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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랑길10구간 (서산, 태안 )(삼길포항~ 산후리 : 79코스, 78코스,77코스, 76코스,75-1코스 )
◈ 일 자/기상: 2025. 4.11~12 /맑음 ( 10도~영상24 도:서산)
◈ 위 치: 태안, 서산
◈ 누구와: 나홀로
◈ 경로: 아라메길관광안내소 - 상길산 -대산버스터미널 - 염전저수지- 진충사- 도성3리마을회관
선산창작예술촌- 팔봉초교- 장구성 - 팗종갯벌체험장- 구도항-산후리 (59.8㎞)
* 79코스: 아라메길관광안내소 - 상길산 -대산버스터미널(12.2㎞)
* 78코스: 대산버스터미널 - 염전저수지- 진충사- 도성3리마을회관(13㎞)
* 77코스: 도성3리마을회관- 선산창작예술촌- 팔봉초교(12.2㎞)
* 76코스: 팔봉초교 -장구성- 팗종갯벌체험장- 구도항 (12.9㎞)
* 75-1코스: 구도항 -산후리(9.5㎞ ) * 태안터미널까지 도보로 이동(6.7키로미터)
◈ 거리: 67.24 ㎞ (실둘레길59.8㎞ ) 총답사:432.4 ㎞
◈ 시간: 14시간 02 분(14시30분~04시32분)
◈ 교통
- 갈때 : 백석역(3호선) → 센트럴시티(서울)서산행(11시00분) → 서산(1시간50분소요)
* 서산터미널(13시20분발)→삼길포(1시간소요)
- 올때: 태안터미널(서울행06시간30분출발:2시간 10분소요) → 센트럴시티(3호선) → 백석역
* 태안읍 산후리 352-135(택시: 6.7키로17000원/도보1시간30분)
삼길포 종점에서 서산버스 터미널 까지오는 버스 시간표
.서산버스 터미널에서 삼길포 가는 버스 시간표
14시10분...삼길포 버스 종점에 위치한 서해랑 80코스 안내 간판(79코스 종점 80코스시점)
오늘은 삼길포에서 태안 산후리 까지 60여키롤르 답사하기 위해 삼길포 버스종점 도착 해
간단히 준비후 출발한다
서산아래메길 관광안내소
삼길포 앞 바다
삼길포 안내지도
**삼길포항 ; [ 三吉浦港 ]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에 있는 국가 어항.
삼길포항은 조선 시대부터 인천을 왕래하던 범선이 출입하던 포구였다.
1972년 지방 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부터 현대식 항구로 바꾸기 위한 기본 조사 및 시설 계획을 수립하였다.
1999년에는 서산시에서 유일하게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 어항의 기본 설계 용역을 발주하고 2002년에는 실시 설계 용역을 발주하여 그 결과에 따라 2003년에 3만 2575㎡ 면적에 방파제, 물양장, 선착장, 호안, 선양장, 준설, 진입 도로 등의 공사를 착공하여 2011년 완공할 예정이다.
2009년 어항 통계에 의하면, 어선 109척에 전체 톤수 242.23톤, 평균 톤수 3.14톤이며, 유람선 2척이 정박하고 있다.
계류 시설로 선착장이 167m, 2008년에 공사가 완료된 방파제는 299.5m이다. 물양장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데 상·하부 357m 중 하부 공사는 2010년에 완료되었고 상부의 잔량 77m가 공사 중에 있다.
어항 면적은 4만 9000㎡, 어획고는 84억 100만 원, 어획량 4,331M/T이며 주 어종은 우럭, 노래미 등이다.
2005년부터 우럭을 테마로 하는 ‘삼길포 우럭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009년까지는 5월에서 6월 사이에 열렸으나 2010년부터 10월에 개최되고 있다. 2009년 1월에는 대산지방해양항만청에서 삼길포항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을 형상화하여 삼길포 붉은등대를 건립하였는데 등대 주변에는 우럭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쉼터 등이 조성되어 있어 우럭 등대로도 불린다.
