬上錄) Ⓟ397에,
『五倫之節 系一 紅葉島 靑鶴洞 眞人是也』
즉 세상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무너져 세상(世上)이 혼탁(混濁)할 때, 이 무너진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바로잡아 이어 나갈 사람이 바로 일(一)인 태을(太乙)이며, 일(一)인 태을(太乙)이 바로 홍엽도(紅葉島)의 청학동(靑鶴洞) 진인(眞人)이라고 한 것이다.
일(一)이란 바로 시수(始數)로서 태을(太乙)을 말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설명하였다.
이분이 계신 곳을 홍엽도(紅葉島)의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홍엽도(紅葉島)라는 말의 홍엽(紅葉)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단풍(丹楓)나무를 의미하는 것이니, 바로 태극(太極)이신 진인(眞人) 정도령의 집에, 단풍(丹楓)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심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누가 일부러 심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명(天命)이 내려지니, 신(神)을 뜻하는 나무가 자연적으로 뒷 뜰에 심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풍(丹楓)나무란 신(神)을 상징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하는 나무 중에 하나인 것이다.
청학(靑鶴)이란 말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백학(白鶴)의 아들이 청학(靑鶴)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하는 별칭(別稱)인 것이니,
나중에 자세히 설명(說明)할 기회(機會)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누가 어떻게 이어받게 되는가?
동학가사(東學歌詞)의 봉명서(奉命書) Ⓟ2를 보면
『無極大道 成道後에 皇極成道 하는故로 五皇極이 成立하니 五倫之德 이아닌가 一倫之德 父子有親 二倫之德 君臣有義
三倫之德 夫婦有別 四倫之德 長幼有序 五倫之德 運數故로 入於中極 成道時라 朋友有信 爲主故로 西北靈友 相會하여
金水江山 이天地에 善惡判斷 公私할제 益者三友 損者三友 風雲같이 모여드니』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이루어진 다음 황극성도(皇極成道)하는 고로, 오황극(五皇極)이 성립(成立)하는 것이 오륜(五倫)의 덕(德)이 아닌가?
이 때에 일륜(一倫)이 부자유친(父子有親)이고, 이륜(二倫)이 군신유의(君臣有義)이고, 삼륜(三倫)이 부부유별(夫婦有別)이며,
사륜(四倫)이 장유유서(長幼有序)이고, 오륜(五倫)에 해당하는 운수(運數)인 고로, 중앙(中央)인 중극(中極) 즉 황극(皇極)이, 도(道)를 이루는 때가 바로 붕우유신(朋友有信)인 것이다.
서북영우(西北靈友) 즉 남한(南韓)의 서북(西北)쪽에 신(神)이고 영(靈)인 벗(友)이 있어, 풍운(風雲)같이 즉 바람에 몰려오는 구름 떼같이 사람들이 몰려오지만, 그 속에는 이로운 벗(益者三友)과 해로운 벗(損者三友)이 두루 섞여 있다 하였다.
온 천지(天地)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지만, 공(公)과 사(私), 선(善)과 악(惡)을 판단(判斷)하여서, 구분한다고 하였다.
중극(中極)이라 하는 말은 한가운데 중앙(中央)을 의미하는 말로, 또는 황극(皇極)이라고 하고, 숫자로는 오(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글 속에는 서북(西北)쪽에 신의 벗(靈友)이 있다고 하였다.
은연중(隱然中)에 황극(皇極)인 하나님의 아들이 어디에 있다는 내용(內容)까지도 밝히는 글인 것이다.
또한 격암(格菴) 선생의 마상록(馬上錄) Ⓟ408을 보면,
『至昧之人 但知求利 不知 仁義禮智信 負之西元 無老』
어리석은 사람들은, 단지 아는 것이라고는 돈과 이끗밖에 없고, 사람이 지켜나갈 덕목(德目)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모른다고 한 것이다.
이 때의 서쪽에 있는 원(西元) 즉 하나님의 장자(長子)가, 그 예법(禮法)을 이어받게 된다고 한 것이다.
