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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을 준비하면서(4)>
가장 좋은 것을 구하리라
2024년 5월 12일 / 눅 11:9-13
눅 11:5-13 / 예수께서는 기도에 대한 것을 더 많이 가르쳐 주시면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밤중에 그 친구에게 가서 ‘여보게, 떡 세 덩이만 꾸어 주게. 친구가 여행 중에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먹으라고 내놓을 것이 없어 왔네’ 하고 말하면 7) 그 친구는 침실에서 큰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은 이미 다 잠가 놓았고 우리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네. 그러니 지금은 자네에게 어떻게 해 줄 수 없네.’ 8)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으라. 그가 친구라는 이유로는 일어나서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 그 간곡히 조르는 것 때문에 일어나 그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9)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 된 사람으로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 12) 아들이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19세기 말 영국의 런던에는 세 분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다. 그리스도 교회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 뉴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찰스 스펄젼 목사,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이셨다. 이들 세 분의 목사님들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각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세 분 가운데서 교회의 교세 면에서나 영향력이 조금은 뒤지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님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열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스펄젼 목사님만큼 설교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몰간 목사님처럼 카리스마적으로 권위 있는 목회도 못 하는구나.’ 이러한 생각이 마음속에 생기면서 다른 두 분의 목사님에 대해 시기했다. ‘강단에서 사랑을 외치는 설교자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 !’ 그러면서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다가도 누군가가 옆에서 스펄젼 목사님이나 몰간 목사님에 대해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다시금 불편해졌다. 아무리 시기심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써도 자기 힘으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부르짖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제 마음에서 불일 듯 일어나는 시기심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그는 간절히 기도를 드리던 가운데, 그의 마음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 ‘너는 어떻게 기껏해야 시기를 없애는 것으로 만족을 삼으려고 하느냐? 그 두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교회가 잘되도록 축복하는 기도를 해 줄 수는 없단 말이냐?’ 마이어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때부터 그는 다른 두 분 목사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무조건 무릎을 꿇고, 그들이 섬기는 교회를 위해서 축복기도를 하였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심지어는 자신의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할 때도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었다. ‘하나님! 스펄젼 목사님과 몰간 목사님의 목회 사역에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분들이 목회하는 두 교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크게 부흥할 수 있도록 채워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교회들이 넘치도록 채워지고 나서 남은 사람들이 있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주십시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음에 기쁨이 찾아왔다. 마음에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 뒤부터 이 세 분의 목사님은 친구처럼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함께 힘을 합쳐서 런던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세 교회 모두를 크게 복 주셨다. 세 교회 모두가 아주 크게 성장했다. 특별히 하나님은 마이어 목사님에게 글을 쓰는 좋은 재능을 주셔서 좋은 책을 많이 저술했다. 그가 쓴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예수님은 마 7:1-5에서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 마 7:6에서는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그 대신 칭찬하고 격려해주는 것, 서로 다투지 말고 화평케 해야 하는 것을 왜 실천하지 못하는지? 그렇게 하려 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마이어 목사님처럼 훌륭하신 분도 자기의 힘대로 되지 않으니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아담의 후손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소원한다.
첫째로, 기도의 응답성(마 7:7-8절)
예수님은 기도와 관련해서 3가지 표현을 하셨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본시 3번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세 번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셨다.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하셨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기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반복해서 기도했다.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뜻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는 분명하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하므로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같은 제목으로 반복해서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첫 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시간에 육신이 피곤하여 잠들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시면서 당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예수님은 다시금 두 번째 기도를 하셨다. 두 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난 뒤에 다시금 제자들을 찾아오셨다. 그때도 제자들은 역시 기도하지 않고 잠자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대로 두시고 다시금 세 번째를 하셨다. 아마도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얼마나 애써 기도하셨는지 흐르는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 예수님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셨다.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잔이셨다.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이셨다. 그 잔을 예수님이 마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백성이 죄에서 구원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잔을 기꺼이 마시기로 작정하셨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예수님의 마음은 지극히 평안했다. 예수님은 평안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향해서 담대히 나가셨다. 그때 가룟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 나아왔다. 그들은 검과 몽치로 무장을 했다. 가룟 유다가 무장한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예수님에게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에게 거짓 입맞춤을 하면서 말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예수님에게는 참기 어려운 순간이셨을 것이다. 3년 동안 온갖 사랑을 다 쏟아준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으니 ….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한 마디도 책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시며 가룟 유다를 오히려 불쌍히 여기셨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을까?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다. 그런 그가 갑자기 검을 빼서 예수님을 붙들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한쪽 귀를 잘랐다. 언뜻 생각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 제자로서의 의분을 발한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다가 쓸데없는 혈기를 부린 것이다.
