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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책 속에서
유채아/중산초 6학년
초희는 13살의 여자아이가 경험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은 여름방학 도서관 미술 캠프에서였다.
1장 방학식
“이야아아아. 드디어 방학이다! 같이 노실 분?”
“나!”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학교 교문을 빠져나갔다.
“초희야, 오늘 학교 끝나고 놀래?”
한 친구가 초희를 불렀다.
“미안, 나 오늘 학원 가야 돼서.”
“에? 방학인데도?”
친구가 묻는 말에 초희는 한숨을 푹 쉬고는 생각했다.
‘그래, 우리 대단하신 어마마마께서 방학식날에도 미술 학원에 기쁨을 부르셔야겠단다.’
초희라는 이름의 뜻은 ‘부를 초’에 ‘기쁨 희’, ‘기쁨을 부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초희는 학원에 간다는 말을 기쁨을 부른다, 라고 한다. 하지만 학원에만 기쁨이 가지, 초희에겐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에 모처럼 놀아 보고 싶어도, 초희의 손은 노래방 마이크가 아닌 붓을 들어야 했다.
“야, 얼른 가자!”
“으응, 알겠어!”
“얼른 가 봐.”
초희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친구는 초희를 향해 한 번 웃어주며 말했다.
“응, 방학 끝나고 봐.”
초희는 친구들에게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고 미술 학원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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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전거
미술학원이 끝난 뒤 초희는 얼얼해진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꼭 붙잡았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역시 자전거가 최고였다. 사실 미술만을 죽어라 하고 있는 초희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자전거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 자전거를 사 달라고 말하는 것도 힘든데 자전거 선수가 되고 싶다고 엄마한테 말하는 건 정말로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초희는 천식이 있었다. 자전거를 열심히 타다가도 기침이 나와 호흡기를 찾고는 했다. 그래도 초희는 자전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이렇게 시원하게 한강변을 달리고 있을 때면 세상에 자신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터럴터털털터터터어얼”
초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자전거 체인이 또 빠졌다. 정말로 새 자전거가 필요했다. 이젠 타다가 한 번씩 빠지는 게 아니라 체인이 5바퀴 구르면 한 번 꼴로 빠지는 것 같다. 이러다가는 1주일도 더 못 탈 것 같다. 초희는 체인이 빠진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탈탈탈탈탈대는 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귀에 거슬렸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초희는 뛰다시피 집으로 향했다.
3장 캠프
“야!! 윤초희! 너,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게 와?”
“왜? 학원 빼먹진 않았어.”
“…아, 안 빼먹었으면 됐어.”
엄마가 웬일로 혼을 내지 않았다. 분명 부탁할 게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초희의 뒤를 따라왔지만 초희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함께 있기 싫다는 의미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오늘도 (대단히 눈치가 없는 건지 초희의 뜻을 무시하는 건지) 엄마 초월 씨는 어김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했다. 말을 걸었다.
“초희야…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너 그림 많이 하느라 힘든 건 알겠는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자. 응?”
‘맨날 마지막, 마지막. 전부 다 마지막이래. 미술과외 하나 더 하라고 할 때도 마지막이라 했으면서. 그냥 하나 더라는 말을 쓰면 병이라도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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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희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시간을 조금 끌다가 물었다.
“…..뭔데?”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하는 미술캠프가 있어. 일주일 동안 프랑스에서 미대를 나온 선생님이 직접 강의를 해 주신대. 학교대표 1명만 참가할 수 있는데 네가 대표로 뽑혔다고 하시더라고. 당연한 일이지만… 방금 담임 선생님께서 전화하셔서 말씀하시더라. 인재가 없는 학교는 참가도 못 했대. 그런데 중요한 건 이거야. 캠프 마지막날에는 각자 작품을 하나씩 그리는데 거기서 1등을 하면 캠프 선생님께서 서울예중 추천서를 써 주신대. 가능성이 보이면 특별과외도 해 주실 거래. 우리 목표 중 하나를 이룰 수 있는 기회야! 한번 해 보는 거야. 어때, 초희야?”
