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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해석>
「辛巳▨▨中折盧䒑▨…▨,
喙部習智阿干支 沙喙斯德智阿干支
敎沙喙尒抽智奈麻, 喙部卒智奈麻, 本牟子 / 喙沙利, 夷斯利白. 爭人喙評公斯弥, 沙喙夷須, 牟旦 / 伐喙斯利壹伐, 皮朱智, 本波喙柴干支, 弗乃壹伐, 金評 / ▨干支, 祭智壹伐. 使人奈蘇毒只道使喙念牟智, 沙 / 喙鄒須智. 世令于居伐壹斯利, 蘇豆古利村仇鄒列支 / 干支,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卜岳干支, 走斤壹金知 / 珍伐壹昔云, 豆智沙干支宮, 日夫智宮奪尒, 今更還 / 牟旦伐喙作民. 沙干支使人果西牟利白口, 若後世更 / 噵人者与重罪. 典書与牟豆, 故記. / 沙喙心刀哩▨.」
신사(辛巳)년 (모월) 중에 절로□ …
-훼부(喙部)의 습지(習智) 아간지(阿干支)와 사훼(沙喙)의 사덕지(斯德智) 아간지(阿干支)가 교(敎; 명령)하였다.
-사훼(沙喙)의 이추지(尒抽智) 나마(奈麻) 훼부(喙部) 의 본지(本智) 나마(奈麻) 본모자(本牟子)인 훼(喙)의 사리(沙利) 이사리(夷斯利)가 아뢰었다.
-백(白) "쟁인(爭人; 소송 당사자)은 훼의 평공 사미(斯彌), 사훼의 이수 모단벌(牟旦伐), 훼의 사리일벌(斯利壹伐)과 피말지(皮末智), 본파훼(本彼喙)의 시간지(柴干支)와 불내 일벌(弗乃壹伐), 금평(金評) □간지와 제지 일벌(祭智壹伐)이고, 사인(使人; 재지 촌주)은 내소독지(奈蘇毒只)이며, 도사는 훼의 염모지(念牟智), 사훼 추수지(鄒須智), 거벌(居伐)의 일사리(壹斯利)이다"라고 하였다.
-소두고리촌(蘇豆古利村)의 구추열지(仇鄒列支) 간지(干支)와 비죽휴(沸竹休) 일금지(壹金知), 나음지촌(那音支村)의 복악(卜岳) 간지와 주근(走斤) 일금지(壹金知) 등이 세간에 명령한다.
"진벌의 일(지번, 혹은 이)은, 옛날에 말하기를[昔云], 두지(豆智) 사간지궁(沙干支宮)과 일부지궁(日夫智宮)이 빼앗았던 것[奪尒]이라 하였는데, 이제 다시[今更] (그것을) 모단벌에게 돌려주어라."
(이에) 훼의 작민 사간지의 사인 과서모리(果西牟利)가 "만약 후세에 다시 말썽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중죄를 준다"라고 하였다. 전서(典書)인 여모두(또는 전서와 모두)가 (이러한) 연고로 기록한다.
사훼 심도리□ … (세웠다)
카페지기 해석
「辛巳▨▨中折盧䒑▨…▨,
喙部習智阿干支 沙喙斯德智阿干支 敎 沙喙尒抽智奈麻, 喙部卒智奈麻 本牟子 /
喙沙利夷斯利 白爭人 喙評公斯弥 沙喙夷須
牟旦/伐 喙斯利壹伐, 皮朱智, 本波喙柴干支, 弗乃壹伐, 金評/▨干支, 祭智壹伐.
使人 奈蘇毒只. 道使 喙念牟智, 沙/喙鄒須智, 世令于 居伐壹斯利, 蘇豆古利村仇鄒列支/干支,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卜岳干支, 走斤壹金知 /
珍伐壹昔云, 豆智沙干支宮, 日夫智宮奪尒 今更還/ 牟旦伐 喙作民沙干支
使人 果西牟利 白口, 若後世更/噵人者与重罪.
典書与牟豆, 故記. /沙喙心刀哩▨.」
신사년 □□중 切盧□파손
-훼(탁,달)의 부습지 아간지, 사훼(탁,달)의 사덕지 아간지가 교를 내렸다.
사훼의 이추 지나마, 훼의 부졸 지나마가 아뢰었다.
*본모 : 고대에 나라에서 돈이나 곡식등을 대여할때의 원금이나 원물을 말함.
웨의 사리이 사리가 명확히 다툰 사람은 훼의 평공 사미, 사훼의 夷須(이수), 牟旦伐(모단벌)에 사는 훼의 사리 일벌과 피주지, 본파부의 훼시 간지, 불내 일벌, 금평 □간지, 제지 일벌 이다.
*본파 : 울진 봉평리에 보이는 부명
사인 내소독지와 도사 훼의 염모지, 사훼의 추수지는 명을 내린다. 거벌일 사리, 소두고리촌의 구추열지 간지, 비죽휴 일금지, 나음지촌의 복악 간지, 주근 일금지에게
진벌일이 지난 날 말하기를,
"두지의 사간 지궁과 일부지궁이 너에게서 빼앗은 것이라 하니 단모벌에 사는 훼의 작민 사간지에게 다시 돌려준다.
