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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다섯 성인 순교 길
갈매못 순교성인 5위 발자취 따라가는 성지순례
갈매못 다섯성인
이 순례 코스는 병인년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다섯 성인(오성)이 군문 효수형을 받고 갈매못 형장까지 가신 길과 순교 후 서짓골에 묻히시기까지 성인 유해 이장 경로, 그리고 유해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일본 오우라 천주당에 옮겨 모시기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는 성지순례 코스이다.
▲ 광화문 세종문화 회관 앞 보도에 그 옛날 형조 터가 있다.
1866년 3월 23일(음력2월7일) 형조에서 갈매못 성인 다섯 분은 군문 효수형을 받게 되며, 이곳을 출발하여 갈매못 형장까지 장장 250여리의 순교 길은 시작된다. 그리고 3월 29일 성 목요일에 그들은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
1. 갈매못 다섯 성인 순교 경위
1866년 병인박해 때 사순시기 수요일에 조선교구 제4대 감목 베르뇌 장(張敬一)주교가 선교사 3명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승계권 있는 부교구장 주교이던 다블뤼 안(安敦伊) 주교가 자동으로 후임 교구장이 됐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오직 23일에 지나지 않았으니, 같은 달 30일 성금요일에 그만 순교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블뤼 주교와 함께 형을 받은 이들은 오매트르 오(吳)신부와 위앵 민(閔) 신부 등 선교사들과 황석두 루카, 장기주 요셉 회장이었다. 성직자들은 거의 모두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이때는 형장이 달랐다. 3월 23일 국왕은 이렇게 결정했다.
“이자들을 모두 함께 포도청에서 끌어내어 충청도의 수영으로 호송해 처형하고 효수해서 교훈이 되게 하라.” 다음날 그들은 충청도로 길을 떠났다. 한 선교사가 주교께 아뢰었다.
“주교님, 국왕은 병이 들어 그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굿을 하고 있어서 우리 선교사들의 죽음으로 해서 굿의 효력이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우리를 멀리 보내서 처형한다고 그럽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국왕이 얼마 후에 혼인을 하게 돼있는데,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면 왕의 혼사에 부정이 탈지도 모른다고 해서 대원군이 서울에서 남쪽으로 250리 떨어진 곳에서 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고 들었습니다.”
모진 고문으로 상처 입은 다리에 유지만을 처맨 채 말을 타고 죽음을 향해 가는 행진은 다섯 사형수들에게 크나큰 고통이었다. 3월 29일 성 목요일에 그들은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 그날 저녁 잠시 쉬는 틈에 다블뤼 주교는 포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보령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면 처형이 또 늦어 질는 지도 모르겠군.”
주교는 벌떡 일어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안 될 일이오. 바로 내일 우리를 곧바로 처형장으로 데려가야 하오.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오.” 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기념일에 순교하기를 열렬히 희망했던 것이다.
포졸들은 결국 이에 동의하고 성금요일에 행렬을 지었다.
“수영으로 돌아가지 않고, 처형장으로 지정된 바닷가 모래밭으로 직접 향할 것이다!
어서 떠나자!”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이곳이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산 9-53 ‘갈매못’ 순교터〔殉敎聖趾〕다.
조선대목구 다섯 번째 감목 다블뤼 안주교와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등 세분 선교사와 주교의 복사요 전교회장 격이던 황석두(黃錫斗) 루카와 배론 신학당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 이렇게 다섯 성인들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현장이다.
당시 조정의 사정으로 서울 새남터가 아닌 이곳까지 와서 순교하게 됐으나,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이들 순교자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묻어 있던 고장이라는 점에서 더 합당한 장소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845년 8월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페레올 고주교를 모시고 강경 부근 익산 나바위에 첫발을 내디딘 그 해 10월 12일 이래 다블뤼 주교는 줄곧 이 일대 내포(內浦)지방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사목하고 연구하며 선교에 힘썼던 것이다.
2. 다섯성인 약전
-.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1818-1866년)
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다. 부모는 그의 억세고도 침착하지 못한 성격을 고치려고 다소 완고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르와예(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월 24일 외방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 상해로 가서 8월 17일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후,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 3월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여 명의 교우들을 돌보았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았으며, 그러면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여 1850년에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였고, 그래서 그동안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Paris)로 보냄으로써 후대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1861년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시작했었는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 해 2월 23일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 치명하였다. 그래서 보좌주교였던 그가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다블뤼 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고 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 30일에 성 금요일에 다블뤼 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다블뤼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다블뤼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다블뤼 주교의 목을 두 번째 내리쳤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 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 땅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1837-1866년)
성 피에르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Angouleme) 교구 뤼페크(Ruffec) 본당의 에제크(Aizecq)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는데, 모두 5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오메트르가 성실은 하였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하여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을 때 본당신부는 그의 성품에는 감동했지만 성적을 보고는 반대했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그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공부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자신의 전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조선 입국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중국 어선으로 연평 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는데, 이때가 1863년 6월 말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우선 1개월 동안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 후, 용인의 손골(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로 내려가 조선말을 익혔다. 그 후 1864년 9월에는 경기도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입국한 지 2년 남짓 지났을 때 박해의 소문이 나돌았고,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인 1866년 당시에 그는 수원의 샘골(泉谷里)에 있었다. 여기서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만나기 위해 일단 교우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미사 예절용 물건들을 모두 감추고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 마을로 갔다. 이것은 오메트르 신부가 교우들에게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다블뤼 주교의 집에 있던 포졸들은 다블뤼 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포졸들은 주교를 위시하여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홍주 옥으로 일단 끌고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문초를 받는 동안 주리 틀림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결국 오메트르 신부를 포함한 세 선교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2백 50리나 떨어진 충청도 보령 수영(水營)의 갈매못 사형장으로 끌려가 1866년 3월 30일 참수 치명하였다. 바로 그 날이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일로 그들이 처형된 시간이 예수께서 운명하신 시간이었다고 전해온다.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1836-1866년)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누스 루카(Martinus Lucas)이며,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프랑스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친은 항상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면서 9남매가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은 1851년에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 6월 29일 사제로 서품되어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선교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864년 6월 13일에 자신이 전교해야 될 지방이 조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에게는 물론 옛날 본당 신부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1864년 7월 15일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와 함께 전교지인 조선을 향해 파리(Paris)를 떠나 홍콩, 상해를 거쳐 1864년 11월 만주의 차쿠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과의 연락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한문과 조선어 공부를 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그 이듬해인 1865년 5월 27일에 비로소 위앵 신부는 일행과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환영을 받으면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도착 후 위앵 신부는 6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그 후에는 내포 지방에서 20리쯤 떨어진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 공소로 떠났다. 위앵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다. 위앵 신부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15명 내지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교우들에게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3월 12일 그는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받고 순순히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3월 19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866년 3월 30일 보령 수영 갈매못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황석두(黃錫斗) 루카 회장(1813-1866년)
성 황석두 혹은 황재건이라고도 하는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충청도 연풍의 어느 양반 집안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도 역시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였는데, 그가 묵은 어느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성교회의 도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이 되돌아 온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리고 급기야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에 놓고 아들의 목을 작두에 걸게 하였다. 그러나 황 루카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의 책망과 모진 매질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그는 2년 이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루카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천주교 교리책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설득하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비신자들까지도 루카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그의 훌륭한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루카는 성교회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주님께 서약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한다는 조건 하에 루카를 사제품에 올리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 땅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페롱(Feron, 權) 신부의 한문 선생 겸 전교회장 일을 맡아 수행하던 황 루카는 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돕게 되었다. 그는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를 위해 원고를 썼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이 다블뤼 주교를 잡으려고 몰려오자, 다블뤼 주교는 루카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루카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주교님은 혼자 천당 가시려는 심사인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주교와 신부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그는 1866년 3월 23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함께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30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1803-1866년)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3. 5대 교구장 성 다블뤼(Daveluy, 안돈이) 주교(프랑스, 1866년 3월 7일~30일)
올 한 해 동안 서울대교구 역대 교구장에 대해 아주 작은 퍼즐이라도 함께 찾아보고, 그분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직접 찾아보고, 생각하고, 공감하지 않으면 나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서울대교구가 있기까지 헌신하신 교구장들의 삶이 주는 울림을 전합니다. 우리가 찾은 서울대교구 다섯 번째 교구장님은 성 다블뤼 주교입니다.