‘엄마 목표가 언제부터 내 목표가 된 거지?’
초희는 쓸쓸히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알겠어.”
엄마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하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초희는 헤드폰을 꼈다. 헤드폰에서 요즘 초희가 좋아하는 노래인 ‘Stronger’가 흘러나왔다. ‘Think that I'd come running back Baby you don't know me’, ‘내가 너에게 다시 가려는 줄 알겠지만 너는 날 몰라’ 라는 가사가 나오자 초희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다. 엄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4장 이현
“자, 그럼 처음 만났으니 자기소개를 해 볼까요? 미술캠프에 온 만큼 자기 미술 전문 분야와, 경력 같은 것도 간단히 얘기 해 볼까요?”
캠프 선생님이신 송쌤은 무척이나 좋은 분이셨다. 그래서 캠프 내내 제대로 하지 않으려던 결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송쌤이 자기를 불성실한 아이로 보는 것이 싫었다. 송쌤의 간단한 자기소개 후에 캠프에 참가한 15명의 아이들의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진초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이름은 최선아입니다. 서울미술대회, 전국소묘미술경연, 그리고 세계학생미술대회에서 입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7살 때부터 소묘를 시작…”
참가자들의 화려한 입상내역과 스펙들이 초희의 귓가를 스쳐가고, 어느덧 초희의 차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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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초희 학생, 한번 말해볼까요?”
초희는 자신의 이름을 들리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15명의 (14명의 학생들과 1명의 선생님) 눈이 모두 자신을 향해 있었다. 초희는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할 말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던 터였다. 초희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송쌤이 다정히 말해 주었다.
“초희 학생. 이름이 예쁘네요. 긴장하지 말고 발표해 봐요.”
송쌤의 격려에 힘을 입은 초희는 차분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네에. 저…제 이름은 윤초희이고요, 유화를 전문으로 하고 있어요. 유화는 2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그리고 수상경력은 잘 기억이 안 나기는 해도 대회를 나가면 입상은 항상 한 것 같아요.”
“푸흡, 나갔던 대회가 다 작았나 보지?”
제일 처음으로 자기소개를 했던 최선아라는 아이가 초희의 소개를 듣고 비웃었다. 초희는 그 아이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어떻게 대놓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희는 못 들은 척 자리에 앉았다.
“자, 선아 학생. 다른 학생도 존중해 줘야지.”
“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전혀 죄송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선생님보다는 초희한테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초희의 뒤에서 한 남자아이가 말했다. 초희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새까맣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에 크고 맑은 짙은 밤색의 눈, 그리고 뽀얀 피부를 가진 한 잘생긴 남자아이였다. 바다가 그려져 있는 하얀 맨투맨 티에, 물감이 묻어 있는 짙은 색의 청바지.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풍기는 아이였다. 초희는 그 남자아이를 쳐다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두 볼이 빨개졌다. 그 마른 남자아이는 최선아 학생을 쏘아보고 있었다. 선아는 자기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는 초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초희.”
초희는 자신이 그 남자아이만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선아 쪽으로 몸을 틀어서 선아를 영혼 없이 용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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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송쌤에게 집중했다.
“좋아요, 그러면 다들 짐을 풀까요? 오늘은 첫날이니 간단히 규율설명만 할 거예요. 각자 머물 방이 있으니 짐을 가져다 놓고 3시까지 다시 여기로 모일게요.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도록 하세요.”
“네에에.”
아이들의 신난 대답이 울려퍼진 후 초희는 짐을 가져다 놓으러 갔다.
초희가 자신의 방에 가방을 가져다 놓고 나왔을 때였다. 초희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쳤다.
“…안녕?”
아까 초희의 편을 들어준 남자아이가 인사했다.
“어, 안녕. 방금은 고마웠어.”
“뭘. 쟤 우리 학교애인데 말버릇이 좀 그래.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아… 그래. 그런데 같은 학교 애라고?”