또한 서울의 서쪽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인 원(元)이며, 양백성인(兩白聖人)이며, 일(一)이며, 태을(太乙)이신 정도령이 쓰러져버린 예법(禮法)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새로이 이어 나간다고 한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께서는 그 예법(禮法)을 이어 나갈 사람이 바로 자기 후손(後孫)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隱然中)에 밝힌 것이다.
다음은 해월(海月) 선생의 시(詩)를 보도록 하자.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1권 17장 83절 2수에,
방화행락부중봉(芳華行樂不重逢) 서수무정일야동(逝水無情日夜東)
천지고인황양반(千里故人黃壤半) 십년유자흑두동(十年唯子黑頭同)
잠시득실난빙마(暫時得失難憑馬) 차후존망호기홍(此後存亡好寄鴻)
일야귀혼화백조(一夜歸魂化白鳥) 분명래왕경호중(分明來往鏡湖中)
아름다운 꽃도 즐기고 나면 다시 볼 수 없고, 흘러가는 냇물도 무정하게 밤낮 동쪽으로 흘러가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천리(天理) 먼 곳에서, 고인(故人)이 되어 황토 속에 묻혔구나 10년 동안 비록 아들의 젊은 무리들이 있기는 하지만
잠시 성공과 실패(得失)는, 말(馬)에 의지하기가 어렵구나. 이후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存亡)는 호(好)조건일 경우에는, 기러기를 보내어 위임하노라(寄鴻).
한밤에 돌아간 혼(魂)이, 백조(白鳥)가 되어 분명하게 거울같이 맑은 호수 한가운데를 오고가고 하는구나.
이 글의 뜻을 보면은, 꽃도 한 번 피었으면 지는 것이고, 흐르는 강물도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며, 천리(天理) 먼 곳에서 한 분이 고인(故人)이 되셔서는 한 줌의 황토 속에 묻혔으니,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맡겨둔 아들의 젊은 무리들이 있지만, 잠시 하나님의 일 잘 되어 나가느냐 실패로 끝나는가는, 하나님의 장자(長子)인 말(馬)만을 의지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狀況) 속에서 시세(時勢)가 조건(條件)에 맞아 만족스럽게 되는 경우에는, 기쁜 소식(消息)을 기러기를 보내어(寄鴻) 하나님의 천명(天命)을 전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러기가 소식(消息)을 전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일은 그대로 실패(失敗)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인간(人間)에게는 앞날의 희망(希望)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기러기가 나타나는 것이 중요(重要)하다고 해월(海月) 선생도 밝혔듯이, 이것은 하나님의 편지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시(詩) 속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보내는 사연(事緣)들이 구구절절(句句節節) 들어 있는 것이며, 이 기러기가 아니라면 해월(海月) 선생의 시(詩)를 하나님의 아들이 볼 수가 없으니, 따라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의 시(詩)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 길이 없으며, 돌아가는 상황(狀況)을 정확(正確)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글 속에는 오직 모두가 아기장수인 하나님의 아들에 의한 호조건(好條件)에 대한 이야기로만 되어 있는데, 기러기가 하나님의 기쁜 소식(消息)을 전하지 않았다면, 해월(海月) 선생의 글 속에 나오는 호조건(好條件)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사실(事實) 의미(意味)가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의 글 속에는, 하나님이 숨겨둔 모든 핵심(核心)적인 중요(重要)한 내용(內容)이 다 들어 있으니, 그 가운데 해월(海月) 선생의 시(詩)가 모든 예언서(豫言書)의 내용(內容)을 확인(確認)시켜주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북창(鄭北窓) 선생께서도 마찬가지로 십승(十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즉 십승(十勝)인 아들이 있다고 하여도, 기러기가 도래(到來)하지 않거나 물고기가 용(龍)이 되어 하늘에 올라 무지개가 뜨지를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실패라고 하였던 것이다.
