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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근에올린자료 기독교관련자료 성낙소목사자료 힐 선교사자료 (archive.org)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무악기와 유악기 sect로 나누어 진다.
나는 무악기(현 강서대학교)에서 공부했다(M. DIV).
동석기전도자(목사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전도자라 함)에 대한
김익진교수의 글을 올린다. 김익진은 내가 공부할 때 재직한 교수다.
동석기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김익진(그리스도신학대학교 교수) 출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http://user.chollian.net/~ikch0102/nm8-9.htm |
들어가는 말 |
동석기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전교 |
1. 동석기의 생애와 도미 |
2. 동석기의 1차 귀국과 3.1운동 |
3. 동석기 전도자의 제2차 도미 |
4. 동석기 전도자의 제3∼4차 도미 |
5. 동석기 전도자의 신앙 |
나오는 말 |
들어가는 말
역사적 사건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 시대의 정황과 삶의 자리에서 전개·발전·쇠퇴되는 것처럼 그 시대의 역사적 정황을 이해할 때 역사적 사실에 좀더 접근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도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파악하고 접근할 때,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교회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원형적인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이고 원형적인 운동이 교회 역사 이면에서 지속되어 왔는데 환원운동이 바로 그 운동이다. 운동의 목적은 교회의 일치(unity)와 말씀으로 환원(restitute)이다. 성서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 침묵하는 것은 침묵한다(Where the Scriptures speak, we speak ; Where the Scriptures are silent, we are silent)는 성서의 침묵성의 바탕 위에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 하자는 유명한 진술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전개된 환원운동의 주된 모토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환원운동은 '성서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는 주장을 하게 된다.
동석기는 초대교회인 신약교회로 복귀를 위한 환원운동을 전개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땅에 전교하였다. 동석기는 90여 년의 생을 살다가 타계(他界)한 지 20년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그에 대한 추억담을 가지고 있지만 국내외는 그에 대한 자료가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 체계적인 연구는 되어 있지 않다. 미국에서 동석기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된 프랭크 팩(Frank Pack)의《코리안 리포트》에서 "Another Pioneer Passes"와 동석기가 신시내티 신학교에서 쓴 석사학위논문인〈미국에서 환원운동의 초기 역사〉(The Early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등이 있다.
본 연구는 동석기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한 그의 발자취를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동석기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전교(傳敎)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국 전래는 1930년 11월 8일 동석기(1881. 4. 6∼ 1971. 12. 26) 전도자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테네시주 내쉬빌(Nashville)에 있는 웨이볼리 벨몬트 그리스도의 교회(Waverly-Belmont Church of Christ)와 12번가(街) 그리스도의 교회(The 12th Avenue Church of Christ), 알라바마주 몽고메리(Montgomery)의 카토마 가(街)의 그리스도의 교회(Catoma Street Church of Christ), 그리고 그외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형제들의 보조와 선교비 지원 약속을 받고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동석기 전도자는 1930년 11월 그의 고향 함경도 북청을 중심으로 이곡면 초리에 함전교회, 덕흥면 시흥리교회, 수동리교회, 하거서면 임자동교회, 수서리교회, 맹경리교회, 진산리교회 등 7개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시작은 세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20명에게 침수세례를 베풀게 된다. 이 침수 세례자들은 남자가 10명, 여자가 10명이었다. 이들은 장로교에서 7명이 환원하였으며, 1명은 동석기 부인이고, 12명은 초신자(初信者)들이었다. 침수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집사 세 명을 임명하고 주일학교 교사 네 명과 회계 및 여자 교사 한 명씩을 임명하여 교회로서 첫 출발을 하게 된다.
1872년〈에딘버러 리뷰지〉는 "복음의 씨앗이 순전히 조선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조선에 소개되고 이 씨앗은 장차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계속 움을 트고 다시 낼 토양 속에 싹을 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구교인 가톨릭 교회는 1785년 봄 서울 진고개, 지금 명동의 김범우 집에서 이벽에 의해 입교한 권일신과 권철신, 그리고 정약용·정약전·정약종의 형제 등 10명이 모여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고 필요한 때에 회집하여 미사와 교리를 강습하였던 것이 이 땅에서 한국인의 손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가톨릭 교회의 시작이었다.
