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새 선교 임지가 정해지다(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9)
조선을 갈망했지만 ‘선교의 황무지’ 샴(태국)으로 발령 받아
- 브뤼기에르 신부의 첫 선교지는 베트남 코친차이나대목구였으나 마카오에 도착한 후 선교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샴대목구로 임지가 바뀌었다. 그림은 코친차이나 관헌에 잡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심문을 받고 있는 장면.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소장.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6년 2월 5일 파리를 떠나 긴 여정 끝에 그해 12월 초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에는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한 교구뿐 아니라 교황청 포교성성대표부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도 있었다. 사도좌의 선교사로서 포교성성대표부를 방문한 브뤼기에르 신부는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라틴어로 번역된 한 통의 편지를 받아 읽었다.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성직자를 요청하는 탄원서였다. 그는 이 탄원서를 읽고 조선 선교를 갈망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포교성성에서 유럽 신부들에게 호소하듯이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호소한다면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다”(1826년 말~1827년 초 바타비아에서 카르카손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보낸 편지)는 뜻을 밝혔다.
- 브뤼기에르 신부의 첫 선교지는 베트남 코친차이나대목구였으나 마카오에 도착한 후 선교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샴대목구로 임지가 바뀌었다. 그림은 코친차이나 관헌에 잡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심문을 받고 있는 장면.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소장.
하지만 새 선교 임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그에게 샴(지금의 태국)으로 떠날 것을 명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를 떠날 때 코친차이나(Cochinchine) 선교사로 내정돼 있었다. 코친차이나는 사이공(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베트남 지역을 가리킨다. 1659년 9월 9일에 코친차이나대목구가 설정됐다. 초대 대목구장은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 중의 한 명인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트(Pierre Lambert de la Motte) 주교였다. 코친차이나 대목구는 1844년 3월 11일 동부와 서부 코친차이나대목구로 분할됐다. 1850년 8월 27일에는 동부 코친차이나대목구에서 북부 코친차이나대목구가 신설됐다.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본부에서 파견될 때 장상으로부터 선교 임지를 통보받았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신부의 경우처럼 마카오에 도착한 다음 극동대표부가 배정한 새 선교지로 가는 게 다반사였다. 또, 모방 신부처럼 선교지에 도착한 후 자원해 새 임지를 바꾸는 일도 적지 않았다. 마카오는 이상을 꿈꾸던 프랑스와 달리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야전 사령부였다. 선교사들은 마카오에 도착했지만 박해 때문에 배속지로 갈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극동대표부의 조치에 따라 순교한 선교사들의 빈자리로 긴급하게 떠나야 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도 동료 선교사인 페코 신부가 갑작스레 선종하는 바람에 그를 대신해 샴으로 가게 된 것이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샴대목구청이 있는 방콕으로 가기 전에 교구 관할로 있는 말레이시아 페낭의 파리외방전교회 국제 신학교를 들렀다. 사진은 19세기 중후반 페낭 항구 모습.
샴대목구는 샴과 케다(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 파라, 리고르 왕국의 모든 지역과 라오스 왕국 일부를 관할했다. 오늘날 태국은 물론 말레이반도와 그 북쪽 모든 지역이 해당한다. 이렇게 광활한 교구를 64세의 노쇠한 프랑스인 주교 1명과 본토인 사제 3~4명이 사목하고 있었다. 본토인 사제들도 사목 경험이 부족해 유럽인 선교사에게 지도를 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샴교구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던 선교지였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이 지역을 전혀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황무지로 여겼다.
소조폴리스의 명의 주교로 샴대목구장이며 이 지역의 유일한 유럽인 선교사는 바로 마리 에스프리 플로랑(Marie Esprit Florens, 1762~1834) 주교였다. 그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처럼 프랑스 아비뇽교구 출신이었다. 더욱이 그의 고향도 페레올 주교와 같은 보클뤼즈현이었다. 아비뇽 교구 출신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도 있다. 바로 가톨릭교회 선교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알렉상드로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신부다. 그는 베트남을 최초로 선교한 예수회 사제로, 교황청에 아시아 선교를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안했다. 교황청이 아시아 선교 정책을 주도할 수 있도록 교황이 직할하는 ‘대목구’를 설정하고, 교황을 대리하는 명의 주교 대목구장에게 자치권을 주자고 주장했다. 또 현지 선교를 촉진하기 위해 본토인 사제를 먼저 양성해야 한다고 청했다.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 교황은 이 방안을 받아들여 1658년 교회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지역에 대목구를 설정했다. 그리고 북베트남과 라오스 일대 지역인 통킹과 코친차이나에 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프랑수아 팔뤼 주교와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를 임명했다. 이들 두 주교는 선교지로 떠나기에 앞서 후속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파리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신학교가 파리외방전교회로 발전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선교지가 확정되자 샴대목구장이 있는 방콕으로 서둘러 떠났다. 플로랑 주교를 도와줄 보좌 주교도 없어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선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긴 항해의 여독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다시 배를 타고 1826년 12월 11일 마카오를 떠났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마카오로 왔던 항로를 거슬러 말라카 해협을 지나 페낭 섬으로 갔다. 샴대목구 관할인 페낭을 거쳐 육로로 말레이반도를 통과해 방콕까지 갈 계획이었다. 시간을 단축하고 말레이반도 내륙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때의 여행기를 작성해 친구인 프랑스 남부 에르교구 총대리 부스케 신부에게 보냈고 그 내용은 리옹에서 발간하는 선교잡지 「전교후원회 연보」 1831년 7월호에 게재됐다. 이 여행기는 프랑스와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지리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많은 잡지에 실렸고, 1854년 샴대목구장인 장 바티스트 팔구 주교가 2권의 샴 연구서를 발간하기 전까지 샴왕국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소개서로 읽혔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26일,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