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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1838년 봉황대에 부는 바람
이번 글은 봉황대를 중건한 1792년부터 봉황대를 다시 중건하는 1838년 까지 봉황대 주변 풍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1792년 가을, 20년 동안 무너져 있던 김산객관을 중건하였다. 이것은 김산군이 여행객들의 경유지로서의 역할을 다시 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김산객관은 금릉관(金陵館)이라 칭하였으며, 관아의 동편에 있었다.
1482년 김산군수 이인형(李仁亨)이 중수하였고, 이때 조위가 지은 김산동헌 중수기(金山東軒重修記)에 ‘세운지 100여년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김산군은 조선 개국 전후부터 동헌과 객관을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4년 김산군수 정호인(鄭好仁)이 관청과 함께 중수하였으며, 1792년 김산군수 이성순(李性淳)이 20년간 무너져 있던 객관 옆에 다시 중수하였다.
▲김천시립박물관 전시 금릉관(金陵館) 현판
객사(客舍)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을 살펴보자.
객사(客舍)는 고려·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다. 고려 초기부터 있던 것으로 확인되며, 중앙의 정당에는 국왕의 상징인 전패 또는 황제의 상징인 궐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하였다. 좌우의 익실은 외방 사신이나 여행하는 관료, 또는 외국에서 오는 사신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하였다.
객사(客舍)는 아전(衙前)들이 맡아 관리하였다. 고려 때, 지방의 잡직(雜職) 가운데 '객사사(客舍史)'라 불리는 아전이 객사를 담당하였다. 고을의 규모에 따라 담당 아전의 수가 달랐다. 1천 정(丁) 이상의 군현에는 4인, 5백 정 이상의 군현에는 3인, 3백 정 이하의 군현에는 2인, 1백 정 이상의 군현에는 1인씩 두었으며, 동서의 방어사(防禦使) · 진장(鎭將) · 현령관(縣令官)에는 각각 2인씩 두었다.
지방 수령은 1월 1일 정조(正朝), 동지, 왕의 탄신일에 객사에 모셔진 전패에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또한 수령이 고을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반드시 전패에 문안례를 올렸고, 임지에 새로 부임할 때도 전패에 배례하는 것이 순서였다.
김산객관(金山客館)을 중수로 인근에 있는 김천역 객관에 머물것인지 금릉관에 머물것인지는 지방관과의 인연에 따라 이용지가 달라지겠지만, 지방을 오가는 관리는 망궐례를 행하기 위하여 김산객관을 들러야 했을 것이다.
영남의 임지로 부임해가는 이성순의 후손과 인척들이 김산 객관을 이용한 것은 그들이 남긴 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김산객관과 함께 중건한 봉황대에 남긴 판상 글이 문화 콘텐츠로 작용하여, 어느 정도 방문객 유인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연화지 위 쪽에 위치하였던 김산동헌과 객관의 판상운에 대하여는 별도의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지만, 여기에도 일정한 패턴과 특이점이 있다. 한 예로 김산 동헌과 객관을 방문한 이들이 동헌이나 객관운을 차운한 시문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한양의 관점에서는 김산은 영남과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이고, 주변의 고을로서는 지방의 공론을 모으고 소통하기 좋은 지리적 이점을 가진 장소였다.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공식 행사 외에 비공식 만찬 장소는 그 행사의 격을 품격있게 한다. 그 비공식 만찬 장소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객관에서 봉황대로 옮겨가는 사유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김산객관 중건 후 가진 낙성연이 봉황대에서 열렸다는 선례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둘째, 봉황대가 객관에 비해 경관과 공간 구성면에서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봉황대가 서사가 있는 공간으로 문화적 의미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의문이 이어진다. 왜 새로 부임한 군수들은 봉황대에 판상운을 남기지 않았을까?