기러기가 도래(到來)할 때, 이 때에 슬기로운 선비(智士)는 비로소 권세(權勢)를 잡게 된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바로 하늘의 천명(天命)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때가 바로 1995년인 을해(乙亥)년인 것이니, 즉 대명(大命)을 받는 첫 해가 되는 것이다.
이 때부터 8년까지가 카운트 다운(COUNT DOWN)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점(時點)은 하늘과 땅의 분기점(分岐點)이 되는 시기인 것이다.
1차년 2차년 계산해 보면서 기다려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하자 한 사람이 질문을 하였다.
“해월 선생의 시(詩)에 나오는 귀혼(歸魂)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라고 질문하자
명산 선생은 다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하였다.
“삼역대경(三易大經) 궁을영부장(弓乙靈符章) Ⓟ254를 보면,
『無極者난 天地鬼神之道也오 皇極者난 人之男女之德也라......無極이 生太極하나니 無極者난 十之數也오 太極者난 一之數야
라...... 其億兆之造化난 十生又十之變化也라 十者난 歸中之數也오......五者난 遊中之數也니 一生之數와 十成之數를 遊魂歸魂』
즉 무극(無極)이란 천지귀신(天地鬼神)의 도(道)이고, 황극(皇極)이란 사람의 남녀(男女)의 덕(德)이고,......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을 낳는데, 무극(無極)의 숫자는 십(十)이고, 태극(太極)의 숫자는 일(一)인 것이다......억조(億兆)의 조화(造化)가, 이 십(十)인 무극(無極)이 일으키고, 이 십(十)인 무극의 변화(變化)이다.
십(十)이란 귀중(歸中)의 숫자이고, 오(五)란 유중(遊中)의 숫자인데, 일(一)의 생수(生數)와 십(十)인 성수(成數)는 각각 유혼귀혼(遊魂歸魂)이라 하였다.
즉 쉽게 간단히 말한다면 십(十)인 무극(無極)을 귀혼(歸魂)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무극(無極)이란 천지(天地) 귀신(鬼神)의 도(道)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화천(化天)하셔서 십(十)인 무극(無極)인 상태로, 즉 귀혼(歸魂)의 상태인 신(神)으로 계시면서, 모든 조화(造化)를 다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그 신(神)으로 화(火)하신 하나님께서, 백조(白鳥: 고니)로 화(化)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즉 신(神)으로 화하신 하나님을 또한 백조(白鳥)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밤에 백조(白鳥)로 화(火)하셔서, 거울같이 맑은 호수(鏡湖) 한가운데로 왕래(往來)하신다고 한 것이다.
앞으로 해월(海月) 선생의 시(詩)에서 백조(白鳥) 이야기가 나오면, 그것은 신(神)으로 계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말로 보면 되는 것이다.
또한 황학(黃鶴), 백학(白鶴), 붕(鵬)새란 말도, 신(神)이신 하나님을 칭하는 말이니, 잘 기억해 두기 바란다.“ 라고 하자마자 또 한 사람이 급한 듯이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호조건이란 무엇을 두고 이르는 말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라고 정중히 묻자
명산 선생은 마찬가지로 힘든 기색없이 기쁘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격암유록(格菴遺錄) 은비가(隱秘歌) Ⓟ59를 보면,
『五運之中 一運論則 赤血千里 四年間 二運論則 赤血千里 二年間 三運論則 赤血千里 一年 四運論則 赤血千里 月間 五運論則
赤血千里 日間』
격암유록(格菴遺錄) 은비가(隱秘歌) Ⓟ54에,
『眞理三豊 人人覺 天下萬民 永不飢 兩白隱理 人不尋 千祖一孫 亞合心 十勝兩白 世人覺 一祖十孫 女子運 畵牛顧溪 仙源川 心火
發白 心泉水』
삼풍(三豊)이 진리(眞理)인 것을 사람마다 깨달으면, 천하만민(天下萬民)은 영원히 굶어죽지 않게되며, 양백(兩白)이란 숨겨둔 사람인데, 사람들이 찾지를 않으면, 천(千) 명의 할아버지에 한 사람의 자손만 살고,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서 양백(兩白)을 깨달아 돌아오면, 한 할아버지에 10명의 자손(子孫)이 사는 것은 여자(女子)운, 즉 호(好)조건이다.