분명히 한 학교에 한 명씩만 온다고 들은 초희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어, 걔네 엄마가 교장 선생님이랑 친하셔서 손을 좀 썼다는 얘기가 있어.”
남자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둘은 아래층으로 돌아갔다.
“그렇구나. 그나저나 아까 말했지만 내 이름은 초희야.”
발표에 집중하지 않은 탓에 듣지 못했던 남자아이의 이름이 궁금해진 초희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했다.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아이의 이름도 듣기 위해서였다.
“난 현이야. 이현.”
“현?”
“응. 이름이 좀 짧지?”
“아니, 되게 이쁘다. 이현.”
“헤헷. 그래? 고마워. 네 이름도 되게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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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도서관 구경 가 볼래?”
“그럴까?”
현이는 초희 앞으로 달려갔다. 초희도 현의 뒤를 쫓아갔다. 둘은 도서관의 한적한 구석에서 수다를 떨었다. 초희는 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현이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팝아트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현이가 너무나도 확실한 꿈을 말하자 초희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자신도 유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진심도 아닌 데다가, 현이처럼 또렷하지도 않은 꿈이었기 때문에 초희는 현이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리고 재치도 있는 친구였다. 이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현이와 캠프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정체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투두둑!
“어? 이게 무슨 소리지?”
현이가 놀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 뭐가 떨어지는 소린가?”
초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시간 제법 남았네. 한번 가 보자.”
“그래.”
5장 책 한 권
초희가 복도를 따라 내려가는 현이를 따라 발걸음을 떼는 순간 초희의 발에 무언가가 툭, 걸렸다. 초희는 넘어질 것처럼 휘청댔다. 하지만 다시 균형을 잡아서고는 발 앞의 물건을 주워들었다. 오래된 책이었다.
“너이…, 아니, 너의 꾸…꿈. 너의 꿈”
“그게 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초희 쪽으로 오며 현이가 물었다.
“이 책 제목이 그래. 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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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올, 제법 진지한 제목이네. 한번 읽어보자.”
“읽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정말 오래된 책이야. 페이지가 다 삮아서 말이야.”
“에이, 한번 펼쳐 보지, 뭐. 이리 줘.”
현이가 책을 들고서 사르륵 책장 넘기는 소리가 초희와 현이의 귓가에 울렸다. 초희는 괜스레 무서운 느낌이 들어서 현이의 팔을 자기도 모르게 꼭 잡았다. 현이는 초희에게 한 번 웃어 주고는 책을 완전히 펼쳤다.
“…허락 없이 봐도 될까? 혼날 지도 모르는데?”
초희가 현이에게 속삭이자 현이는 나무라듯이 말했다.
“괜찮을 거야. 책 보는데 뭐라 하는 사람 봤어?”
“그, 그런가?”
“응, 그래.”
초희는 현이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초희가 웃고 있는 사이에 책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이잉 하는 낯선 소리에 초희는 웃음을 멈췄다.
6장 씬디
“안녕하십니까, 저는 씬디입니다.”
“이, 이게 뭐야?”
초희와 현이는 눈앞에 떠 있는 비행물체인지, 뭔지를 보고 놀라서 외쳤다.
“이것이라니요. 기분이 나쁘군요. 이렇게 보여도 엄연히 감정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저를 왜 부르셨죠?”
“우, 우린 너 부른 적 없는데?”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이 날 불러 놓고는 ‘부른 적 없다’ 라고 대답하더군요. 혹시 반대로 말하는 습성이 있는 겁니까?”
“아, 아니. 우린 반대로 말하지 않아.”
“만약에 반대로 말하는 습성이 있다면 방금 한 말은 ‘으, 응. 우린 반대로 말해.’라는 문장이 됩니다. 저는 어느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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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라니까. 진짜로 반대로 말 안 해.”