1800년대초의 시대 상황과 얽힌 김산의 사연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세기를 알리는 1800년이 되었다.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11살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한다. 순조를 대신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고 반대 정파인 시파와 남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먼저 사도세자 신원을 주장한 정조 16년(1792년)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 동조한 이들을 축출하고, 정조가 근신(近臣)으로 육성한 시파의 영수격인 이조판서 윤행임(尹行恁,1762~1801)을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명목으로 신지도로 유배 보낸다.
윤행임은 1756년부터 1759년까지 3년간 김산군수를 역임했던 윤염(尹琰)의 아들로, 정조의 치세를 이끌면서 “기자(箕子)와 같은 성인의 치세에는 노비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노비제 혁파를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그의 부친 윤염(尹琰,1709~1771)은 김산군수로 재임하면서 감천변에 무너져 있던 경렴서원을 자산동 아래에 중건하여 학품을 일으키고, 조마면 일대 감천변에 수십리 제방을 쌓는 치수 사업을 시행하여 김산의 민생을 안정 시켰다. 그 외 직지사의 종이세를 면제하고 객관의 연세(煙稅,숙박비)를 줄여 여행객의 편의를 도모하는 등의 조치로 김산군에 혁혁한 치적을 남겼었다.
다음해인 1801년에는 신유사옥이 발생한다.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정순왕후는 당시 시파와 남인 사이에 퍼져있던 사학(邪學,천주교)을 엄금하면서,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고, 전국적으로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잔당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잔당을 색출한다는 명목하에 윤행임의 개인 비리를 들춰낸다. 예나 지금이나 정적 제거 방법은 다르지 않다.
‘김산의 경렴서원에서 윤염을 제향한 것에 대해 윤행임과 이를 추진한 유생들에게 죄를 물었다.’ 김산 지역의 민심이 동요할 사건인데, 일성록에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일성록> 순조 1년 신유(1801) 8월 9일(계축)
비국이 서원에서 윤염(尹琰)을 마음대로 제향한 일을 조사하여 보고한 데 대해 복계(覆啓)하였다.
영남에서는 김산군(金山郡)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서 금년 5월에 마음대로 제향하였는데 그때의 도신은 시임 감사 김이영이었습니다. 이 세 고을의 서원은 모두 사액(賜額)하지 않은 서원으로 유생들이 권간(權奸)에게 붙어서 마음대로 제향하고 애당초 영문에 보고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대간의 상소가 나온 뒤 세 곳에서 모두 이미 출거(黜去)했다고 합니다. 애당초 보고하지 않았으니 비록 알고서 금하지 않은 것과는 다르지만, 도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책임은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전후 도신들을 모두 엄히 추고하고, 세 고을에서 앞장을 선 유생들은 도신에게 지시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엄히 감죄(勘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
‘한 해 전에 귀양간 윤행임의 권세에 빌붙어서 김산군의 유생들이 경렴서원에 마음대로 제향했다.’는 전말이 호도된 죄목이다.
이어서 ‘천안 출신 임시발(任時發)이 시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흉서를 성문에 붙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윤가기(尹可基,1747~1801)의 아우와 아들이 과거 시험장에서 임시발을 알았다는 구실을 붙혀 연루자로 만들고, 그 배후로 윤행임을 지목하여 모두 사형에 처한다.
윤가기는 윤증(尹拯,1629~1714)의 서제 윤졸(尹拙,1656~)[진1681]의 후손으로 유득공의 사위였다. 1799년 12월부터 1800년 4월 까지 김산군수를 역임했던 인물로, 윤행임이 천거하여 장악원 주부에 임명되었던 적이 있었기에 윤행임과 공모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더 없이 좋은 대상이었다. 덩달아 윤가기와 친하게 지냈던 박제가 등 당시 실학파들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한양에서 벌어지는 살육은 김천 지역 유림이 동요할 만한 일이었다. 역적으로 몰린 이들과 교류한 흔적을 남기면 일족이 멸문당하는 일을 겪을 수도 있었다. 과거 김산 동락당에 걸려 있었던 송시열의 기문을 떼어 내었듯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들과 관련된 작은 흔적도 모두 지워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김산 고을에서 공덕비의 비문마져 지워야 하는 암울한 시대의 폭풍이 한바탕 몰아쳤다.