지금 상대편은 검과 몽치로 무장을 한 큰 무리이다. 그런데 칼 한 자루를 가지고 무슨 예수님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겠을? 또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고의 한쪽 귀를 잘라버렸다. 예수님이 다시 붙여주셨기에 망정이지, 베드로가 검이 말고의 목에라도 찔려서 말고가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베드로는 살인죄로 체포될 것이고, 예수님도 베드로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해야 하는 등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한 일은 예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쓸데없는 만용과 객기를 부린 것이다.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다.
우리도 때로는 괜한 일에 화를 벌컥 낼 때가 있다. 거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큰 소리로 고함을 칠 때가 있다. 왜 그럴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기도하자.
"오, 주여! 나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에 앞서서 먼저 내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주께서 제게 허락하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끝까지 지고 갈 수 있는 인내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둘째로, 응답의 당연성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다. 이른바 떡과 생선의 비유이다. 9-10절 /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떡과 생선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주로 섭취하던 음식이었다. 예컨대 예수님은 떡 5개와 생선 2마리를 가지고 5천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까 열두 광주리에 차게 되었다. 또 예수님은 떡 7개와 생선 2마리를 가지고 4천 명을 먹이셨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까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셨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주로 먹던 음식이 바로 떡과 생선이었다.
먼저 예수님은 떡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아들이 배가 고프다고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보챈다. 그때 누가 떡 대신 돌을 주겠는가? 유대 광야에 있는 둥근 돌은 언뜻 보면 떡과 비슷하게 생겼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비슷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다. 그곳에 있는 돌이 떡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슷하게 생겼다 할지라도 아들이 배가 고파서 떡을 달라고 하는데 아들에게 돌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만일 아들이 그 돌이 떡인 줄 알고 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가 다 부러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잔인함 때문에 아들의 마음은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기의 자식을 그토록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당연히 하나님은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주신다.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사 1:18-20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이 문제를 상의해 보자! 너희가 아무리 죄악에 찌들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너희의 죄악을 씻어 주리라. 금방 떨어진 눈송이보다도 더 희게 하리라. 너희가 진홍같이 붉게 물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를 양털처럼 희게 씻어 주리라. 19) 너희가 내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면, 너희가 내 말을 듣기만 하면, 너희는 땅이 내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으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계속 내게 등을 돌리고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오히려 너희가 원수들에게 잡아 먹히리라.’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는 것은 오히려 그 성공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는 것은 참된 성공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컨대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안 된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고 성공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언제나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눅 18:1-8 / [과부와 재판관]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깔보는 재판관 한 사람이 있었다. 3) 그런데 그 도시에 사는 한 과부가 늘 그를 찾아가서 자기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을 법으로 다스려 달라고 탄원하였다. 4-5)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말을 무시해 왔으나 귀찮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6) 나는 하나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여자가 나를 이렇게 성가시게 구니 그의 소원대로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나를 찾아와서 견디지 못하게 할 테니까 하고 생각하였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비록 악한 재판관이라도 이처럼 들어주는데 7)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간구하는 그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해 주시지 않겠느냐? 8)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신속히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과연 몇 명이나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 실제로 응답해 주신 경우를 마가복음 10:46-52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여리고에 도착했다. 그러나 예수님 일행은 그 도시에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난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바로 그 길에 맹인이요 거지인 바디매오가 앉아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기에 바디매오는 평생을 남에게 신세 지고 살아야 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그러한 그가 거지의 삶을 살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의 삶은 여유와 평안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고, 멸시와 천대받는 소외된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는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 만나 뵙기를 갈망했다.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곳을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바디매오는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이것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단순한 집안의 내력을 말하는 의미가 아니라 ‘메시아’를 기대하는 내용이 담긴 호칭이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로부터 백성의 해방과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사역이 시작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다. 구원을 향한 갈망, 예수님을 향한 바디매오의 이러한 부름은 곧 그의 신앙고백이었으며 기도였다.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사회 밑바닥에서 온갖 멸시를 받고 살아온 맹인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그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였고 구원자였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저마다의 생각으로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었을 뿐, 그들 중 간절한 마음으로 그 예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바디매오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이에 바디메오가 할 수 있는 소리치며 부르짖는 것뿐이다. 물론 삭개오의 경우도 있었지만, 당시 바디메오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더 크게 부르짖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무리 크고 소란스러운 군중의 소리가 있었을지라도 바디메오의 간절한 그 외침은 예수님의 귀에 스쳐 지나갈 수 없었다. 세미한 음성까지 들으시는 전능하신 분께서 군중들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못 들으실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시며 ‘그를 불러오라’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그 맹인에게 가서 ‘당신은 운이 좋소. 이리로 오시오. 그분이 당신을 부르시고 있소.’하고 일러주자 맹인은 그의 낡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왔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으셨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가 대답했다.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사람들은 ‘믿음의 삶’은 우리가 가진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믿음의 삶’을 위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과 성경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뿐이다. 예수님을 향한 그 갈망이 바디메오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였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로 뛰어나가게 하였다. 바디매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예수님을 향한 그 갈망이 그분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희망인 것을 깨닫게 하며, 그 갈망이 그분만이 우리 삶의 목적임을 고백하게 한다.