이렇게 책에서 나온 비행물체와 현이가 뜬금없는 말다툼을 하는 동안 초희는 그 이상한 물체를 자세하게 관찰했다. 그 비행물체는 실제로 만져질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홀로그램인 것 같다고 초희는 생각했다. 그리고 몸 전체가 눈 빼고는 하얀색이었다. 가끔 현이와 얘기하다가 흥분하면 형체가 약간씩 흔들리며 지직대는 소리를 냈다. 크기는 배구공보다는 작아도 테니스공보다는 큰 어중간한 크기였다. 아, 큰 사과 크기 정도인 것 같았다. 결론은 구 모양의 로봇 홀로그램이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까만색의 큰 눈이 있었는데 깜빡깜빡하는 것이 나름 귀여웠다. 그 로봇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초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항상 멍 때리는 버릇을 정말 고쳐야 했다. 초희는 급히 둘의 말싸움을 멈췄다.
“둘 다 그만해!”
이현과 그 로봇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초희를 바라보았다. 그 둘의 모습을 보며 초희는 둘의 모습이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웃었다.
“그렇게 싸워서 결론 나는 게 뭐야?”
초희는 나무랐다. 그러자 로봇도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의미 없는 말장난일 뿐입니다. 왜 이런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 아니. 와아아아아. 네가 먼저 꺼낸 얘기 아니야? 내가 반대로 말한다고.”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이야기를 꺼내서 언쟁을 하게 만든 건 당신입니다.”
“뭐라고? 와, 진짜로?”
둘의 말싸움이 다시 시작되자 초희는 둘 사이에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둘은 다시 조용해졌다.
“자, 이제 상황을 좀 정리하자.”
초희는 아직도 살짝 알딸딸했다. 아직 자신이 캠프에 가기 전이고, 침대에 누워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아. 네 이름이 씬…디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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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 이름은 씬디입니다.”
“그러면 넌 뭐 하는 로봇… 로봇이 맞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홀로그램입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서, 입체상을 재현하는 간섭 줄무늬를 기록한 매체이며, 기준이 되는 레이저광과 물체로부터의 반사 레이저광으로 이루어지는 간섭 줄무늬를 필름에 농담으로 기록한 것…”
씬디가 홀로그램일 거라는 초희의 생각은 옳았다. 그런데 씬디가 길게 설명을 시작하려 하자 현이가 말을 끊었다.
“그래. 홀로그램이 뭔지는 우리도 대충 알아. 그니깐 넌 어떻게 이 책에서 나온 건데?”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이 책에 들어 있는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이유는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해킹을 거치지 않는 이상 저는 다른 곳에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책장을 여는 순간 홀로그램 실행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제 기억 프로그램도 함께 가동됩니다. 그리하여 제가 이 책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적은 장래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들 앞에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이해서 저는 거짓말탐지기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씬디의 말을 듣고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초희는 장래에 대해 항상 고민했기 때문이다. 초희는 되고 싶은 건 있었지만 자신의 재능과 엄마의 뜻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초희는 요즘 들어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참에 딱 씬디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런 게 운명일까? 도움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
초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곤 옆에 있는 현이의 얼굴을 흘깃거렸다. 현이는 자기는 이런 로봇 같은 거 필요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이는 확실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초희는 잠깐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도움을 주는데?”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게 해 줍니다.”
“…”
초희는 살짝 실망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원했던 것인데 말이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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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희가 답이 없자 로봇은 말을 확실하게 했다.
“그렇구나. 어찌됐든 우리는 다시 캠프로 돌아가야 될 것 같은데. 시간이 다 돼서. 널 그냥 여기 둘 순 없을 것 같은데… 어쩔까, 초희야?”
“음? 아아아, 어, 책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곳에 숨겨놓는 건 어때?”
현이가 말하는 동안 현이를 또다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초희는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과는 다르게 매우 좋은 의견을 내놓았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굿띵킹, 초희. 씬디야, 너 좀 어디 숨어 있을래?”
“더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기에 나는 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씬디가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아휴. 어떻게 한마디를 안 져 주냐. 우리는 네가 발견되는 게 싫다고! 그러면 또 상황이 복잡해질 거란 말이야.”
“상황이 복잡해지면 왜 안 됩니까?”
