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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해수욕장으로 물놀이를 갔습니다. 제가 교회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물개답게 바닷속에 들어가 조개를 잡았습니다. 조개가 무조건 모래를 파헤친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모래 속에 해초가 꼿꼿이 박혀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밑을 파면 조개가 있습니다. 조개가 해초를 먹는가 봅니다. 해초도 모래에 뿌리를 박을 수 없으니까 조개 위에 붙어서 자랍니다. 서로 공생관계 일 수 있습니다. 한 냄비 정도 분량 잡았습니다. 조개 그냥 끓이면 안 됩니다. 옛날에 반 양동이 정도 잡았는데 바로 끓였더니 모래가 반 정도 나와서 다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하루 정도 해감을 해야 합니다. 짠물에 담가두는데 쇠못이나 칼을 넣으면 더 잘 이물질을 뱉어냅니다. 잡은 조개를 하루 해감하고 아침에 끓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가족들도 먹으라고 두었는데 점심때까지 아무도 안 먹었습니다. 그래서 점심때도 저 혼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신호가 오기 시작합니다. 어떤 신호인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화장실 들락날락하는 거는 좋다 이겁니다. 온몸이 춥고 떨리고 오한이 2일 동안 계속되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인 줄 알고 계속 자가키트 해도 한 줄만 나왔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장염이라고 합니다. 오전에 입원해서 항생제, 진통제, 수액주사 맞고 오후가 되어서야 통증이 가라앉았습니다. 아마도 조개탕을 끓여서 먹기는 했지만, 균이나 바이러스가 죽지 않아서 온몸에 염증을 일으켰나 봅니다. 혼자 조개탕을 먹은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도님들도 장염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의롭게 된 결과가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실 의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현실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파트 거래량이 작년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답니다. 이런 거에 관심이 더 있습니다. 우리 50대들은 정치, 경제에 관심 있습니다. 청년들은 취업, 결혼에 관심 많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기어코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할까요? 우리를 그렇게 기를 쓰시고 구원을 주려고 할까요? 1절을 보십시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 해답은 본문 화평에 있습니다. 제가 좀 전에 장염이 걸려 고생했다 했습니다. 그래서 온몸에 열나고 식은땀이 나고 설사를 하고 오한과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장염의 증상입니다. 원인이 아닙니다. 원인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있었습니다. 원인을 제거했기 때문에 증상이 완화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적용해보면 로마서 1장 29절에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죄들을 나열합니다. 우상숭배, 정욕, 욕심, 불경건, 불의, 추,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등입니다. 이런 보이는 죄들은 사실 진짜 죄가 아닙니다. 증상에 불과합니다. 진짜 죄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이로 인해 화평의 관계가 깨지고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를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 때문에 세상에는 각종 죄의 증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질병과 죽음도 왔습니다. 죽은 후에는 영원한 지옥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벌 받을 두려움과 염려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 장염의 세균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이듯이 우리를 의롭게 하여 하나님과 화평관계로 만드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구원론에 대하여 복습이 되셨습니까?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유익이 무엇입니까? 쌀이 나오고 밥이 나오지는 않잖아요? 그 유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입니다. 본문은 제안이나 명령이 아닙니다. 이는 화평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했을 뿐인데 화평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맘껏 누리라는 겁니다. “이 모든 화평을 누려~~ !”라는 개그 콘서트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벼락 부자가 된 부부가 마음 편하게 호사를 누리려 하지만 과거에 가난했을 때의 습관이 몸에 배어서 잘 누리지 못하는 걸 개그 소재로 삼았었습니다.
