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자녀 교육에 실패한 엘리 대제사장
삼상3:11-14, 4:12-18
서 론
“엘리”란 이름의 뜻은 고상(高尙)하다는 뜻인데 그는 대제사장(大祭司長)이요(삼상1:9). 또 이스라엘의 사사(士師)였습니다. (삼상4:18)에 “사무엘”바로 전인(前人)자요 “아론”의 아들“이다말”의 계통(系統)의 후손입니다(왕상2:27, 대상24:3). 저는 사무엘을 맡아 기르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자기 아들을 교육시키는데는 크게 실패했습니다.
(삼상2:12)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엘리가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음란 방탕한 일을 듣고도 방임(放任)하여 대제사장의 계통이 이어 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엘리는 자기 가족 중에 제 1차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자들이 방임한 결과 불행하게 죽었고 그 후손 “아히둡”이 그 직분을 대신하였으니(삼상14:3) “아히둡”의 손 “아비아달”이 반역한 “아도니야”를 좇아 “솔로몬을 반대한고로 제사장의 직분을 박탈하게 되었습니다”(왕상2:26-27).
엘리는 대제사장으로 98세나 수연했으나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철저히 하지 못하므로 가정이 패가망신(敗家亡身)하고 말았습니다. 꼭 제사장 가문이 잘 되어야만 하는 명제가 붙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녀 교육을 바로 하지 못하여서 가정의 불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녀가 잘 안 되는 것이 바로 신앙 교육이 잘 되지 않아서 임을 알고 나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의 교육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생애를 더 깊이 생각해 보면서 많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경건하고 유능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사사시대의 말기에 사사요 대제사장이었으니 엘리는 대단히 존경스러운 자였습니다.
첫째, 대제사장으로 40년간 이스라엘을 치리한 자
(삼상1:9)에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즉 대제사장 엘리는 성전 안 마당에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제사장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래서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들어 가는 모든 사람은 엘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당시의 대제사장들의 직무중에 한 면이었으니 그는 직분에 대해 최선을 다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민27:2)에 보면 “회막문에서 모세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족장들과 온 회중앞에 서서”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이같이 엘리는 선배들의 제사장직을 수행하는데 유감없이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한나의 가련함을 보고 위로했던 자
(삼상1:17)에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했습니다. 즉 대제사장으로써 축복을 빌어 주었던 것입니다. 당시 한나는 무자해서 아들을 얻기위해 고통중에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 기도하는 한나를 위로하고 복을 빌어 준 것입니다.
셋째, 사무엘을 가르쳐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했습니다.
(삼상1:27)에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 한바를 허락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위해 이같이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삼상2:20)에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어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아직 나이가 어려 종교적 예식 및 신앙에 대해서 어려움이 많을 것을 감안하여, 엘리는 그 일을 잘 하도록 축복의 기도를 하며 직무에 대해 수시로 교육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이 엘리로 부터 적지 않은 교육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2. 제사장으로 실수가 있던 자
(삼상1:12)에 “그가 여호와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 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통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엘리는 한나가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을 술에 취한줄로만 알고 책망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즉 엘리는 한나의 마음속에 있는 안타까움을 보기 보다는 겉으로 나타난 표정을 보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거룩한 제사장직을 행하는 그가 형식적이고 육신적인 신앙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형제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 형제의 생각과 마음의 뜻을 깊이 이해할 줄 아는 사랑이 필요하며 엘리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주안의 은혜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신령한 체험을 못한 엘리 제사장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듣고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책임자들이니 다른 사람들은 다 못들어도 제사장은 들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역사가 기록된(삼상1-4장)에 보면 그가 사람과 대화한 기사는 있으나 하나님 앞에 자신이 기도했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기사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성전에 있을 때에도 어린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으나 저는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삼상3:4-10)절의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네 번씩이나 부르신 기사가 있습니다. 한데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엘리는 듣지 못했고 사무엘이 나를 부르셨나이까? 했을 때 저는 가서 잠이나 자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의 전 하나님의 궤 있는 곳에 누웠다가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요 네 번씩이나 부르셨는데 이를 먼저 듣고 지도해야 할 엘리에 귀에는 들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사도바울”을 부르실 때에도 이렇게 친히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음성에 순응하여 자기들의 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여생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말씀은 사모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엘리처럼 심령이 어두워서 잠만 자고 있는 자에게는 임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육안과 영안이 있듯이 귀에도 육의 귀와 영의 귀가 있습니다. 육의 귀는 세상 이야기를 듣는 귀요 영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는 귀입니다. 여기서 영의 귀에 대해 몇 가지 알고자 합니다.
