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탄생"관련성지
18. 중국, 소팔가자 성당
1843년 4월, 김대건은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 .
김대건과 최양업은 소정의 공부를 끝냈으나 만 25세가 되지 않아 신품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게 된 것이다.
소팔가자(小八家子)는 길림성(吉林省)의 장춘(長春) 서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사평(四平) 인근에 있던 교우 촌이다. 천주교 신자가 중국 장춘 지역을 갈 때 맨 처음 들르는 곳으로
소팔가자(小八家子)란 여덟 가구가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
소팔가자는 1796년 천주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38년에는 요동 대목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부터 파리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소팔가자' 교우촌은 본래 만주의 한 작은 교우 촌일 뿐이었는데,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르(Verolles, 方) 주교가 1841년에 이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고 나서부터 만주 전교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매스트르 신부, 그리고 최양업과 김대건이 이곳에 거처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곳 성당은 훗날 폐허가 되었다가 유명한 의화단 사건을 겪은 뒤인 1908년에 재건되었다. 성당 뒷마당에는 김대건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팔가자 마을 포장도로 입구에는 '김대건로'라는 표지판이 있다.
김대건로는 허룽진과 소팔가자(小八家子) 성당을 잇는 9.7㎞ 구간으로 김대건 성인이 1844년 12월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 서품을 받았던 장소에 김대건로가 준공됨으로써 소팔가자 성당을 찾는 신자들의 순례 길도 훨씬 수월해졌으며 이 지역 발전과 한-중간 천주교 교류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소팔가자는 우리 한국인들과 매우 친근한 역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1844년 12월 김대건, 양업 두 신학생이 페레올(제3대 조선교구장)주교로부터 부제로 서품된 곳이다. 김대건 부제가 소팔가자에서 1년 반 가량 머문 데 비해 최양업 부제는 4년 동안 신학공부를 계속하면서 조선 입국 로를 탐색했다.
1844년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서 소팔가자를 떠나서 한 달 여 동안 도보로 훈춘이란 곳에 도착, 두만강을 건너 개시(開市)기간을 이용하여 경원에서 조선교회의 밀사(방지거외,교우)들과 만났다. 그러나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함께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그해 12월 초에 부제품을 받았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런 다음 1845년 1월에는 책문에서 조선의 밀사를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돌우물골에서 약 3개월을 지낸 그는 4월 30일에 마포를 떠나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8월 17일에는 그곳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약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성당에서 첫미사를 집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