한편 유람선은 대산항과 대산임해산업단지, 주변의 유·무인도를 구경하는 코스로 운영하고 있으며,
여름철에는 일시적으로 충청남도 당진군의 난지도를 연결하는 항로가 운영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산 포구 와 비경도
전망대에서 본 풍경
석유화학단지
화곡1리 마을회관
호남정유=롯데케미칼 사옥
**석유 화학 산업 ; [ 石油化學産業 ] (롯데케미칼)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석유나 천연가스를 원료로 하여 연료, 윤활유 이외의 용도로 쓰는 여러 가지 화학제품을 만드는 산업.
석유 화학 산업은 원유에서 나프타를 분해하여 얻을 수 있는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BTX[벤젠, 톨루엔, 크실렌] 등의 중간 재료를 생산하는 단계와 중간 재료를 혼합하여 합성수지, 합성 섬유 등을 만드는 단계로 나뉘는데 서산시에는 중간 재료를 생산하는 석유 화학 산업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는 석유 화학 산업 분야에서 세계 5위에 달하는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충청남도 서산시, 울산광역시, 전라남도 여수시에 대규모 석유 화학 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서산시에는 약 826만 4500㎡ 규모의 석유 화학 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1980년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에 극동정유[현 현대오일뱅크]가 들어선 이후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석유 화학 산업이 가동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삼성토탈[현 한화토탈] 등 다양한 기업들이 입주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대외 경쟁력 약화와 국제 경쟁력 미비로 쇠퇴하던 서산의 석유 화학 산업은 2000년에 접어들면서 대규모 수출 증가 등 성장세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대산항과 서해안고속국도 등 산업 인프라의 확충과 중국의 폭발적인 성장세가 석유 화학 제품 수요의 증가로 이어져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산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대산일반산업단지는 삼성토탈[현 한화토탈]을 비롯하여 현대오일뱅크, LG화학 대산공장, 호남석유화학 대산공장 등이 밀집해 있는 국내의 주요 산업 단지로 2009년 기준으로 연간 178만 톤의 에틸렌을 생산하고 있다.
한편, 2011년 정부는 석유 화학 산업이 생산 효율성을 높이고 핵심 소재를 개발하여 고부가 사업 구조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공동 배관망을 설치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서산에는 4.5㎞ 정도의 배관망이 설치될 계획이다.
또한 2011년 6월 충청남도는 서산시 대산읍 대죽리 산 43-1번지 일원에 63만 7701㎡ 규모의 대산컴플렉스일반산업단지 조성 계획을 승인하였다.
KCC건설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 총 사업비 1043억 원을 투입하여 석유 화학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 단지 조성에 나서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적 ; [ 金積 ]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단구자(丹丘子). 할아버지는 서산 지역에 자리 잡은 경주 김씨 입향조 김연(金堧)이다.
아버지는 증 좌승지 김호윤(金好尹), 부인은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좌윤 최원지(崔遠之)의 딸이다.
아들은 연산현감 김홍익(金弘翼), 김홍양, 김홍필, 충청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다.
김적(金積)[1564~1646]은 어머니의 외삼촌[외외종조부]이자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아버지인 이계(李啓)로부터 이정구와 함께 글을 배웠다.
1609년(광해군) 사마생원시에 급제한 뒤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을 지냈다.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자 탄식하고 사직한 뒤 가족을 이끌고 서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출사의 기회가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심지어 월사 이정구가 편지까지 보내 부임을 종용하였지만 “어찌 백수의 나이에 소년들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치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자식에게는 학문을, 노복에게는 농사에 근면하기를 일깨우고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이곳에서도 후학을 양성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기꺼이 불쌍한 사람을 도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수천 석의 곡식을 풀어 구휼에 힘썼다.
현재 김적의 학문과 저술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김적의 행적은 아들 김홍욱의 문집인 『학주선생전집(鶴洲先生全集)』에 수록된 「선고행장(先考行狀)」에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다.
또한 서산으로 낙향하여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은거하면서 주변의 사림들과 교유한 흔적인 단구대(丹丘臺)와 용유대(龍遊臺) 등의 유적이 전하고 있다.
묘소는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먹수지마을 뒤편에 위치한다.