역사는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
1804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벽파의 전횡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제 벽파 세력이 수세에 몰린다. 그러나 이미 죽고 없어진 생명과 기록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봉황대는 그렇게 사람들을 쓸어가는 모진 바람을 맞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조시대에 가장 먼저 봉황대판상운을 차운한 이는 1810년 김산군수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7월 병으로 체직된 정동원(鄭東元,1748~1815)이다.
정동원의 본관은 동래, 자(字)는 인수(仁叟)이다.
정광필(鄭光弼,1462~1538)의 5세손으로 그의 선조인 정난원(鄭蘭元)은 개령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개령향교를 건립(1473년)하였고, 정난원의 백부 정옹(鄭雍)[문1417]은 지례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지례향교를 건립(1426년)한 이력 있는 가문 출신이라 김천 지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을 것이다.
특히, 정동원의 장인인 이전효(李全孝)는 봉황대를 중건한 이성순과 8촌간 이었다. 김산군수로 부임하여 인척의 범주에 들어가는 조선의 삼소(三蘇)라 불렸던 이성순 삼부자의 글이 있는 봉황대를 살펴보는 것은 당시 조선의 유학자로서는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정동원은 봉황대판상운을 차운하여 글을 올리게 된다.
次鳳凰臺板上韻
봉황대 판상운을 이어서 짓다.
作1810년 김산군수 정동원(鄭東元,1748~1815)
抱材帶郭幾重山(포재대곽기중산) 재목 품은 성곽 둘레 산들이 몇 겹이던가
中有紅亭翠四環(중유홍정취사환) 가운데는 붉은 정자, 사방은 물빛이 감싸네.
槐柳低枝覆池面(괴류저지복지면) 느티와 버들의 낮은 가지 연못을 덮고 있어
樓臺對影出林間(루대대영출림간) 물에 비친 누대가 수풀 사이에 나타나네.
野分二水名符古(야분이수명부고) 들판 가른 두 물줄기 옛 이름에 부합하여
文揭三蘇地開顔(문게삼소지개안) 삼소의 글을 걸어 땅을 활짝 열었네.
損廩築斯知有意(손름축사지유의) 곡식 창고 들어서 루대 지은 뜻을 알기에
理民心界貴淸閒(이민심계귀청한) 백성 다스리는 마음가짐 맑고 한가하여 귀하네.
*삼소(三蘇) : 북송의 삼대 문장가(三大文章家)인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 소식(蘇軾)ㆍ소철(蘇轍) 형제를 말하는데, 소순을 노소(老蘇), 소식을 대소(大蘇), 소철을 소소(小蘇)라고도 하여 구별함. 여기서는 봉황대를 중건한 김산군수 이성순(李性淳,1724~)과 그의 두 아들 이면긍(李勉兢,1753~1812), 이면긍(李勉兢,1753~1812)을 말함.
別界名亭勝看山(별계명정승간산) 별계의 이름난 정자에서 산을 보니 훌륭하고
澄潭况復抱臺環(징담황복포대환) 맑은 연못 하물며 봉황대를 감싸네.
千家鷄犬桑陰裡(천가계견상음리) 큰 마을 닭과 개도 뽕나무 그늘 속에서 노닐고
四時謳歌麥隴間(사시구가맥롱간) 사시사철 노랫소리 보리밭 사이에서 들리네.
澗鳥慣傳簫管韻(간조관전소관운) 개울가 새들이 퉁소 운을 전하여
林間觧拓粉粧顏(림간해척분장안) 나무 사이 꺽고 나가니 얼굴에 분칠하네.