현이는 이제 질렸다는 듯이 책장을 탁 덮었다. 그러자 반짝 하는 빛과 함께 씬디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이런 방법이 있었네. 씬디야, 조용히 있는 법 좀 배워서 다시 보자.”
현이가 킥킥거리며 책을 넣을 곳을 찾으러 두리번거렸다.
“책은 어디에 넣는 것이 좋을까?”
초희가 살짝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현이가 구석의 한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빈칸이 하나 있었다. 현이는 책을 다른 두꺼운 책들 사이에 집어넣고는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책들을 살짝 기울어가며 매무새를 다듬었다. 왠지 그 책을 특별히 신경 쓰는 느낌이었다. 초희는 씬디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이 몇 번 싸우기는 했어도 벌써 많이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7장 최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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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씬디를 만난 미술캠프에서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최선아는 초희에게 계속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초희의 그림을 보고 놀리며 안 그래도 부족한 초희의 자존감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초희에게 잘못된 시간을 알려줘서 강의에 늦게 만들기도 했다. 현이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 초희를 위로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선아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송쌤은 선아를 호되게 혼냈다. 그럴 때마다 초희는 괜찮다며 송쌤을 뜯어 말렸고, 그때마다 초희는 착하고 배려심 많은 애가 되었고 선아는 착한 친구를 괴롭히는 못된 아이가 되었다. 그 때문인지 시간이 갈수록 선아는 초희에게 더 쌀쌀맞아지고 괴롭힘의 정도도 더 심해졌다. 배식을 받고 초희가 자리로 갈 때 발을 걸어서 초희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버리게 만들기도 하고, 숙소에서는 초희의 호흡기를 숨겨서 초희가 호흡곤란이 온 상황까지 있었다. 이 일 때문에 선아는 하루 동안 캠프 활동이 금지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선아도 유일하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현이었다. 선아가 초희에게 한 짓을 잘 몰랐을 때 현이가 선아에게 짧게나마 웃어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선아는 얼굴을 붉히며 현이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런데 초희가 그걸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고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고, 현이가 자신에게보다 더 밟게 웃으며 초희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선아의 얼굴은 다시 차갑게 굳었다.
선아가 현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초희는 당황했다. 선아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자신이 현이한테 외면당하면 어떨까 생각 해 보니 정말 끔찍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못되게 구는 선아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공감 될 뿐이었다.
8장 꿈이라는 주제로
“자, 오늘은 특별히 ‘꿈’을 주제로 작품을 하나씩 제출하고 자유시간을 가지도록 할게요. 어떤 그림을 그리든 상관없어요. 자신의 꿈에 대한 생각을 그리면 돼요. 아, 그리고 꼭 그릴 필요도 없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어떤 기법을 써도 좋아요.”
송쌤은 부드럽게 말한 뒤에 윙크를 했다. 하지만 송쌤의 마음과는 다르게 초희의 마음은 착잡했다. 꿈이라니! 더 쉬운 주제도 있는데 왜 하필 ‘꿈’인지 의문인 초희는 울상이었다. 그런 초희는 도화지를 받자 아무런 도구도 꺼내지 않고 도화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는 캠프의 일정을 다 알고 있었다. 이 그림을 숨긴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초희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초희는 잘 깎인 4B연필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자, 이제 그림을 마친 친구는 쉬어도 좋아요.”
송쌤의 말에 현이는 초희의 등을 톡톡 쳤다.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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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딜?”
“심술쟁이 로봇 만나러.”
“하핳. 그래.”
첫 만남 이후 현이와 초희는 캠프 일정이 바빴던 탓에 씬디를 보러 가지 못했다. 둘은 얼른 말대꾸하는 홀로그램이 보고 싶어서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둘의 뒤를 한 여자아이가 쫓고 있는 것은 못 알아챈 채로 말이다.
9장 선아의 진심
“씬디! 오랜만이야!”
“오랜만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헤어진 지는 정확히 75시간 42분 2초가 지났습니다. 오랜만이란 이 시간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푸하하하핫.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만나자마자 두서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잖아.”