개신교는 서상륜이 성서를 가지고 원근 각지를 다니면서 남만주 지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포하였는데, 위험이 뒤따름에도 개의치 않고 서울을 왕래하며 성서를 널리 전파하였다. 그는 1884년 봄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 ; 九美浦)에서 가족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서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개신교회를 세웠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1930년 11월 미국에서 돌아온 동석기 전도자가 고향인 함경도 북청에 그의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다. 즉 구교인 가톨릭 교회가 한국인의 손에 의해 설립되었고 신교인 개신교도 한국인의 손으로 설립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도 한국인인 동석기 전도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초기 교회 설립이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기보다는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은 아직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 공식적인 활동을 하기 이전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설립도 선교사들이 아직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 동석기의 생애와 도미(渡美)
(1) 어린 시절
동석기는 1881년 4월 6일 함경도 북청에서 동주홍과 김씨(本 - 三陟)부인 사이에서 4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董)씨는 북청지역에서 명문가로 널리 알려진 가문이며, 그가 살던 초리에는 동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초리 함전부락은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앞에는 들판으로 상(上)함전과 하(下)함전으로 나누어졌으며, 상함전 부락은 30여 가구가 살던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동석기 집은 농사를 짓는 중류 가정에 전통적인 유교 집안으로 그는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유교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마을 서당에서 한문 교육을 받게 된다.
그는 다른 학동들보다 총명하여 한문 공부의 학습 진도가 빨라 훈장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장난이 심하고 대담한 성격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동석기는 남다르게 모험심이 많아서 아홉 살 되던 해에 험준한 산길을 넘어 왕복 500리 길이 되는 원산을 다녀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비교적 개방적인 사람으로 이와 같은 아들의 돌출된 행동들을 묵인하였다. 따라서 그의 어린 시절은 엄격한 유교적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보냈다.
(2) 결혼
마을 안에서 서당 교육만을 받기에는 그의 끝없는 모험심과 더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답답한 마음만을 가중시켰다. 기회만 되면 좁은 시골 동네를 벗어나 넓은 세계로 나가려던 동경심은 오지나 다름없는 북청군 이곡면 초리함전에 안주할 수가 없어 그는 열네 살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하였으나 타향 땅에서 고생만 하고 돌아오게 된다.
열 일곱 살 되던 해에는 그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김씨 규수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후에 회고하기를 "내가 열 일곱 살 되던 해에 생전 보지도 못한 열 다섯 살 된 시골 처녀와 혼인을 하였다. 나는 결혼식 날에도 그 여자가 미인인지 박색인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결혼식 날에도 신부는 내내 얼굴을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3) 관직의 꿈
결혼을 한 후에도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그의 꿈은 그를 시골 농부로만 묶어 둘 수는 없었다. 열 아홉 살 되던 해에 동네에서 돈을 빌려 가지고 한양으로 상경한다.
조선 말엽 조정은 부패되어서 관직이 매관매직되고 있었다. 그는 돈으로 관리를 매수하여 어렵게 관직을 얻는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뇌물을 상납할 수 있는 돈이 없게 되자 관직에서 밀려난다.
아버지는 그의 빚을 갚기 위하여 농토를 처분하게 되었고 그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 갈 수 없는 입장이 된다. 또 농토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소작농의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되자 한양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 근면 절약하는 함경도 사람인지라 얼마 후에는 목돈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의 큰 꿈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4) 하와이 노동이민
스물 세 살 되던 해에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된다. 농사일을 하던 시골보다 도시인 한양으로 왔으나 그의 넓은 세계에 대한 꿈과 동경을 채우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데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할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언제나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꿈을 갖고 그것을 동경하던 청년 동석기는 지체없이 지원하여 1903년 그의 나이 22세 때 태평양을 건너 사탕수수의 산지인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가게 된다.
하와이에 도착하여 노동조건이 열악한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게 된다. 많은 한국 노동자들은 기후 조건과 저임금으로 노동 의욕을 상실하고 감독의 눈치만 살피면서 적당히 일하였다.