다블뤼 주교님의 연혁만 본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교구장이 되자마자 순교하신 것인가 하고…. 그런데 조금 더 주교님에 대해서 검색해 보면 이런 구절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1866년 3월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신부로서 12년, 주교로서 9년)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가장 능통하였다.”
따라서 주교님은 신부로 12년, 주교로서 9년은 조선교구 부주교로, 오히려 교구장 주교로서 살으셨던 날은 며칠이 되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다블뤼 주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라고 합니다. 자료를 찾고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고 이것들을 프랑스어로 옮기고, 그 외의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낸 분도 바로 다블뤼 주교님입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를 만들면서 복음사가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생애를 엮었을까 생각해보면 어쩌면 다블뤼 주교님의 방식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거의 150년이 지나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볼 때에, 그 당시에 그런 중요한 일을 누군가가 힘들게 해놓지 않았다면, 박해도 없이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이야기처럼 순교자들에 대해서 뜬구름을 잡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주교님에 대한 또 다른 글을 찾다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다블뤼 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순간 올해 2018년도 비슷한 시기에 성삼일이 겹친다는 것을 기억하고 전례력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습니다. 2018년 3월 30일도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주님께서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린 그날, 다블뤼 주교님도 예수님처럼 피를 흘려 처형되셨고 군문효수되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성금요일이 되면, 전심을 다 해 주님의 사제로 살다가 순교한 다블뤼 주교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 나만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을 제때에 정확하게 해야 할 때도 주교님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주교님.
· 1841년 12월 18일 서품.
· 1845년 10월 조선 입국.
· 1857년 3월 25일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성성식을 가졌고, 1866년 3월 7일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함.
· 1968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
[2018년 5월 13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서울주보 4면, 이도행 토마스 신부,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4.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 선교사
교황청 포교성성은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 책임을 맡겼다.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1831년부터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까지 35년간 파리외방전교회는 21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 중 앵베르ㆍ다블뤼ㆍ베르뇌 주교와 모방ㆍ샤스탕ㆍ프티니콜라ㆍ푸르티에ㆍ오메트르ㆍ위앵ㆍ볼리외ㆍ도리ㆍ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12명이 순교했다. 또 브뤼기에르ㆍ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ㆍ장수ㆍ랑드르ㆍ조안노 신부 등 6명이 병사했다. 그리고 리델 주교와 칼레ㆍ페롱 신부는 조선 선교지를 떠나 다른 곳에서 선종했다.
조선에 입국할 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평균 나이는 29세였다. 이들은 평균 7년간 사목을 하다 36세 즈음 사망했다.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1845년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21년간 조선에서 사목했다.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ㆍ프티니콜라 신부도 10년간 선교사로 활동했다. 반면 장수 신부는 입국한 지 3개월 만에 뇌염으로 선종했다.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파리외방전교회가 1832년부터 1866년까지 아시아 전역에 파견한 선교사 수가 531명”이라며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가 같은 시기 전체 선교사 중 약 4%에 불과한 것으로 볼 때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조선 선교지 비중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참조)
5. 신리와 갈매못 (성인들의 체포와 순교지)
▲ 신리 다블뤼주교 주교관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시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孫 토마스)을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가 이 곳 신리에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다블뤼 주교가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정리하여 프랑스로 보낸 점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와 신리의 주교 댁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리의 주교 댁만은 인근 교우들 때문에 성 손자선이 태어난 곳이며, 다블뤼 주교의 거처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합덕 본당의 페랭(Perrin, 白) 신부는 1927년에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이를 매입한 뒤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지금과 같이 함석지붕을 새로 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6.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삼거리 오성바위
위: 아산 음봉에있는 모조 오성바위
위: 현재 절두산 성지에 옮겨진 오성바위
1876년 병인박해당시 다블뤼 주교와 함께 형을 언도받은 오 매트로 신부와 위앵 신부 황석두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분이 갈매 못으로 순교길 을 가던 길목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신 곳이다. 이곳에 있던 오성바위는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있고, 이곳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270 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53 년 전(1866년) 지금은 순교성인이 되신 다섯 분이 이곳을 지나시던 모습을 이 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현재 오성바위는 1973년 4월 12일 충남 아산군 동천리에 있던 것을 당시 절두산순교성지 주임 박희봉 신부(1924~1988)가 이전 허가를 얻어 미군 제83병기대대의 협조로 옮겨 왔다. 본래 ‘복자(福者)바위’라고 불리다가 1984년 5월 6일 시성식 후 박희봉 신부가 ‘오성바위’라고 명명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성바위는 두께 1m, 지름 4m, 둘레 11m, 무게 16톤 규모며 바위 옆에 놓인 높이 48cm, 둘레 118cm의 돌은 다블뤼 주교가 1845년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해 합덕 신리에서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던 문지방돌이다.
-. 오성바위 기념비 비문
오성바위(Osung Bawui, Rock of the five Saints)
1866년 3월30일 갈매 못에서 순교한 성 안토니오 다블뤼, 성 오메트로 오 베드로,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 성인이 한양에서 군문 효수형을 언도 받고 갈매 못으로 가던 도중에 지금의 충남아산시 음봉면 동천 리 삼거리에 있는 오성(五聖)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갖은 문초로 온 몸은 부셔져 있고 또 죽으러 가는 길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갈매 못으로 가는 6일 내내 떼제 음과 기도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증언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 바위 위에서도 다섯 성인들은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 하면서 성가를 불렀다. 이 바위는 한때 “복자 바위”로 불렀으나 1984년 성인품 이후 오성바위로 불린다. 지금은 서울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 정원에 있다.