더욱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바디매오가 눈을 뜨자마자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따른 것은 일시적인 뒤쫓음이 아니라 ‘제자로서의 따름’이었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아콜루데오'라는 단어가 스승의 가는 길을 알고서 제자로서 그 길을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다면 바디매오나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엘리사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부탁한 것도 이런 것 아닌가? 눈을 뜬 바디매오가 뒤좇았던 예수님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골고다의 길, 수난의 길이었다. 바디매오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넓은 길을 기대한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그 길은 좁은 길이요, 그 길은 섬기는 길이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르는 고난의 길이다.
▶ 그런데 예수님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마 7:21-24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위의 말씀이 믿는 이들에게 경각심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를 향해 무서운 책망을 하셨던 말씀이 있다.
마 11:20-24 / 예수께서는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도시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자 이렇게 꾸짖으셨다. 21) ‘화가 있으라. 고라신아. 화가 있으라, 벳새다야! 너희에게 베푼 이적을 악한 도시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부끄러워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 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네게 베푼 이적을 소돔에서 베풀었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날까지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24)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이 오히려 너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가버나움은 왜 버림을 받았을까? / 특히 세상은 가버나움(GAPHARNAUM)을 ‘신도 버린 마을’ 이렇게 표현한다. 저주도 이런 저주가 없다.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다. 2,000여 년 전 예수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을 향해 심하게 책망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 소돔의 심판보다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했다(마 11:23-24, 눅 10:15).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公生涯) 3년을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했다. 갈릴리 지방에서도 가버나움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한 곳이자 사역의 거점이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버나움이 많이 언급될 정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열두 제자 중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레위)를 제자 삼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기간 행한 많은 병 고침과 같은 기적 대부분이 가버나움에서 일어났다.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자,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났다. 12년간 혈류증을 앓아온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에 손을 대자 병이 나았다. 지붕에서 침상 채 내려진 중풍병자는 죄 사함 받아 스스로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나갔다. 이뿐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풍에 걸린 백부장의 하인과 열병으로 앓아누운 베드로의 장모 등 온갖 병자들을 다 고쳤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다 위를 걷는 이적을 행한 곳도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고도 가버나움 사람들의 삶과 신앙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율법적이고 교만했으며 회개하지 않았다. 종국에는 책망과 저주를 받았다. 당시 가버나움은 각종 상업과 어업, 무역이 발달하고 교통이 잘 갖춰진 국제적 상업도시이자 국경도시였다. 다메섹에서 이집트, 지중해까지 잇는 해안도로 ‘비아 마리스’(Via Maris)가 통과하는 위치에 있었다. 세금과 수입 관세로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하지만 746년 이스라엘을 덮친 지진의 여파로 폐허가 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16세기에는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가버나움은 한국교회에 뼈아픈 교훈으로 다가온다. 한국교회는 과거 가버나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일궈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세상으로 하여금 교만과 탐욕의 대상으로 지탄받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은 가버나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 성경에서는 분명히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고 있다.
마 11:25-30 / 그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여,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택한 사람들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겸손과 온유 역시 타락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오시기를 위해 얍복강가에서 부르짖은 야곱과 같은 기도가 필요하다.
보혜사(保惠師) /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문자적으로 ‘도움을 베풀기 위해 곁으로 부름을 받은 자’란 의미다. 헬라에서는 대개 변호사나 법률 자문가를 가리켰다. 성경에서는 ‘위로자’(Comforter), ‘중보자’(Mediator), ‘돕는 자’(Helper), ‘상담자’(Counselor), ‘탄원자’(Supplicator)란 의미로 사용되어 대부분은 ‘성령’(요 14:16, 26; 15:26; 16:7)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요일 2:1)에게도 한 차례 적용되었다. 한편, 보혜사 성령께서는 성도와 함께 거하시며(요 14:16), 성도를 가르치고 주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요 14:26),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고(요 15:26),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요 16:7-8). 또한, 그분은 성도를 진리로 인도하시고(요 16:13),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요 16:14-15). 뿐만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시며(요일 2:1),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여 주신다(롬 8:26).