그러나 동석기는 작업장의 감독이 있든지 없든지 성실하게 일했다. 농장 주인은 열심히 일하는 그를 눈여겨 보다가 하루는 그를 불러서 "당신은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열심히 일하여 내가 많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사탕수수 밭에서 노동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당신의 앞날을 위하여 내가 무엇인가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게 된다. 하늘은 뜻 있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신념으로 믿고 있던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그는 하와이에서 미국의 일면을 보면서 새로운 서구 학문을 배우고 싶은 욕망에 차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공부를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답변한다. 농장 주인은 그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에 흡족해 한다. 그 자리에서 흔쾌히 본토로 들어가서 공부할 것을 제의한다. 그는 농장주인의 특별한 배려로 9개월만에 하와이에서의 노동생활을 청산하고 함께 노동하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본토로 들어가서 청운의 뜻을 펴게 된다. 하와이를 떠나기 직전에 그곳의 감리교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5) 노스웨스턴 대학
미시간 호수에 인접된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은 감리교 계통의 명문대학으로 아마 농장주인의 주선과 세례를 베푼 감리교 목사 추천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리노이(Illinois)주 시카고(Chicago) 근교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공부하러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거치게 된다. 이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을 만나게 되며, 그는 참혹한 지진의 현장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노스웨스턴 대학에 도착한 그는 첫 해에 법학부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하다가 후에 신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신학을 전공한 후 1913년 노스웨스턴 갈렡 신학부(Garrett School of Divinity, 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의 노무자로 한국을 떠나온 지 10년만의 영광이다.
그는 졸업후 미국 교회로부터 목회 제의를 받기도 하고, 하와이 농장 주인으로부터는 공부를 계속할 경우 얼마든지 지원해 주겠다는 제의도 받지만 고국에서 일할 것을 결심하고 귀국하게 된다.
2. 동석기의 1차 귀국과 3.1운동
그의 귀국은 한국 감리교로서는 큰 기대를 갖게 되는 경사스러운 일인데, 당시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몇 사람밖에 없었으며, 미국 선교사에 의하여 한국 감리교회가 주도되던 때였기 때문이다.
1913년 원주지방에서 순회 목회를 시작으로 14년 동안 목회를 한다. 귀국 후 1914년에는 인천 내리교회 교역자로 부임하여 열정적인 목회로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한다. 1916년〈기독신보〉의 "감리회 통신"(監理會通信)에 '김씨의 신앙심'과 '박부인의 별세'라는 글을 기고한다. 동석기는 1917년 서울의 마포교회에서 목회하였고, 이어서 1919년 경기 수원 지역 남양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 전체의 거족적 운동이었고 또 천도교나 기독교·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단체가 선도한 것이 사실이었다. 조선시대의 정통에서 항상 이단시되던 신앙으로 늘 체제에서 소외되었던 민중의 종교들이 주동이 된 3.1운동은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참된 근대 한국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민족운동의 핵심과 다이나믹스는 기독교를 경로(經路)로 하고 있었다.
미국 기독교연합회의 동양문제위원회는 기독교인의 3.1운동에 대한 성명에서 '기독교가 이번 3.1운동에 참여한 것이 정당했다고 믿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기독교인만이 현시점에서 국제정세에 정통하여 민족자결의 횃불을 들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며, 그들만이 참혹한 식민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민올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동석기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희도와 절친했고 수원지방의 독립운동 책임자였던 김세환도 자주 만났다. 이러한 만남에서 한국의 독립에 관한 논의를 자주 하였는데 동석기는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연유로 영국과 미국의 외교관들과 친분이 깊었고 당시 세계 정세(政勢)에 밝아 3.1운동 직전 동석기는 민족대표로 서명하였으나 이후 33인의 일원이 되지는 못하였다고《기독교대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동석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이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남보다 일찍 간파하여 이러한 소식을 박희도 등 여러 인사들에게 전달해 주는 중요한 구미 소식통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가 관할하던 경기 사강·비봉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위한 활동 이외에도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력으로 그의 목회 지역인 수원지방 일원이 3.1운동의 성역이 되도록 하였다.