이 바위는 둘레가 11미터, 지름4미터, 두께1미터, 무게는 16톤이다. 순교자들이 얻고자 한 것은 오직 천국이었다. 고통과 죽음조차도 그 희망을 꺾을 수 없었다. 주님이 전부인 이들이 누리는 자유와 희망을 우리는 이곳에서 만난다. 생각을 바꾸면 삽니다. 복음의 말씀을 따라 생각을 바꾸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큰 아들처럼 잘못된 생각을 바꾸듯이 비록 내 죄가 크다 해도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서서 하느님의뜻대로 살면 될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 생각과 생활 방식이 복음적 입니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 하여라.” 주님은 내게 하느님 나라에 가서 살자고 하십니다. 생각을 바꾸시겠습니까? 잘못을 회개하고 세리와 창녀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의로운 길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아니면 유다 지도자들처럼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이기심과 교만과 허영심에 빠져 그 분을 믿지 않고 거절 하겠습니까? 순간의 선택이 당신을 가름 합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 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여기 다섯 성인들이 머무셨던 자리를 기념하여 이 표지 석을 세웁니다.
2011년. 11월. 11일. 11시
7. 갈매못 성지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여 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가 합세하여 모두 다섯 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시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5월 6일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1866년 3월 30일, 그해의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5위의 성인 중 황석두 루카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4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했다가 그해 여름 이화만 바오로와 두 아들 그리고 인근 교우촌인 도앙골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현 서짓골 성지)에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1882년까지 16년간 묻혀 있던 4위 성인의 유해는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되었다.
8. 서짓골 성지
지번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67-2
관련기관 : 만수리 공소(하부내포 성지) (041)836-5904)
▲ 서짓골성지
1866년 병인박해의 피바람이 전국을 뒤덮었을 때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충청수영(忠淸水營)이 있던 보령의 갈마연, 지금의 갈매못 성지 해변에서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자신들의 붉은 피로 모래사장을 붉게 물들였다. 이 중에서 다블뤼 주교를 포함한 다섯 순교자는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1866년 3월 7일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면서 교구장직을 승계해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4일 만인 11일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대원군과의 접촉이 실패로 돌아가고 신자들이 마구 처형되자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의 더 큰 희생을 막고자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하였고, 다른 선교사제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쓴 후 붙잡혔다.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이라는 뜻의 '광영위주치명'이란 한자 구절을 새긴 순교자 현양비.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은 다블뤼 주교 일행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국혼(國婚)이 임박한 조정의 상황으로 인해 서울에서 250여 리 떨어진 충청수영이 있는 보령 고을의 갈마연까지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었고, 중간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인 장주기 요셉 회장도 동행하게 되었다. 병인년 3월 29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에 처형장 근처에 도착하여 포졸들이 다음날 이웃 읍내를 돌며 사형수들을 구경시킬 계획을 짜자, 다블뤼 주교는 “내일 형장으로 곧바로 가거라.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하고자 했던 경건한 열망과 위엄 있는 어조에 포졸들과 군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섯 순교자들은 주님 수난에 동참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았고, 포졸들은 붉은 피가 흩뿌려진 모래밭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 순교자들의 목을 하나씩 장깃대에 꽂아 깃대를 똑바로 세워놓았고, 목이 잘려진 몸은 그대로 두어 세상 사람들이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3일 후인 1866년 4월 2일 수영의 지시에 따라 비신자들이 장깃대에서 순교자들의 머리를 내려 각각의 시신과 함께 인근 모래사장에 묻었다. 이곳이 갈매못 다섯 순교자들의 첫 번째 무덤이자 임시매장지였다. 이때 비신자들은 프랑스 선교사 3명의 시신을 한 무덤으로, 조선인 2명의 시신을 또 한 무덤으로 만들고 그 위에 잔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목이 잘려진 부분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 순교자들의 신원을 확실히 한 후 시신마다 안가(다블뤼 주교), 민가(위앵 신부), 오가(오메트르 신부), 황가, 장가라고 쓴 명패를 달았다. 1899-1900년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에 이와 관련된 증언들이 나온다.
황석두의 시신은 임시매장 직후 조카이자 양자인 황기원 안드레아와 그 아우인 황천일 요한 등 일가에 의해 홍산 삽티(현 부여군 홍산면 상천2리)에 안장했다가 1982년 8월 25일 고향 인근 연풍 성지로 천묘(遷墓)하여 고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갈매못에 다블뤼 주교, 위앵 ·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시신만 남게 되자, 장주기의 아들 장노첨이 다른 곳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청양 다락골 신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시신 이동에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할 뿐 아니라 발각될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노첨은 다시 남포 서짓골에 사는 이화만(일명 이사심) 바오로를 찾아갔고 그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박해시대 교우촌 사이에 연락체계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1866년 5월 21일 갈매못 임시매장지에서 순교자들의 목과 시신을 일치시키고 염을 한 뒤 10리가량 떨어진 오포리의 야산(일설에 콩밭)에 암장하였다. 이것이 갈매못 순교자들의 두 번째 무덤이며 하나의 봉분을 쌓아 만들었다. 이 무덤은 이후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우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첫 번째 이장을 주도했던 이화만이 1866년 6월 직접 무덤 상태를 확인하고 홍산 도앙골(현 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 교우촌에 살던 김순장 요한 금구와 두 번째 시신 수습 및 이장을 의논했다. 두 사람은 이장 비용을 신자들에게 추렴하고 이장 장소는 남포 서짓골 이씨 집 뒤편 골짜기 담배 밭으로 결정했다. 신자들은 비신자 최가의 배를 삯 내고 역시 비신자인 서성학 형제를 사공으로 고용했다. 이장은 1866년 7월(음력)에 이뤄져 서짓골에 안장되기까지 10-15일이 소요되었다. 갈매못 인근 두 번째 무덤에서 서짓골 세 번째 무덤까지의 이동 경로에 대해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루카 소장은 다음과 같이 고증했다. 여수애(현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의 여수해) → 가패 → 슬섬(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의 솔섬) → 녹안이뿌리(현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 독대섬) → 완장내(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 곰재(현 보령시 주산면 동오리) → 서짓골.