公餘更被詩情惱(공여갱피시정뇌) 공무의 여가에 다시 시정(詩情)으로 고뇌하며
盡日紛忙不覺閒(진일분망불각한) 하루 종일 분주하여 한가로움 못 느끼네.
*계견(雞犬) : 주인 덕분에 신분이 함께 상승되는 행운을 맞고 싶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신선술을 터득하여 온 가족을 이끌고 승천(昇天)할 적에, 그 집의 닭과 개도 그릇에 남아 있던 단약(丹藥)을 핥아 먹고 하늘에 올라가서, “개는 천상에서 짖고 닭은 구름 속에서 울었다.〔犬吠於天上 鷄鳴於雲中〕”라는 전설이 전한다. 《論衡 道虛》
다음에 남아 있는 차운한 판상운은 이대원 부자가 남긴 판상운이다.
이대원(李大遠,1749~)은 1811년부터 1813년 사이에 거창 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거창부사의 이력 외에 특별히 영남을 방문할 이력을 찾을 수 없기에 이 판상운의 제작 시기를 거창부사 재임시기인 1812년경으로 추정하였다. 당시 김산군수 정동원(鄭東元)과는 인척간이다.
敬次鳳凰臺板上韻
봉황대 판상운을 경건히 차운하다
作1812년경 再從孫 이대원(李大遠,1749~)
昔聞二水與三山(석문이수여삼산) 일찍이 이수와 삼산이 있다고 들었는데
鳳去臺空世幾環(봉거대공세기환) 봉황 떠난 빈 대가 몇 세대 지났는가.
官路縱橫碧潭畔(관로종횡벽담반) 관직을 종횡하다 푸른 못에 이르러
村客出沒綠陰間(촌객출몰녹음간) 시골 나그네 되어서 녹음 사이에 나타났네.
百年洞闢壺中面(백년동벽호중면) 백년 만에 열린 마을 별천지 속 모습으로
五月樓亭鏡裡顔(오월누정경리안) 오월의 누정이 거울 속에 비치네.
儘覺經營神所造(진각경영신소조) 신인께서 만들어 사용한 걸 깨달으니
古來太守劇清閒(고래태수극청한) 예전의 태수는 참으로 청한하였네.
*이대원(李大遠,1749~) [진1780] 전주인 김산군수 이성순의 재종손으로 1811년~1813 거창 부사를 역임하였음. 이 시기 김산 방문한 듯
*호중(壺中) : 호리병 속의 선경(仙境)이라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의 총애를 받아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선경인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더라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下 費長房》
다음에 기록된 판상운은 이대원의 아들 이상두(李象斗,1783~)의 작품으로, 당시 거창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배종하여 김산을 지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敬次鳳凰臺板上韻
作1812년경 再從曾孫 이상두(李象斗,1783~)
一洞天開四面山(일동천개사면산) 하늘 아래 한 골짜기 사면이 산이라
中分二水抱村環(중분이수포촌환) 두 물줄기에 나뉘어 마을을 돌아가네.
池塘隱暎藏壺裡(지당은영장호리) 연못에 숨은 그림자 별천지를 간직하고
樓閣參差見樹間(누각삼치현수간) 누각은 들쭉날쭉 나무 사이에 보이네.
彩鳥飛歸餘舊額(채조비귀여구액) 봉황은 날아갔지만 옛 판액 남아있어
詩似魂返怳新顔(시사혼반황신안) 혼이 돌아온 듯 시(詩)들은 새 얼굴에 황홀하네.
古來形勝元無主(고래형승원무주) 예로부터 좋은 경치 원래 주인 없기에
剩得尋常過客間(잉득심상과객간) 지나는 과객 사이에, 깊은 도리 넘쳐나네.