3월 1일이 되자 상경하여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의 집회에 참가하였고,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에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의주로를 경유하여 정동의 미국 영사관,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프랑스 영사관 총독 관저 등을 다니며 시위를 하였고, 미국 영사관에 민족자결주의 운동의 정황을 파리강화회의에 타전 의뢰하다가 검거되어,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개월의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복역후 충남 청양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22년 교회를 사임하고, 만주 봉천의 영고탑교회에서 1년간 목회를 하였다.
3.1운동은 한국 교회사에서도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다. 서구의 기독교 국가가 식민지 쟁탈로 프랑스가 베트남을, 영국이 인도를, 네델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화시켰고 아프리카의 대부분도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한국은 비기독교국인 일본에 식민지화되어 기독교 전래 초기부터 서구 제국주의 침략의 주구로 오인되었다. 수구적 지식인들의 격렬한 지탄을 받던 기독교가 우리 한국에서는 민족 구성원의 일부로서 동질성을 회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 나라 경우와는 달리 기독교가 외래 종교로서의 이미지를 불식하고 민족종교로서 정착할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로 불리는 진독수(陳獨秀)가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역할을 보고 과학주의의 기치 아래 종교를 미신이라고 주장하던 입장을 바꿔 "우리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볼 때 기독교를 경시하던 사상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계몽활동 단체들은 조국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목적이 있었으므로 사회 지도자들은 해외 독립운동과 연계하여 국내 조직을 활성화시켰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던 사실은 역사 속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활동한 교회의 역할을 보여준다. 3.1운동을 선도하여 기독교가 한국 민족 속에 소망스런 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이끌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역할과 동석기 전도자가 국가와 민족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은 우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후진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3. 동석기 전도자의 제2차 도미
동석기가 독립운동과 옥중생활을 하면서 그가 새롭게 느낀 것은 한민족의 진정한 독립은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육체적인 독립보다 영적으로 자유함을 갖는 영혼의 독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민족 전체의 영혼 구원을 위해 더 많은 성서 지식과 깊은 믿음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신학공부를 더 하기 위해 1927년에 두 번째로 도미한다.
동석기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신학교(Cincinnati Bible Seminary)에 입학하는데, 이 학교는 미국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에서 운영하는 신학원이다. 그가 여기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주님께서 그를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였다. 그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그것이 주의 섭리라고 믿었다. 이 학교는 우리가 가르치 듯이 진리를 성서의 말씀 그대로 가르쳤다. 그러나 예배 때에는 악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라고 하면서 이때 신약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견하고 1929년 5월에 환원운동에 관한 졸업논문을 쓰면서 성서적인 올바른 가르침을 깨닫고 구원의 침수세례를 받는다. 곧 이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평생 사역할 것을 결단하고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한다.
그 이듬해 5월에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대빗 립스콤 대학 신학부(David Lipscomb)에서 신약교회 원리에 대하여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와 같은 그의 신학수업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신시내티 신학교에서 쓴 석사학위 논문이다. 그의 학위논문은 "미국에서 환원운동의 초기 역사"(The Early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로서 서론과 본론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는 환원운동이 일어나기 전(前) 미국의 종교상황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신앙의 자유에 따른 교파주의의 범람과 대각성운동, 이성주의 등에 대하여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론 전반부에서는 환원운동 지도자인 토마스 캠밸(Thomas Campbell), 알렉산더 캠밸(Alexander Campbell), 발톤 스톤 (Barton W. Stone), 라쿤 존 스미스('Raccoon' John Smith),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로버트 리차드슨(Robert Richardson) 사상을 소개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환원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원인 및 운동의 본질·목적·성장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 논문의 지도 교수는 레코드스(R. L. Records) 학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논문은 "미국에서의 초기 환원운동에 대한 역사 연구"(The Early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인데, 서론에서는 환원운동이 발생하게 된 종교적 배경사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특히 유럽의 기독교가 미국에 들어와 자리잡게 된 동기와 이성(理性)주의에 따른 대각성운동과의 신학적인 연결 고리를 다루고 있다. 제1장에서는 환원운동의 사상가인 토마스 캠밸, 알렉산더 캠밸, 발톤 스톤의 생애와 교육·신앙·사상·신학 등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The Early Labors of Thomas and Alexander Campbell and Barton W. Stone). 제2장에서는 발톤 스톤과 알렉산더 캠밸의 역사적인 렉싱톤 연합운동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The Union of the Movements of Campbell and Stone). 제3장에서는 위에 기술한 이외의 환원운동가 존 스미스, 월터 스코트, 로버트 리차드슨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The Other Early Leaders of the Movement). 제4장에서는 미국 교회들의 교리 논쟁과 무분별한 교파적 분열상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The Conditions and Causes Hat Led to the Pioneer Leaders from the Domominationalism and that Led Them to Inaugurate the Restoration Movement). 제5장에서는 환원운동의 본질과 특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The Nature of the Movement). 제6장에서는 환원운동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명료하게 논하고 있다(The Purpose of the Movement). 제7장에서는 환원운동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 동인(動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The Rapid of the Movement). 제8장에서는 환원운동의 여러 문제점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The Hindrances to the Restoration Movement).