묘전에는 조익(趙翼)이 찬하고, 아들 김홍욱이 쓴 묘갈(墓碣)이 있다. 2011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410호로 지정되었다.
김적은 후일 아들인 학주 김홍욱의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797년 서산 송곡사(松谷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경주김씨족보』에 따르면 송곡사가 1868년(고종5)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될 당시 김적의 위패는 대교촌 뒤편에 매안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산4리 마을 표석
대산 정형외과
서해랑79코스 안내 간판.
대산버스 터미널
소머리 국밥짐에서 김치 찌개로 점심겸저녁으로 민생고 해결
대산버스터미널과 망일산
대산교도 지나고...
하천 뚝길로 계속진행
구진2교
벚꽃이 만발하고..꽃길을 걷다
꽃길을 걸으며..
대산 공공 하수처리장
해안뚝길을 따라....
망일지맥 의 주산인 망일산
검은 뿌리 와박쥐섬
멋진 해안 길을 따라..
포장공사중 ...
경치좋은 해안길을 따라
솟대도
풍경이 멋져요
망일산은 계속 조망되고...
염전지역
부성염전 소금창고
부성 염전
**염전 ; [ 鹽田 ]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바닷물을 끌어 들여 논처럼 만든 곳.
대산반도와 이원반도로 둘러싸인 가로림만은 천수만 연안과 같이 염전 개발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특히 대산반도의 북단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 화곡리, 오지리 일대에는 조선 시대부터 자염(煮鹽)[원주민들은 화염(火鹽)이라고 함] 생산이 성하였고,
그 후 천일제염으로 바꾸어 소금의 생산이 많았던 곳이다. 서해안 중에서도 특히 조수간만의 차가 큰 곳으로 유명하며, 농업용수의 확보가 어려워 해안 간척은 결국 염전 개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자연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곳 자연 지명 중 벗터, 벗말 등의 지명은 제염을 해왔던 곳임을 의미한다.
일제 강점기 전후에 서산 지역의 대지주들이 염전을 운영하여 부를 축척하는 등 근대부터 이미 서산에는 많은 염전이 있었다.
이후 1950년대를 지나 1970년대까지 천수만 간척 사업은 농경지 조성과 염전 개발 두 가지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서산 지역은 입지 조건이 천일제염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소금은 국가 전매 사업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므로 농경지 조성보다는 염전 개발에 중점을 두었다.
1960년대에도 서산 지역 간척 사업은 농경지 조성 보다는 염전 개발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사장포 북안인 덕문천 하구에 233㏊의 대규모 염전이 조성된 후에 고북면 사기포, 성포 등에도 100㏊의 대형 염전들이 건설 되었다.
염전 개발은 1970년대에도 지속되어 충청남도 서산군 부석면 대두리, 창리, 심포 등지에 신규 염전이 조성되었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신규 염전 건설은 완전히 중단되고 1980년대 초부터 폐전되기 시작하였다.
폐전의 추세는 서산AB지구 간척사업으로 인해 천수만 연안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서산AB지구방조제 건설로 천수만 연안에서 염전이 많이 없어진 반면 가로림만에서는 아직도 염전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현재 서산시의 염전은 15개소로 이중 대산읍에 14개소가 있고, 지곡면에 1개소가 있다.
종업원은 77명, 연간 생산량은 5,340톤이다. 주요 염전은 서산시 대산읍 기은리 금현염전, 영탑리 부성제염, 오지리 대호염전, 통포염전, 지곡면 중왕리 염전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 사업자 등록을 하는 염전의 경우 상호 등록이 의무이지만, 1970~1980년대에는 상호를 등록하지 않아도 사업자 등록이 되기 때문에 상당수 염전은 상호가 없다].
최근 일부 염전은 산업 단지 부지로 편입되어 문을 닫았고, 일부 염전은 형질 변경 후 양식장, 함초 재배 등으로 운영 중이다.
충청남도 수산관리소 서산사무소는 2011년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중왕리 폐염전에서 함초를 시범 재배하고 있다.