*이상두(李象斗,1783~)[생1810] 전주인. 字경칠(景七). 부친은 이대원(李大遠,1749~) 이다. *참치(參差) : 길고 짧고 들쭉날쭉하여 같지 않음 *심상(尋常) :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
위의 시에서도 등장하는 삼산(三山)과 이수(二水)라는 표현. 아버지가 삼산(三山)으로 구읍 마을을 표현하자, 아들이 이수(二水)로 이어서 금릉의 중심지를 표현하고 있다.
김산 읍치를 두 물줄기 사이에 형성된 마을을 의미하는 삼산이수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산군을 금릉이라 칭하고 중국 금릉에 있는 지명을 구읍 주변의 산천에 차용하고, 시설물의 이름도 중국 금릉의 유명한 시설명을 차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계승하여 연화지 서편에 있는 학교명을 금릉초등학교로 지었을 것이다.
이제 봉황대에 여행객들이 김산의 봉황대를 다녀간다.
지금부터는 봉황대를 방문하는 이들은 판상운을 차운하지 않는다. 아마 앞서 원운을 남긴 이성순(李性淳,1724~)과 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유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래 작품은 1820년 2월 김천찰방으로 부임한 이약열(李若烈, 1765~1836)의 문집 <눌와집(訥窩集)>에 표현된 봉황대의 모습이다..
1821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연화지를 중국 금릉의 전당(錢塘)에 비유하며, 연꽃이 특히 아름다운 명소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사항은 인근의 지방관들과 봉황대에서 시회를 개최하는 기록이다. 물론 선례에 따라 봉황대에서 지방관들이 회합을 개최한 것이겠지만, 이 시기에는 봉황대가 김산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한국문집총간 > 눌와집(訥窩集)
賞蓮有約。阻雨未成。際擎瓊篇。稍紓悁鬱。忘拙次呈。以供一博。
연꽃을 감상하기로 했는데 비로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에 시편으로 답답함을 풀었다. 한 번 넓히는데 이바지하고자 졸열함을 잊고 차운하여 올리다.
作1821년 이약열(李若烈,1765~1836)
何似錢塘十里荷(하사전당십리하) 전당을 얼마나 닮았는지 십 리에 연꽃 있고
金陵又有鳳臺佳(금릉우유봉대가) 금릉에는 또 아름다운 봉황대 있네.
定知十日淋漓雨(정지십일림리우) 십일 동안 비가 쏱아지는 걸 알지만
留待三秋的皪花(유대삼추적력화) 삼추를 기다리며 밝게 핀 꽃 기다렸네.
勝會翻成爲物戲(승회번성위물희) 좋은 기회 이루지 못해 사물을 희롱하며
名區堪惜與人遐(명구감석여인하) 좋은 구역 애석하여 사람들과 멀어지네
文園更覺添消渴(문원갱각첨소갈) 문원은 다시 깨닫고 갈증 조금 해소하고자
官酒盈盈謾掛車(관주영영만괘차) 관아 술을 가득 채워 부질없이 수레에 싣네.
*전당(錢塘) :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전당호(錢塘湖)를 말함. 연화지의 별칭도 전당이다. *임리(淋漓) : 긴 칼처럼 멋있게 보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초사(楚辭)》 권8 애시명(哀時命)에 “우뚝하게 쓴 관은 구름을 뚫을 듯, 길고 긴 칼은 또 종횡무진이라.[冠崔嵬而切雲兮 劍淋漓而縱橫]”라는 말이 나온다.
이약열(李若烈,1765~1836)[문1804] 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字)는 겸회(謙會), 호(號)는 눌와(訥窩)이다. 단성(丹城,경남 산청)에 거주 하였다.
아버지는 이계함(李啓함香+咸)이며, 어머니는 현풍곽씨(玄風郭氏)로 곽원후(郭元垕)의 딸이다. 1827년 정언(正言)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목계(牧溪)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고, 이존수(李存秀) 이익회(李翊會) 김이교(金履喬) 등과 교유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눌와문집(訥窩文集)>이 있다.
