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에 보는 고은(臯隱) 안지( 安止) 실기
1. 출생
1384년 출생. 우왕 10년. 부 사종(士宗)
참고: 안지 (1384-1464), 정인지 (1397-1452)), 세종대왕 (1397-1450), 황희 정승 (1363-1452)
2. 태종조-급제
1414년 태종 14년. 알성친시 급제. 승문원 정자 (정7품, 30세). 본관 탐진. 부 종사랑 문하록사 사종 (父 從事郞 門下錄事 士宗). 권근의 아들 권제, 안우의 외손자 황보인 동시 급제.
1416년 태종 16년. 중시 대과 등제. 사헌부 감찰 (정6품, 32세). 사간원 정언 (정6품)
3. 세종조-봉사
1418년 세종대왕 즉위
1420년 세종 2년. 집현전 수찬 (정6품,36세). 수찬은 경연, 실록 편찬, 왕명의 제작 및 전달 등의 시종.
집현전은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과거에서 5등 안에 합격하는 등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15세기 조선 학술연구의 중심 기관이다.
1423년 세종 5년. 집현전 부교리 (종5품, 39세). 금자 불경 씀
1424년 세종 6년. 일본 사신 찬시 지음. 금자 금강법화경 씀. 식년시와 알성친시 시험관
1426년 세종 8년. 집현전 응교(정5품, 42세). 황희의 소청전을 돌려주다. 세종이 변계량에게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할 것을 명하다.
1430년 세종 12년. 집현전 직전(정4품, 46세).세종과 세금제도 심의
1432년 신찬팔도지리지 완성 (변계량)
1434년 세종 17년. 집현전 부제학 (정3품 당상관, 50세)
1435년 세종 17년. 사신과의 강론과 제술(製述)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로 가사성으로 삼음.
1436년 세종 18년. 과거시험의 대독관. 척불 상소
1438년 세종 20년. 세종과 경연, 사대문서(명나라문서) 관장. 세종 20넌 고려사 개수 시작. 11년 후인 1449년 세종 30년 고려사 개찬 완료 (일명 고려사 전문). 11년 간의 노고에도 권씨 기록 임의 삭감으로 고신수탈 당하다.
1439년 세종 21년. 세종과 민생양육 논의, 장학과 과거절차 상소. 사정전 과거 독권관. 중추원부사 (종2품, 56세)
1440년 세종 22년. 이조참판 (종2품, 57세))
1441년 세종 23년. 이문 담당자 추천. 예문관제학 (종2품, 58세). 세종과 절제사의 치계 논의. 현덕빈 출상 빈객
1442년 세종 24년. 세종과 변방 포로 논의, 당인의 송환 논의. 태조 행적 기록 논의. 몽고 황제의 칙서 논의. 과거 사험장의 강경 논의. 세자부빈객이 됨 (59세).. 태조와 정종 실록 수찬관이 됨. 비해당 소상팔경 시
1443년 세종 25년. 세종과 주문사 북경 파견 논의. 일본 절일사 파견논의 및 주본 작성.
12월에 훈민정음 창제 처음 기록됨.
1444년 세종 26년. 2월 집현전에 훈민정음 운회를 명했했으나 예문관 부제학 최만리 등 6인이 힌글 반대 상소로 취소됨. 달단 토벌 하례와 경기감사 추핵 논의. 공조참판 (종2품, 62세). 도적에 대한 벌칙 제정
1445년 세종 27년. 세종 명으로 장인지, 권제, 안지는 용비어천가 찬술 시작. 다시 중추원부사가 됨. 인순부윤이 됨. 국조실록 전주 경기전 봉송
1446년 세종 28년. 다시 예문관제학. 호조참판 (종2품, 63세). 왕에게 동궁면복 주청. 9월에 훈민정음 반포.
1447년 세종 29년. 공조판서 (정2품, 64세). 은영연 사은 전문 올림. 외교상 여러 문제 논의. 용비어천가 발간 완료
1448년 세종 30년. 각의에서 관리들 취한 논의. 예문관대제학이 됨 (정2품, 65세). 유생들 선도에 관한 상소
1449년 세종 31년. 고려사 개찬 오류로 남수문과 함께 고신수탈(해임, 66세). 삭감의 주범 권제는 파면.
1450년 세종 22년. 세종대왕 서거
4. 문종조
1450년 문종 즉위. 경오추시 시험관
1451년 신미증광 등극 경축시 시험관
1452년 안지 외손들의 진소로 고신환급 (복권, 69세). 실물 친필 보물 비해당소상팔경 시 작성.
5. 호남유람-5년
1452년 단종 즉위
1453년 계유정란. 안우 장군 외손자인 고명대신 영의정 황보인과 그 가족 피살.
1455년 세조 즉위. 불출사 (지중추원사, 지경연사, 중추원사)
1456년 보제원 주연 참석. 5년간 호남 유람 (한양을 떠남, 72세)) 영암, 행영(도강), 오산 (탐진 유람). 김제향교 제문명루 작성. 김제 평고에 정착. 평고거생 노막동 시 작성.
6. 세조조-원로 및 서거
1461년 한양 입성 (77세). 화위당 시 향연. 어의일령 하사 받음. 경회루 시 향연. 봉교시축. 어제시축 하사
1462년 행동지중추원사 제수됨. 행첨지중추원사 제수됨
1463년 은정전 양로연 참석. 보국숭록대부 검교령 중추원사 제수됨. 영중추봉조하 제수 (79세)
1464년 낙향 상서 및 서거: 김제 평고현에서 졸 (80세). 묘 김제 예촌리. 시호 문정공(文靖公).