▷국어식(이두식) 문장구조(목+술 구조)로 해석 : 두지사간지의 궁과 일부지의 궁을 너에게 빼았았다 하니,
사인 과서모리가 입으로 명확히 말하기를, "만약 후세에 다시 어기는 자는 중죄를 준다." 하였다.
전서와 모두가 그래서 기록 기록한다. 사훼의 심도리가 □.
喙’는 ‘부리:훼’ 字로서 분명 ‘훼’로 소리가 남에도 통상 "탁"으로 읽는다.
그 이유는 일단 "喙(훼)"와 "啄(탁)"이 字形上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喙에 대한 기록은 계림유사에서 찾아진다. 계림유사의 사본은 현존하는 것이 약 20개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곳에 “雞曰/口+遂-辶/音達” 또는 “雞曰啄/口+豕/音達” “雞曰喙音達”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https://livemiri.tistory.com/224?category=494970 [한국고대사를 바로보자.]
■ 발견개요
국보 제318호. 2009년 5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 거주하는 김헌도씨가 북구 흥해읍 중성리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한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비이다. 발견 당시에는 ‘학성리비’로 보고되었지만, 정밀 측량 결과 발견 지점이 중성리로 확인됨으로써 ‘포항 중성리 신라비’로 명칭을 바꾸었다. 모양이 일정치 않은 자연석 화강암 한 면에만 고졸한 예서체로 행별 최대 21자, 12행 203자 정도를 음각하였다. 비석은 비면 맨 위쪽 일부와 우측면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일부 획이 남아 있는 4자, 결락된 4자를 제외한 195자의 글자를 모두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하다. 비석 하단부 약 20㎝ 공간은 글자를 새기지 않고 비워 놓았다.
※영일 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倭)·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
곡강천을 통해 신광면과 연결되며, 신광면은 안강(安康)·청하(淸河)·흥해(興海)를 잇는 교통의 요지.
※진솔선예백장 동인 [晉率善濊伯長銅印]
포항시 신광면 흥곡리에서 출토된 청동 도장. 높이 2.7cm, 폭 2.4cm로, 중국 진(晋)나라 때에 제작된 것이다.
사각형의 도장면에, ‘진솔선예백장(晋率善濊伯長)’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보물 정식 명칭은 ‘청동 진솔선예백장 인장’이다.
■ 내용
○ 건립 연도 : 辛巳□□中折
비문 첫 머리의 ‘신사(辛巳)’년을 어느 시기로 보느냐에 따라 501년(지증왕 2)설과 441년(눌지왕 25)설이 있다.
대체로 비문의 형식, 문체, 글자의 용법, 관용구 등이 냉수리비와 거의 같으면서 이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501년설이 유력하다.
■문장구성
○본모자(本牟子)의 풀이(3열 15~17)
-인명으로 해석 : ‘본모의 아들’과 ‘본모자’ 전체를 인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
-직함으로 해석 :
‘본래의 모자’, 원래의 소유자라는 해석
고위자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은 하급관리로 해석 ▷ ‘본디 모자’, 사건의 실상을 조사하는 역임자,
-지명으로 해석 :
경주 동쪽 모지정(毛只亭)과 관련된 지명으로 해석 ▷ ‘본래 모자 지방의 누구누구라고 사뢰었다’고 풀이
○백쟁인(白爭人)의 풀이(4열 7~9)
-백쟁인을 ‘사뢰는 사람’으로 해석
-쟁인 만을 따로 떼어내어 해석
▷소송을 제기한 사람, 분쟁을 일으킨 사람, 또는 왕경의 지배층에게 분쟁의 판정을 호소한 사람, 쟁송을 실무선에서 제기한 사람, 쟁송의 심의와 판결 전의 1차 평결을 맡았던 사람 또는 분쟁의 당사자,
▷냉수리비의 7왕등과 같은 역할 곧 쟁의(爭議)하는 소임을 맡은 사람 등으로 풀이.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현재는 전체 문단을 교(敎), 백(白), 령(令), 운(云) 등의 동사로 문단을 구분하고, 다른 글자에 비하여 대략 1.5배 내지 1.8배 정도 큰 글자로 씌여진 ‘교(敎)’ 이하 ‘고기(故記)’ 앞까지를 교의 내용으로 본다.