서해안 갯벌에서 자생하는 함초는 바다 속에 녹아 있는 염분과 칼슘, 철, 칼륨, 요오드 등 각종 미네랄을 뿌리로 흡수하여 농축해 살아가는 한해살이 염생 식물로 콜린과 비테인 식이섬유, 미네랄 등이 포함되어 있어 간 독소 해소와 지방간 치유, 면역 기능 증강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염전지역이 태양열 발전소 페널로...
우측 고지가 망미산
배나무골 일대
모처럼 내 꼬라지도 거울에 비추어 보고...ㅎㅎㅎ
덕적골 일대
수선화가 만발 하고...
적목련과동백
토끼 들이...
환성리 일대
환성3리 마을 회관
예쁜제비곷이
꽃짠디가
백목련과 동백
지곡면 환성리 일대
진충사 2.7키로미터이정목
무쇠점 일대
염소농장
개나리도 만발하고
진충사
**정충신사당(진충사) ; [ 鄭忠信祠堂-振忠祠- ]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원래 전라남도 광주 일대에 세거하고 있었는데,
1633년(인조 11) 당진에 유배된 이후 서산 대산에서 은거하다가 지곡면 대요리의 지세를 살펴보고 자신의 묘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일대는 인조반정의 논공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괄(李适)[1587~1624] 가문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정충신이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후 대요리 일대를 사패지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금성 정씨(錦城鄭氏)들이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일대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충신은 사후 29년 만인 1685년(숙종 11)에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으며, 영정과 위패는 종손이 보관하면서 제향을 하였다.
정충신사당은 정충신을 제향하고 있는 사우로 1636년(인조 14)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다.
위패를 도난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자 후손 정세오(鄭世奧)가 사당을 지었다가 1897년(고종 34) 9세손 정세칠(鄭世七)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구 사당은 현재 정충신사당으로부터 북쪽 300m 지점에 있었다.
1968년 사우를 복원한 후 진충사로 개칭하였다. 최근에도 몇 차례의 중수와 개축이 이루어졌다.
홍살문과 삼문, 사우, 동서 양재로 구성되어 있다.
삼문은 솟을대문이고,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팔작지붕, 겹처마의 양식이다.
전면 1칸을 개방하였고, 그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깐 후 뒷면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둥근 주춧돌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공포(栱包)는 전형적인 무출목 익공집 형태이다. 기둥의 주춧돌·기둥·창방·대들보의 부재는 시멘트이고, 주심도리·장혀와 익공(翼工)은 목재를 사용하였다.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접시받침이 중앙 칸에 4개, 양 협간에 2개 끼워져 있다.
1969년의 상량문이 있으며, 건물의 정면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친필 ‘진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진충사에는 정충신의 유품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1975년 도난 사건으로 인해 유물이 유실되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유물은 2달 만에 찾았지만, 투구 1점은 끝내 사라지고 사진만이 전한다. 2011년 현재 중요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유품은 모두 5점으로, 1994년부터 동재를 전시관으로 조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제향은 매년 양력 4월 25일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지낸다.
정충신사당은 조선 후기 서산 지역 무인 가문의 사우 건립과 인물의 추숭 활동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특히 정충신의 증시교지(贈諡敎旨)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전하고 있어 당시의 국가적인 사건과 지역의 실정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충신사당(진충사) ; [ 鄭忠信祠堂-振忠祠- ]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원래 전라남도 광주 일대에 세거하고 있었는데,
1633년(인조 11) 당진에 유배된 이후 서산 대산에서 은거하다가 지곡면 대요리의 지세를 살펴보고 자신의 묘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일대는 인조반정의 논공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괄(李适)[1587~1624] 가문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정충신이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후 대요리 일대를 사패지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금성 정씨(錦城鄭氏)들이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일대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충신은 사후 29년 만인 1685년(숙종 11)에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으며, 영정과 위패는 종손이 보관하면서 제향을 하였다.
정충신사당은 정충신을 제향하고 있는 사우로 1636년(인조 14)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다.
위패를 도난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자 후손 정세오(鄭世奧)가 사당을 지었다가 1897년(고종 34) 9세손 정세칠(鄭世七)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구 사당은 현재 정충신사당으로부터 북쪽 300m 지점에 있었다.