현이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현이의 웃음은 뒤에서 들려온 헉하는 숨소리에 끊겼다. 책장 뒤에 숨어 있던 선아는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지만 이미 새어나간 소리는 주워담을 수 없었다. 현이와 초희가 동그래진 눈으로 선아를 쳐다보았다. 선아는 앞으로 한걸음 걸어나왔다. 씬디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초희는 매우 당황했고, 현이는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씬디는 위이잉 소리를 내며 선아 앞으로 갔다.
“선아야. 안녕. 잘 지냈지?”
씬디의 반응에 초희와 현이는 당황했다. 그리고 현이의 당황한 표정은 서서히 의문으로 바뀌었다.
“뭐야? 최선아, 너 씬디 어떻게 알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씬디 어떻게 아냐고.”
현이가 차갑게 묻자 선아는 쭈뼛대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12 |
선아는 어릴 때부터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부모님은 예술 쪽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선아가 미술에 재능이 있는 것이 보이자 어릴 때부터 미친 듯이 미술을 시켰다. 재능이 있는 데다가 제대로 된 교육까지 받으니 선아의 재능은 빛을 발했다. 미술대회란 대회는 나갈 때마다 상을 휩쓸었고, 학교성적도 항상 평균 90점 이상을 유지했고, 얼굴까지 예쁜. 그야말로 완벽한 딸이었다. 선아는 항상 죽도록 노력했다. 엄마아빠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선아의 부모님은 그 노력을 알아 주지도 않고,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 했다. 돈을 많이 벌려면 한국에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선아는 그게 싫었다. 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것인가? 왜 미술을 취미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왜 자신 같은 재능은 썩히면 안 되는가? 선아는 지긋지긋했다. 사실은 그래서 이 미술캠프에 참가할 때 집에서 짐을 싸서 나왔다고 한다. 가출할 계획이라고. 선아는 씁쓸한 웃음을 띄며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때 선아의 앞에 씬디가 들어있는 책이 나타났는데 외로웠던 선아는 씬디에게 무척 잘해주었다. 선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씬디가 말했다.
“맞습니다. 당신처럼 제 말에다가 대고 꼬투리 잡지 않았습니다.”
현이는 씬디의 말을 듣고도 무시했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듯이 선아는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초희는 심기가 살짝 불편 했지만 뒷얘기가 궁금해서 기다렸다.
“푸흡. 어쨌든 그래서 씬디가 좋은 친구가 돼 줬어. 그냥 이런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씬디가 그걸 해 준 거지. 너희는 내 이야기를 알게 된 두 번쨰 사람이야. 씬디가 사람인지는 의문이지만.”
선아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싱겁게 얘기를 끝냈다. 무슨 운명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는 평범했다. 그러자 현이는 집중하던 모습을 싹 거두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초희는 대체 왜 괴롭힌 건데? 네가 초희 호흡기를 숨기는 바람에 초희는 죽을 수도 있었어.”
“진짜로 그럴 의도는 없었어. 나도 그 짓 하고 많이 후회했어. 그냥 당황하게 만들려던 거였는데. 진짜 미안해. 용서는 안 해 줘도 괜찮아. 나도 내가 끔찍한 거 아니까.”
현이는 화가 조금 누그러진 모양이었지만 티 안 내려고 노력하는 게 눈치가 별로 없는 초희에게도 보였다. 그렇게 현이가 고민하는 사이에 선아는 씬디에게로 돌아섰다.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쓸쓸히 쳐다볼 뿐이었다. 아마도 하나밖에 없던 친구가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초희가 용기를 낸 것은.
“저… 가출하지 마.”
“뭐?”
선아가 놀란 얼굴로 초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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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하지 말라고. 네가 나한테 한 일들 다 용서한 건 아니야. 어쩌면 평생 용서 안 할 지도 몰라. 그래도… 할 말은 해 줘야지. 괜히 집 나가서 후회하지 말고.”