(1) 한국 기독교 선교회(Korea Christian Mission)
신시내티에서 학위논문을 쓰면서 구원의 세례가 침수세례임을 깨닫고 매디슨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트램(S. W. Tram)에게 침례를 받는다.
이후로 저명한 교계 지도자와 친구들에 의하여 1929년 8월에 한국 기독교 선교회가 구성된다. 선교회에 가입한 회원은 두 교회(Crescent & South Church of Christ in Louisville, KY)와 8명의 형제들이다. 이들 중에서 신시내티 신학교 레코드스 학장, 크리스천 스탠더드지(紙)의 편집인 에맅(E. R. Errett, Christian Standard), 미국 기독교 환원협회 회장 멀취(J. D. Murch, Christian Restoration Association) 등이 포함되었다. 선교회는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연 약 2천여 달러의 선교비를 모금하여 보낸다.
(2)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 동석기
1930년 6월 동석기는 신시내티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선교비 모금을 위해 성서를 판매한다. 이를 위하여 알라바마주 버밍햄에 갔다가 톰슨(T. B. Thompson)과 댁커(F. A. Decker)를 만나게 되며, 그들의 소개로 테네시주 내쉬빌로 간다. 내쉬빌 센츄럴교회(Central Church of Christ)에서 립스콤 대학 샘 피트만(Sam Pittman)교수의 강의와 유명한 환원운동가이었던 브리워(C. R. Brewer), 칼훈(H. L. Calhoun) 등의 설교를 통해 온전한 신약교회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그는 예배에서 악기 사용은 비성서적임을 믿고, 그 후로 신시내티 신학교 측에 자신의 신앙적인 입장을 전달하고 교제를 단절한다. 내쉬빌 교회들의 후원으로 그가 선교사로 파견되어 1930년 10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을 타고 11월 8일 한국에 도착한다.
(3) 북청지역에 신약교회 설립
한국의 교회는 1910년대의 길선주(吉善宙, 1869∼1935)의 요한계시록에 근거한 신비주의 신앙의 종말적 사상으로 주도되는 부흥회의 제1기와 1920년대 김익두(金益斗, 1874∼1950)의 내세 지향적인 부흥회의 제2기로 나눈다. 시련 속에서 신앙의 불길을 타오르게 해 주던 부흥회가 주춤한 1930년대 그 자리를 경건의 새 박력과 영감의 능력으로 채운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전국을 휩쓸고 있었던 것은 선교사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져 가고, 교회가 사회 변화의 도전에 신음하던 때였다.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가 되어 고국에 온 동석기 전도자는 북청 고향집으로 가서 아내를 복음화시킨다. 그 후로 친척과 친구들에게 성서를 가르친다. 처음으로 열 명의 남자와 열 명의 여자가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의 침례를 받는다. 이들은 장로교인과 무신론자들이었으나 북청의 추운 겨울날 결빙된 저수지에서 얼음을 깨고 구원의 침수 세례식을 거행한다.
1930년 11월 29일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에 세워진다. 그 교회는 동석기 전도자의 고향 동네인 북청에 세워지게 되며, 교회 이름은 함전 그리스도의 교회로 부르게 된다. 그 후로 시흥리교회(1931년 5월 14일), 수동리교회(1932년 5월 22일), 임자동교회(1936년 10월 11일), 맹경리교회, 진산리교회, 수서리교회 등이 연이어 세워진다.