그림 속에 소(牛)가 골짜기를 돌아보니 신선(神仙)이 계시는 곳이 천(川)이로구나. 라고 하여 사람들이 양백삼풍(兩白三豊)인 하나님의 아들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대부분이 다 죽게 되고, 돌아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격암유록(格菴遺錄) 갑을가(甲乙歌) Ⓟ114에,
『欲速不達 男子運 遲遲徐行 女子運 女子受運 多人和 男子受運 小人和 遲人成事 鷄龍立』
빨리 이루고자 하나 이루지 못하는 것이 남자(男子)운, 즉 악조건(惡條件)이고, 천천히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여자(女子)운, 호(好)조건인 것이다.
호(好)조건은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지만, 남자(男子)운 즉 악운(惡運)에는 적은 사람들이 돌아오는데, 천천히 이루어져 일이 성사(成事)되는 것이 계룡(鷄龍)이라고 했다.
좀 늦어지는 것이 좋은 조건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기다려도 가망이 없을 때에는 빨리 끝내겠지만, 조금 더 기다려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와 준다면 기다리는 것이다.
좀 늦어지면 시비(是非)가 많이 일어나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순전경(大巡典經)에서도 증산(甑山) 상제께서 아무리 하여도 다 살릴 수는 없다고 하시면서 흐느끼며 우셨다고 하였다. 깊이 생각하여 볼 일이다.
격암유록(格菴遺錄) 성운론(聖運論) Ⓟ106을 보면,
『一心和合 是非眞人 末復合一 眞人일세 訪道君子 修道人아 地鷄龍만 찾단말가 寒心하다 世上事여 死末生初 此時로다
陽來陰退 仙運에는 白寶座의 神判이라 非禮勿視 非禮勿聽 行往坐臥 端正하소 先聖預言 明示하라 逆天者는 亡하리라』
『老少男女 上下階級 有無識을 莫論하고 生命路에 喜消息을 不遠千里 傳하올제 自一傳十 十傳百과 百傳千에 千傳萬을
天下人民 다傳하면 永遠無窮 榮光일세 鳥乙矢口 十方勝地 擧手頭足 天呼萬歲』
일심(一心)으로 화합(和合)하니, 그렇게도 시비(是非) 많던 진인(眞人)이, 끝에 가서는 한 사람의 진인(眞人)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도(道)를 찾아 닦는다고 수도(修道)하는 사람들이 지계룡(地鷄龍)만 찾는다고 하였다.
즉 계룡산(鷄龍山)이 어디인가 그것만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다.
계룡(鷄龍)이란 것이 지명(地名)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서 한심(寒心)하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때, 죽고 사는 갈림길이 되는 때인 것인데, 음(陰)이 물러가고 양(陽)이 돌아오는 신선(神仙)의 운(運)에는, 백보좌(百寶座)의 신(神)의 심판(審判)이 있으니, 예의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의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일상생활을 단정(端正)히 하라고 하는 것이다.
먼저 오신 성인(聖人)들이 분명하게 밝혔듯이,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전(傳)하면 영원무궁(永遠無窮)한 영광(榮光)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얼마나 좋으냐 모든 사람들이 쌍수(雙手)를 들어 환호(歡呼)하며, 맞이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격암유록(格菴遺錄) 송가전(松家田) Ⓟ99에,
『聖神劒名 掃腥塵에 無戰爭이 天下和라』
하나님의 아들이 쓰는 성신(聖神)의 칼은, 세상에 냄새나는 티끌을 쓸어 없애니, 전쟁(戰爭)은 없어지고, 온 세상에 평화(天下和)가 깃든다고 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은 이조 영조 때에, 해월(海月) 선생의 문중(門中)에서 판각(板刻)하여 간행하였다.
