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별곡(20)-솔뫼엔 곧은 소나무가 없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솔뫼에서 나이가 지긋한 소나무들은 몸이 휘고 비틀어져 있다.
솔뫼 소나무들은 여전히 흙속에 스며있는 놀라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두려움에 뿌리를 박고 있다.
바람이 불면 가지나 줄기가 잘도 부러지고, 연일 폭우가 내려 토심이 물러지면 몇 그루씩 벌러덩 자빠진다.
그래서 폭우가 내리거나 폭풍이 불거나 폭설이 내리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몽유병자처럼 자다 말고 장대로 솔가지에 쌓인 떡눈을 털기도 했다.
솔잎혹파리를 퇴치하기 위해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맹독성 농약 다이메크론을 주입하다 어지러워 구토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4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제초작업을 10여 차례는 해야 한다.
기계로 잡초들을 참수할 때 튀는 돌과 풀 부스러기가 눈으로 입으로 귀로 옷이나 장화 속으로 들어오면 땀과 함께 정신이 혼미해졌다.
제초작업을 끝내고 땀에 절은 몸에 도장(塗裝)된 토사초(土砂草)을 씻으며 세례를 갱신한다.
저녁밥을 먹고 어두어진 솔밭을 오가며 기도하노라면 나는 수도자가 된 것 같았다.
소나무에 달빛이 닿으면 숲속은 비밀스러워졌다.
그리고 “나는 여기 왜 있는가?”를 11년 내내 솔밭에서 물었다.
(지금도 여전히 묻고 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9월 26일 복자첨례날[1]이면 솔뫼로 성지순례를 하곤 했다.
논두렁콩포기에 휘감겨 어린 나는 논배미에 빠지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사제가 되어 솔뫼성지에 두 번이나 살게 되었다.)
모든 성지에는 비밀이 있다.
밤과 낮을 하루라 하듯 성지들은 성성과 세속성이 공존한다.
성지의 시작은 ‘놀라움’이다.
(이는 ‘땅’이라는 성지의 ‘공간성’이다.)
몸뚱아리와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다가 영혼과 천국을 알게 되니 그렇고,
모든 게 제멋대로 생긴 줄 알고 살았는데 조물주가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렇고,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심판과 천당과 지옥이 있음 알게 되니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공간을 지으시고 하나하나 채워시고는 그때 마다 감탄하며 좋아하셨다.
성지는 공간을 만들어가며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듣는다.
하지만 성지는 갈수록 ‘부끄러움’에 빠진다.
(이는 성지의 ‘세속성’이다,)
나와 하느님, 세상과 천당은 멀어도 한참 멀어다고 여기는 인생들[2]이 살았고 방문하는 곳이 성지다.
그것이 사람이든 아니든, 지금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선대로부터 강력한 유전자의 소생들이다.
‘땅’은 강해지려는 세속 생명체들의 각축장이다.
그리고 ‘땅’은 더 강력한 것들만 살아남아 움직이도록 허락한다.
성지가 ‘땅’이나 ‘건물’이라는 공간에 빠질 때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더 강해지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런데 성지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순교자들은 무기력하게 사라져야 하는 운명들이었다.
(사실 세속의 역사가들은 순교자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순교자를 기억하는 성지는 강력함과 무기력함의 이중성 속에서 자기모순이라는 부끄러움에 빠져든다.
천국을 바라면서도 세상도 제대로 살지 못했던 순교자들처럼···.
성지의 땅과 하늘 사이는 차츰 ‘두려움’으로 채워져 간다.
성지(聖地)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기 때문이다.
성지(聖地)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지(聖地)는 사람이 지나면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순교자를 기억하는 성지는 정작 “나는 밀알, 맹수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하느님의 밀알”(성 이냐시오)이 되지 못하는 두려움이 깃든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간직해야 하는데도 성지엔 사람만 끌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돌과 자원예물로 웅장하게 꾸며져[3] 찬사를 받는 성지라도 공간에 묶이려는 것은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다.
교회는 땅이 부족하고 건물이 빈약해서 생기를 잃고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과 건물에서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진 이들[4]을 갈수록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솔뫼에 나이 먹은 소나무가 곧지 못한 것과 성지에서 살며 “나는 여기 왜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예수님은 약 600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시몬도 질 수 있었던 십자가를 지고 세 번이나 넘어지셨다.
소나무가 굽은 것은 나약함 때문이오, ‘내가 여기 왜 있는지’는 그 나약함 속에 하느님께 이르는 거짓 없는 믿음이 있음을 외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1] 첨례 : ‘축일’의 옛말. 복자첨례는 1926년부터 1983년까지 9월 26일에 한국천주교회에서 지내던 한국순교복자 고유축일이다.
[2] ‘불충실한 종’(마태 24,48-49) :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일탕방탕하고픈 속물성.
[3] 루카 21,5; 마르13,2.
[4] 요한 1,47; 마태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