1931년 5월 22일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때는 일본에 있던 메칼렘 선교사가 내한(來韓)하여 동석기 전도자를 도와 일하였고, 남녀 31명에게 침수 세례를 베푼다.
4. 동석기 전도자의 제3∼4차 도미
동석기 전도자는 1935년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한국 교회를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하여 성원과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후 해방전 서울 종로구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당시 교회를 관장하고 확장해 나갈 만한 사람이 없어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의 성낙소 목사에게 빌려 주게 된다. 그러나 성낙소 목사는 동석기 전도자와 교리적으로 이견이 생겨 내수동 건너편 필운동 도로변 집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러나 성낙소 목사는 이미 1930년 5월에 도일(渡日)하여 일본 도쿄의 한국인을 위한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전도하던 컨닝햄 선교부의 체이스 선교사를 1936년 한국에 오도록 주선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동석기 전도자는 성낙소 목사의 신앙을 인지하고 있었다.
동석기 전도자는 1946년부터 1949년에 서울에 4개 교회, 부산에 1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949년 선교비 모금을 위하여 미국으로 향한다.
(1) 남한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설립
1945년 9월 동석기 전도자는 공산당의 극심한 핍박때문에 남한으로 피난하게 된다. 해방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지역 선교를 위해 마련한 내수동 집에서 피난 즉시 집회를 갖고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로 명명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서울에서도 15명의 회중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동석기 전도자는 남한에서 내수동교회를 시작으로 1949년까지 서대문교회, 부산의 영주동교회 등을 개척하였으며, 여러 교회의 설립 기반을 위해 복음집회와 선교비로 지원한다. 교회 개척을 위해 여러 차례 미국에 가서 선교비를 모금한다. 이때 이화여대를 졸업한 동은희라는 딸도 미국으로 가서 간호학을 공부했으나 아버지의 재정적인 지원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했다.
(2) 미국에서 선교활동
1949년 교회 개척에 필요한 선교비를 마련하고 한국에 파송될 선교사를 찾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갔다. 이때부터 내쉬빌에 있는 트리니티 레인 그리스도의 교회(Trinity Lane Church of Christ in Nashville)가 후원 교회가 된다.
미국에서 선교비 모금을 위해 활동을 하던 때에 6.25전쟁이 일어난다. 동석기 전도자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조지아주 포트 배닝(Port Banning)에 있는 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훈련받기 위하여 그곳에 온 한국군 장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때에 약 160여 명의 고급 장교들이 동석기 전도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3) 생의 끝에서
한국전쟁이 끝난 후 워싱톤 D.C에 있는 16번가(街) 그리스도의 교회(16th Church of Christ)를 후원 교회로 한국 선교사 파송과 선교비를 모금하는 등 바쁜 사역의 일정을 보낸다. 동석기 전도자의 주선으로 한국에 파송된 리치슨(Dale Richeson) 선교사는 미국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했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 한국의 역사·문화·관습 및 언어를 습득하였다. 이화여대에서 불어 강사를 했던 그는 교회와 교역자를 중심으로 교육을 강조하였다. 홀톤(A. R. Holton)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1958년 한국 기독학원을 용산구 효창동에 설립한 초대 원장이다. 하스켈 췌셔(L. Haskell Cheshire ; 최수열)은 사회사업을 통한 주님 사업을 주장하여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며 사회 속에서 교회일꾼을 양성하되 영육으로 일하여 경제자립을 강조했다. 그 이후 한국 선교사로 파송된 하딘(Daniel C. Hardin), 윌리암 리치슨(William A. Richardson ; 이철신), 파스리(Malcom E. Parsley), 램지(William R. Ramsey)도 선교사로 오게 된다.
동석기 전도자는 틈틈이 귀국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과 선교사 의 선교활동을 지원하다가 1966년 은퇴한 후 1971년 12월 26일 캘리포니아에서 그의 여생을 마감한다
5. 동석기 전도자의 신앙
(1) 회심
동석기 전도자가 복음을 처음 받은 곳은 하와이 농장에서였다. 그에게 각별한 관심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농장 주인이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아마도 그에게 감동을 받고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를 떠나오기 전에 감리교 워터만 목사(Dr. Waterman)로부터 세례를 받았지만 복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그때를 회고하여 '나는 단지 도덕적으로 선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편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나는 1903년 스물 세 살 되던 해에 하와이 섬에 건너갔다. 그곳 사탕수수밭에서 9개월 동안 있었는데, 그때 그리스도인이 되어 못된 습관들을 버렸다. 이국 땅에서 노동자로서 그 못된 버릇들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하기 위해 유혹을 이겨냈다"고 술회했다.