▶ 사도 바울도 이런 말을 했다.
살전 5:14-19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게으른 자들을 나무라고 소심한 자들을 격려하며 허약한 자들이 있거든 돌보아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인내로 대하십시오. 15)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언제나 서로 선을 베풀도록 힘쓰십시오. 또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십시오.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언제나 기도에 힘쓰십시오. 18) 어떤 처지에 있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많은 본 말씀이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살전 5:19).’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온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똑바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열심을 다하여 충성한다면서 ‘행위 운운--’ 하며 율법적인 신앙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닌지? 혹은 하나님의 의가 뭔지로 모르면서 힘써 자기의(自己義)를 세우려함은 아닌지(롬 10:3)? 또 성령(은사) 충만을 자처하며 서로 시기, 분쟁하고 그룹을 만들어 당파 싸움을 일삼다가 결국 교회가 쪼개지고, 교파가 갈라지는 행태를 연출하고 있진 않은지? 오늘날 교회가 이 문제를 놓고 맹성(猛省)을 해야 한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셋째로, 잘 알고 있는 응답의 여러 가지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자(11절).
❶ YES의 응답이 있다. 긍정적으로 응답하실 때이다. 예컨대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성전 쪽을 바라보면서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 동안이나 연장해 주셨다. 그리고 그가 사는 날 동안에는 평안함과 견고함이 있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긍정적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
❷ NO의 응답이 있다. 부정적으로 응답하실 때이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경우이다. 그에게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 그는 괴로워서 세 번이나 간절하게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없애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도 그의 육체에서 가시가 제거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자고하지 않도록 그에게 가시를 허락하신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겼다. 우리가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NO로 응답하실 때가 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❸ WAIT의 응답이 있다(합 2:3).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나사로 가 병에 걸려 다 죽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이 예수님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그곳으로 가지 않으셨다.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경과한 후에 가셨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셨다. 우리가 기도할 때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를 우리에게 기다리게 하신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렇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때로는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YES로 긍정적인 응답을 주실 때가 있다. 또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NO로 부정적인 응답을 주실 때도 있다. 하박국 선지자나 나사로의 경우처럼 WAIT로 응답을 주실 때도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 어느 경우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부활하신 후 제자를 비롯하여 120여 명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시기까지 일곱 주간이 지난 오순절까지 한곳에 모여 있는데 기도했다. 그리고 그 후로 성도들은 경건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기도했다. 무엇보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기도에 힘썼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삶 속에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갈 5:22-23에 기록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9가지의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 풍성하게 열린다고 생각해 보자. 나와 너 사이의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교회라는 공동체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겠는가? 오히려 만날 때마다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될 것이다.
■ 어떤 성도가 길을 가다가 어떤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가 보니까 마귀 새끼들이 교회 지붕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고 있었다. 그러니 마귀 새끼들이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마치 교회 지붕이 자기들의 놀이터처럼 생각하고 편안하게 낮잠을 자고 있더라는 것이다. 조금 더 가다가 다른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귀 새끼들이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그가 교회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어떤 할머니 권사님이 조용히 앉아서 평안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이처럼 한 분이 기도하는데도 마귀 새끼들은 비상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서로 다툴 수밖에 없다. 교회가 마귀의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된다.
❹ 언제나(Always)의 응답 / 요 14:12-16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하라. 내가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아들인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루어 주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찬양을 받으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 그렇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5) [성령의 약속]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말을 지키라. 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자를 너희에게 보내 너희와 영원히 같이 계시게 할 것이다.
4.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일까요? 일차적으로 사로잡힌 사람이고,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며,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갈 5:22-23). 성령에 사로잡히면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희락(기쁨)의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기뻐할 수 없을 때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어떤 기쁨의 환경이 되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라고 한다. 항상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돈이 없을 때나 고난의 역경 가운데서라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화평한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어떤 핍박과 곤경 가운데서 화평(평화)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바람과 창수가 와도 그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 마치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화를 맛보며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니라 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시 1:3-4)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오래 참는 것, 인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고 말한다. 인내해야 어떤 일이든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래 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 1:14)고 했는데, 인내하고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 용서를 베푸는 것, 나에게 잘못을 하고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나를 모함하고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과는 달리 자비를 베풀고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것,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골 3:13)하는 것, 용서가 안 돼도 성령님의 역사로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양선(착함)한 자가 성령 충만한 자이다. 착한 사람, 착하다는 말은 멍청하거나 힘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충분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만 양선을 베푸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꾀를 따르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착함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의 사람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충성하는 사람, 온유하는 사람, 절제하는 사람’ 다 마찬가지이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대로 자신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는 끝까지 충성한다. 온유해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신다. 쉽게 분노하지 않는 사람, 분노할 일이 있지만 분노하지 않고 온유한 사람이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 마지막 이 절제를 해야 모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모든 일에 절제가 있어야 한다.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성령 충만은 말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 열매로 나타날 때 그 사람을 보고 성령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린다.