첫째, 영의 귀가 열려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엘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은 영의 귀가 열리지 아니해서 못들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사환이나 스데반의 영안을 열어 주시고 영계를 보여 주신 것이 특수한 은사인 것 같이 영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특수한 은사라고 할 수 있나니 엘리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둘째, 영의 귀가 열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도 바로 들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에 서 있고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주장해 주시면 우리가 이세상 사람들에게서 무슨 말을 듣든지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선한 말을 듣든지 악한 말을 듣든지 길한 소식을 듣든지 흉한 소식을 듣든지 모든 말을 복되게 소화시켜 들을 수 있습니다.
(1) 칭찬하는 말을 듣고 시험에 들지 말고
악평하는 말을 듣고 시험에 들지 맙시다. 우리가 칭찬에서나 악평에서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의 위치를 바로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핍박받을 때도 깨어 있어야 하지만 칭찬받을 때는 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에서 핍박을 받을 때에는 신앙이 순수했으나 자유를 얻고 권세를 갖게 되자 부패했습니다. 예수님은 환영받으실 때나 핍박을 받으실 때도 변함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2) 남이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시험에 들지 말고 남이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시험에 들지 맙시다. 소인은 남이 실패했다면 기뻐하고 남이 성공했다면 시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올바른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은 그런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3) 지나치게 좁은 귀가 되지 말고 지나치게 넓은 귀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열두 정탐군들이 가나안을 탐지하고 돌아왔을 때 열 사람의 보고는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해서 우리는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자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분별해서 듣는 귀가 없었기 때문에 불신앙적인 열 정탐군의 말을 듣는 데는 지나치게 귀가 넓었고 신앙적인 두 정탐의 말을 듣는 데는 지나치게 귀가 좁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부왕 솔로몬 때의 고역을 가볍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왕이 부왕의 생전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한 즉 노인들은 백성의 말을 듣는 것이 가한줄 안다고 그랬고 왕이 젊은 친구들과 의논한즉 “나의 새끼 손가락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나는 더욱 무거운 멍에를 매게 하였고”라고 대답하라 하여 르호보암은 젊은 친구들의 말에 따랐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회중은 르호보암왕을 떠나게 되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르호보암이 노인들의 교도를 버린 것은 사랑과 겸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안이 열릴 때 육안도 열려서 만인과 만물을 바로 볼 수 있는 것같이 우리의 영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때에 육의 귀도 열려 세상 말도 분별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의 귀가 열리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 영을 주장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가 있습니다.
(1) 꿈과 환상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2)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거꾸러지고 180도로 변화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귀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일생에 한 두번 있기도 어려운 일이요 또 누구나 다 듣게 되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오늘날도 말씀하십니다.
(3) 지혜와 계시로 말씀하십니다.
(엡1:17-18)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번쩍하는 사이에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게 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4)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롬9:2, 요일3:20).
(5)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6)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7) 뜨거운 소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의 불로 응답함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영감을 주시면서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또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뚜렷한 음성은 들리지 않지만 마음에 “확신”을 주시므로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1) 듣기를 원하고 기대해야 합니다(출12:2)
(2) 겸손해야 합니다.