시카고로 가는 도중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을 만나게 된다. 1906년 4월 18일에 있었던 지진은 진도가 강한 지진으로 도시 전체를 초토화시켰으며, 700명의 사망자와 3십만 명이 집을 잃었다. 이국에서 접하게 되는 처절한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참혹한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도 인간의 한계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게 된다. 이때의 체험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서는 확고한 신앙인이 되게 한 것이다.
(2) 기도의 체험
노스웨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던 그는 극적인 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어느날 그로브(Paul Grove)라는 해외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는 신학부 학생인 친구가 동석기에게 "나는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데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형제가 나의 선교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면 고맙겠습니다"고 요청을 한다. 동석기는 자신의 조국에 가서 선교하겠다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게 된다. 얼마 후 그로브라는 그 친구가 다시 와서 기도의 응답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했다. 동석기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동안 깊은 영적체험을 하게 되며, 응답 받는 기도의 결과를 보면서 즉시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3) 감리교 신앙
동석기는 하와이에서 감리교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감리교 대학인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귀국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14년 동안 감리교의 명성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그는 다시 공부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들어 갈 때는 정동교회 소속 목사로 당시 한국 감리교 내에서 앞날이 촉망되던 유능한 젊은 목사였다. 그가 신시내티 신학교를 입학하자 그의 감리교 신앙과 배치되어 신앙적으로 깊이 고뇌하게 되고 교수들과도 끊임없는 논쟁을 한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교파주의의 실상을 알게 되며, 그동안 자신이 믿었던 감리교 신앙이 성서의 가르침과는 상관없는 인위적이고 교권적인 교회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곧 감리교 신앙을 포기하고 목사직을 사임한다. 그 후 1935년 6월 내쉬빌에서 감리교 목사인 강명석을 만났을 때 자신의 감리교 신앙을 회고하여 "나는 지난 14년 동안 감리교 목사로서 사역하였는데 이제 돌이켜보니 나는 감리교 교리를 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하였다.
(4)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
신시내티 신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면서 처음에는 신앙적인 갈등을 느꼈지만 점차적으로 성서에서 가르치는 신약교회의 원형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것은 말하고 성서에서 침묵하는 것은 침묵한다는 슬로건에 신앙적으로 깊이 매료되면서 '환원운동의 역사'를 졸업논문의 주제로 잡는다. 레코드스 학장의 지도로 논문을 쓰면서 성서적인 교회에 대한 확신과 구원의 원리를 깨닫게 되자 지체없이 구원의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5)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
신약교회 운동의 중심지이었던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몇 달 동안 머물면서 명성있는 형제들로부터 온전한 신약교회에 대하여 보다 확실하게 배우게 된다. 그는 열 가지의 기본적인 성서 교리를 믿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 예배 때 악기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비성서적임을 믿는다.
그가 주장하였던 열 가지의 기본 원리는 첫째, 구원의 침수세례 받은 자만이 그리스도인이다. 둘째, 신약교회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만이 있다. 셋째, 매 주일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을 행한다. 넷째, 매 주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다섯째, 매 주일 성서 말씀을 공부한다. 여섯째, 악기 사용은 비성서적이다. 일곱째, 유아 세례는 비성서적이다. 여덟째, 약식 세례는 비성서적이다. 아홉째, 교회 내의 조직은 비성서적이다. 열째, 인간이 만든 교리·헌법·규칙 등은 비성서적이다. 이후로 그는 온전한 신약교회 교인이 되어서 평생을 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로 생애를 보낸다.