1968년 사우를 복원한 후 진충사로 개칭하였다. 최근에도 몇 차례의 중수와 개축이 이루어졌다.
홍살문과 삼문, 사우, 동서 양재로 구성되어 있다.
삼문은 솟을대문이고,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팔작지붕, 겹처마의 양식이다.
전면 1칸을 개방하였고, 그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깐 후 뒷면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둥근 주춧돌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공포(栱包)는 전형적인 무출목 익공집 형태이다. 기둥의 주춧돌·기둥·창방·대들보의 부재는 시멘트이고, 주심도리·장혀와 익공(翼工)은 목재를 사용하였다.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접시받침이 중앙 칸에 4개, 양 협간에 2개 끼워져 있다.
1969년의 상량문이 있으며, 건물의 정면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친필 ‘진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진충사에는 정충신의 유품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1975년 도난 사건으로 인해 유물이 유실되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유물은 2달 만에 찾았지만, 투구 1점은 끝내 사라지고 사진만이 전한다. 2011년 현재 중요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유품은 모두 5점으로, 1994년부터 동재를 전시관으로 조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제향은 매년 양력 4월 25일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지낸다.
정충신사당은 조선 후기 서산 지역 무인 가문의 사우 건립과 인물의 추숭 활동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특히 정충신의 증시교지(贈諡敎旨)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전하고 있어 당시의 국가적인 사건과 지역의 실정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림같은 솔섬일대
도성리 방조제 끝 부분의 갯바위
꽃길을 걷고...
안무물 앞바다풍경
바깥고잔 버스 승강장
벗꽃이.. 예쁘게...
마늘과 적송
진충사 3.7키로 미터 이정목
17시59분...77코스종점 과 78코스 시점을 알리는 안내판(도성3리 마을회관입구)...24.5키로미터 지점
도성3리 마을 회관
칠지도 제작 야철지?
**도성리 야철 터 ; [ 桃星里冶鐵址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쇠팽이에 있는 야철 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충청도(忠淸道) 해미현(海美縣) 호장(戶長) 김연(金鍊)이 서산군(瑞山郡) 임내(任內) 지곡현(地谷縣) 땅에 은돌[銀石]이 있다고 하니, 관가에서 사람을 보내어 파내어서 납[鉛] 1근 8냥쭝[兩重]을 녹이었는데, 정련(精練)한 백은(白銀)이 1전 3푼이었다.
또 다른 도(道)는 은돌이 있는 곳이 모두 암석 사이인데, 여기는 땅이 평평하고 나무가 무성하여 은(銀)을 단련하기에 제일 좋은 땅이었다.
공조(工曹)에서 아뢰기를, ‘원컨대, 김연을 교명에 의하여 역사를 면제하여 후인을 권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태종 17년, 11월 7일]”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후에도 은이 채굴되어 활용되는 등 서산 지역은 은(銀) 산지로 알려졌고, 일제 강점기에도 은부리 지역에서 은광 산업이 성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서산군의 서쪽 도비산(都飛山) 남쪽에 철장(鐵場)이 1개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도성리 야철 터와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도비산이 도성리로부터 불과 20㎞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지곡면 일대가 예부터 철 생산지로 유명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도성리 야철 터 또한 서산 지역에서 토산 철을 생산한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서산시의 서북단 지곡면 도성리 일대에서 야철 터가 확인된다.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는 지곡면 중에서도 가장 서북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높이 70m 이하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가로림만과 맞닿아 있는데, 이 구릉성 산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마을들이 펼쳐져 있다.
특히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쇠풍리골[쇠팽이]과 음불이골[은부리]은 남북 방향의 낮은 고개를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주변을 중심으로 철 슬래그편들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도성리 야철 터는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사례가 없으며, 『문화유적분포지도』에 간략한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은부리마을에서 최근까지 철광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일대가 철 생산지 혹은 철 수공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마을 입구 마을 회관에는 2010년에 세워진 칠지도제작야철지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도성리 야철 터가 백제 왕이 369년에 일본 왕을 위해 만든 칠지도(七支刀)의 제작지라는 전언에 따라 지역 주민들이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도성리 야철 터가 백제 시대 이후의 유적임을 입증할 만한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도성리 야철 터는 조선 시대 지곡면 도성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철 생산 혹은 은 제련(製鍊) 양상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 초기 명(明)으로의 조공(朝貢)에 필요한 금은(金銀)이 매우 절실하였던 상황에서 서산 지역이 은 산지(産地) 중 하나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도성리 일대가 기록에 보이는 바로 그 산지로 추정된다.