다음 작품은 인근의 김산군수, 김천찰방, 개령현감, 황간현감과 김산의 문인들이 봉황대에 모여 시회를 열었던 련구 작품이다. 이 날 시회 연구(聯句)에 참여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홍준모(洪俊謨,1761~) [진1803] 字치등(稺登) 본관 풍산. 김산군수
-이약열(李若烈,1765~1836) [문1804] 字겸회(謙會), 號눌와(訥窩) 본관 성주(星州). 단성거주 김천찰방
-조극명(曺克明,1769~) [생1819] 字덕첨(德瞻) 본관 창녕. 김산거주
-신순(申淳,1775~) [생,1803] 字희세(羲世) 본관 고령. 개령현감
-홍석모(洪錫謨,1781~1857) [생1804] 字경부(敬敷). 본관 풍산 황간현감
-조찬규(曺讚奎,1789~1853) [생1828] 字서원(瑞元) 본관 창녕 김산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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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臺聯句
봉황대 련구
作1821년 이약열(李若烈,1765~1836)
鳳臺開勝會(봉대개승회) 稺登 봉황대에서 좋은 모음 가지니 <홍준모>
幽鳥聽交交(유조청교교) 산새 소리 교교히 들리네.
數郡傾冠蓋(수군경관개) 謙會 여러 군의 관개(冠蓋)가 놓여있어 <이약열>
初筵託漆膠(초연탁칠교) 처음 자리 끈끈하길 부탁하네
雨經收暑氣(우경수서기) 德瞻 비 지나며 더위 걷어가고 <조극명>
風度靜林梢(풍도정림초) 바람은 가지 끝에서 고요한데,
冷籟壺心徹(냉뢰호심철) 羲世 낭낭한 퉁소 소리 술병을 뚫으니 <신순>
虛欄鏡面包(허난경면포) 빈 루는 거울 면에 잠겨있네.
*관개(冠蓋) : 말 네필이 끄는 수레.
蓉抽紅褪袖(용추홍퇴수) 敬敷 연꽃 뽑으니 붉은빛 소매에서 바래고 <홍석모>
魚蹴綠生泡(어축녹생포) 물고기 뛰어올라 녹색 포말 일으키네.
會盡東南美(회진동남미) 瑞元 모임은 동남의 아름다움 다하고 <조찬규>
詩因寂寞敲(시인적막고) 시는 적막 속에 높아지네.
乾糇戒周雅(건후계주아) 登 건량은 주아(周雅)를 경계하고
淳俗問犧庖(순속문희포) 순한 풍속은 제물에 올리 포를 물어오네.
姑去申牌吏(고거신패리) 謙 시어미 죽고 패리(牌吏)를 경계하는데
何妨庚日炰(하방경일포) 경일(庚日,복날)에 사나운 게 어찌 무방하리오.
*주아(周雅) : 《시경》‘대아(大雅)’를 가리킨다. 주공(周公)이 대아(大雅)를 지어 선왕(先王)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포정(庖丁)이 소를 잡을 때 능란한 솜씨로 칼을 놀려[遊刃] 부위별로 해부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雕蟲慙唱和(조충참창화) 瞻 졸렬한 글 창화하기 부끄러워
童羖禁號呶(동고금호노) 동고(童羖)에게 시끄러운 소리 금하네
搜勝郵筒荷(수승우통하) 羲 우편으로 간곡하게 승경을 찾자 하니
乘閒案牒拋(승한안첩포) 안첩(案牒)을 포기하고 한가하게 올랐네.
試茶纔過蟹(시다재과해) 敬 차를 마시며 조금 시간 지나자
摛藻競騰蛟(리조경등교) 글을 지어 용이 오르는 듯 다투고
榻設追陳禮(탑설추진례) 瑞 의자를 놓고서 예의를 쫒아가니
帽攲解孟嘲(모기해맹조) 모자를 기울이며 처음 글귀 풀어가네.