다블뤼 주교의 한국식 이름인 안돈이에서 따온 이름이다.서짓골의 세 번째 무덤은 1866년 7월 25일(음력)부터 1882년 1월까지 15년 6개월 동안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결과 순교자들의 피와 살, 잔뼈들이 진토가 된 거룩한 땅이 되었다. 이후 순교자들의 유해는 1882년 11월 6일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 내 조선대목구 대표부로 보내졌다가 1894년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치되었다. 6년 뒤인 1900년 9월 5일에는 명동 성당 지하묘역에 옮겨진 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식(1968년 10월 6일)을 1년 앞둔 1967년(정확한 일자에 대한 기록이 없음)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네 순교성인들의 시신 이동에 앞장섰던 이화만과 그 아들들은 그 해 가을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병인년 12월 12일 ‘무참히 맞아 죽어 시신이 버려졌다’는 간단한 기록과 구전만 전해질 뿐 시신의 소재를 찾지 못했다. 이사심의 증손인 이우철 시몬(1915-1984년) 신부는 이사심의 부인인 정 마리아의 묘(부여군 충화면 천당리 소재) 묘비를 직접 써 이사심 삼부자의 순교 내력과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경위를 기록했다. 또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홍산 삽티에 안장해드린 조카들 역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서짓골은 부여 금사리 본당 제3대 주임인 정규량 레오(1883-1952년) 신부가 1925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기념하며 그 위치를 확인하였지만 이후 교회사에서 잊힌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부여 만수리 공소에 윤종관 신부가 상주하면서 다블뤼 주교의 주 사목지이며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하부내포 지역이 알려지게 되었고, 2012년 1월 대전교구에서 하부내포 지역을 성지로 선포하며 윤종관 신부를 전담으로 임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교회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윤종관 신부는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루카 소장 등과 함께 위치 고증과 학술적 연구 성과를 축적하면서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2013년 10월 31일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현지에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서짓골 성지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서짓골 성지는 같은 해 5월 미산면 평라리 일대 886㎡(268평) 크기 시유지에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부지를 정비하고 화장실과 파고라(정자), 주차장 등 기반을 조성한 후 야외제대와 순교자 현양비, 성지 안내 비석, 성역 표지 시설공사를 마치고 이날 봉헌식을 가졌다. 무게가 50톤이나 되는 제대석은 오석을 3.6×1.7×1.35m 크기로 잘라 만들었으며, 전면에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이름을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좌대 포함 8m 높이의 순교자 현양비에는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이라는 뜻의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이란 한자 구절을 새겼다.
이로써 서짓골 성지는 2010년 11월 13일 천방산 줄기 옛 교우촌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미사와 2011년 9월 29일 충남 부여군 내산면 옛 교우촌 도앙골 기도의 집인 ‘우애의 집’ 축복에 이어 하부내포 성지에서 세 번째로 봉헌된 성지가 되었다. 그 외에 하부내포 성지로는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지였던 삽티(부여군 홍산면), 순교자 프티니콜라 신부 최초 사목지이자 황석두 성인 거주지였던 내대(부여군 외산면), 프티니콜라 신부 피란지였던 고갈(부여군 외산면) 등이 있다. 2014년 8월에는 보령시의 협조로 갈매못에서 완장포구를 거쳐 서짓골 성지까지 차량과 도보를 이용한 성지순례길을 조성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2013년 평화신문 오세택 기자 & 가톨릭신문 박지순 기자의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2월 2일)]
9. 갈매못 다섯성인 유해 이장 경로
갈매못 순교성인들 서짓골에 묻히시고
서짓골에서 나가사키에
나가사키에서 서울로
가.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 되었나?
1866년 3월 30일 갈매못 해변의 법장(法場 사형장)에서 다섯 분의 성인들을 참수 처형한 충청수영의 집행관은 그분들의 목을 벤 머리를 장깃대에 매달아 사흘 동안 효수하였다.
매어달린 그분들의 머리 밑에는 각각 ‘안가(安家)’ ‘오가(吳家)’ 등의 글자를 쓴 팻말이 달려 있었다. 그러한 효수 기간이 지난 후 그곳의 모래자갈 바닥에 병졸들이 대충 묻었는데,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를 함께 묻고 다른 세 순교자들은 한 구덩이에 함께 묻었다.
순교자들의 효수된 머리와 알몸을 일치시켜 칡넝쿨로 묶어서 각각 그 시신별로 ‘안가(安家)’ ‘오가(吳家)’ 등의 글자를 쓴 그 팻말을 머리에 덮어 묻었다.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의 조선식 이름 안돈이(安敦伊)에 따라 그분의 시신에 ‘안가(安家)’, 오메트르 신부의 시신에 ‘오가(吳家)’ 등의 표식이 함께 묻혔기에 나중에 신자들이 수습할 때 유해 구분이 용이하였다.
나. 순교하신 성인들의 시신은 그렇게 방치 되었나?
함께 치명하시고 갈매못 형장 모래자갈 속에 묻힌 다섯 성인의 시신 가운데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은 두 달 후 5월 29일(음력 4월 16일)에 그분의 양자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의 수습작업으로 홍산 삽티(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에 안장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4월 16일(양력 5월 29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사피(삽틔)에 묻었습니다. 지금(증언한 1922년)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
한편, 장주기 요셉 성인의 아들 장노첨이 청양 다락골의 신자들을 찾아가 수습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락골의 신자들은 두려움으로 그 협력을 거절하였다.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남포현(보령시) 서짓골에 살던 이화만 바오로의 아들들과 신자들이 장노첨과 더불어 갈매못 현지에 가게 된다. 그 일에 참가한 이화만 바오로의 아들 이치문 힐라리오는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병인 4월 초9일(양력 1866년 5월 22일)에 죄인(이치문)과 죄인 형 둘 이뀌수(요한 크리소스토모) · 이(치서) 이냐시오와 이(성여) 바르나바)와 김성집과 장 회장의 아들(즉 장노첨)과 또 다른 교우 몇이 가서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장 회장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니까 날이 샜습니다.
빨리 염해서 10리 되는 곳으로 모셔다가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관 없이 묻었는데, 그 후에 말을 들으니 짐승들이 송장을 파먹는다고 해서 죄인의 부친(즉 이 바오로)이 무덤 자리를 가보고 다른 데로 옮겨야겠다고 해서 그 해 7월 초9일(양력 8월 18일)에 죄인과 죄인의 형 이뀌수와 조카 (이) 바르나바 등이 가서 시신을 파서 외인 최가의 배에 실었습니다.
바람이 대단히 불었기 때문에 보름 동안 고생하다가 간신히 남포 서지동(서짓골)에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네 시신을 관 없이 묻고 한 봉분으로 덮었습니다.”
네 분 성인의 유해를 서짓골에 옮겨 오기까지 ‘보름 동안’의 이러한 작업을 한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에 따르면, 서짓골에 안장한 것은 그해의 (양력으로) 9월 1일이 된다.
다. 서짓골에 안장된 성인들의 유해는 그 후 어찌 되었나?
네 분 성인의 유해가 서짓골에 안장 된 후 1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그분들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당시 조선대목구의 부주교인 블랑(Blanc) 신부는 1882년 3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였다.
“본인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 요셉 회장의 유해 발굴 임무를 맡고서 전에도 발굴을 했었던 교우들에게 유해를 찾아서 가능한 한 정성껏 유해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하였다.”