7. 유사편-7건
사궤장사전문, 신간 상명산법 서문, 자치통감훈의 서문, 매헌 권우선생 문집 발문, 춘정 변선생 계량 문집 발문, 송곡 정연 묘지명, 대제학 양후공 이공기 묘갈문
8. 유고편 -14건
증 참의 최담 호 월당, 증 최덕지 참의, 제 압구정 한명회, 증 전라방백 이사임, 비해당 소상팔경 (1342년), 증 권길창군 람 (1356년), 증 이조참판 조서강, 증 이진 경우 부임, 오산(탐진, 강진)시, 행영(도강, 강진의 병영), 증 내한겸사마우사 예순, 봉차 고은안공 기증시, 평고(김제)거생노막동, 화위당 연구, 화관음찬, 이사맹 오형제 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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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적 사항 코멘트
- 출생년: 화위당 설연 서문에 78세 명기. 1384년 출생
- 본관: 1414년 문과방목에 본관은 탐진. 비해당 소상팔경시에 '예문관제학 탐진 안지'로 본관은 탐진. 영암의 존양 최덕지에에 보낸 글에서 "내 고향은 탐진”. 조선왕조실록의 안지 졸기에 탐진인 명기.
- 호남유람: 유시 중에 행영(도강의 병영)과 오산(탐진) 방문 기록. 김제향교에 제문명루 시가 있어 김제 방문 기록. 평고거생 노막동에서 평고(김제 안터) 정착 기록
- 세종조 집현전 대학자들과 오랜 교분있음. 안평대군, 변계량, 한명회 등의 유명 인사와도 교류.
- 일찍이 권우 문하생으로 주역에 대통하였고, 문예와 덕업이 출중하여 명성이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칭해졌다 (지식백과, 태산북두는 주역의 대가라는 뜻).
- 서화 또한 유명하였는데, 세종의 명으로 선왕 태조·태종의 명복을 비는 `금자 법화경`을 최흥효외 같이 썼다.
- 안지는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현로, 이개 등과 한글 제정에 동참하였다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지식백과). 세종 1443년 12월 훈민정음을 완성하였다. 한글 해례본에는 자방고잔, 즉 , 고전에 나오는 문바를 모방헸다고 했다. 정인지 글에는 세종이 직접 창제하였다고 나오고 신숙주 글에는 세종과 문종이 창제하였다고 나온다. 안지는 이 당시 세종의 명으로 음운 연구를 했다는 세자 문종의 스승이므로 같이 음운연구에 일조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는 1444년 2월 최만리 등 여섯 명의 집현잔 학사들이 반대 상소문을 올렸지만, 안지는 첫 한글 책자인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므로 한글창제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다.
- 화위당 시 향연 서문 (이문형 서): 안지는 유교의 도를 높이고, 유악의 고문이 되었고, 역사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학예의 모범이 되었으며, 과거시험의 제형으로 일대 유가의 종장이 되었다.
11. 탐진안씨 관련 코멘트
- 1414년 안지(1384년생)와 황보인(1387년생)은 알성친시 문과에 동시 급제. 구국영웅 안우 대장군의 외손자 황보인은 문종조 영의정이었고 계유정란 시 피살됨.
- 부친: 부친은 사종으로 확인. 알성친시 합격 당시 벙목에 부친은 종사랑문하록사 사종으로 기록.
- 연안차씨 족보에 기록된 안우-안정-안지는 잘못임. 안지의 부친은 안사종임. 안윤기-안사종-안기·안지로 이어짐.
- 황보인은 안우-황보림(사위)-황보인(외손자) 로 이어지고, 안지는 안윤기-안사종-안지로 이어짐.
- 안지의 50년 조선왕조실록이나 유사·유고 중에 안우는 없다. 상장군파 안영송대부께서도 같은 의문을 제기하였음. 안우와 안지는 같은 탐진 안씨이긴 하나 선대 기록을 파악할 수있는 가까운 혈연관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안우와 안지는 탐진의 안씨 토성에서 출발한 느슨한 혈연관계로 보인다. 만약 안우와 안지가 아주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면 고려사를 편찬한 정인지가 이를 놓칠 수가 없음. 정인지와 안지는 집현전의 막역한 동료이고, 심지어 안지도 고려사 개찬에도 오래 관여하였는데도 안지와 안우의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계유정란에서 고명대신 황보인은 피살되었는 되었는데 안지는 무사함. 가까운 인척관계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안지는 1438년 고려사 개수읗 명 받았고 10년 후 1449년에 고려사 개편 실수로 해임되었다. 그럼에도 고려사 그 어디에도 안우와 안지의 혈연 관계는 없다.
- 1777년 오성군 족보에서는 "자고로 시조는 유명인사 중에 선택하였는데, 고려16공신으로 구국공신인 안우 대장군이 탐진 안씨 중에 제일 유명하시고 오성군으로 봉군받았으며, 오성군의 오성이 곧 탐진이라 탐진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느슨한 혈연관계이지만 같은 탐진안씨 동향 출신으로 과거 어디엔가는 가까운 혈연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오성군 안우장군을 시조로 모시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12. 보물급 친필 감상
- 보물 '비해당소상팔경 시첩' 중의 고은 안지선생 친핅
- '해동명적(우리나라 명필)' 중의 안지의 친필을 옮긴 목간본.
- 용비어찬가 2장 (안익수 서예)
국가보물 비해당 소상팔경에 보이는 실물 안지 친필
- 끝까지 읽어 주셔셔 대단히 감사합니다 -
참고문헌
안동순저 <고은 안지선생 실기> 1999년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