초희는 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말은 고맙지만 넌 내 마음 몰라. 넌 뭐든지 다 잘하잖아. 그림도 잘 그리고, 친구도 많고, 착하기까지 하잖아. 그림실력도 애매하고, 친구도 없고, 못되빠진 나랑은 달라.”
“무슨 말 하는 거야! 이 세상에서 제일 너랑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나일걸?”
“뭐라는 거야? 내가 차이점 다 말해 줬잖아.”
“아니. 그런 걸로 사람이 다르다고 얘기할 수는 없어. 그리고 사실도 아니고 말이야.”
“…..그럼?”
“나는 부모님 전부는 아니야. 엄마만 그래. 아빠는 나한테 관심도 없어. 내가 언제 집에 있는지조차 모를걸? 엄마는 내가 서울예중을 나와서 고등학교는 또 서울예고를 가래. 그리고 유학을 가래. 프랑스가 좋겠대. 아주 그냥 날 위한 계획을 다 세워놨어. 죽겠어, 그냥. 난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는 맘도 몰라주고.”
“…”
“그러니까 내가 너랑 비슷한 점이 많은 거라고. 다 이해하니까 내 말 들어.”
11장 거짓말탐지기
“…고마워. 내 생각 해 줘서.”
선아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선아의 웃는 얼굴은 정말 예뻤다. 초희는 이렇게 예쁜 웃음을 왜 여태껏 안 보여줬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현이는 아직까지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잠깐만. 이렇게 벌써 둘이 사이 좋아지면 안 돼. 난 아직 내 질문의 답을 못 들었어. 그래서 초희를 괴롭힌 이유가 뭐냐고. 이유!”
“아아… 그… 초희에게만 말해 줘도 될까?”
“뭐라는 거야, 지금? 나한테 말하기 싫어?”
“아, 아니. 그… 초희는 들으면 왜인지 아, 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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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아는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현은 언짢아 보였지만 어서 초희에게라도 말하라는 식으로 초희 쪽으로 고갯짓했다. 그러자 선아는 재빨리 초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이현 좋아해. 올해 같은 반 됐을 때부터 좋아했어. 그런데 현이는 날 좋게 안 봐 주는 거야. 원래도 그렇게 친한 여자애는 없어서 그냥 원래 그런가 보다 했어. 그런데 너한테는 엄청 잘 해 주는 거야! 그리고 넌 항상 1등만 해 봤던 나보다 그림도, 성격도, 인기도 더 나으니까. 샘 나서 그랬어. 샘 났다는 얘기는 해도 되는데 내가 현이 좋아한다고는 하지 마!”
초희는 옅게 미소 지었다. 이미 짐작했던 얘기라 놀랍지는 않았다. 자신한테 샘이 났다는 말은 조금 놀랍긴 했지만. 그때 씬디가 끼어들었다.
“세 분 중에 꿈에 대해서 더 고민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세 분이 제 도움 없이도 잘 해결한 것 같습니다. 초희 님이 이제 마음을 정한 것 같습니다. 나머지 두 분도 마찬가지고요.”
“난 팝아트작가가 되고 싶어.”
현이의 꿈이다.
“나는 자전거선수라는 내 꿈을 엄마가 인정해 주고 응원해 주면 좋겠어.”
초희의 꿈이다.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없어. 그치만 내 생각대로 살고 싶어.”
선아의 꿈이다.
세 사람 모두 씬디의 대답을 기다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씬디의 거짓말탐지기 기능을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씬디의 말을 듣지 않고도 세 사람은 정답을 알았지만 말이다.
에필로그
“으으으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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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희가 침대 위에 걸터 앉아 기지개를 폈다. 새 액자를 침대 위에 막 걸어놓은 참이었다. 초희는 마지막날 그림 대회에서 백지를 제출했다. 선아도였다. 그렇게 되자 1등은 누군지 모르는 한 남자아이가 차지했다. 현이까지도 그 친구가 당연히 1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자신의 감정이 담긴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캠프를 마친 뒤 초희는 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초희야! 왔니? 결과는 어떻게 됐어? 당연히 네가 1등 했지?”