그 목판(木版)을 지금까지 해월(海月) 선생의 장손(長孫)이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틀린 글자나 필사에 의한 누락(漏落)이나 오류(誤謬)가 거의 없는 것이 다행(多幸)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은 해월(海月) 선생의 사후 150여 년이 지난 후 해월(海月) 선생의 적손(適孫)인 상하(尙夏)씨가 흩어져 있던 선생의 글을 모았는데, 대부분의 많은 부분이 흩어져 잃어버렸고, 집안의 책갑 속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서 편집(編輯)을 하였는데, 이 때(이조 영조)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교정(校正)을 보았으며, 해월(海月) 선생의 위패를 모신 명계서원(明溪書院)의 주관하에, 산 속에 은거(隱居)하여 학문을 가르치시던 이형복(李亨福) 선생이, 실질적인 사무를 담당하여 목판을 새겨서 책이 인쇄되어 나온 것이다.
책 서문(序文)을 보면 영조 50년 1774(甲午)년 봄에 시작하여 영조 52년 1772(丙申)년 봄, 청명절(淸明節)에 목판(木版) 인쇄(印刷)를 끝냈다고 나와 있는 것이다.
전체가 7책 14권으로 되어 있으며,
1~4권, 까지는 시(詩)이고,
5권은, 부(賦)와 대책(對策)과 론(論)이며,
6권은, 서(書),
7권은, 소(疏), 장계(狀啓), 교(敎), 전(箋), 표(表), 송(頌), 기(記), 서(序), 발(跋),
8권은, 잡저(雜著), 제문(祭文),
9권은, 은사시(銀槎詩),
10~12권은, 은사일록(銀槎日錄),
13권은, 전(傳), 묘지(墓誌), 행장(行狀),
14권은,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월(海月) 선생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은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숙종37~정조5) 선생이 쓰셨던 것이다.
서문(序文)에는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이, 목판으로 인쇄되어 나온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상정(李象靖) 선생은 본관이 한산(漢山)이고, 호가 대산(大山) 자는 경문(景文)이며 1735(영조11)년에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1739년에는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에 연일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에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심동정도(心動靜圖), 이기휘편(理氣彙編), 경제잠집설(敬齊箴集說) 등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 저술을 남겼으며, 또한 사례상변통교(四禮常變通巧), 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 그 밖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근원(根源)이 되는 이황(李滉) 선생의 사상(思想)을 계승하고 전승하는 입장에서 사상적(思想的) 터전을 마련한 분이다.
그는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고종 때 이조판서로 추증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學者)인 그는, 그의 눈으로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보고는 매우 안타까워 한 것이다.
그는 서문(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서문(서문) 1장을 보면,
『海月先生 黃公 生東海上 瑰瑋之才 雄麗之文 後世 莫望焉』
해월(海月) 선생 황공(黃公)은 동해상(東海上)에서 태어난 분으로, 뛰어난 자질(瑰瑋之才)과 웅대하고 아름다운 문장(雄麗之文)은, 후세(後世)에 흠망(欽望)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라고 시작하여, 다음과 같이 글을 이었다.
『自玆以還 百有餘年之間 聲寢響寂 欲求當日 淵源授受談笑 咳唾之萬一 而不可得 漠然徒見山海之 崒嵂渺溟而已 有志之士
烏得不起 曠世之感 而有生晩之悲也耶』
해월(海月) 선생이 가신 지가 지금까지 다만 100여 년이 지난 사이에, 그에 대한 명망(名望)도 그치고 조용해졌으며, 선생의 평소 그 당시의 연원(淵源)과 주고 받은 말씀을 만에 하나라도 건질 수가 없으니, 어렴풋한 것이 다만 산이 높고 험한 모습과 멀리 아득하고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같을 뿐이구나.