“전에도 발굴을 했었던 교우들” 중 한 사람인 이치문 힐라리오는 이러한 블랑 부주교의 지시를 받고 서짓골의 네 분 성인의 유해를 다시 발굴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이치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죄인이 강경이(즉 충남 강경)에 살 때 백 주교께서 신부로 계실 때인데 죄인보고 말씀하시기를 ‘그 시신들을 장사한 사람 중에 너희 형제 밖에 그 무덤 자리를 아는 이가 없으니 네가 죽기 전에 파와라’ 하시기에 죄인과 죄인의 형 (이) 이냐시오 치서와 죄인의 조카 이 안드레아와 김성보와 합 4명이 대개 신사년(1881년) 봄 2월 즈음에 가서 네 시신을 파서 백 주교께 바쳤더니 백 주교께서 그 시신들을 네 집에 두었다가 누가 오거든 주어라 하시기에 한 달포 동안 죄인의 집에 두었더니, 어느 교우가 와서 법국으로 들여간다고 하기에 내주었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서짓골의 묘를 “신사년(1881년) 봄 2월 즈음에” 발굴했다고 증언한 이치문은 임오년(1882년)을 1년 착오 진술한 것이다. 블랑 부주교는 서짓골의 순교자들 안장묘를 발굴 수습하도록 지시한 후 그 작업을 한 교우들로부터 성인들의 유해를 인수하고 확인하여 그 다음의 절차를 강구하게 된다. 그 사실을 블랑은 1882년 3월 23일에 아래와 같이 기록해놓았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유해를 옮기게 되어 본인은 은진군(Yun-tjia)의 강경리로 가서 그곳에 도착한 조선 교우들인 이 힐라리오, 이 이냐시오, 이 안드레아, 이 프란치스코, 이 바르바나, 김 안드레아, 최 바오로로부터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신앙을 위해 참수된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조선인 장 요셉 회장의 유해를 헝겊으로 싼 꾸러미 네 개를 받았음을 승인한다.
위에서 언급한 거룩한 유해의 이장에 이번에만 협력을 한 김 안드레아와 최 바오로를 제외하고 위에서 명시한 다섯 명의 교우들은 사형집행 장소 근처에서 우리 순교자들의 시신을 직접 거두어들였던 교우들이다. 이들은 시신을 정성껏 땅에 묻었었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시신을 여기저기로 여러 번 옮기는 일을 했었다.
각 꾸러미마다 별개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신체의 부분들은 각각 기름종이로 싸여졌고 그 위에는 순교자의 이름과 함께 싸여진 부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꾸러미를 받고서 본인은 본인 앞에서 꾸러미들을 모두 열도록 하였고 특별히 다블뤼 주교를 위해, 해골이 싸여 있다는 꾸러미들 속에 해골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았다. 본인은 거두어온 모든 유해들의 목록을 작성하도록 하였고 시신들을 각각 한 꾸러미에 넣도록 하였다.
교우들이 꾸러미들을 끈으로 묶고 난 후에 본인은 각 꾸러미의 중심 매듭에 본인의 인장을 찍었다. 인장을 망가뜨리지 않고는 매듭을 풀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우리 순교자들의 시신들이 분명하다는 다짐을 하고 각 시신마다 별도로 확인을 하고서 위에 명시한 교우들이 모두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으며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의 확신을 할 수가 없다고 복음서에다 선서를 하였다. 앞의 일들을 모두 증명하기 위해 조선어로 공문서를 만들고 위에 명시한 교우들 모두가 복음서에 선서를 한 다음에 서명을 하도록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봉인되고 겉에 순교자의 이름이 쓰인 네 개의 꾸러미들은 현재 전라도 진안 널티의 마 베드로(Moua Pierre)회장의 집에서 리델 주교의 차후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널티’ 공소는 현재의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이다. 이와 같은 경위에 대해서 블랑은 조선대목구장인 리델 주교에게 1882년 5월 12일의 편지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저는 거룩한 유해를 받고 틀림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강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동료들의 순교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과 관련이 있는 것들에 대한 조서를 꾸미게 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거룩한 유해를 깨끗한 종이에 쌌습니다. 잘 분리된 각각의 시신과 각 부분에 특기할 만한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 번 이장을 하는 일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서에 선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선서를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항상 같은 교우들이 이 일을 해왔었기 때문에 거룩한 유해에 대한 확인도 아주 잘 되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 모든 서류의 사본을 보내드립니다. 관계자들의 서명이 있는 원본은 이곳에서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동료들과 교우들은 모두 거룩한 유해를 일단 손에 넣었으니 다시 땅에 묻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예를 들면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골들을 각각 따로 헝겊으로 싸고 그 위에 순교자의 이름을 조선어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저는 제가 보는 앞에서 이 일을 하도록 하였고 각각 싼 시신을 묶은 끈을 제 인장으로 봉인하였습니다. 이 인장을 망가뜨리지 않고는 열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귀중한 유해는 현재 열성적인 교우의 집에 옮겨 놓고 일본으로 보내기에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 오는 10월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그때까지 주교님의 반대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말입니다.”
이렇게 네 분 성인들의 유해는 서짓골에서 수습되어 강경에서 블랑 부주교에 의해 확인 절차를 거쳐서 1개월 남짓 강경의 이치문의 집에 보관되고, 이어서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의 조치가 있기까지 전라도 진안 널티 공소회장 집에 일시 보관 되었다. ‘널티’는 현재의 ‘전북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이다.
그 후 성인들의 유해는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 구내 신학교에 보내져서 12년 동안 보관되다가 1894년에 서울로 모셔오게 되었다. 전라도 널티 공소에서 일본 나가사키까지 이송된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헌이 발견되지 않는다. 리델 주교에게 보낸 보고 편지에 씌어있듯이, 유해를 일본으로 보낼 적당한 시기를 모색하였는데 그해 10월 이후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1882년 10월 이후에 그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블랑 신부가 이러한 경위를 보고하는 편지를 받아야 할 리델 주교는 당시 조선을 떠나 있었다. 리델은 1861년에 다른 동료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시기에 중국으로 탈출하였다가 1869년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을 받아 1870년에 주교로 서품 받게 되었다.
리델은 교구장 주교로서 다시 조선 입국을 도모하던 중 1876년 5월에 블랑(Blanc) 신부와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먼저 입국시키고 드디어 1877년 9월에 다른 두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잠입하여 교구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입국 후 4개월 만에(1878년 1월말에) 리델 주교는 체포되고 1878년 6월 4일에 중국으로 추방당하여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리델 주교는 추방당하면서 1878년에 블랑 신부를 부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추방당한 리델 교구장의 부재중에 블랑 신부는 부교구장으로서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면서, 서짓골의 순교자들 무덤을 발굴하도록 신자들에게 지시를 하고 모든 것을 확인한 후, 안전 조치로써 일본으로 유해를 보낼 뜻을 해외의 리델 주교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러던 중 블랑 신부는 교구장 승계권이 있는 주교로 서임되어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에서 1883년 7월 8일에 나가사키 교구장 프티장 주교의 집전으로 주교 성품을 받게 되었다.