엄마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난 백지 냈어. 1등은 어떤 남자애가 했고.”
“아휴, 너 예중 갈 준비 빨리 해야겠네. 우리 초희, 정말….. 잠깐. 뭐?”
엄마는 초희의 대답을 듣고도 한참 상황파악을 못 했다.
“백지 냈다고. 나 예중 안 갈 거야, 엄마! 예고도, 미대도, 유학도 안 갈 거야. 나 자전거선수 되고 싶어.”
초희의 차분한 말에 엄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얘, 너, 뭐 뭐 뭐라는 거니? 지, 지금 농담하는 거지? 갑자기 자, 자전거선수라니?”
“내가 계속 가지고 있었던 꿈이야. 나 천식 있어서 힘들 건 알아. 그래도 꼭 해 보고 싶어.”
“…..언제부터 그런 생각 했어?”
“제작년부터.”
“…그런데 2년이나 참고 미술을 해 왔던 거야?”
“응. 엄마가 바라니까.”
“초희야… 빨리 말하지 그랬어?”
엄마한테 엄청 혼나고 나서 내일부터 다시 미술학원에 가게 될 줄 알았던 초희는 놀라고 기뻐서 푹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슬프게 웃고 있었다.
“엄마는 네가 미술을 좋아한다고 생각 했어. 그래서 네 꿈을 이루는 걸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건데 그게 싫었으면 말을 했어야지.”
“…혼날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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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왜 혼내니? 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해. 자전거 타고 싶다고?”
“응.”
“그게 네 꿈이면 해 봐야지. 엄마가 항상 사랑하고 응원하는 거 알지?”
“응!”
“주말에 자전거 사러 갈까? 네 자전거 너무 낡았던데.”
“진짜로? 나 로드 사도 돼?”
“로드? 그게 뭔데?”
초희는 엄마와 행복한 대화를 이어갔다.
초희는 엄마와 자전거를 사러 갈 시간을 정한 뒤 침대에 누워서 자신이 꿈에 관해서 그린 그림을 쳐다보았다. 연필만으로 거칠게 그려진 두 타원형은 마치 자전거 바퀴를 연상시켰다.
그 시각 선아의 집이었다. 선아는 엄마와 크게 싸우고 있었다.
“아니, 왜 내 말을 안 듣는데?”
“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얘가 뭐라고? 다른 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미술을 이제 안 하겠다고? 정말 어이가 없어서. 네가 뭐래도 미술은 못 그만둬.”
“그러면 어쩔 건데? 엄마가 학원 가게 하면 어쩔 건데?”
“얘, 얘가! 야, 최선아! 너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엄마는 선아의 말에 소리를 질렀다.
‘초희가 틀렸어. 상황은 비슷할지 몰라도 초희 엄마보다는 내 엄마가 더 집요하고 힘이 세. 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돼?’
선아는 화를 삭이며 생각했다. 이렇게는 정말로 안 됐다. 선아는 내려놓았던 캠프 가방을 다시 집어들었다. 안에 있는 미술도구들은 모두 바닥에 내려놓고 안에 가출하기 위해서 챙겨둔 현금과, 옷 몇 벌, 그리고 아끼는 책 한 권이 들어 있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운동화를 신었다.
“야, 최선아. 너 어디 가! 당장 다시 안 와?”
17 |
“안 가. 어디 그렇게 만들어 보던가.”
선아는 빠르게 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엄마가 쫓아오려는 소리가 들렸지만 선아가 훨씬 빨랐다.
“너 어디 가는데?”
“이 세상 어딘가 내 자유가 있는 곳으로!”
“뭐라고? 야, 최선아! 최선아!”
선아는 아파트를 빠져나와서 잠시 멈춰섰다. 숨을 헐떡이며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선아에요. 잠깐 할머니랑 지내도 될까요? 이유는 가서 설명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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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아는 할머니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부릉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1시간쯤 뒤에 보게 될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