뜻이 있는 선비라면, 어찌 광세지감(曠世之感: 오랜 세월에 대한 감회)과 너무 늦게 태어난 비감(悲感)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글에서 대산(大山) 선생이,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보고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대산(大山) 선생은 해월(海月) 선생의 글 속에서, 다른 여러 학자(學者)들과 비교하여 볼 때, 그 내용면(內容面)에서 무엇인가 정확(正確)히 그 뜻을 알 수 없는 내용(內容)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 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만 산이 높고 험한 모습과 멀리 아득하고 어두운 바다를 보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글 속에 잘 알 수 없는 깊은 내용(內容)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살아 계시지 않으니 물어 보지도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 한 것이다.
그러니 해월(海月) 선생의 글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글과는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글인 것을 알고 있는 선비로서, 그러한 것을 알고서도 어찌 그의 글을 문집으로 세상에 내는데 주저하겠는가 하며, 너무 늦게 태어나서 안타깝다고 한 것이다.
다음은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서문 6~7장을 보면,
『雖其晩年 成就籍甚如此 又安知其胸中之所存有蘊而不發者乎 聊並書之 以見公氣象之一二云彌』
공(公: 해월 선생)이 만년(晩年)에는 이와 같이 문장(文章)으로 명성(名聲)을 떨쳤으나, 또한 해월(海月) 선생이 그 마음속에 깊이 숨겨 둔 심오(深奧)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니,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그저 아울러 기록하여 해월공(海月公)의 기상(氣像) 한두 가지 정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당대(當代)의 대학자(大學者)인 대산(大山) 선생께서, 공(公-海月)의 심오(深奧)한 속내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을 알고는, 후세(後世)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문집(文集)으로 엮어서 전하는데, 앞장선다고 하신 것이다.
대학자(大學者)인 그 역시도,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해월(海月) 선생의 글은 매우 심오(深奧)하고 어려워 일반 사람들은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내용이니, 세상에 널리 알려져 두루 회자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 생존(生存)시에는 문장(文章)으로 나라를 빛냈지만, 사후(死後)에는 그의 글이 다른 사람들의 글보다 일찍이 잊혀지게 된 원인(原因)은, 내용(內容)이 매우 어려워서, 그 담긴 뜻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제자(弟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령 제자(弟子)가 있었다고 하여도, 그 내용(內容)이 제대로 전(傳)해질 수 있는 내용(內容)은 아닌 것이다.
또한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의 발문(跋文)을 쓴 이세택(李世澤) 선생은,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이세택(李世澤, 1716~1777, 숙종42~정조1) 선생은 조선후기(朝鮮後期)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者)는 맹윤(孟潤), 호는 조은(釣隱), 예안 출신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8대손이다.
1753(영조 29)년에 정시문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으나,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삼사(三司) 모두가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과 병조판서 이지억(李之億)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정계(停啓)에 응할 것을 권(勸)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성격 또한 대쪽같이 곧은 품성(品性)을 지닌 분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또한 찬집당상이 되었다.
그가 쓴 해월(海月) 선생 문집(文集)의 발문(跋文)을 보면, 이조(李朝) 선조(宣祖) 때 명(明)나라의 사신(使臣)인 찬획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이다.
그 정응태 사건의 개략을 보면, 정응태는 조선(朝鮮)의 왜란 중에, 명(明)의 황제(皇帝)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의 요지는, 명(明)나라 조정이 요동(遼東) 땅을 빼앗아 탈취하고 있는데. 이 요동(遼東) 땅은 옛 고구려(高句麗) 땅이어서 조선(朝鮮)이 다시 회복(回復)하여야 한다면서, 조선(朝鮮)이 왜병(倭兵)을 불러들여 함께 명(明)나라를 치려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朝鮮)에 파견되어 명(明)나라 군사를 지휘하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사당(私黨)을 만들어서 조선(朝鮮)의 임금과 신하(臣下)들과 결당(結黨)하여, 명(明)나라 황제를 속이고 대적(對敵)한 지가 여러 해인데, 그 증거로서 조선(朝鮮)의 오래된 책인 해동기략(海東記略)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은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가 일본을 다녀오면서 왜인(倭人)에게 우연히 책 한 권을 얻어서 보니, 그 나라(倭)의 풍속과 세계지도(世界地圖)를 기록(記錄)하고 있는 왜인(倭人)이 저술(著述)한 책으로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여 만든 책인데,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 나라에 있는 관(館)과 일본과의 관계를 사례별(事例別)로 기록한 책을 한 권 만들었으니, 그 책 이름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인 것이다.