블랑 신부는 주로 전라도 지역을 맡아서 사목활동을 하였는데 1878년에 진안군 마령에 사는 박중현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박중현은 병인년(1866년)의 박해를 경험한 신자이고 성직자들을 보필하던 열심한 회장인데 한때 박해를 피하여 해외 망명을 하고자 밀항을 하다가 실패하고 진안에 숨어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경력이 있는 박중현을 만난 블랑 신부는 중국과의 연락을 육로로 하지 않고 일본을 경유하는 해로의 용이성을 착안하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동료 선교사들과 연락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1876년에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음으로써 부산 등의 개항을 하게 되어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개항지에 일본인 거주 지역이 설정되고 일본 화폐의 유통 및 일본의 수출입 상품의 비과세와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이 허용되었다. 블랑 신부가 일본인 때문에 난처한 일을 당한 일이 있다면서 1879년 12월 12일에 리델 주교에게 보낸 편지로 보고한 일이 있는데, 이는 일본인들을 이용하여 당시 일본에 주재하던 파리외방전교회 동료선교사들과 연락관계를 도모하다가 당한 일이 있다는 반증이 된다.
실제로 일본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일본 신학생을 조선에 파견하여 성유와 미사주를 블랑 신부에게 공급하기도 하였는데, 이렇듯이 블랑 신부는 비밀리에 일본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의 연락망을 확보하고 있었다.
블랑 신부는 일본의 주교들과 중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에게 보고할 편지를 일본인 신학생들을 통하여 보내려고 1879년 10월 3일에 박중현의 아들인 박영학 고스마에게 심부름을 시킨 일이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 블랑 신부는 조선에 왕래하는 일본인들을 이용하여 일본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교신하였다.
중국으로 추방당한 리델 주교 역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선으로 다시 들어올 기회를 기다리던 차에 중병에 걸려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리델 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이미 부주교 임명권한을 부여받은 터에 블랑 신부에게 서둘러 주교 서품 받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블랑 신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1883년 7월 8일에 나가사키에서 프티장(Petitjean) 주교로부터 주교 성품을 받게 되었다. 계승권 있는 부주교로 서품된 블랑 주교는 1884년 6월 20일에 리델 주교가 프랑스에서 병사하자 자동적으로 조선대목구 제7대 교구장직을 승계 받게 되었다.
일련의 이러한 블랑 주교의 일본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선교사들과의 관계와 주교 승품 과정을 통하여, 서짓골에서 수습된 순교성인들의 유해를 나가사키로 안전하게 옮겨 모시게 된 정황을 짚어볼 수 있다. 유해를 그렇듯이 나가사키로 옮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던 블랑은 강경에서 이치문 힐라리오 등을 통하여 유해의 확실성을 확보하고 그 이송 전까지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의 열심한 교우 집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1882년 2월에 서짓골에서 발굴 수습된 순교 성인 네 분의 유해를 나가사키에 이송하게 된 사연은 블랑 신부의 나가사키와의 관계에서 그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유해 수습 후 블랑 주교가 조선대목구 부주교로서 나가사키에서 1883년 7월 8일에 주교성품을 받게 되기까지의 그 기간에 조선에서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확실한 연락망이 유지되었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서짓골에서 1882년 봄에 발굴 수습된 네 분 순교성인의 유해는 1882년 10월 이후에서 1883년 7월 사이의 어느 땐가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유해는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에 12년간 안치 보존되었다.
오우라 성당은 당시 일본 나가사키 교구장좌 성당이었고 그 경내에 신학교가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오우라 성당의 제대 밑에 안치했다고 하는데, 그 후 10년이 지난 때에 나가사키 교구장 쥘르(Jules) 주교는 신학교에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고 편지에 언급한다. 그러나 1883년 7월 8일에 오우라 성당에서 주교성품을 받은 블랑 주교는 아마도 조선의 자기 선배 동료 선교사들의 치명하신 유해들을 그 성당 제단에 바치고 나서 조선의 주교로 서품 되었을 것이다.
라. 성인들의 유해를 나가사키에 옮겨 모시다.
▲ 2016년 9월 일본 오우라 성당에서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과 나가사키 타카미 대주교가
갈매못 성인 4위 유해 봉안 기념탑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네 분 성인의 유해를 나가사키에 안전하게 옮겨 모시게 되었음을 1882년 11월 6일 일본의 대목구장인 프티장(Petitjean) 주교의 편지로 알 수 있다. 일본의 프티장 주교의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에 의하면,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의 승인을 받아서 나가사키로 유해를 모시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프티장 주교는 다음과 같이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가사키에 있는 우리들은 오늘 큰 기쁨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블랑 주교의 매우 귀중한 위탁물인,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와 조선인 회장의 유해를 받았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때에 나가사키 교구장 쥘르(Jules) 주교가 쓴 편지에 의하면, 오우라 성당 구내 신학교에 네 분 성인의 유해가 정성스레 보관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년 후의 나가사키 교구장 쥘르 주교는 위앵 신부의 전기를 저술하던 라마제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공경하올 주임 신부님,
신부님께서 지난 9월 1일에 보내주신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위앵 신부의 유해가 여전히 이곳에 있다고 신부님께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그 소중한 유골이 들어있는 작은 나무 상자가 신학교에 있는데 보존 상태가 여전히 완벽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저는 덮개나 나사로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 앞에서 덮개를 열게 하고 우리들의 소중한 순교자의 유골이 들어있는 삼베로 된 조그만 자루를 제 손으로 만질 수 있었습니다.
격한 감동이 일어난 것을 신부님께서는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위앵 신부와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수개월 동안의 추억이 더욱더 확대되었습니다.
