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世家曰 孔子名丘요 字仲尼니 其先宋人이라.
사기세가왈 공자명구요 자중니니 기성송인이라.
사기 세가에 말하길 공자의 이름이 구고 자는 중니 이니 그 선대는 송나라 사람이었다.
父叔梁紇이요 母顔氏니 以魯囊公二十二年庚戌之歲十一月庚子에 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하다.
부숙양흘이요 모안씨니 이노양공이십이년경술지세십일월경자에 생공자어노창평향추읍하다.
아버지는 숙량흘이요 어머니는 안씨(顔徵在) 이니 노나라 양공 22년 경술(BC 552년) 11월 경자(27일) 에(以)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낳았다.
爲兒嬉戱에 常陳俎豆하고 說禮容이러시니 及長에 爲委吏하야는 料量平하고 爲司職吏하야는 畜蕃息하시니라.
適周하여 問禮於老子하고 旣反而弟子益進이러라
위아희희에 상진조두하고 설예용이러시니 급장에 위위리하사는 요량평하고 위사직리하사는 휵번식하시니라.
적주하여 문예어노자하고 기반이제자익진이러라
어려서 희희(소꿉놀이)를 할 때 항상 조두를 진설해놓았으며 禮法을 따르는 몸짓을 하였다. 장성함에 미치어 위리(창고 담당)가 되어서는 요량이 공평하였고 사직리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주(周) 나라에 가서는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고 돌아오고 난 뒤에는 제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昭公二十五年甲申은 孔子年三十五라 而昭公奔齊魯亂하니 於是에 適齊爲高昭子家臣하여 以通乎景公하다.
公欲封以尼谿之田한대 晏嬰이 不可라하니 公惑之어늘 孔子遂行하여 反乎魯하니라.
소공이십오년갑신은 공자년삼십오라 이소공분제노란하니 어제에 적제위고소자가신하여 이통호경공하다.
공욕봉이이계지전한대 안영이 불가라하니 공혹지어늘 공자수행하여 반호노하니라.
소공 25년 갑신(BC517년)은 공자 나이 35세였다. 소공(노나라 임금)이 제(齊) 나라로 달아나서 노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이에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서 경공과 소통을 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전답(토지)을 가지고서 공자를 봉하려고 하였는데 안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안영의 말에> 미혹당하였고,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서 노나라에 돌아왔다.
定公元年壬辰은 孔子年四十三이라 而季氏疆僭하고 其臣陽虎作亂專政이라 故孔子不仕而退하고 修詩書禮樂하니 弟子彌衆이러라.
정공원년임진은 공자년사십삼이라 이계씨강참하고 기신양호작란전정이라
고공자불사이퇴하고 수시서예악하니 제자미중이러라.
정공원년 임진(BC509년)은 공자의 나이 43세였다. 계씨가 강참(권세가 지나치게 강하여 분수에 넘는 짓) 하였고, 그(계씨)의 가신인 양호가 난을 일으켜서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출사하지 않고서 물러나 시경(時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를 편수(編修) 하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九年庚子는 孔子年五十一이라 公山不狃以費畔季氏하니 召孔子어늘 欲往而卒不行하니라
구년경자는 공자년오십일이라 공산불뉴이빈반계시하니 소공자어늘 욕왕이졸불행하니라
<정공> 9년 경자년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공산불뉴가 비읍을 가지고 계씨를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는> 가고자 하였으나 끝내 가지 않았다.
定公以孔子爲中都宰하니 一年에 四方則之라 遂爲司空하여 又爲大司寇하다. 十年辛丑에 相定公하여 會齊侯于夾谷하니 齊人歸魯侵地하다. 十二年癸卯에 使仲由爲季氏宰하여 墮三都하고 收其甲兵이러니 孟氏不肯墮成이어늘 圍之不克하다.
十四年乙巳는 孔子年五十六이라 攝行相事하여 誅少正卯하고 與聞國政하니 三月에 魯國大治라 齊人歸女樂以沮之하니 季桓子受之하고 郊又不致膰俎於大夫한대 孔子行하니라.
정공이공자위중도재하니 일년에 사방칙지라 수위사공하여 우위대사구하다. 십년신축에 상정공하여 회제후우협곡하니 제인귀노침지하다. 십이년계묘에 사중유위계씨재하여 휴삼도하고 수기갑병이러니 맹씨불긍휴성이어늘 위지불극하다.
십사년을사는 공자년오십육이라 섭행상사하여 주소정묘하고 여문국정하니 삼월에 노국대치라 제인귀여악이저지하니 계환자수지하고 교우불치번조어대부한대 공자행하니라.