대표적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을 뽑는다면 /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남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마 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고 하였는데, 성령이 충만한 사람 성령이 내 맘에 거주하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과는 달리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성령 충만한 사람인데, 첫째로 손꼽을 수 있는 분은 스데반이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이며,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행 7:59-60).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초대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매일 구제하는 일을 맡기려고 선출했던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행 6:1-6). 그는 자유인들의 회당에서 가르쳤고, 거기서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등지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토론했는데, 지혜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들을 압도했다(행 6:9-10). 심지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 때문에 스데반은 공회에 잡혀갔으며, 공회에서 변증한 내용으로 인해 신성 모독죄로 고소되었다(행 6:11-7:53).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행한 유명한 변증은 당시 유대교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히브리 기독교인들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었다. 곧 스데반은 자신의 변증을 끝맺기 직전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라고 하였는데, 이는 유대 민족만의 특권적 종교를 고집했던 유대교 민족주의자들과 새로운 메시아 신앙을 유대교적재도 안에서 받아들이려는 히브리 기독교인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곧 스데반의 변증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히브리인이나 유대교를 넘어 우주 전체를 통치하는 메시아로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셨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을 듣고 있던 공회 의원들과 유대인들은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이고 말았다(행 7:57-58). 그러나 돌들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속에서 스데반은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말을 남긴 뒤 그는 눈을 감았다(행 7:59-60).
남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모습 / 어느 날, 아이젠하워 장군이 장병들 앞에서 연설하고 강단을 내려오다가 그만 빗물에 미끄러져 진흙탕에 넘어졌다. 참모들이 주변 청소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 있을 줄 알고 불안에 떨었다. 그때 아이젠하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강단으로 올라가 말했다. ‘장병 여러분! 재미있었습니까? 재미있다면 다시 한번 더 넘어질까요?’ 그 얘기를 듣고 그곳 분위기가 밝아졌고, 군의 사기도 높아졌다고 한다.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 / 그 말은 하나님께서 곁에 두신 사람과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잘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잘하려고 죽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피차 복종해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찼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표적인 2대 성품인 온유함과 겸손함이 없으면 결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면 다른 사람을 잘 섬겨준다. 반대로 사단의 영이 충만하면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고, 섬겨주지 않는 사람에 대해 화가 나고 섭섭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섬겨주지 않는 것에 대해 결코 섭섭함을 가지지 말고, 더 나아가 섬겨주는 자리까지 나가야 한다.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자연 앞에서 겸손하고, 우리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실패의 최고봉은 겸손하지 못한 것이다면 성공의 최고봉은 끝까지 겸손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주실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입술부터 성공해야 한다. 남을 기쁘게 해주고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한다. 살면서 누구나 숱한 고난을 만나기에 다 격려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서로 힘써 격려해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입술의 헌신이 손길의 헌신으로 발전해서 선교와 구제에는 항상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한다. 서로 좋은 말과 안색과 손길과 찬송으로 화답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많아질 때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이다.
끝까지 겸손함을 잃지 마라. / 왜 성령 충만을 마술적인 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것도 겸손하지 못한 마음 때문이다. 성령 충만이란 어떤 능력이나 은사를 나타내는 삶이 아니라 내 뜻과 의지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온유함과 겸손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사람은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더 복을 받는다.
행복한 삶의 가장 큰 장애는 환경이 아니라 자신이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마음이 높아지고 욕심이 많아진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끝까지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겸손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그처럼 겸손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넘치게 될 것이고 성령 충만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특이하고 기적적인 삶을 살아야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결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가끔 기적적인 은혜도 있으면 감사한다. 그러나 기적적인 은혜가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사실 기적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람보다 기적이 없을 때 감사하는 사람이 더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성령 충만한 삶을 보여줄 가장 위대한 현장입니다. 우리는 평소의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성령 충만한 삶이 나타나기를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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