교를 받은 객체에 대하여는 중고기 신라비에서 교를 받는 대상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체로 모든 신라인에게 고시하는 성격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마지막 문단의 ‘그러므로 기록한다(故記)’는 교가 있었으므로 기록한다는 의미이며,
‘사탁심도리공(沙喙心刀哩公)’은 이 글을 쓴 자 내지 비를 세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비는 쟁인으로 표현된 6부가 모종의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여 사인인 도사를 통하여 이 문제와 관련된 거벌고리촌·고리촌·나음지촌·진벌 지역, 곧 지금의 경주 동쪽 일원과 포항 지역을 아우르는 지방민에게 영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의 내용에 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연구자에 따라 금광, 주민, 식읍, 토지에 대한 권리(수조권), 궁(宮) 등을 돌려준다는 의미로 추론하기도 한다. 이는 두 개의 궁 이하의 글자를 빼앗을 ‘탈(奪)’자로 석독한 결과이다. 이를 냉수리비 ‘칠왕등(七王等)’의 ‘등’과 동일한 이체자로 석독하고 교의 첫 문장을 이 비의 쟁송이 있게 된 배경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모자 지역의 지방민이 왕경 탁부와 사탁부에 속하였다가 쟁인의 협의를 거쳐 다시 본래 지방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라는 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이 비에는 울진봉평신라비에서 일컬은 신라 6부의 이름이 501년 당시에 탁·탁부·탁평, 사탁부, 모참벌, 본피, 금평 등으로 일컬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탁·사탁부 출신의 귀족들 가운데 궁(宮)을 소지한 자들은 개별적인 사인(使人)을 두었는데, 이는 국왕의 개별적 사인으로서의 도사(道使)와 같은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탁부·사탁부가 ‘[국왕(갈문왕)]-아간지-일간지-사간지-거벌간지-나마’의 관등체계인데 대해, 왕경 여타 4부는 ‘간지-일벌’, 그리고 지방 촌의 경우 ‘간지-일금지’의 체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 비는 501년 당시 지증왕의 개혁정치와 관련된 왕경 6부의 구조 뿐만 아니라 관등체계 및 골품제의 정비과정, 지방 지배 체제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인정된다.
중성리비는 지금까지 내용 파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6세기 초 흥해지역에서 왕경인과 현지인이 뒤얽혀 무언가를 뺏고 빼앗겨서 다툼이 생겼다는 점, 그리고 중앙 정부에서 분쟁을 판정한 결과를 고지한 내용이라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중성리비 후반부의 구절을 보면 “진벌일(珍伐壹)이 말하되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과 ‘일부지궁(日夫智宮)’이 빼앗았다(奪)고 하니‘ 다시 이제(今更還)’ 모단벌훼(牟旦伐喙)와 작민사 간지(作民沙干支)에게 돌려주라”는 내용이 들어있다.(하일식 교수 견해)
하 교수는 “중성리비에서 보이는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이나 일부지궁(日夫智宮)은 울진 냉수리비에 보이는‘왕(王)’이라 표현된 세력가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존재로 생각된다”고 보았다.
‘인명+궁(人名+宮)’으로 기록된 실체는 신라라는 국가 범주에 결집된 사로국 이래의 여러 세력가들 가운데서 대표적 가계의 대표 인물이 유지하던 위상과 건조물 및 실무조직을 통틀어 칭하던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 교수는 결국 ‘빼앗고 되돌려 준 분쟁의 대상’을 수조권이라고 가정하고 “궁(宮)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세력가가 그렇지 못한 자로부터 수조지를 빼앗았으며, 분쟁 끝에 중앙정부의 판정으로 되돌려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 교수는 중성리 비문에 나오는 내용을 분석하면서 ‘빼앗은(奪) 쪽은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과 일부지궁(日夫智宮)이고, 돌려받은(還) 쪽은 작민사간지(作民沙干支)와 모단벌훼(牟旦伐喙)가 공동으로 소유한 토지’로 보았다.
하 교수는 다시한번 “진벌일(珍伐壹·마을의 나이많은 사람인 듯)이 말하기를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과 일부지궁(日夫智宮)이 빼앗았다’고 하니 이제 다시 모단벌훼(牟旦伐喙)와 작민사간지(作民沙干支)에게 돌려주라”고 번역했다.
비문에는 사인 과서모리(使人 果西牟利)가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重罪)를 주겠다”고 다짐하는 내용도 등장한다.
하 교수는 “이런 표현들은 고려시대 수조권 다툼을 둘러싼 분쟁에서도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이틀 동안 벌어지는 학술대회에서는 이 중성리비를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제264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묶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세 비석과 유사한 사례로는 일본이 201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 고즈케(上野) 삼비(三碑)가 있다. 미리 배포된 발표문에 따르면 군마현지역문화연구협의회 소속 마에자와 가즈유키(前澤和之)는 “고즈케 삼비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당시 거의 완전한 형태로 원위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일본 최고 석비군임을 내세우고, 신라 석비를 원류로 하면서도 독자적으로 변용한 점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또 박형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비석과 명문(銘文·금석에 새긴 글) 12건을 소개하고 “해당 유산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정리하고, 연관된 세계유산이 있다면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학술회의에서는 중성리 신라비 세계기록유산 가치 고찰 외에도 글씨 특징과 서예사적 의의, 국어사적 의의, 문서 격식, 상고기 신라 지역 지배, 비석에 나타나는‘탈(奪)’과‘환(還)’의 대상 등 다양한 주제 발표가 진행된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판독문이 비문 해석의 새로운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학술회의를 계기로 중성리 신라비의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재조명되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