14년 을사는 공자의 나이 56세였다. 재상의 일을 대행하여 소정묘(노나라 대부)를 誅殺하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니, 석 달 만에 노나라가 크게 잘 다스려졌다. 제나라가 <노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을> 저지하려고 미녀 악사들을 선물 하였는데, 계환자가 받아들였고, 郊祭祀를 지내고 제사 고기를 보내주지 않으니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
適衛하여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하다. 適陳할새 過匡하니 匡人以爲陽虎而拘之하다. 旣解還衛하여 主蘧伯玉家하여 見南子하다.
적위하여 주어자로처형안탁추가하다. 적진할새 과광하니 광인이위양호이구지하다. 기해환위하여 주거백옥가하여 견남자하다.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의 집에 머물렀다. 진나라로 갈 때에 광(匡) 땅을 지나가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陽虎라고 여겨 拘禁 시켰다. 풀려난 뒤에 위나라로 돌아와서 거백옥의 집에 머물면서 南子를 만났다.
去適宋한대 司馬桓魋欲殺之어늘 又去適陳하여 主司城貞子家하고 居三歲而反于衛하니 靈公不能用하다.
晉趙氏家臣佛肹以中牟畔하여 召孔子어늘 孔子欲往이라가 亦不果하다. 將西見趙簡子라가 至河而反하여
又主蘧伯玉家러니 靈公問陳이어늘 不對而行하여 復如陳하다.
거적송한대 사마환퇴욕살지어늘 우거적진하여 주사성정자가하고 거삼세이반루위하니 영공불능용하다.
진조씨가신불힐이중모반하여 소공자어늘 공자욕왕이라가 역불과하다. 장서견조간자라가 지하이반하여
우주거백옥가러니 영공문진이어늘 불대이행하여 부여진하다.
<위(衛) 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는데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하여 다시 <송나라를 떠나> 陳나라로 가서 사성정자의 집에 머물렀고 3년 동안 머물다가 위나라로 돌아오니 靈公이 등용하지 않았다. 晉나라 조 씨(趙鞅)의 가신인 필힐이 中牟에서 배반하여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는 가려다가 실현하지 않았다. 장차 서쪽으로 가서 조간자를 만나보려 하다가 黃河에 이르러 돌아와 또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는데 영공이 진법을 묻자 대답하지 않고 떠나 다시 진(陳)나라로 갔다.
季桓子卒에 遺言謂康子호되 必召孔子라하더니 其臣止之한대 康子乃召冉求하다. 孔子如蔡及葉하다.
계환자졸에 유언위강자호되 필소공자라하더니 기신지지한대 강자내소염구하다. 공자여채급섭하다.
계환자가 죽을 때 유언으로 강자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공자를 불러라”고 하였는데, 그의 가신(公之魚)이 저지하자 강자는 마침내 冉求를 불렀다. 공자는 채(蔡) 땅과 섭(葉) 땅으로 갔다.
楚昭王將以書社地로 封孔子러니 令尹子西不可하니 乃止하라. 又反乎衛하니 時靈公已卒하고 衛君輒이 欲得孔子爲政하며 而冉求爲季氏將하여 與齊戰有功한대 康子乃召孔子어늘 而孔子歸魯하니
實哀公之十一年丁巳而孔子年六十八矣라.
초소왕장이서사지로 봉공자러니 영윤자서불가하니 내지하라. 우반호위하니 시영공이졸하고 위군첩이 욕득공자위정하며 이염구위계씨장하여 여제전유공한대 강자내소공자어늘 이공자귀노하니
실애공지십일년정사이공자년육십팔의라.
초나라 소왕이 書社의 땅을 가지고서 공자를 봉(封) 하려고 하였는데 영윤인 子西(楚平王의 庶子)가 불가하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공자가> 또다시 위(衛) 나라로 돌아오니 이때 영공은 이미 죽었고 위나라 임금인 輒이 공자를 얻어서 정사를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염구(冉求)가 <노나라> 계씨(季氏)의 將帥가 되어 제(齊) 나라와 전쟁에서 공을 세우자 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니 실로 애공(哀公: BC 494∼ BC 468) 11년(BC484) 정사에 공자 나이 68세였다.
然魯終不能用孔子하고 孔子亦不求仕하여 乃敍書傳禮記하며 刪詩正樂이요 序易彖繫象說卦文言하니라.
弟子蓋三千焉에 身通六藝者 七十二人이러라. 十四年庚申에 魯西狩獲麟하니 孔子作春秋하니라.
연노종불능용공자하고 공자역불구사하여 내서서전예기하며 산시정악이요 서역단계상설괘문언하니라.
제자개삼천언에 신통육예자 칠십이인이러라. 십사년경신에 노서수획린하니 공자작춘추하니라.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고, 공자 역시 출사 하지 않으니 마침내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를 編敍(차례를 바로 잡음) 하고 시경(詩經)을 刪定(글을 다듬음) 하고 樂記를 바로잡았으며 주역(周易)의 단전(彖傳), 계사전(繫辭傳), 상전(象傳), 설괘전(說卦傳), 문언전(文言傳)을 차례로 지었다. 제자가 대략 3천여 명 이였는데 몸소 육예(六藝)에 능통한 사람이 72명이었다. 14년(BC481) 경신에 노나라 <애공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으니 공자는 춘추(春秋)를 지었다.