(6) 교회 개척
북청지역에 초리 함전 그리스도의 교회를 비롯하여 7개 교회를 개척한다. 그 교회들은 매일 새벽기도와 성서공부로 영적인 신앙 열기가 넘쳤던 교회들이었다. 그의 믿음의 제자였던 양석문 전도자는 그 당시를 이렇게 술회하면서 "마가의 다락방이 따로 없었습니다. 북청 교회들은 언제나 은혜와 사랑의 열기가 넘쳤습니다. 당시 일제 치하의 신사참배와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핍박으로 많은 교회가 변절하여 일제의 정책에 동조했고 신앙의 열기가 식기도 하였지만 북청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성령이 충만했고 영적 생명력이 생동하던 교회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남한지역에서 개척한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비롯한 초기의 교회들은 모이기에 힘쓰고 성서공부와 기도를 열심히 하던 형제애가 넘치는 교회들이었다. 동석기 전도자가 직접 개척한 교회는 북청에 7개 교회와 남한의 3개 교회지만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의 기도와 재정적 도움으로 개척된 교회들이다.
(7) 동석기 전도자의 신앙적인 입장
그의 성격이 담대하고 솔직한 것처럼 그의 신앙적인 입장은 언제나 진리 앞에서는 솔직하였으며, 그것이 확실한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믿을 때에는 지체없이 실행하였다.
처음으로 감리교 신앙을 가질 때에도, 법률 공부에서 신학 공부로 바꿀 때에도, 감리교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로 다시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의 신앙을 가질 때에도 그는 항상 확신하고 믿는 데에 그의 신앙을 두었다. 따라서 믿고 확신하는 성서적인 교리에는 조금도 타협이나 굴절됨이 없었다. 그는 형제가 신앙적으로 변절하거나 교리적으로 알면서도 그릇된 길을 갈 때에는 가차없이 질책하였으며 관계를 단절하기도 하였다.
나오는 말
1930년 11월 29일 동석기 전도자에 의하여 최초로 가견적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 땅에 세워진 후 67년의 나이테를 두르게 되었다. 그가 뿌린 신약교회를 향한 환원운동의 씨앗이 과연 얼만큼 결실을 거두어 가고 있는가?
지금의 신약교회는 그 연대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 문제점은 외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을 함께 가지고 있다. 외면적인 것으로는 한국이라는 토양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질적인 요인들과 명칭들에서 오는 기존 교회들로부터 거부감 등이 있을 것이다. 내면적인 것으로는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패배적 자괴감과 우리의 것에 대한 신앙적인 자긍심에 대한 부재(不在)라 하겠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환원운동에 대한 사상의 불일치에서 오는 우리 됨의 상실(Identity Crisis)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환원운동을 위해 고난의 역경을 감내하면서 일관되게 활동하고 있는 형제들보다는 이쪽 저쪽 신앙노선에 관계 없이 넘나들고 활동하였던 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풍토는 친일파나 신사참배에 동조 옹호하며, 기독교를 박해했던 자들에게 훈장과 포상을 주는 것처럼, 지난 날의 활동과 역할들을 역사적 검증없이 영입 내지 포용하는 것은 역사의식의 결여로 이어져 우리의 판단 기준을 마비시켜 버린다.
교회사 속에 새 장을 열었던 환원운동은 신약교회의 원형과 본질을 찾기 위한 회복운동이며,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일치운동이다. 결코 캠밸교(Campbellite)나 '그리스도의 교회'교(敎)로 불려지는 또 하나의 교파를 만들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전개하는 환원운동은 그 존재이유를 상실한 운동으로 교파화되었으며, 그것도 천대받는 군소교파로 위상이 전락되어 있다. 누구도 이 현실적인 실상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신약교회의 씨앗을 뿌렸던 동석기 전도자의 신앙의 발자취를 되새겨 보면서 우리들의 신약교회를 향한 환원운동의 현주소와 실상을 솔직히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신앙의 족적(足跡)은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으며, 성서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이정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0 : 1∼11, 약 2 : 23∼25).
그가 믿었던 성서적인 교리, 그가 확신하였던 환원운동의 구호들이 우리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것은 말하고 성서에서 침묵하는 것은 침묵한다'는 말씀에 자기의 전 생애를 걸었는데 우리들은 동석기 전도자의 정신과 신앙을 얼마나 따르며 이어가고 있으며, 어디다 우리의 생애를 걸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