정응태는 이 책을 보고 인용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를 무고(誣告)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日本)의 연호(年號)는 큰 글씨로 쓰고, 큰 글씨로 쓴 일본(日本)의 연호(年號) 하단 부분에, 조그마한 글자로 명(明)나라의 연호(年號)를 썼으며, 또한 분수에 지나치게도 태조(太祖), 세조(世祖), 열성조(列聖祖), 성상(聖上)이라 하는 용어는 천자국(天子國)에서만이 쓸 수 있는 용어(用語)인데, 어찌 제후국인 조선(朝鮮)이 함부로 쓰고 있는가?
본보기로 주색(酒色)에 빠지고 횡포가 잔인한 조선(朝鮮) 국왕과 신하들을 문책(問責)하여야 하며, 어찌 감히 일본을 끌어들여 명(明)의 조정을 우롱(愚弄)하는가?
양호(楊鎬)와 더불어 결당(結黨)한 이 무리들이 황제를 기만(欺瞞)하였으니, 황제께서는 너그럽고 관대함을 거두시고, 조선(朝鮮)을 토벌하여 제거(誅討)하여 버리라』 고 극언(極言)했던 것이다.
『조선(朝鮮)이 쌀과 곡식과 비단 등을 일본에 헌납(獻納)하였으며, 또한 일본과 조선(朝鮮)이 서로 사신(使臣)을 왕래(往來)하여 일본을 불러들여, 옛 고구려(高句麗) 땅을 회복하려고 쌀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허언(虛言)이 아니라』 고 한 것이다.
그러한 내용(內容)이 명(明)나라 황제(皇帝)에게 전해졌으니, 명(明)의 황제와 명(明)의 조정(朝廷)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 우리 나라의 실정은, 일본과의 오랜 전쟁에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명(明)나라 조정에서 정응태의 글을 그대로 인정하여 우리 나라를 토벌한다면, 우리의 국운(國運)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인 것이다.
이 때에 조선(朝鮮) 조정에서는, 이 말이 진실이 아님을 변명(辨明)하는 사신(使臣)을 보내야만 했는데, 평상시에 보내지는 사신(使臣)과는 근본적으로, 그 임무(任務)가 다른 엄청난 사건인 것이었다.
그 때 당시 명(明)나라의 사정을 보면, 대내적(對內的)으로 양응덕(楊應德)의 난(亂)이 있고, 조선(朝鮮)이 왜란(倭亂)을 당하여서 어쩔 수 없이 구원병(救援兵)까지 보내 주어 국력(國力)이 매우 약해져 있을 때에 이러한 글이 황제께 전해지니, 여러모로 조선(朝鮮)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조선(朝鮮)의 조정에서는 나라의 안위가 위급(危急)함에 이에 대처(對處)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苦心)을 하였겠는가?
크게 고심한 끝에, 그 당시 문장(文章)으로 가장 총망받는 사람을 가려 뽑아서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에, 정사(正使)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우의정)이, 부사(副使)로는, 월사(月使) 이정구(李廷龜) 선생(이조판서)이, 서장관(書狀官)으로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인 해월(海月) 선생이 뽑히게 되어, 10월 21일(癸酉)일에 서울 서소문 모화관(慕華館)을 출발하게 되었다.
11월 10일 아침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으며, 12월 6(丙辰)일 압록강을 건넜다. (해월유록p474~492말씀)
【만사이황발(萬事已黃髮) 잔생수백구(殘生隨白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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