明年辛酉에 子路死於衛하고 十六年壬戌四月乙丑에 孔子卒하시니 年七十三이라 葬魯城北泗上하다.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로되 惟子貢廬於冢上하여 凡六年이러라.
명년신유에 자로사어위하고 십육년임술사월을축에 공자졸하시니 년칠십삼이라 장노성북사상하다.
제자개복심상삼년이거로되 유자공려어총상하여 범육년이러라.
다음 해 신유년에 자로가 衛나라에서 죽었으며, <애공> 16년(BC479) 임술 4월 을축일(18일)에 공자가 별세하시니 연세는 73세였다. 노나라 도성(都城) 북쪽 사수(泗水중국 산둥성에 있는 강)가에 장례를 지냈다. 제자들이 모두 다 心喪(상복을 입지는 아니 하나 상중과 같이 처신하는 행위) 3년 복을 하고 떠났으나 오직 자공만은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서 모두 6년을 지냈다.
孔子生鯉하니 字伯魚라 先卒하고 伯魚生伋하니 字子思니 作中庸하니라.
공자생리하니 자백리라 선졸하고 백어생급하니 자자사니 작중용하니라.
공자가 鯉를 낳으니 자(字)가 伯魚였는데 <공자 보다> 먼저 죽었고, 백어가 伋을 낳으니 자(字)는 子思로 “중용(中庸)”을 지었다.
何氏曰 魯論語는 二十篇이요 齊論語는 別有文王知道하여 凡二十二篇이라 其二十篇中章句도 頗多於魯論이라. 古論은 出孔氏璧中하니 分堯曰下章子張問하여 以爲一篇하여 有兩子張하니 凡二十一篇이요
篇次不與齊魯論同이니라
하씨왈 노논어는 이십편이요 제논어는 별유문왕지도하여 범이십이편이라 기이십편중장구도 파다어노론이라. 고론은 출공씨벽중하니 분요왈하장자장문하여 이위일편하여 유양자장하니 법이십이편이요
편차불여제노론동이니라.
하 씨(何晏 자는 平叔 魏나라 南陽사람)가 말하길 魯論語는 20편이요, 齊論語는 별도로 문왕(問王)편과 지도(知道)편이 있어서 모두 22편이다. 그 <제논어> 20편에 있는 장구(章句)도 魯論語보다 상당히 많다. 古論은 공 씨의 벽 속에서 나왔으니 堯曰 다음 장에 있는 子張問을 나누어 한편을 만들어서 子張이 두 편이 있으니 모두 21편이고, 篇의 차례도 魯論語와 齊論語는 같지 않다.
程子曰 論語之書는 成於有子曾子之門人이라 故其書獨二子以子稱하니라.
程子曰 讀論語에 有讀了全然無事者하며 有讀了後에 其中得一兩句喜者하며 有讀了後에 知好之者하며 有讀了後에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니라.
정자왈 논어지서는 성어유자증자지문인이라 고기서독이자이자칭하니라.
정자왈 독논어에 유독료전연무사자하며 유독료후에 기중득일양구희자하며 유독료후에 지호지자하여 유독료후에 직유불지수지무지족지답지자니라.
정자(程伊川)가 말하길 논어의 글은 유자와 증자의 문인에게서 완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논어)에서는 유독 두 사람만을 자(子)라고 일컫는다.
정자가 말하길 論語를 배우고 나서 전혀 일이 없는 사람(하나라도 터득한 게 없음)도 있으며, 배우고 난 뒤에 그중 한두 글귀를 깨우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며, 배우고 난 뒤에 <논어를>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며, 단지 손이 춤을 추게 하고 발이 굴러지게 되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程子曰 今人不會讀書로다 如讀論語에 未讀時是此等人이요 讀了後에도 又只是此等人이면 便是不曾讀이니라. 程子曰 頤自十七八로 讀論語하니 當時已曉文義러니 讀之愈久에 但覺意味深長이로다.
정자왈 금인불회독서로다 여독논어에 미독시시차등인이요 독료후에도 우지시차등인이면 변시불증독이니라. 정자왈 이자십칠팔로 독논어하니 당시이효문의러니 독지유구에 단각의미심장이로다.
정자가 말하길 지금 사람들은 글을 배우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논어를 배울 때에 아직 배우지 아니하였을 때에도 이러한 등급의 사람이었고, 배우기를 마친 뒤에도 단지 이러한 등급의 사람일 뿐이라면 이 사람은 바로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다.
정자가 말하길 나는 나이 17, 8세 때부터 논어를 공부하였는데, 당시에도 이미 글의 의미를 알고 있었건만, 공부하기를 더욱 오래 한 뒤에야 다만 <논어의> 의미가 심장함을 깨우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