우리가 화평을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저는 집중하여 묵상해 보았습니다. 제가 대학 때 자취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가난한 선후배 몇명과 생활 했습니다. 늘 배고픈 시절입니다. 동네에 예식장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식권을 나눠줘서 관계자 아니면 식당에 못 들어갑니다.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짜 음식을 몇 번 먹은 적 있습니다. 제가 주도 한 것은 아니고 과감한 후배 한 명이 있어 따라갔습니다. 주의사항은 넥타이를 반드시 메야 하고 신랑 이름 정도는 외워야 합니다. 지금 그러면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가서 공분을 삽니다. 그런데 당시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 당당했겠습니까? 들킬까 봐 머리를 푹 숙였고 어깨도 한없이 움츠러들었습니다. 옆 사람과 말도 걸지 못합니다. 너무 빨리 먹어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면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고 천국 잔치에 초대된 형국입니다. 그래서 화평을 맘껏 누려야지 남의 밥 몰래먹듯 한없이 움츠린 신앙 생활하면 안 됩니다.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첫째 이유는 우리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 양심에 계속 송사를 합니다. “너 구원받은 거 맞아? 현재 너 꼬락서니를 봐라! 하루가 멀다고 죄에 넘어지고 나는 지난날 너의 과거에 지은 죄를 다 알고 있다.” 하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자꾸만 흔듭니다. 그러면 마음이 왠지 불안해지죠. 우리가 이신칭의 교리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자세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작은 죄들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을 참고하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무심코 허용하는 작은 죄들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와 싸우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엄격한 분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 못 해 화평을 못 누리지못합니다.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야겠습니다.
세 번째는 부활 신앙이 흔들릴 때입니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 하반 절은 무엇이라 합니까?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 “그의 살아나심으로”의 다른 표현은 “그의 생명으로”라는 뜻입니다.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말합니다. 부활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이미 가졌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얼씬도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2절로 넘어갑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구원이 주는 유익, 이신칭의의 결과에 대하여 계속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서 있다.“란 표현은 설악산에 울산바위처럼 꿈쩍도 안 하고 단단히 믿음으로 서 있는 형국을 말합니다. 그리고 제가 예식장에 도둑 식사하러 가 있듯이 머리 숙이고, 죄인 모양으로 주변 눈치 보며, 어깨 움츠리지 말고 꼿꼿이 서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들어간다는 표현은 왕실 용어입니다. 왜 왕실 용어를 썼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왕궁 밖을 헤매던 신세였는데 이제는 신분이 바뀌어서 왕궁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주는 혜택인 은혜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원래 인간의 본질이 흙입니다 흙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이 주는 은혜 안에 살게 되었었던 존재인데 죄로 인해 은혜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았습니다. 은혜의 반대는 율법이죠? 율법 아래 살다 은혜 아래 있게 된 다윗은 시편 23편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그 가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이신칭의의 3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즐거워한다는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영광을 바란다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 한 땀 한 땀 빚어서 만든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를 만든 이유는 당신이 영광 받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소경 거지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멋진 예술 작품을 보면 예술가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자식이 잘되면 누가 영광을 받습니까? 그 부모가 영광을 받습니다. 피아노 세계 콩쿠르에서 1등 해보십시오. 뉘 집 아들인가 부모를 찾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지 않으면 세상 영광에 매입니다. 세상 영광에 매이면 또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참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또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두 번째 의미는 장차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바라본다는 뜻도 됩니다. 롬8:18절에서는 이 영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말씀하죠?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상에서 구원이 주는 유익 3가지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화평 케되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장차 말할 수 없는 영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3~5절까지 봅니다. 영화 한 편만 소개합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입니다. 2012년에 개봉한 영화가 있습니다. 이병헌 배우가 주인공인데 일인이역을 합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도망을 갑니다. 선조를 대신해 광해군이 왕실을 돌봅니다.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어서 끊임없이 정적으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느낍니다. 그래서 신하 허균에게 왕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을 데려오도록 합니다. 그가 바로 저잣거리에서 놀던 광대입니다. 그에게 잠시 왕의 역할을 맡깁니다. 그런데 진짜 광해군이 병에 걸려 쓰려지게 되면서 광대가 왕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해프닝을 영화로 그렸습니다. 광대가 갑자기 왕의 신분이 되자 몸이 광대 시절의 때를 잊지 못합니다. 광대춤을 추고, 수라상을 받고 게걸스럽게 접시를 비우기도 합니다. 수라상에서 남는 음식을 아랫사람들이 먹는데 지켜보던 사람들이 황당해하기도 합니다. 볼일을 보고 나면 과정을 다 지켜보고 있다가 경축드린다고 하는데 처음엔 적응을 잘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숙해집니다. “또 선정을 베푼 결과 진짜 광해군이 깨어나서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그를 따르던 신하들에 의해 죽을 위기에서 목숨을 건지고 왕궁을 떠난다.”가 줄거리입니다. 우리도 신분이 왕으로 바뀌었는데 옛 습성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걸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걸 신학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본문3-5절까지는 성화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3-4절을 참고합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본문은 4개의 추상명사를 씁니다. 환난, 인내, 연단, 소망입니다. 이 4개의 추상명사가 서로 연쇄작용을 일으키면서 우리의 신앙 인격을 만들어 줍니다. 환난은 도리깨로 콩이나 들깨 터는 일에서 나왔습니다. 말린 콩 대공을 마당에 펼쳐놓고 탁탁 때리면 쭉정이가 벌어지면서 콩이 튀어나옵니다. 털리는 과정이 환난의 뜻입니다. 환난은 괴로운 과정입니다.