추후 도성리 야철 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정황이 파악된다면 조선 전기 은 수공업과 관련된 중요한 양상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일대의 철 생산과 관련된 수공업 역사의 중요한 단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칠지도란?
**칠지도 ; [ 七支刀 ]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된 백제 시대의 철제 가지모양의 칼.
철을 두드려서 만들었다. 전체 길이는 74.9㎝이다. 그 중 손잡이 내지 연결부를 뺀 칼날 부분이 66.5㎝이다.
칼의 양쪽 날 부분에 마치 소뿔이나 나뭇가지처럼 굴곡진 가지가 각각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뻗어 나와 있다.
이 같은 형태는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정확한 용도와 명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특히 명문이 발견되기 전에는 칠지도의 연결부에 주목해 이를 칼이 아닌 창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1873∼1877년에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칠지도에 붙어있던 녹을 닦아내다가 칼의 양쪽 옆면에 금(金)으로 상감(象嵌)된 명문(銘文)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이것이 칼이며, 제작 당시의 명칭이 칠지도였음이 분명해졌다.
명문은 한쪽 면에서 34자, 다른 쪽 면에서 27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명문 외곽으로는 금선(金線)이 상감기법으로 가늘게 둘러쳐져 있다.
명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34자가 새겨진 곳을 보통 표면(表面) 또는 앞면이라 부르고, 27자가 새겨진 곳을 이면(裏面) 혹은 뒷면이라 부른다.
명문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적지 않아서 판독된 글자는 연구 시점과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상당수의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한 덕분에 근래에는 꽤 많은 부분에서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그러나 이와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뒷면의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을 ‘백제왕이 다스릴 때 기묘하게 얻은 성스러운 소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성음’을 ‘성진(聖晋)’, 곧 중국의 동진(東晋, 317∼418)왕조로 판독한 뒤 ‘백제왕의 세자가 생(生)을 성스러운 진나라에 의탁하고 있으므로’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왜왕 지’를 ‘왜왕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명문이 매우 단조로운 표현방식을 따르고 있고, 주는 이와 받는 이가 함께 명시되어 있으며, 명문의 궁극적인 목적이 명확한 뜻의 전달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교를 버리고 매우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칠지도에 대한 학자들의 분분한 해석을 종합해보면,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칠지도의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태△ 4년’이 과연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제작 주체, 곧 왜왕에게 칠지도를 만들어준 정치체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태△’는 연호임에 틀림없는데, 어느 나라의 연호인지가 문제이다.
처음에는 태초(泰初) 혹은 태시(泰始)로 읽고, 중국 전진(前秦)의 태초(太初, 386∼394)라든가 서진(西晉)의 태시(太始·泰始, 265∼274), 남송(南宋)의 태시(泰始, 465∼471) 등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태화(泰和)로 읽고 위(魏)의 태화(太和, 227∼232), 동진의 태화(太和, 366∼371), 북위(北魏)의 태화(太和, 477∼499) 등에 주목하는 연구자가 많은 편이다. 또한 ‘태△’를 백제의 연호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명문의 ‘5월’을 6월 또는 4월로 판독하기도 하며, ‘16일’을 11일 또는 13일로 판독하는 사람도 있다.
대다수의 연구자는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준 백제의 왕이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일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간지(干支)가 딱 맞아떨어지는 전지왕(腆支王) 4년(408)이라든가 동성왕(東城王) 2년(480)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연구 결과도 있다.
칠지도를 만든 주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①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②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③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④대등한 관계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①설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52년조의 “백제의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 하나와 칠자경(七子鏡) 하나, 그리고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는 기사를 염두에 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신공기 기사가 매우 왜곡된 것이라는 데에는 학자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에는 거의 부정되고 있다.