제게 유골 자체를 보고서 만지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다고 고백하는 건 전혀 힘든 일이 아니지만 그 유골을 지켜주는 봉인을 떼는 것은 저의 권한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유일하게 이 소중한 보물을 처리할 권리가 있는 조선 선교지가 우리에게 의뢰한 위탁물을 파손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마. 성인들의 유해를 서울로 모신 경위
네 분 성인의 유해가 나가사키의 신학교에 12년 간 정중히 보관되어오다가 블랑 주교의 선종 후 조선 대목구장으로 취임한 뮈텔 주교의 의지에 의해 조선 땅으로 귀환하게 된다. 일본에서 귀환되는 유해의 이송 출발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 대목구의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의 1895년 12월 31일자 일기에 필체가 다른 문건이 첨부되어 있다. 이것은 원문을 그대로 복사하여 중간에 꽂아둔 사본이다. 1932년 라리보(Larribeau) 주교가 일본의 후쿠오카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 활동했던 파리외방전교회 살몽(Amédée Salmon, 1845-1919) 신부의 일기 중 일부를 베껴 쓴 문건이다. 조선과 관련된 내용을 라리보 주교가 베껴왔는데, 그 중에서 우리의 성인 순교자들 유해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894년 5월 1일 르 포르페(le Forfait) 호의 지휘관인 친절한 르퀼루(Reculoux) 선장이 정오에 조선으로 떠났다. 주교님께서 그에게 서울로 되돌려 보내져야 하는 네 분의 순교자 유해, 즉 세분의 유럽인들과 조선인 한 분의 유해를 부탁했다. 각각의 순교자들의 유해는 교기(Kyoki)로 만들어져 나사로 잘 고정되어 있는 네모난 상자 안에 모셔졌고, 주교님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다. 스티내커(Steenackerrs) 영사는 르퀼루 호의 지휘관을 호위하여 유해함들을 배까지 수행해주었다. 그것은 세관에서 유해함을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유해함들은 단지 국적기의 보호 아래 통과되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젊은 프랑스인 타세(G. Tasset)는 동양어학교 학생으로 교육부 장관인 스켈랭(Squellen) 씨가 현지에서 조선어를 배우도록 보내기에 르 포르페 호를 타고 한국으로 행하는 중이었다.”
살몽 신부의 이 일기는 일본에 있는 조선 순교자들의 유해를 프랑스 선박을 이용해 조선으로 보내던 사정에 대한 내용이다.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유해는 보령 서짓골에 묻혀 있다가 안전상의 이유로 블랑 주교에 의해 1882년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
블랑 주교의 후임자인 1894년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은 이 유해들을 다시 조선으로 옮겨 오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서 당시 나가사키 대목구의 사목을 담당하던 파리외방전교회가 동일한 전교회 선교사 주교인 조선 대목구의 뮈텔 주교의 뜻에 따라 흔쾌히 순교자들의 유해를 조선으로 귀환해주었던 것이다. 5월 1일 나가사키에서 그렇게 르 포르페 호에 실려 보내진 유해는 5월 13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5월 22일에 뮈텔 주교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그 유해들은 서울 용산에 세워진 신학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4년 후 1898년 명동 대성당이 준공된 다음에 1900년 9월 10일 대성당의 지하 소성당에 이전하여 안치되었다가, 병인 순교자 시복을 기하여 1967년 절두산 기념 성당의 순교자들 유해 안치실에 이전 안치되어 오늘에 이른다.
병인년(1866년) 3월 30일에 충청수영 보령 갈매못에서 치명하신 그분들의 ‘시신’은 그해 여름(8월 18일∼9월 1일)에 서짓골에 정식으로 안장되었으나, 서짓골의 신자들 또한 치명하고 떠난 후, 돌보는 사람 없이 외교인 땅주인들에 의해 훼손될 것을 우려한 교회 당국의 조처로 그분들의 유골이 발굴 수습되어 일본으로 임시 옮겨졌다가 서울로 돌아와, 다른 순교성인들의 유해들과 함께 ‘한 곳’(절두산 성지)에 영구 보존을 위해 안치되어 있다.
자료: 하부내포 윤종관 가브리엘 신부
10. 삽티성지
▲ 삽티성지
주소: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491
‘삽고개’라고도 불리는 삽티(揷峙)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교우들이 숨어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살던 교우로 잘 알려진 이는 황석두(루카) 성인의 양자 황천일(요한)과 조카 황기원(안드레아)이다. 황석두 성인이 이들을 삽티에 살게 하여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866년 3월 30일 황석두 성인이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자 얼마 후 황천일과 황기원이 시신을 수습하여 삽티에 안장하였다. 황석두 성인의 무덤은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나 삽티의 ‘즘터’(옹기 터)에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즘터에서는 1964년 산림개간 작업을 하던 중에 박해시대의 성물이 담긴 옹기가 발견된 바 있다.
삽티 교우촌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도앙골 교우촌’(부여군 내산면 금지리)과 관련을 맺고 있다. 삽티 교우들은 최양업 신부의 거처가 있던 도앙골 교우들과 서로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삽티와 도앙골을 잇는 도보순례길이 조성되어 있어 옛날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11.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
▲ 오우라 성당, 갈매못 성인 유해 봉안 기념탑 위치
▲ 오우라 천주당(성당)
-. 오우라 천주당(大浦 天主堂)역사
일본 최고(最古)의 서양식 교회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성당(大浦天主堂)은 건축물의 가치에 앞서 신앙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일본의 종교 자유가 완전히 허용되기 전 외국인 거류지인 나가사키(長崎)에 입국한 파리외방 전교회가 1864년 오우라에 26성인 기념 성당을 세웠습니다.
260여년의 금교령이 계속되고 있던 일본이 1858년 서양 5개국과 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통상조약에는, 개항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신앙을 존중하고 교회당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파리외방전교회의 푸티장(Petitjean) 신부가 오우라에 성당을 짓고 1865년 2월 19일 봉헌식을 올렸습니다.
일본교회 초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26명의 성인들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니시자카(西坂) 언덕에 그 순교기념성당을 세우고자 했지만, 금교령이 풀리지 않아서 그 니시자카 순교지를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오우라 언덕에 외국인들을 위한 명분으로서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내막적으로는 그 26위 성인의 순교기념성당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프랑스 절’이라 불리어지던 그 성당에 사람들이 구경삼아 찾아 왔는데, 그로 인하여 일본 교회사에 중대사가 일어납니다. 찾아온 일본인들 가운데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 지역에 숨어 살던 잠복 신자들(가쿠레 기리시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교도 행세를 하며 비밀리에 그리스도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이었습니다. 은밀히 찾아온 그들이 성모 마리아 상을 확인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들은 16세기말부터 260여 년간 “박해가 7대 동안 계속된 뒤 로마의 파파(교황)가 보내는 사제가 마루아(마리아)를 모시고 온다.”는 예언을 굳게 믿으며 기다려온 가쿠레 기리스탄의 후손들입니다.
그 우라카미의 농민들은 오우라 성당의 외국인 선교사에게 3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누가 보냈습니까?”
“당신은 결혼했습니까?”
교황님께서 보낸 가톨릭의 사제라고 대답한 프티장(Petitjean) 신부의 대답을 들은 그들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질문했습니다.
“산타 마리아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교사제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가리키자 자신들의 신앙과 일치함을 확인하고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당신 마음과 우리 마음이 같습니다.”
자신들은 가톨릭 신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보편교회의 교계제도와 성모신심을 묻는 핵심 질문을 통해 사제와 신자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실로 260여년만의 일입니다. 260년간의 암흑 속에서도 성령의 빛은 교회를 지켜주셨습니다. 가쿠레 기리스탄(잠복 그리스도 신자)을 찾고 있던 사제가 이렇게 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금교령(박해) 밑에서 260년 동안 성직자 없이 신앙을 이어온 신자들과 사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엄혹한 금교령 밑에서 수백 년 숨어서 지켜온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기적입니다. 그 순간의 오우라 성당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과 같은 기쁨과 감동으로 가득 찼을 것이 아니었을까! 1865년 3월 17일의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신도발견 기념일”이란 명칭으로 매년 3월 17일에 일본교회는 경축합니다.