(3)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4)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5)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6) 기도하는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7) 확신과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면 반드시 순종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하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와도 결단을 내리고 순종하고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 엘리가 일러준대로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한 것 같이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큰 축복과 기회를 마련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바로 듣고 나가면 놀라운 기적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자식에 대한 신앙 교육에 실패한 자
엘리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바로 신앙교육을 하지 못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를 아니했습니다.
첫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로 여호와를 몰랐습니다.
(삼상2:12)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대제사장인데 그 두 아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했으니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기 자신만 잘 믿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잘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더욱 축복을 받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를 멸시하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아들이요 또한 제사장들의 제사 행위를 멸시했으니 말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 그 자체를 멸시했습니다. (삼상2:7)에 “이 소년들이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특수한 신분으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짓밟았습니다. (레10:12)에서 “제사장에 허락된 식물만 화제중 소제의 남은 것과 가슴과 뒷다리”등이니 먹고도 남을 것이로되 이것을 부족하게 생각하고 그들은 제물 중에 좋은 것을 먼저 취함과, 제사 전에 생고기를 탈취함은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죄악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노니 제사장에게 제물에 대한 응분의 몫을 지정하고 있는데도 고기 가마솥에서 삶은 고기를 갈고리로 마음대로 취했으며 불고기감으로 날것을 빼앗아 가는 일을 능사로 하였으니 이것이 홉니와 비느하스의 저주받을 사건인 것입니다.
셋째,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해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성전의 신성함을 교육받지 못한 것입니다. (삼상2:22)에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했습니다. 그들은 보통 창녀의 집에 가는 것도 극악한 죄라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제사장이란 직권을 이용하여 경건하며 신앙적인 여인들을 범하는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도저히 제사장으로써 범할 죄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즉 이는 제 칠계명을 범한 것이니 곧 간음죄입니다. 성막 봉사하는 여인을 범하였으니 색마(色魔)는 불고 염치(不顧廉恥)로 부끄러움을 돌아 보지 않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경건함은 물론이요 그들은 제사장이란 성직을 악용하여 극악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넷째, 충고도 효력을 내지 못했고
(삼상2:23-25)에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 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 하였으니”라고 하신 말씀을 보아 엘리의 두 아들들은 늙으신 아버지의 정중하고 심각한 충고를 거역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과, 부모에 대한 거역과, 다른 사람에 대한 범죄와, 자신의 불신앙의 죄, 이 4대 죄악은 어느 시대에나 심판의 표적(標的)이 됩니다(삼상2:30-34). 우리는 오늘날 청소년의 불량상태를 세심하게 보고 잘 지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6:8-10)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의 죄목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자녀된 자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고 부모님의 신앙적 교훈도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의 길인 것입니다.
5. 눈이 점점 어두어져서 잠만 자던 자
(삼상3:2)에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했습니다. 당시의 나이는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고령을 감안할 때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절의 표현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 뿐만 아니라 그와 비례하여 점점 약해져가는 엘리 제사장의 영적 무감각이 오고 만 것입니다.
물론 저는 영적으로 크게 은사를 체험 한 사실도 없지만 그나마 저에게 영적 은사가 점점 더 약해져 가니 이제는 더이상 그 직무를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성직자는 무엇보다도 세상의 지식으로 성역을 하는게 아니고 영적 은사로 하게 되는데 이 은사가 점점 약해지면 그는 그 직무를 그만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이제 엘리는 더 이상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고후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어디까지나 날마다 새로워 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생명이 약동하는 신앙은 긴장과 감격의 연속이어야 하고 또 날마다 새로워 지도록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때 생수가 나왔다가 말라버린 샘터가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샘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속의 고기가 물의 은혜를 알지 못하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할수 없는 은혜의 바닷속을 헤엄치며 살지만 아무런 감격도 감정도 없이 메말라 버린 상태에서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런 상태를 원치 않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 지는 감격과 감사와 긴장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