③설은 명문에 동진의 연호(태화)가 사용되었다는 점과 뒷면에 성진(聖晋)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적지 않고, ‘성진’보다는 ‘성음(聖音)’일 개연성이 더 높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결국 칠지도 문제는 ②설 또는 ④설의 입장에서 검토해야 한다. ‘제후국의 왕’ 운운하는 문구가 있는 점, 왜왕의 이름 ‘지(旨)’가 거명된 점, 칼을 준 사람이 왕세자일 개연성이 높은 점,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문구가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②의 백제왕 하사설이 상대적으로 더 타당한 듯하다.
한편 최근에 칠지도의 모양을 중국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사당화상석에 보이는 명협(蓂莢)과 연결시킨 연구가 주목된다.
육협(六莢)은 한 해를 의미하는데, 육협의 가운데 줄기를 세우면, 칠지도의 모양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칼의 모양을 달력을 상징하는 명협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칼을 만든 주체의 왕자적(王者的) 성격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성3리 마을 회관입구 도로.. 수선화가...
새골일대
망미산과 팔봉초등학교10.8키로미터 이정목
마동(중리)마을 앞 갯벌.. 멀리 솔섬도 보이고...우측 닭절
저섬과 갯벌
중리 포구
해변 도로를 따라 진행
저도와 솔섬
데크길로 접어 들고
저도와솔섬
데크길이 계속되고
저도.. 솔섬.. 닭절
중왕리 펜션단지지역
카라반 캠핑장
중왕마을 감태공장
중왕리 캠핑장
중왕어촌 체험 마을 일대
중왕리 고개 벗꽃
중리 어촌 체험마을0.6키로미터, 팔봉초교7.8키로미터 이정목
89.9고지 방향으로 (산으로 진입)
임도길에 꽃들이(개나리와명자나무)
명자나무
중리 일대
빈탑마을 일대..
중리(빈탑) 배수장
이름없는 다리도 건너고
하천과 달(음력14일밤)
흑석리 일대
곳곳에 태양열 발전소 페널이...
흑석리의ㅡ광복
광복 마을 일대
외야골 일대
학림 일대
대황리 학림 일대/ 형제봉
대황리 방조제
길천을 가로 지른느 다리를 건너고....
20시38분...서해량 77코서 시점과 76코스 종점 안내간판..36키로미터지점
팔봉초등학교
양지편마을
양길2리 버스 승강장
덕송1리 버스 승강장
덕송리 갯벌
한살 방조제
함박골 마을 갯벌
갯벌 모습
쌍도
쌍도
**쌍2도
해도번호 ; 323
지번 ; 서산시 팔봉면 호리 산197
토지소유현황 ; 국유지
면적 ; 6,472㎡
육지와의 거리 ; 팔봉면 0.4㎞, 만대항 12.7㎞
인문사회환경
• 용도 구분 : 미분류
• 지목 : 임야
• 지자체 개발 계획 :
- 고흥 조선타운 조성사업 대상지역(’08~’13, 5,257억원, 민자)
- 조선소 및 조선기자재 업체, 배후단지 조성
• 시설물 · 이용현황 : 없음
• 영해기점 무인도서 : 해당 없음
• 과거 주민 거주 여부 : 없음
• 향후 주민 거주 가능성 : 없음
• 과거 주민 거주 목적 : 없음
• 역사적 가치 : 없음
• 주변 해역 이용 현황 : 마을어업(서산마을65, 팔봉대황, 굴, 8ha, '09.06.29-'19.06.28) 외 6건
• 타법에 의한 관리 현황 : 없음
자연환경 · 생태계
• 지형 · 지질 : 쌍2도는 동쪽의 쌍1도와 사주로 연결되어 있음. 동서 방향의 장축이 160미터 정도. 사주 외의 특이 지형 없음.
• 주요 육상동물 :
- 쌍2도는 쌍1도와 연육되어 있는 섬으로 육지와 인접해 있는 섬으로 현지 조사 결과 포유류 서식의 흔적은 관찰되지 않았으나, 향후 육지로부터 유입이 가능한 섬으로 판단됨.