이 오우라 천주당은 1879년에 보수되었는데, 1945년 원폭 피해 후 재차 보수하여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며 국보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참고 : 파리외방 전교회가 오우라에 성당을 짓기 위해 매입한 토지에 우선 사제관을 짓고, 신자 발견 후 사제관과 지붕 사이에 다락방을 만들고 잠복 기리시탄들을 숨기거나 미사를 봉헌하며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일본인 성직자 양성도 시작 하였지만 금교령이 풀리지 않아 신학생들은 해외로 피신 시켰고1873년 금교령 해제 후 주교관 뒤쪽에 신학교를 세워 1882년 말 처음으로 3명의 일본인 성직자가 탄생 되었으며 우라카미 성당으로 주교좌를 옮기기 전까지 주교좌성당이었습니다.
-. 오우라 성당과 한국교회의 인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준비 중인 오우라 성당은 한국 교회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아래와 같이 세 가지의 역사적 사실을 한국인 순례자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고 서짓골에 묻혔던 다블뤼 주교 등 4위 순교성인의 유해 손실을 우려한 블랑 주교의 노력으로 서짓골에서부터 1882년 11월에 모셔와 안치하고, 1894년 5월에 서울의 용산신학교로 옮길 때까지 12년간 모셨던 곳이 오우라 성당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로를 따라 하부내포 성지의 서짓골에서 출발하여 오우라 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의 가슴은 특별한 감회에 젖게 됩니다.
둘째로, 1867년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박해를 피해 머물렀고, 1882년 푸티장 주교가 조선의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의 성품을 거행한 곳이 오우라 성당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위하여 전례용품과 서적 등을 지원한 곳이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입니다.
셋째로, 한국에 신학교가 설립되기 전에 한국의 신학생들이 유학하여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공부한 곳이 오우라 성당의 라틴신학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 이후 세 번째로 사제가 된 강성삼 신부 등 12명의 사제성소를 키워낸 요람이 오우라의 라틴신학교입니다.
위와 같은 오우라 천주당의 역사를 되새기는 순례자들은 라틴신학교에서 아래와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오우라의 라틴 신학교
오우라 천주당 아래 오른 편에 위치한 옛 신학교 내부에 일본 천주교회의 역사에 대한 자료들을 자세한 설명문안과 함께 잘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자료들을 관람하면서 한국인으로서 갖게 되는 감회가 색다릅니다.
우리 조선교회의 엄혹했던 시기에 선발된 신학생들이 바로 역사자료관인 이 신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서짓골에서 수습한 한국의 순교성인 유해를 안치한 이 곳 ‘오우라 라틴신학교’에 비밀리 유학하여 공부하고 사제가 된 분이 계십니다.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입니다. 하부내포 지역의 홍산에서 병인박해시기에 태어난 강성삼 신부님께서 1881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나가사키 오우라의 이 라틴신학교에 유학한 첫 번째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분 다음으로 여러 명이 뒤이어 오우라의 라틴신학교에 유학하였습니다. 1883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된 강도영(마르코)과 정규하(우우구스티노)도 여기서 라틴어를 습득하고 강성삼 신학생과 함께 이어서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귀국하여 서울 용산에서 1896년에 함께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님 등 세 분이 사제품을 받으신 것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중국에서 우리 한국의 첫째사제 되신 1845년 이후 51년 만에, 그리고 최양업 신부님께서 역시 중국에서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으신 1849년 이후 47년 만에, 한국인으로서 세 번째로 한국에서 1896년 사제 되신 역사를 이 오우라의 라틴 신학교가 회상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1897년에 사제품을 받은 이내수(아우구스티노), 한기근(바오로), 김성학(알렉스) 신부도 오우라의 라틴신학교를 거쳐서 페낭신학교에서 신학 공부하고 귀국하여 사제품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 분들을 이어서 1899년에 사제품을 받은 김원영(아우구스티노), 홍병철(루카), 이종국(바오로) 신부도 같은 오우라의 라틴신학교를 유학한 경로로 사제품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1900년에 사제품을 받은 김문옥(요셉), 김승연(아우구스티노), 김양홍(스테파노·초대 전주교구장 주교) 등도 오우라의 라틴신학교와 페낭신학교를 거쳐서 사제 되신 분들입니다.
중국의 마카오에 유학하여 사제되신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을 이어서 사제 되신 12명의 사제들이 오우라의 라틴신학교에 유학하신 분들입니다. 서짓골에 묻히셨던 순교성인들의 유해를 모셨던 오우라의 라틴신학교는 이렇게 한국인 세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의 12명 사제를 양성해준 우리 한국교회 사제성소의 요람이었습니다.
-. 하부내포의 성지 서짓골에서 나가사키의 오우라 까지
병인년(1866년) 3월 30일에 충청수영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5위의 성인들 중 4위의 유해를 그해 7월(음력) 중순에 서짓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모셔 안장했습니다.
갈매못에서부터 서짓골까지 12일간 험난한 운송 작업으로 모셔온 유해는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님과 성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님과 성 루카 위앵 신부님과 성 요셉 장주기 회장님의 시신이었습니다.
갈매못에서 웅천 완장포구까지 거친 풍랑을 헤치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넌 후 이십 여리 산을 넘어 서짓골에 성인들의 시신을 모셔왔습니다. 그 성인들의 유해를 산자락에 안장해 드린 후, 그 안장 작업을 했던 서짓골의 주요 신자들 역시 체포되어 순교하고, 나머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16년 지난 1882년에 그 순교 성인들의 무덤을 발굴하게 됩니다. 박해를 피해 서짓골을 떠나 살아남은 신자들의 손에 의해, 그 성인들의 유골을 수습한 당시의 조선교구 부주교 블랑(Blanc) 신부님께서 일본 나가사키 교구와 협의를 하였습니다. 그 성인들의 유골을 나가사키로 옮겨 모시고자 하는 협의였습니다. 블랑 부주교께서 그러한 협의를 하게 된 까닭은, 그 유골을 조선에서는 안전하게 모셔둘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나가사키 오우라에는 이미 1864년에 성당이 건립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자기와 같은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들이 사목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블랑 부주교께서 그곳으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옮겨 모실 계획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블랑 부주교는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883년에 나가사키의 오우라 주교좌성당에서 주교성품을 받게 됩니다.
자기 선배 선교사였던 다블뤼 주교님과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와 장주기 성인의 유해를 옮겨 모신 그 오우라 성당에서 주교성품을 받은 블랑 주교의 감격이 어떠했을 것인가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부내포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신부]
편집: 성지순례 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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