*조충(雕蟲) :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을 꾸미는 것을 가리킴. *동고(童羖) : 얼토당토 않은 결과가 빚어짐을 일컫는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에, ‘취중(醉中)에 하는 말은 동고(童羖 뿔 없는 양)를 낳게 한다.’고 한 예에서 유래한 말임.
諸君皆舊面(제군개구면) 登 제군들 모두 구면이고
萬物卽同胞(만물즉동포) 만물은 모두 동포이네.
國瑞穰田稼(국서양전가) 謙 나라의 길조는 논밭의 풍년에 있고
民憂漏屋茅(민우누옥모) 백성의 근심은 초가지붕 비 새는 데 있네.
山容鋪畫障(산용포화장) 瞻 산들은 그림 펼친 듯 놓여있고
秋色曬書巢(추색쇄서소) 가을빛은 글을 말리는 데 모여 있네.
借蔭松垂蓋(차음송수개) 羲 소나무 그늘 빌려와 일산처럼 드리우고
移亭幕象爻(이정막상효) 정자 막(幕) 옮기어 상효(象爻)를 가리네.
香荷非陋淖(향하비누뇨) 敬 향기로운 연꽃은 좁은 진창에 있지 않고
輕芥可容凹(경개가용요) 가벼운 겨자씨 오목한 그릇에도 있네.
醉興同劉阮(취흥동유완) 瑞 취흥은 유령(劉伶)과 완적(阮籍) 같고
騷情孰島郊(소정숙도교) 시정(詩情)은 가도(賈島)와 맹교(孟郊) 같네.
靑州俄送酒(청주아송주) 登 청주에서 갑자기 술을 보내왔는데
赤壁豈無肴(적벽개무효) 적벽에서 어찌 안주가 없으리오.
睥睨凌千古(비예능천고) 謙 비예(睥睨)는 오랜 세월 굽어보지만
翺翔聽九苞(고상청구포) 높이 날아 봉황 소리 들으리.
*유완(劉阮) : 위진(魏晉) 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유령(劉伶)과 완적(阮籍) 두 사람을 병칭한 말인데, 그들은 특히 술을 아주 즐겨 마시고 방달(放達)하기로 유명했다. *도교(島郊) : 당(唐)나라의 시인 가도(賈島)와 맹교(孟郊)의 병칭이다. 이들이 시풍이 비슷한 데다 청절(淸切)하고 처고(淒苦)한 정서가 많기 때문에 가수교한(賈瘦郊寒)이라 일컬어진다. *비예(睥睨) : 성 위의 담 *구포(九苞) : 봉황이 지녔다는 9종의 특징을 말함.
宿趼老鹽虀(숙견노염제) 瞻 지난 자취 절인 배추 같이 쇠하여
吾道歎瓜匏(오도탄과포) 내 신세 오이와 박 같아 한탄하네.
高價珠藏櫝(고가주장독) 羲 값비싼 구슬은 궤속에 감추고
悲歌劍吼鞘(비가검후초) 슬피 우는 검은 칼집에서 울고 있네.
芝蘭宜共臭(지란의공취) 敬 좋은 벗은 마땅히 체취를 같이 하고
涇渭易分淆(경위역분효) 경위(涇渭)는 분간하여 섞이고
聯放城南句(련방성남구) 瑞 성 남쪽에 시구를 잇달아 놓으니
華牋尙古嘐(화전상고교) 登 종이가 오히려 예스럽고 뜻이 크네.
*숙견(宿趼) : 지난날의 자취라는 뜻으로, 이전에 역임한 관직을 가리킨다. *염제(鹽虀) : 소금에 절인 김치를 말한다. *경위(涇渭) : 옳고 그름과 청탁(淸濁)에 대한 분별이 엄격함을 이르는 말이다. 원래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두 물 이름인데, 경수(涇水)는 물이 탁하고 위수(渭水)는 맑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다. *화전(華牋) : 종이를 가리킨다