- 양서 · 파충류는 관찰되지 않음.
• 주요 해양동물 :
- 해양무척추동물 9종 출현, 암반조간대 전반에 조무래기따개비의 밀도가 높음.
- 해조류는 녹조류 1종과 홍조류 1종으로 총 2종이 서식.
• 주요 조류 · 곤충 :
- 조류는 4종으로 인근 육지로부터 비행이동 중인 까치와 수변에서 먹이활동 중인 왜가리, 중대백로가 확인되었고, 섬 주변에 발달한 모래사장에서 괭이갈매기 무리가 휴식중인 모습이 관찰됨.
- 곤충은 37종으로 노랑배수중다리꽃등에 등 환경부 특정종 10종 확인.
• 주요 식생 · 식물 :
- 관속식물은 23종이며, 상록성식물 2종, 해안지표종 5종이 출현.
- 섬 전체에 소나무와 낙엽활엽수가 혼재된 혼효림이 분포하며, 정상부근에서는 소나무군락이 발달함.
• 주변 해역(해중) 경관 : 동쪽으로 호리가 조망됨. 간조시 갯벌로 둘러싸여 있음.
(네이버 지식백과)
한살 마을 일대/ 방파제
한살마을 펜션촌
범머리 일대
한영교회 수양관
갈머리 일대
개목출입항 신고소
10시49분...개목 쉼터.. 이곳에서쉬면서.. 영양보충(떡과 음료수:비상용)...46키로미터 지점
16시경 저녁겸 점심먹고 그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답다로에 편의점 전무)
방조제를 지나고
개목개벌
산으로 진입.... 약2.5키로정도 산
한적한 산길.. 좋아요
구도항 일대
호랑이와 떡파는 소녀 전설
가로림만범머리길
구도항/여객선 탑승장?
구도나루터
00시20분...서해랑길76코스 안내도(75코스 종점및 76코스 시점)...50키로미터 지점
구도항/나루터
구도 방조제를 지나고
구도항 갯벌
구도항 반대편일대 조명(밝은것은 무인텔 )
당도(야산)
다시(서호) 방조제
달섬일대
도내교
가로림만 해변의 모든 집 들은 팬션 또는 숙박 시설들인 것 같음
도내마을 일대
도내2리 종점 버스 승강장
도내리
도내리 방조제
도내나루 터및 바다
**도내항 ; [ 島內港 , Donaehang ]
충청남도 태안군의 태안읍 도내리에 있는 항구이다. 항구의 명칭은 마을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시대의 도내리는 동일도면 소속이었다. 『여지도서』에 지명과 호구 수가 수록되어 있다.
도내리 안도내에서 가로림만 쪽으로 돌출한 곶에 위치하여 있다. 가로림만 간석지가 개간되기 이전까지 도내리는 가로림만으로 불쑥 튀어나온 반도였으므로 항구에 유리한 이점이 있었다. 안에는 도내리 나루터가 있었다.
여기서 가로림만의 물길을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면 팔봉면 호리의 구도항에 구도 나루터가 있었고,
원북면 청산리에는 청산리나루터가 연이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 지역의 세곡을 서울로 조운하던 유일한 항구였으며, 1970년대까지는 인천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었다. 지금은 기능이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어은2리 버스 승하차장
75코스 종점8.9키로미터 시점11.9키로미터 이정목(어은리)
산후리 일대
02시54분...산후리352-135위치에 도착...59.7키로미터지점(오늘 답사 끝부분)
서울가는 버스 예약차시간이 너무많이 남아(06시30분) 택시콜하지 않고 태안공용버스터미널(6.7키로미터) 걸아 간다
터미널 가는도중 만난 산후2리 다목적 회관
태안시내도착 첫조형물... 조금더 가면 버스 터미널
04시32분 ...태안공용버스 터미널에 도착---67.24키로미터
이곳에서 간단히 씻고 옷갈이입고 편의점에서 컵러면에 햇반 말아먹고 06시30분출발하는 고속버스 타고 서울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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