연단이란 단어는 대장장이가 쇠를 만들 때 달궜다가 망치로 두드렸다가를 반복하면서 점점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과 같습니다. 금광석을 도가니에 녹이면 불순물이 날아가고 100% 순도의 황금이 나오는 장면을 연상하면 됩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하여 옛사람이라는 불순물이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논증입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소망이 떨어져 나가고 영원한 하늘을 향한 순수한 소망이 생깁니다. 저는 감히 환난 중에 성도님에게 “즐거워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장염 환난에 걸려보니 즐겁기는커녕 이를 악물고 언제 끝나나 하며 괴로워합니다.
환난을 하나님은 ”너 혼자 감당해! 나 몰라라 하십니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능히 환난을 견디고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라는 것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내적 확신을 주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함을 어떻게 압니까? 고전 12:3에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항 이 증거라 합니다. 또 롬 8장 15절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나옵니다. 굳이 말씀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성령님이 계신다는 증거 많습니다. 저의 경우는 갑자기 성경 구절이 마음에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저절로 찬송 흘러나올 때도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질 때도 있고 죄를 함부로 짓지도 못합니다. 교회에 가고 싶고 성도님들과 교제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언뜻언뜻 소망이 하늘나라를 향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님은 추상명사를 좋아합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과 사랑에 관여합니다. 성령님은 마음에 사랑을 부어줍니다. 이 사랑은 쇠심줄보다 강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5절에서“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9절“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환희에 찬 고백을 합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에 대하여 오늘 본문6-11절까지 길게 소개합니다. “6-11절까지 한번 보십시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한 개를 찾으면 무엇일까요? 더욱입니다. 9, 10절입니다. 더욱은 부사로 본문과 같은 형태가 성경에 자주 쓰입니다. 더욱 앞쪽에 일이 너무 크기 때문에 더욱 뒤쪽 일은 아주 경하다는 의미입니다. 돈으로 비유를 한다면 내가 1,000억을 주었는데 10만 원을 못 주겠느냐는 겁니다. 1,000억을 준 일을 본문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로 표현합니다. 6,8,10절에 세 번 나옵니다. 다른 표현으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셨는데 죽어 줄 만한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죽어 줄만 한 명분이 단 1도 없는 자들을 위해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자들입니까? 첫째는 연약할 때입니다. (6) 이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였다고 하고 있고(6) 죄인 되었을 때(8)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원수 노릇까지 한(10)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본문 7절에 의인과 선인을 비교합니다. 의인은 올바른 사람을 말하고 선인은 올바른데 거기에 한술 더 떠서 타인에게 사랑과 덕까지 베푸는 사람을 말합니다. 의인보다 선인이 더 나은 사람입니다. 선인을 위해 죽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01년 일본 유학생 김수현 씨라고 있습니다. 열차 선로에 취객을 구하려 뛰어들었다 유명을 달리한 사람입니다. 의인 김수현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의인도 아니었고 선인은 더더군다나 아니었습니다. 죄인이었고 심지어 원수였다고 합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대신 예수님이 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합니다. 확증하다는 “행동으로 증명하다.”뜻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아들까지 희생시킨 일이 너무 커서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경한 일이라는 논증입니다. 아들까지 희생시키셨는데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반드시 이루지 않으시겠습니까? 본문에서는 이 뜻을 곡언법을 써서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고 표현합니다.
필자의 로마서 이외 원고는 블러그 "빛고운구슬" [성경탐구 및 강의원고]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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